2017년 여름, 김금희

「모리와 무라」 (『현대문학』2017년 5월호)

선정의 말

모리와 무라는 개 이름이다. 이름처럼 모리는 숲[森]에서 왔고 무라는 도시[村]에서 왔다. 그런데 무라(むら)를 도시라고 할 수 있나. 무라는 촌동네 아닌가. 모리는 진돗개처럼 생긴 꽤 큰 개고 무라는 흰 몸과 구별되는 검은 머리가 특징인 테리어 종인데 그들은 숲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후쿠오카의 온천 마을 유후인의 별장식 료칸에 산다. 태풍의 영향 아래 있는 8월의 유후인에서 모리와 무라는 연처럼 언덕을 달려 내려온다. 아이들과 상냥한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어디든 돌아다니고 가고 싶은 곳에 간다. 다정과 다정의 엄마 해경과 해경의 오빠이자 다정의 숙부가 유후인에 간 것은 다정의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이다. 무릎이 안 좋은 해경을 위한 온천과 은퇴한 후 좀 조용히 있고 싶다고 호소하는 숙부를 위한 적막과 여행의 기쁨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여행이 무탈하게 끝나기만을 원하는 다정을 위한 료칸이 있는 곳. 무엇보다 다정이 원하는 것은 5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남긴 빚을 갚는 일이다. 빚을 갚으려면 어르신들의 우호가, 정확히 말하면 독신으로 살며 30년 넘게 호텔에서 일했던 숙부가 남길 유산이 필요했다. 해외여행 한 번으로? 지당하신 말씀. 이야기의 내적 논리에 따라, 다정은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온천 마을에는 시험도 음모도 사건도 없다. 낮이면 료칸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고 밤이면 그래도 여행이니까, 하는 의무감으로 술을 마시며 지난 이야기들을 나눌 뿐. 그 시간들을 통해 다정은 숙부에 대한 어떤 이해에 도달하긴 한다. 한국어 병기가 되어 있는 표지판을 일어로 읽어주며 뿌듯해하는, 앓는 소리이기도 고함을 지르는 것 같기도 어떻게 들으면 웃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로 잠꼬대하는, 슬리퍼 한 짝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하얀 맨발로 자기가 걸어온 방향을 시무룩하게 바라보는 숙부의 모습들을 통해 다른 숙부들과 달리 외국어를 잘하고 세련된 태도를 지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거둘 수 없었던 숙부에 대한 일종의 의혹을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자격이라 부를 수 있나.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닌가. 어떤 이해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낮. 반바지에 러닝셔츠를 입고 온천을 하러 나간 숙부는 한참 후 하나도 젖지 않은 몸으로 돌아온다. 도대체 무얼 했느냐는 해경의 질문에 숙부는 대답한다. 개들을 구경했다고. 개들이 꼬리를 치며 발코니까지 다가왔다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랬다고. 밤. 코를 골며 자던 숙부는 어느새 깨어나 어두운 창밖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난다요. 다정은 창밖을 본다. 그곳에는 웅크리고 있는 사람 혹은 던져진 물건처럼 보이는 검정 물체가 있다. 검정 물체는 움직이면서 멀리 식당 조명에 그림자가 조금 길어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그것은 모리였을까. 무라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 다정은 그것이 개라고 생각하지만 숙부에게는 본인의 삶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였을 것이다. 모리(もり)와 무라(むら). 숙부는 시골에서 왔지만 아무 데나 침을 뱉고 지퍼를 다 올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며 하던 말을 잇는 다른 숙부들과는 다르게 살았고 ‘호텔식’이라는 미묘한 별칭을 얻었다. 거기에 어떤 어긋남이 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도시에서 온 개에게 붙은 ‘촌동네(むら)’라는 이름처럼. 혹은 그 개의 검은 머리와 흰 몸처럼. 그 순간, 숙부의 세련된 매너 아래 서늘하고 야박한 어둠이 숨어 있을 거라고 오해해왔던 다정은 반대로, 여전히 ‘촌스러운’ 무엇이 그곳에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료칸을 둘러보다 노천탕 속에 떨어져 있던 거미를 나무바가지로 떠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던 숙부의 마음 같은 것이. 아마 그때 다정은 (소설의 초반에 등장했던) 남자친구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별을 합의하는 자리에 불쑥 끼어든 잡상인에게 돈을 내밀며 거스름돈은 받지 않던 우준의 모습을. 다정은 아저씨, 아저씨 지금 물건 팔려고 다니는 거잖아요. 나 좀 불쌍히 여겨라 이런 거 아니잖아요. 거래잖아요. 떳떳하잖아요. 그러니까 한 통 더 내놓고 천 원도 거슬러줘요. 내놔요, 화를 냈지만 그것이 실은 우준을 향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모리와 무라를 통해 다정이 이해한 것이 숙부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고 이별을 고하는 자리에서조차 낯모르는 이에게 선뜻 5천원 권을 내미는 우준에 대한, 그런 우준의 모습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 그것은 소설의 끝에서 다정이 밝히듯 자신의 가계에 대한 이해이며, 가계를 타고 내려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어쩔 수 없이 물려받게 되는 어떤 유산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받는지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법. 그렇기에 고작해야 서너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두 마리 개의 이름이 소설의 제목이 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도 내 생각인데, 개의 이름을 제목으로 단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금정연(서평가)

인터뷰

황예인_ 안녕하세요, 더운 여름 잘 지내셨나요. 먼저 「모리와 무라」로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난해 두번째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가 출간되었고 「체스의 모든 것」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또 올봄부터는 계간 『창작과비평』에 첫 장편소설 『경애(敬愛)의 마음』을 연재하고 계시죠. 소설가의 지난 일 년을 이렇게만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출간 및 집필, 수상 등 실로 알찬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과는 달라진 생활 리듬 혹은 자세의 변화 같은 것들이 궁금해집니다. 제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다른 소식도 함께 들려주세요.

김금희_ 안녕하세요, 질문을 받고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떠올려보니 이런 장면들이 생각이 나요. 카페에서 ‘죄송합니다’라고 시작되는 이메일을 쓰고 있는 나, 시간을 좀더 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뒷문장을 이어보는 나, 우리 베이글 먹을까? 하고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나, 더 이상은 못 하겠어,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필통과 원고를, 노트북을 그리고 잊지 않게 휴대폰 충전기 같은 것을 챙기는 나. 여전히 쓰고 어려워하고 이것만 끝나면 영화를 보러 가겠어, 다시 어디론가 떠나보겠어, 하면서 살고 있어요. 올해는 장편과 단편 그리고 엽편까지 부지런히 써야 했다는 것. 신문에 엽편 연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새롭게 추가할 만한 근황인 것 같아요.

 

 

황예인_ 이야기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꼭 한번쯤 묻고 싶은 질문인데요. 독자로서 읽기 좋아하는 이야기를 특정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읽을 때 특별히 재미를 느끼는 어떤 이야기의 종류랄지 구성 요소랄지 그런 것들이요. 예컨대 저는 인물이 여러 선택지들을 두고 계속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뭘 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그 선택이 별로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어요. 어떤 소설이 훌륭한 작품이어서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저 특정한 성격의 이야기를 제가 좋아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질문을 드립니다.

김금희_ 이런 얘기를 하면 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에 대한 고백이 되겠지만 저는 주인공이 거리를 걷거나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아무튼 그런 일상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 우연하고 맥락 없는 자극―모르는 사람의 얼굴이나 타인들의 대화, 우연히 들려온 노래, 빛의 각도나 가로수 같은 거리 풍경의 상태―에 마음이 흔들려 자신의 모든 감정과 기억을 실어서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들어가 생각해보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황예인_ 「모리와 무라」는 하필이면 태풍이 온 8월의 어느 날, 주인공 ‘다정’이 모친 ‘해경’과 숙부를 데리고 후쿠오카의 온천 마을 유후인으로 짧게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묶게 되는 료칸에서 ‘모리’와 ‘무라’라는 이름을 가진 개들을 만나는데 그 개들의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돼 있지요. 멀리서는 날아가는 연처럼 보였다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발코니로 와서는 숙부에게 한참 동안 꼬리를 흔들어주던 이 개들은 이 소설 안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운동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 인물들과의 대비 때문이겠죠. 흔히들 하는 생각처럼 김금희의 인물들이 따뜻하고 환한 것이 아닌데, 유독 이 소설의 인물들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을 그리게 만든 최근 마음의 상황이 궁금해졌어요.

김금희_ 소설은 2년 전쯤 유후인에 여행 갔다가 태풍을 만났을 때 구상했어요. 그 후 쓰지는 못하고 있다가 지난해 겨울과 봄을 보내면서 문득 전환한다는 것, 과거에서 오늘로, 내일로 나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숙부 캐릭터가 더 강하게 다가왔지만 나중에는 다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생각해봤던 것 같아요.

 

황예인_ ‘다정’이 오래 사귄 연인 ‘운주’와 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된 이별을 하기 위해 만난 날, 술집 안으로 드롭스를 파는 ‘잡상인’(소설 안에서는 이렇게 지칭되지 않지만요)이 등장합니다. 삼천 원짜리 드롭스를 이천 원에 줄 테니 사달라고 하는 남자에게 ‘운주’는 오천 원을 주고 하나만 달라고 말하죠. ‘다정’은 가격을 따지며 거스름돈을 내놓으라고 하고요. 꼭 이 장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김금희의 소설을 떠올리면 어쩐지 생활력이 강하고 씩씩한 여성 인물과 헛똑똑이라 할 만하여 모자란 구석을 드러내고야 마는 그런 남성 인물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이나 의도 같은 게 있을까요? 작가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 궁금합니다.

김금희_ ‘셈’하고 ‘계산’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많아요. 이득과 손실을 따져보는 행위가 어쩔 수 없이 삶에는 작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드롭스 한 통이 다정에게는 중요하고 운주에게는 그것을 받지 않는 선택이 더 중요한 것처럼. 그런데 어쩌면 또 다정에게는 그렇게 해서 그 ‘잡상인’을 말 그대로 물건을 파는 자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존중일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상황에 따라, 자기 나름의 철학에 따라 이 셈법이라는 문제를 사람들이 다양하게 풀어나가며 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워요. 그냥 쓰는 저로서는 어떤 유형의 인물들이든 모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편이에요. 좀 줏대는 없지만 인물 하나가 드롭스 한 통을 받아야 해! 하면 그래,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하고 뭘 그렇게까지 하니, 하면 아 맞아, 그렇지 정말 그래, 하면서 쓰고 있어요.

황예인_ 처음 몇 번 읽을 때에는 그런 감정이 크게 들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에는 어쩐지 모친 ‘해경’이 하는 말들이 좀 무섭게 들렸습니다. 위로의 기능을 하는 듯 보이던 말들, “결국 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 미워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오빠, 그 사람도 다 죽습니다. 돈 많다고 안 죽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태풍이 몰아쳐 나무들이 부러질 듯 꺾이고 있는 삼나무 숲을 지나며 “비가 오니까 숲이 더 운치가 있네” 하던 감탄…… 말의 진실과 무관하게 해경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일까, 대체 어떤 세월을 살아왔을까,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었는데요. 딸인 ‘다정’은 이를 두고 “염세일까, 완벽한 처세일까” 궁금해합니다. 작가에게 이러한 태도는 어느 쪽일까요, 뭘까요?

김금희_ 질문을 받고 작품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 해경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귀만 있고 입은 없는 사람처럼. 어쩌면 그런 면에서 잉어에 비유되어야 하는 사람은 숙부뿐 아니라 해경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작품을 쓸 때의 마음을 떠올려보니 저는 해경을 일종의 ‘예외자’로 상정하고 썼던 것 같아요. 작품에서는 숙부의 삶 그리고 다정의 삶이 두 축처럼 그려지는데 해경은 시대적으로는 숙부의 삶에 놓여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참여자는 아니고, 나름의 계산과 셈법이 결과적으로 인생의 어떤 손실로 인식되었을 때 적개와 분노에 ‘버닝’하는 다정의 방식에도 동의하지는 않죠. 그렇다면 해경은 뭔가, 싶은데, 그냥 태풍이 몰아친 숲에서도 운치를 찾을 수 있는 사람, 슬리퍼를 잃어버린 황망한 사람에게 그냥 갈 길을 가자고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사람, 현실에 대한 완전하고 오류 없는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의외의 리듬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엄마들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엄마들은 일상에서 복닥대다가도 의외로 시인처럼 현실의 맥락을 비약적인 요약으로 잡아내잖아요.

 

황예인_ 나이든 먼 친척 어른의 죽음은 그 거리감 때문에 독특한 애도를 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름날의 이 여행 덕분에 다정은 숙부의 삶을, 그리고 자신의 가계를 어느 정도 요약할 수 있게 되고요. 문득, 다정이 해경의 남자 형제인 ‘숙부’의 앞에 ‘외’ 자를 붙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한번 그렇게 떠올리니 억지로 떼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완강한 힘을 느끼게 되는데요. 4번의 질문과도 연결이 될까요? 김금희에게 여성 인물, 모계 가족, 그 안의 남성들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그런 거라면, 좀더 들려주시겠어요?

김금희_ 저는 성장하면서 사실 부모와 그 자녀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가족을 넘는 범위에 절 넣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별로 없었어요. 저는 그냥 저이기만 하면 되었고 저를 중심으로 일종의 가계를 그려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지요. 물론 이후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다른 관계들에 노출이 되면서 그런 관계도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저는 여전히 저, 여성인, 삼십대 후반의, 도시 변두리에 거주하는, 저 이외에 다른 기준을 두지는 않으려고 노력해요. 더 정확히는 애초에 세상이 정해놓은 관계도에는 선별적으로 응하겠다, 정도가 될까요. 그래서 그렇게 놓고 보면 ‘외’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에서의 제가 그런 감각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황예인_ 삶은 풋콩과 함께 데운 정종을 마시는 장면을 보니 어서 추운 계절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직은 여름 한가운데지만, 남은 한 해의 계획이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미처 묻지 못했으나,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금희_  예인 선생님의 질문을 받았을 때와 답신을 적고 있는 지금의 계절이 아주 달라요. 제가 자주 오는 카페에서는 이제 에어컨을 청소하고 있어요, 앞으로 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2017년이 얼른 가기를 바래 왔기 때문에 이렇게 가을이 슬며시 발을 들여놓는 것이 반갑고 좋아요. 저는 남은 시간들에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고 특별한 결심, 특별한 계획, 특별한 기대 따위를 하지 않고 그 다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여길까 해요. 살면서 어떤 시간들은 그저 그렇게 일종의 ‘가외’처럼 두어도 된다고 제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내년을 맞을 수 있다면 올 여름도 나쁘지 않은, 꽤 괜찮은 시간들로 남을 거라고. 예인 선생님에게도 올해가 그렇기를, 그래서 문득 겨울이 오면 우리가 나눴던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이 대화를 데운 정종처럼 따듯하게 환기할 수 있기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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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가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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