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임솔아

「신체 적출물」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선정의 말

나이브한 수준에서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자 할 때,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단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물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인간과 그의 노동을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사고 팔 수 있는 사물의 일종으로 만들어놓고야 만다는 것이 이 말이 품고 있는 비판의 요지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에서 인류는 정말이지 지나치게 물화되어 있어서, 이제 보편화된 물화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 단어 자체가 물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세계는 물화를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물화되어 있다. 임솔아의 「신체 적출물」(『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이 일종의 문학적 충격요법으로 읽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방금 전까지 내 신체의 말단에서 나의 일부로 존재하던 발가락이 절단되었다. 내 심장에서 보낸 피가 닿았었고, 간지럽거나 아프기도 했고, 일평생을 걷는 내내 균형을 잡아주기도 했던 발가락이다. 엄마가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지상의 곳곳을 나와 함께, 아니 ‘나로서’ 누비기도 했던 발가락이다. 그러나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순간부터 그것의 본질은 변한다. 떨어져 나간 발가락은 여전히 주체subject의 일부로서, 말하자면 사물object 이상의 것으로서 보관되고 기념될 가치를 지니는가? 작중 은하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은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제 발가락이 아니라 ‘신체 적출물’이 되어버린 그것은 두 자매 사이에서 갈등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비체abject’가 된다. 물론 자매의 논란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가장 섬뜩한 부분은 은지가 호텔에 두고 온(아마도 무의식적인 동기가 있었으리라) 발가락이, 그것을 찾으러 되돌아갔을 때 지출하게 될 체류비용으로 환산되는 장면이다. 교통비, 숙박비, 식비를 꼼꼼히 따져본 은지에게 그것은 “4백만 원짜리” 물건이다. 그 많은 돈을 지불할 가치가 없는 사물이다. 최종적으로 분리된 발가락이 사물에 불과함을 판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돈이다. 그렇다고 은지더러 야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설은 곳곳에서 자매가 처한 생활고를 독자들에게 알려온 바 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작가 임솔아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보아라, 물화다!’.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발가락 하나를 기념할 수 없게 하는 세계, 사물이 된 신체들의 세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물건 이상의 취급을 받기 힘든 인간들이 사는 세계, 거기가 「신체 적출물」의 세계다.  –김형중(문학평론가)

 

 

 

두 개의 무서움이 있다. 언니 은지의 무서움과 동생 은하의 무서움. “언니가 무섭다고 하는 것들을 은하는 죄다 좋아했다.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은하가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언니는 죄다 무서워했다. 호러영화를 보는 것을, 밤에 골목을 걸어 귀가하는 것을, 스노클링을 하며 끝없이 아득한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 무서워하는 언니를 더 무섭게 만드는 것을 은하는 좋아했다.” 처음 무섭다고 말한 것은 은지다. 자매는 여행지인 태국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타박상에 그친 은지와 달리 은하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은지가 무서운 것은 유리병에 담긴 동생의 잘린 발가락이다. “신이 당신에게 준 몸이니까요. 여기서는 신체 적출물을 환자에게 돌려드립니다.” 발가락을 돌려주며 간호사는 말했다. 하지만 잘린 발가락이 담긴 유리병을 보며 무서워하는 언니를 보는 게 은하는 즐겁지 않다. 발가락이 잘린 사람은 그녀고 고통을 느끼는 것도 그녀다. 드레싱실 앞에서 은하는 은지는 동시에 말한다. “무서워.” 두드러지는 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다. 사마귀에게 몸통의 절반을 뜯기면서도 꾸역꾸역 달팽이를 먹고 있는 베짱이를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매는 생각한다. “은하는 언니가 베짱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면이 그랬다.” “은지는 동생이 베짱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욕망에만 눈이 멀어 뒷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면이 그랬다.” 은하가 밥도 안 먹고 유리병에 담긴 잘린 발가락에 집착하며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는 동안 은지는 병원비를 결제하기 위해 카드 한도를 최대로 늘리고 서류를 떼고 항공권을 끊고 서울의 접합 전문 병원에 예약을 한다. 국제전화비는 백만 원이 넘었다. 태국을 떠나는 날, 공항을 향하는 택시 안에서 발가락을 병원에 두고 왔다며 돌아가야 한다는 은하에게 은지는 말한다. 지금 비행기를 놓치면 추가로 들어가야 하는 돈이 4백만 원이라고. 너는 그 발가락이 4백만 원짜리라고 생각하느냐고. “4백만 원은 은하가 하루 8시간 3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제 은하는 언니가 되뇌던 무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욕망. 각자의 것을 지키려는 욕망. 갑자기 은하는 무서워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철없는 막내가 비로소 세상의 무서움을 깨닫는 이야기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각자의 것이란 각자에게 속해 고립된 것이고, 은하가 무서운 건 바로 그 고립이었다. 각자의 것이란 무엇인가. 각자의 것이었으나 이제 분리된 것은 무엇인가. 각자의 것이었으나 이제 분리되어 쓸모가 없어진 것은 또. 이를테면 은하의 발가락은. 당연하게 통용되는 접속과 단속의 경계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배제의 기준선이 은하에게는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은하는 발가락이 담긴 유리병을 돌려받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은하가 발가락을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사고의 순간이 아니라 병원에 놓고 왔을 때다) 은하는 밥을 잘 먹는다. 은지도 더 이상 동생의 잘린 발가락이 무섭지 않다. 발가락의 비용은 이미 치러졌고 그것을 치른 것은 은지다. 이것은 또 다른 논리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자매의 갈등은 그렇게 잠정적인 봉합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임솔아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침내 돌아온 인천 공항. 자매는 방부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신체 적출물은 검역법 위반이라고 말하는 보안검색원을 마주한다. 그는 무엇을 배제하고 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일이라는 듯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이 소설에는 보안검색원을 제외하면 ‘잘라 말하는’ 인물이 두 명 더 등장한다. 모두 병원이라는 시스템에 속한 이들이다). 자매는, 또한 우리는, 왜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개인의 실존과 그것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두 자매의 시점으로 이루어진 소설이고 우리는 그들의 시점을 따라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짧은 엔딩이 내게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의 맹점에 대한 문제제기로 느껴졌다면(소설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읽는가. 소설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읽지 않는가.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시스템의 조건이 모두 바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등등)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무서운 소설이다. – 금정연(문학과사회편집동인)

인터뷰

조연정_ 문지 블로그에서 진행되는 <이달의 소설>이 <이 계절의 소설>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선정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변화 이후, 임솔아 작가의 「신체 적출물」이 첫 선정작이 되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는 처음 뵙는 듯한데 독자분들께 간단한 인사말을 부탁드립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임솔아_ 안녕하세요, 임솔아라고 합니다. 학사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곧 졸업이네요. 7년 6개월 만에 졸업합니다. 만세.

 

조연정_ 올봄에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출간하셨습니다.  출판 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첨가한 것, 그리고 해설 없이 작품만으로 시집을 꾸린 것 등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문단의 문제적 관행을 교정해 나가는 데 여러 모로 참조점이 될 만한 행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시집을 출간하고 석 달 정도가 지난 셈인데요, 출간 이후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어떤 점일지 궁금합니다.

임솔아_ 제 시집이 바로 이렇게 회자되는 부분이 가장 아쉽습니다. 문학출판계 관행을 교정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제게 가장 자연스럽고 저다운 방식을 고집부리다가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호기로운 용기로 하게 된 일이 아니라, 저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은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었어요.

 

조연정_ 최근 인터뷰에서 임솔아 작가는 시를 쓰는 데 있어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 “멋 부리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일상과 유리된 채 미학적 측면에만 치중한 문학작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고요. 문학이 문학 안에만 함몰되지 않고 그 안에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문학이 삶과 접속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한 임솔아 작가만의 구체적인 원칙은 무엇일지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그것이 소설과 시의 경우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임솔아_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배제를 기초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도 좋고 저 단어도 좋고, 이쪽 방식도 좋고 저쪽 방식도 좋다는 식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한 단어를 배제하며 다른 단어를 선택하게 되죠. 문학이 삶과 접속하는 방식 또한 제게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의 방식도 좋고 저쪽의 방식도 좋고, 이런 방식도 있고 저런 방식도 있지, 라는 식으로 사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 작품이 둥글고 넓기보다는, 가늘고 날카롭기를 바랍니다.

모든 문학 작품은 사람이 쓴 것이고,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삶과 접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문학이 삶과 접속하고 있다는 막연한 사실보다, 문학이 삶과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접속하고 있는지가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일상의 층위가 부재하는 상태에서 미학적인 측면에만 몰두하는 문학은 멸균실에서의 아름다운 문학, 혹은 진공상태에 놓인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적이다’라고 일컬어지던 많은 한국 작품들에서 저는 일상과의 유리를 느껴왔습니다. 그 부대낌이 저를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성폭력, 열정페이, 저작권 문제까지 널리 퍼져 있는 문화예술계의 수많은 병폐는 문학이 삶의 조건에 대한 기본을 오래 무시해온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삶을 기만했다고 체감되었습니다.

문학이 삶과 접속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한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인 것처럼, 문학과 문학에 대한 태도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진화하거나 심지어 퇴행하는 것조차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각이 이전의 감각들에 대한 거부감을 작동시켜서 이전의 감각들과 절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을 저는 문학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이해가 보태지면 보태질수록 절연하고 싶은 것이 더 많이 축적되는 건 자연스러운 증상인 것 같습니다.

제게 명제는 원칙에 우선하지 않습니다. 명제와 원칙과 글쓰기는 제게 한 몸입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작품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가장 염두에 둡니다. 쓸 때에도 그렇지만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먼 미래에 미리 가 있는 태도도 거짓말 같고, 도무지 거짓말 같아 보이는 게 많습니다. 거짓되지 않은 가장 먼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을까 늘 그걸 고민합니다. 그러니 멀리 갈 수가 없고 멀리 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조연정_ 「신체 적출물」은 선정 과정에서 선정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절단된 발가락을 체류 비용으로 환산하는 장면을 지적하며 “이 작가 무섭다”라고 표현한 선정자도 있었고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자매 관계에 익숙한 방식의 동정이나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매관계에 대한 관습적 재현을 돌파하는 지점이 있다고 표현한 선정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가들은 모두 임솔아 작가의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같은 건조한 단문의 문장들은 ‘멋 부리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임솔아 작가의 의지와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임솔아_ 가장 건조한 문장이 제가 하려는 이야기와 가장 어울리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가 쓴 소설 중에 덜 건조한 문장을 필요로 했던 소설도 한두 편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조건에 따라 문장의 습도는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습한 문장을 워낙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체감한 이 세상은 제 문장보다 더 건조하고 계산적이고 매섭습니다. 「신체 적출물」을 쓸 때는 제가 체험한 이야기가 가장 기본적인 단서였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일에 자주 실패했고, 퇴고를 하면서 점점 더 건조하고 차갑게 만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반년 넘게 이 소설을 고쳤는데 건조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연정_ 최근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연달아 소설을 발표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임솔아_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극단적인 공간이 병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동네에나 병원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병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비염으로 이비인후과에 가거나 충치로 치과에 가는 일은 은행에 가거나 학교에 가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도무지 일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가벼운 감기 환자와 폐결핵 환자와 신체가 절단된 환자와 죽은 자의 시체가 한 건물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병원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장소인데 극단적인 장소이고, 극단적인 사건들이 비일비재한데 이 극단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핵심적인 장소가 병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내내 신촌연세병원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1층 로비에서 오른쪽 환자 대기실에는 팔이나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환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6층 입원실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리에 거머리를 붙인 채,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거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환자를 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으며 피의 순환을 도와 응혈이나 세포 손상을 방지한다고 하더군요. 그 이미지들이 기묘했고, 수지접합에 대한 논문을 국회도서관에 가서 찾아봤습니다. 그 논문들 속에서 ‘신체 적출물’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신체 적출물을 담아두는 보존액을 개발하기 위해 돼지의 심장을 실험도구로 쓴다고 합니다. 돼지의 심장세포가 인간의 신체세포와 가장 비슷하기 때문이라서요. 나의 손가락과 나의 발가락이 잘려나가 버리면 ‘신체 적출물’이 되는 거죠. 참 이상하지 않나요.

 

조연정_ 첫 장편 『최선의 삶』에서부터 단편「「신체 적출물」에 이르기까지 임솔아 작가의 글쓰기는 어느 정도 ‘상처 치유’라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임솔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어떤 지점에서 독자와 마주하고 싶은지,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무엇을 얻길 바라는지 궁금해집니다. 더불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 혹은 심화시켜 나가고 싶은지도 궁금합니다.

임솔아_제가 시와 소설을 쓰는 이유가 제 환부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치유를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치유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작품을 쓰면서 마주하는 것은 독자라기보다는 저 자신에 가깝습니다. 제 자신 안에 무수한 타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고, 저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 중 타인에게서 온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육체를 갖고 태어나서 저는 결국 환부를 얻게 되었는데, 이 환부가 생긴 이유에 대해 물리적으로 추론해봅니다.

그저 아무에게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저의 내면과 타자의 내면이 작품을 통해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아직까지는 믿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타인을 만날 때에는 타인이 내 앞에 따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게 되지만, 소설을 읽을 때에는 작중 인물이 나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내부에 작중 인물의 거주공간을 그리고, 작중 인물의 얼굴을 상상합니다. 작중 인물이 아파하며 신음 소리를 낼 때, 그것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닌, 내 내부에서 그려낸 작중 인물이 아파하는 소리로 들려옵니다. 이런 것들은 저절로 되는 일이지 않을까요. 소설은 분명 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인데, 소설을 읽으며 그려낸 세계는 제 안에 있습니다. 작중 인물의 아픔이 나에게 전가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아픔을 작중 인물과 나누어가지는 순간이 제가 창작을 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또 다른 한 명과 아픔을 공유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최소한의 보편성을 최초로 경험하는 과정이 창작과정이라고 여깁니다. 독자들이 제 소설 속 인물에 동참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이 제 소설 속 인물의 환부를 경유하고 나서 자신의 현실로 돌아갔을 때, 경유하기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것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제 소설을 읽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쓰고 싶었던 것들을 쓰고 싶습니다.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자꾸 더 생겨나버립니다.

관련 작가

임솔아 소설가, 시인

1987년 대전 출생했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로,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소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최선의 삶』과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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