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구병모

「지속되는 호의」(『21세기문학』 2015년 겨울호)

선정의 말

보이기 위한 호의의 아이러니, 혹은 진심의 종말

―구병모의 「지속되는 호의」

 

나와 남. 단지 종성 ‘ㅁ’이 보태졌을 뿐인데, 나에서 남은, 남에서 나는 아주 먼, 혹은 차마 계측하기 곤란한 거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남에 대한 배려와 예의, 선의와 윤리, 이런 것들이 늘 강조되곤 하지만 나 아닌 남에게 진심을 다한다는 것은 정녕 가능한 일이던가? 작가 구병모는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안내한다.

병약한 아이 상휘를 데리고 서영 부부는 해수욕장 근처로 여름 물놀이를 간다. 아이에게 주스를 사주러 가게에 들렀다가 미끄러워 넘어진 어린이를 보고 일으켜 세우면 달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썩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아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앞선다기보다 어려운 처지의 아이를 외면한 ‘무개념’ 어른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선의를 베푸는 것 같은 과정을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그려낸다. 이때부터 도와준 어른(서영)과 도움받은 아이 사이에 미묘한 파워게임이 형성된다. 어른은 최소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주스를 사주려 하는 어른에게 자기 동생도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하나 더 뜯어낸다. 아니 아이가 뜯어낸 것이라고 어른이 그렇게 느낀다. 마지못해 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스를 사주지만 여전히 아이는 고맙다는 말도 그런 표정도 아니다. “잠깐이나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타인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과, 넉넉하고 우아한 포즈가 공중에 싱겁게 흩어졌다.”(『21세기문학』 2015년 겨울호, p.62)

이어서 아이는 물속에서 상휘에게 장난처럼 위협을 가한다. 아니 어른 서영이 그렇게 느낀다. 이를 막기 위해 어른이 개입하지만, 트릭스터와도 같은 아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품위를 유지하려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아이와 자기 아이가 한꺼번에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여기저기 허둥대며 찾아보지만 종적이 묘연하다. 허둥대던 몸과 마음이 이내 흐트러지고 와르르 무너진다. 의식적으로 나와 남 사이의 시선과 응시의 긴장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녀였지만, 자기 자식의 일 앞에서 우선 무의식적으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더 이상 나를 바라보는 남의 응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긴장감 있게 유지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혹 본능적 모성애였을까?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변화는 돌연 서스펜스를 야기한다. 보이기 위한 호의, 선의, 그런 것들을 지속시키려 애썼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종말이 참혹하다. 작가가 표제로 삼은 ‘지속되는 호의’는 고약한 아이러니를 환기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중층적인 셈이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라는 기본적인 틀 안에, 나와 남 사이의 허심탄회한 소통가능성의 문제, 혹은 호의, 선의, 사랑, 자비 등과 같은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계율의 이율배반성의 문제, 혹은 중산층의 자기 모순적 성격의 문제, 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원초적 가족애의 본능 문제 등 여러 층위와 국면들의 문제성들을 포괄적으로 건드린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이런 질문을 한번 툭 던져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 진심이야?”

요컨대 「지속되는 호의」는 좀처럼 진심을 헤아리기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있는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음을, 무죄일 수 없음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소설이다. “너도 별 수 없지 않아? 그렇지?”

 

우찬제(문학평론가)

인터뷰

이수형_안녕하세요? 2016년 ‘이달의 소설’ 일정이 시작되는 3월에 「지속되는 호의」를 첫 선정작으로 발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작년에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2015년 오늘의 작가상’은 기존 문학상 심사 방식과 달리 인터넷 서점을 통한 독자 투표를 진행한 것으로 널리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독자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와의 관계에 대한 작가로서의 생각과 같은 일반적인 차원에서부터 문학적 평가나 문학상 심사에서 독자의 위상이나 역할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이르기까지 구병모 작가의 견해를 경청하고 싶습니다.

 

구병모_고맙습니다. 이 질문을 주시기 전까지 저는 작가-독자 관계를 저 자신의 글쓰기와 밀착되게 고찰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고민을 필요로 할 때,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 대목을 피상적으로 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의도적 회피에 가깝습니다. 너무나 모호하고 복잡한 관계여서 왠지 깊이 들어가면 다칠 것 같았던 거겠지요. 작가에게 독자는 분명 각별합니다. 동시에 작가는 독자에게서 끝없이 도주해야 합니다. 작가-독자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긴장관계의 상당수가, 긍정/부정을 막론하고 그런 속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도망치고 붙들리고, 도망치는 자는 붙잡아주기를 원하면서 꼭 아슬아슬하게 붙잡힐 만큼의 거리나 장소로 도망치고, 붙잡은 자는 곧 손에 쥔 것에 흥미를 잃고 놓아버리고. 정박과 탈출과 집행유예의 삼각형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소설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지금은 어설픈 도주 단계에 있습니다.

‘오늘의 작가상’에 관해서는, 독자 투표라는 방식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시도였는데, 이미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바대로 저는 독자 투표 당시 상위권에 들어 있지 않았고, 인터넷의 개방성과 손쉬운 클릭이라는 행위로 인해 반드시 책을 읽은 분들만 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는 문제점 또한 예상 가능합니다. 그러니 그 투표는 독자들이 대체로 이러한 것을 선호하더라, 지금 어떤 작가가 회자되며 어떤 제목과 표지에 꽂히더라는 지표 정도로 활용될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는 그런 참고로도 유의미하다고 보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결과적으로 독자 의견을 전폭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사실입니다.

 

 

이수형_「지속되는 호의」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그래서 지루하지만 예상 가능했던 주인공의 삶에 뭔가가 침입합니다. 본문 중의 표현에 의하면, “직전까지 서영이 견지했던 모든 정당성과 명백함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답변을 주셨지만, 이런 종류의 사건이 갖는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혹시 실제로 겪거나 주위에서 목격한 경우도 있나요?

 

구병모_10년 전 입원실에서 링거 꽂고 있을 때였는데, 열린 문 밖에서 수간호사님이 다른 환자에게 또박또박 설명하는 게 들려왔습니다. “열이 나는 건 몸에 염증이 있다는 거고, 염증이 있다는 건 내 몸에 내 몸 아닌 게 들어와서 문제가 됐다는 뜻이에요. 알아들으셨어요?” 저도 불명열 체질이어서 귀를 쫑긋하고 들었는데, 내용은 대충 수술을 한 환자가 열이 안 내려간다는 거였고, 안 그래도 배 가른 상처를 수술용 실밥(=내 몸 아닌 것)으로 꿰맸으니 염증이 나는 것이며, 그래서 항생제를 놓는 거니까 참으라는, 뭐 그런 상식적인 얘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내 몸 밖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침입자로 간주해도 무방하고, 언제든 그것이 작은 염증을 일으킬 수 있고. 그런데 이게 알고 봤더니 슈퍼 박테리아. 항생제도 안 듣고. 처음에는 작은 염증이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조직이 막 괴사합니다. 사람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사소한 순간에 이런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게는 솜털 같지만……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지요. 실제로 ‘작은 것의 침입’이란 사람들 살아가면서 대부분 알게 모르게 겪습니다. 가령 자기 자식도 몸속에 별 탈 없이 있었을 때는 제 몸의 일부인데, 바깥으로 낳아놓고 탯줄 끊는 순간 타자가 되어버립니다. 그 타자가 자라나고 살아가면서 내 몸과 정신에 염증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수형_전작 「이창」에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가 발생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주인공이 이와 관련된 게시물을 인터넷에 올리자 “100개의 댓글이 달렸다고 치면 그중 80개가 나더러 오지랖을 넘어선 편집증이 의심되니 정신과에 가보라는 내용이었고”라는 서술이 나옵니다. 「이창」도 그렇지만 「지속되는 호의」에서도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잘 드러나지 않고 주인공의 시선과 독백이 서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자아에 한정된 폐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역시 본문 중의 표현에 의하면, “서영은 선뜻 손을 뻗어 이어폰을 잡아채지 못했는데, 그 순간 남자가 휘두르는 솥뚜껑에 맞고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겨서가 아니라, 내민 손에 아무것도 닿지 않거나 그나마 눈앞에 있던 형상마저 영원히 규명되지 않고 사라질 것만 같아서였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이자 책임을 추궁해야 할 남자 앞에서 주인공이 주저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자신의 삶에서 예상치 못한 것의 침입을 받은 주인공이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주인공의 현실 감각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뜻일까요? 물론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좌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병모_이런 경험 많이들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게 지금 내가 사람 귀에 대고 얘기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개 소 말 닭한테 대고 외치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벽 두드리는지 장지문을 뜯는 건지. 처음에는 그 대상이 문제라고 여기다가, 다음으론 자신이 돌아버린 게 아닌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고, 나중 가면 소통의 총체적 불가능성을 깨닫기에 이릅니다. 사소한 불통이 누적되면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는 현실마저 믿을 수 없게 되어서, 그저 관통 가능한 홀로그램으로 간주하는 게 차라리 편한 순간도 있을 겁니다. 형상은 갖추었는데 건드리면 부서지거나 증발하는 현실은, 한 개인에게 더 이상 현실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현실에 거부당한 끝에 고작 현실의 연속에 불과한 장면에서 지레 몸을 움츠리게 되죠. 그러니 주인공의 현실 감각이 파탄에 이른 것은 어떤 원인 제공에 뒤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말

거대한 닭장에 갇히는 꿈을 꾸었다. 새벽이 오지 않았다.

관련 작가

구병모 소설가

1976년 서울 출생.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방주로 오세요』,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이 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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