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467

마종기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5년 5월 26일 | ISBN 9788932027548

사양 변형판 128x205 · 163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헐벗은 영혼을 치유하는 투명한 이슬의 침묵,

그 고맙고 살가운 비밀과 온전한 희망의 노래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타국에서 의사의 삶을 살며 뼛속 깊이 새긴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조국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맑고 투명한 시들에 담아온 마종기 시인이 시력(詩歷) 55년을 맞아 새롭게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 2015)을 출간했다.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2010)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특히 어머니와 지인들을 떠나보내는 상실의 아픔을 시인 특유의 간절하고 지순한 목소리로 전하는 한편, 수십 년 만에 이룬 국적회복의 감격과 기쁨을 솔직하고 희망찬 시어들에 담고 있다. 더불어 시인은 “괴롭고 외로웠던 지난날부터 이 나이에까지, 여일하게 내 동반자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 볼품없지만 정이 든 내 시들에게” 각별한 고마움의 인사도 잊지 않는다. 예고 없는 죽음이 잇닿는 인생의 황혼녘에서 다시금 싱싱한 초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51편의 시들은 “아무리 이 시대가 속절없이 떠나도/숨 가쁜 아픔 느끼지 않고는/사랑할 수 없다”(「잡담 길들이기 11」)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봄날의 심장」)는 깊은 성찰과 사랑 가득한 시적 에너지를 아낌없이 증명한다.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은 부드러운 서정적 사랑의 어조 저 너머에 있는 치열한 뿌리, 그 서러움의 바닥을 보여준다. 부드러움이라는 서정적 표면이 단단한 의지의 다른 모습이라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김주연, 문학평론가)

 

이별의 아픔, 고요한 애도의 자리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좀처럼 잊히지도, 치유되지도 않는 사별의 고통 가운데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자식의 슬픔은, 설령 그가 일흔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목도한 숱한 죽음이 있다 한들 익숙해지거나 덜해질 리 없다. 오래 세월 아버지(마해송, 아동문학가 수필가, 1905~1966)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품고 살아온 시인에게 몸짓의 언어, 멋과 예술의 혼을 불어 넣어준 어머니(박외선,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 1915~2011)의 죽음 역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몸은 가벼워야 하고 꿈은 넘쳐나야”(「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 부분) 한다던 살아생전 어머니의 말씀이 비통한 심정과 함께 가슴에 사무쳐오는 이유다.

“결국 하나씩 놓는 것이군요, 어머니./멋도 예술도 인연도 하나씩 놓으시고/후회 없이 날아가실 준비를 하시는 건지,/빈손과 빈 뼈를 털며 가벼워지시는군요./[……]/당신이 남기신 시야가 내 앞길이 됩니다./외로운 밤 다 땅에 내리시고, 어머니/오랜 기다림 끝내시고 일어나세요.”(「어머니의 세상」 부분)

“오래된 무용이 선택한 여행은 어디에서 끝날까./핏물 번진 늙은 토슈즈 하나 가슴에 안고/두 팔 접고 말없이 떠난 저기 백조 한 마리.”(「백조의 호수」 부분)

“떠나시는 어머니를 보듬어 안는 저녁 빛,/이 외딴 풍경은 여명까지 엉겨 있어서/온기가 남은 물새에게 전해진다지만/아직은 물에 젖은 물새의 다리,/물에 젖은 뺨”(「경건한 물새의 저녁」 부분)

 

이슬과 꽃에 담긴 한 생의 비밀

낯선 땅의 이방인으로 달랠 길 없는 상실의 아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나날을 보내온 시인이 한결같은 시선으로 붙들고 의지했던 대상이 바로 이슬과 꽃이다. 긴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잠깐 맺힌 이슬과 피고 지고 열매 맺는 한 생의 궤적을 온몸으로 전하는 꽃(“자신을 오랜만에 드러내는 돌과 돌 사이의 체온/단 열흘을 살면서 백 년의 침묵을 남기는 꽃”―「네팔에서 온 편지」, 『하늘의 맨살』, 2010)을 바라보며 “맑고 찬 시 한 편”(「이슬의 눈」, 『이슬의 눈』, 1997)을 간절히 희망했던 시인은 이제 “이슬의 하루는/허덕이던 내 평생”(「이슬의 하루」)이었음을 고백한다. 덧없는 생, 찰나에 머무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의 고통을 한 몸에 껴안은 이슬과 꽃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었노라고. “마종기 시인이 밖으로 분열되어나가는 그 과정을 통해 되살고 싶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최초의 순수한 세계로의 거듭된 귀향”(정과리, 문학평론가)이라는 지적대로,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거둔 이슬과 꽃의 마종기의 시는 말 그대로, 순수하고 맑은 삶에 대한 소망의 피력이자 그것의 언어적 실천인 셈이다.

“없는 듯 숨어서 사는/누구도 갈 수 없는 곳의/거대한 마지막 비밀./내 젊은 날의 모습도/이슬 안에 보이고/내가 흘린 먼 길의 눈물까지/이슬이 아직 품어 안고 있네.”(「이슬의 하루」 부분)

“이른 아침의 작은 꽃은, 결국/잠들어 있던 이슬이었지만/그래도 꽃향기는 몰려와/눈부신 하루를 만들고/시간의 폐허에서 나를 구해주었다”(「이슬의 애인」 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꿈꾸는 시 ― “반갑고, 고맙다”

아무래도 마종기 시의 다정하고 겸손한 목소리를 거듭 말해야겠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황혼의 나이에 이른 시인에게 “두 손이 만지는 하늘이 따뜻하고/두 팔로 안는 이웃이 살뜰하다.”(「경학원 자리 2」)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른 섞임”(「희망에 대하여」), “인간이 서로 반기며 껴안는”(「폭풍 속의 화가」)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희망은 다름 아닌 시(詩)와 함께해온 생을 통해 얻은 교훈이고 믿음이다. 긴 세월, 일상에서 모국어를 쓰는 데 자유롭지 못했던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곧 “깊이 숨겨진 말을 펼쳐보는 즐거움”이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신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입김”이기도 했다. “말의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벅찬 기적”이며 “두 눈 뜨거워지는 시간”(「혼잣말하기」)인지를 알게 해준 자신의 시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화답한다. “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저녁 올레길」)

“낙태한 수많은 노래가 재로 쌓이는 아침,/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치명적인지/모여서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되고/노쇠가 되고 혈압이 되었겠지만,//모든 기억과 사유와 교양이 사는/자투리 시간에 자란 전두엽의 뇌,/피질의 굴곡을 따라간 열정만으로/잠들지 않는 뇌의 맥박을 듣는다.//산에서 강에서 몰려오는 뇌파들,/어릴 적 불면이 만든 중얼거림이/오늘에야 무수한 살별로 피어난다.//밤이여, 내 정든 타인,/뼛속에 깊이 감추어둔 꽃잎,/이 나이에 이르도록 나를 살려준/고맙고 살가운 비밀이여.”(「은인을 위하여」 부분)

“그래 맞아,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어./한동안 그 초심을 잊고 살아왔구나./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해서였어./맞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어./그래서 현자가 된다고 했어./눈으로 생각도 하고 심장으로 보기도 한다고,/날렵한 세상을 천천히 한눈팔고 걸으면서/탈 없이 욕심 없는 모습으로 산다고 했어.”(「날개」 부분)

“빈손에 초라하게 남는/먼지 덮인 통증의 양심 하나,/그래, 너 하나면 족하다./한 세월 가장 많이 의지했던/떠도는 내 운세가 되어다오.//이별하는 젖은 얼굴처럼/외로움도 단념해야 축복이 되고/되돌려줄 힘이 있어야/너그러운 매력도 된다.//많이 아프며/살아온 것 아는지,/부드럽게 안아주는/추운 날의 언 음성./넉넉한 운세의 덤불들.”(「오늘의 운세」 부분)

“길 떠나지 않는 물은/눈치만 보다가 죽고 만다./움직여라, 게으른 물들,/좌절에 흔들려보지 않은 물은/얼어서 결박되든가,/썩어서 사라질 뿐이다./흔들려라, 젊은 날에는,/그래야 산다.”(「물의 정성분석」 부분)

 

적 회복, 온전한 귀향과 희망의 노래

5년 전, 마종기 시인의 등단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문우인 정현종은 “시는 온전한 곳으로 가는 여행이며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나그네다. 1년에 한 번 마종기가 귀향할 때마다 잊고 살던 우리도 같이 귀향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해 오랫동안 바라왔던 국적 회복의 꿈을 이룬 시인의 이번 귀향은 더욱 각별하다. 1966년, 엄혹한 시절에 뿌리 깊은 환멸과 상처를 안은 채 이 땅을 떠난 이후로 메마른 국경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던 시인은 “계획 없이 떠다니던 내 생” 그러나 누구보다 치열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모든 의심과 열등감을 밟고 대신 “눈을 크게 뜨고 아직은 갈기 사나운 수사자를 꿈꾸며, 가슴을 펴고 바다같이 넒은 시를 꿈꾸며”(「헤밍웨이를 꿈꾸며」) 넘실대는 파도처럼 푸른 희망을 노래한다.

“아무도 없는 광대무변의 외로움이/무시로 나를 차고 흔들어 굴렸지만/먼지와 폭풍과 천둥의 비바람 속, /그 마지막에 남는 평화를 믿었다./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그래도 다 괜찮다는 말이, 확실히/내 가슴 한복판에서 맑게 들렸다./정말이다,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나를 그냥 가볍고 푸근하게 해주었다.”(「국적 회복」 부분)

“내가 세상과 작별할 때에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은 아마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희망들 때문에 나는 누구라도 용서할 힘이 생겼다. 내 손을 보라, 허영이 치유되는 침묵의 소리. 손해보고 상처받았다고 괴로워하던 남루한 내 생을 안아주면서 당당하게 가벼워지라고 희망은 오늘도 내게 말해준다.”(「희망에 대하여」 부분)

마종기의 시가 오랜 시간 독자들 가까이에서 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지식인 특유의 현학성을 배제한 염결하고 진솔한 삶의 토로, 구체적 생체험에서 비롯된 간명하고도 아름다운 시어, 그리고 애써 벗으려 하지 않는 유랑의식에서 발견한 삶과 죽음의 고독한 이치에 대한 절실한 공감일 것이다. “내 시가 내 안에서 시작되고 그래서 내가 책임지고 내가 울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마종기 깊이 읽기』 대담 중, 1999)는 시인의 고백처럼, 그에게는 시가 삶의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힘이자, 생의 무한한 원천으로서의 힘이 되었다. 그렇게 조국이 아닌 타국에서 매일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환자들을 치유하며 경계인의 촉각으로 일구어낸 깊은 성찰과, 고독과 외로움이 생을 무겁게 짓누를수록 있는 힘껏 생명의 온기와 사랑의 열정을 좇아온 시인의 진심이 오롯이 독자에게 전해져온 셈이다. 함께 붙잡고 울 수 있어야 진정한 행복이고 사람과 사람이 고루 섞여 서로의 마음속까지 당당히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는 시인의 평범하지만 귀한 믿음의 힘, 오늘의 우리에게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시인의 말

이 시집은 몇 해 전에 출간한 ‘하늘의 맨살’ 이후 여러 곳에 발표했던 시들을 모은 것이다.

만 5년이란 햇수가 좀 긴 터울이긴 하지만 그래도 게으름에 끌려 다니지 않고

살았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그간에도 내 시를 지켜보아주고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2015년 5월

마종기

 

■  시인 산문(뒤표지)

젊은 날, 들개처럼 헤매며 살다가 낯선 땅에 쓰러진다 해도 내가 한때 강제로 잃었던 자유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유는 좀 추운 구석이 있다. 아무 데나 적당히 기댈 수 없어서일까.

지난달에는 카리브 해를 이틀 동안 남진해서 퀴라소라는 작은 섬나라에 갔었다. 베네수엘라 근처의 이 나라 사람들은 가난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지만 모두 자기 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라고 주장해서 묘한 감동을 받았다. 남미의 북쪽 콜롬비아의 몇 어촌에서도 무식해 보이고 소금기에 전 어부들이 소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하나같이 자기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라고 말해서 마약의 나라라고 믿었던 내가 오히려 민망해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더럽고 가난에 찌든 마을로 간주했던 그곳이 갑자기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행복해하는 그 사람들이 모두 싱싱하고 고상해 보였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 헤어질지 모를 내 시들에게 늦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싶다. 괴롭고 외로웠던 지난날부터 이 나이에까지, 여일하게 내 동반자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 볼품없지만 정이 든 내 시들에게…… 사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귀인이 되어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나눈다면 우리들의 주위가 훨씬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봄날의 심장
마흔두 개의 초록
저녁 올레길
경학원 자리 2
이슬의 하루
서 있는 종이
헤밍웨이를 꿈꾸며
희망에 대하여
어머니의 세상
유적지의 비
신석기 시대 화가
손의 흔적
백조의 호수
신라의 발음
더블린의 며칠 1
더블린의 며칠 2
날개

2부
이슬의 애인
고속도로변 노을
경건한 물새의 저녁
잡담 길들이기 11
잡담 길들이기 13
잡담 길들이기 14
잡담 길들이기 17
나이 든 고막
옛 집 근처
검정 넥타이
11월의 발길
개꿈
270초
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
폭풍 속의 화가
다섯번째 맛
혼잣말하기
계림의 부부

3부
알렉산드리아의 바다
정화된 골목
산행 6
오늘의 운세
고비 사막 1
고비 사막 2
고비 사막 3
고비 사막 4
벌레 죽이기
가을의 생애
김영태의 기차역
물의 정성분석
은인을 위하여
악어 2
국적 회복
이슬의 뿌리

해설_이슬과 꽃, 그리고 시인(김주연)

작가 소개

마종기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뒤,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6)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외 『마종기 시전집』(1999),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2004),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과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등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고원문학상, 혜산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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