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번기十番棋

해이수 지음

출판사 문지푸른책 | 발행일 2015년 4월 23일 | ISBN 9788932027241

사양 변형판 145x210 | 가격 10,000원

책소개

“승부에 집착하면 손가락에 쥔 돌이 쇠처럼 무거워져.

반대로 마음을 비우면 어느 순간 돌이 반짝거리지, 유리알처럼.”

 

열아홉 줄 바둑판 위에서 펼쳐지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뜨거운 우리의 승부!

 

인간이 만든 놀이 중 가장 변화무쌍하고 가장 고요한 동작을 결합한 것. ‘바둑’ 이야기다. 그리고 가장 섬세하고도 예민한 시기,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둑판 위에 이제 막 올라선 열여섯 소년소녀가 있다. 삶에 대한 정교한 시선과 단아한 문장으로 현실에 핍진한 글쓰기를 해온 해이수는 자신의 첫 성장소설을 ‘바둑’을 무대로 풀어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십번기』가 그것.

제목의 ‘십번기’는 “열 판 둬서 세 판을 연속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시리즈 대결을 뜻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올인 게임’ 혹은 ‘바둑계의 끝장 대결’을 의미한다. 단판 승부야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니, 사생결단으로 완벽하게 우열을 가리자는 게 십번기 개념이다. 패하는 쪽은 치수를 조정당해 하수 딱지가 붙게 되니 목숨 걸고 두는 ‘단두대 매치’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해이수는 이 책에서 바둑, 그것도 ‘십번기’라는 극한의 기법을 내세워 청소년기 소년소녀의 꿈과 사랑, 번뇌와 성장 과정을 다감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촘촘하게 그려낸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돌이라면 〔……〕 한 판의 바둑도 결국 수를 저곳에 두지 않고 이곳에 둔 우연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인간 존재로서 가장 밀도가 높은 청소년기에 우리가 숱하게 맞닥뜨리는 질문,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운명론 혹은 삶의 비의를 ‘바둑’이라는 절묘한 설정을 통해 풀어가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해이수의 첫 성장소설

해이수는 2000년 『현대문학』 중편으로 등단해 심훈문학상(2004)과 한무숙문학상(2010) 등을 수상하며 중견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과 『젤리피쉬』, 첫 장편 『눈의 경전』까지 이어지는 이방인 의식을 바탕으로 ‘삶은 곧 여행’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매 작품마다 치열하게 휴머니즘이라는 주제의식을 담아온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나름대로 십대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번 작품을 통해 또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특히 바둑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답게 작품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바둑에 대한 그의 식견과 감식안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고 따뜻하다. 이는 바둑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읽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독서를 제공할뿐더러 바둑을 아는 이라면 더더욱 흥미로울 만한 지점이다.

소설은 주인공 ‘나’(훈)가 사범님의 권유로 전학생인 ‘연희’와 십번기를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에 바둑에 입문하여 중3인 현재 아마 초단 자격증을 딴 나름 실력자로, 시골에서 전학 온 여자아이 ‘연희’가 과연 자기와 맞수가 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나’는 충격적인 5연패를 당하며 호선(互先)에서 정선(定先)으로 치수가 깎여 ‘연희’를 상수(上手)로 모셔야 하는 치욕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전투? 그래도 바둑과 사랑은 서로 마주 보며 하는 거야.”

소설은 ‘십번기’라는 대국을 큰 축으로 ‘나’와 ‘연희’의 성장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5대 빵’이라는 결과에 무참한 심정을 숨길 길 없는 ‘나’는 우연히 ‘연희’와 바둑에 관한 서로의 생각을 담은 필담을 주고받게 되고, 점차 승부를 더해가면서 ‘나’와 ‘연희’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지면 졸때기가 되는” 사생결단의 대결 과정에서 어느덧 ‘나’와 ‘연희’의 풋풋한 사랑이 싹트는 것. 이처럼 ‘승부’와 ‘사랑’이라는 모순되고 미묘한 구도는 이기고 지는 단순한 승부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깨달음을 ‘나’와 ‘연희’에게 선사한다.

―바둑은 서로 번갈아가며 한 번씩만 두는 거야. 힘이 세고 돈이 많다고 해도 두 번 둘 수 없어. 반대로 응수할 자신이 없거나 실력이 없다고 해서 한 번을 안 두거나 건너뛸 수 없어.

―맞아, 한 판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150수가량을 방어하거나 공격해야 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까 끝까지 책임져야 해.

―집중력을 잃으면 패착을 두게 돼. 반대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면 지고 말아. 힘을 적당히 빼는 게 곧 실력.

―한 판이 끝나면 돌을 거둬서 바둑판을 비워야 해. 그래야만 다음 대국을 할 수 있어. 이전 판의 돌을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게임도 없는 거야.

―오직 손으로만 나누는 대화. 나는 말소리보다 그 손의 움직임으로 얘기하는 게 좋아. 말을 잘 못해서일까?

‘연희’에게 바둑은 어머니가 가족을 떠나고, 애지중지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버지마저 사고로 잃은 비정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었다. 반면 이론에만 빠삭한 “화초바둑”을 두면서 “책에 쓰인 절차와 규칙을 신봉하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연희와의 거듭된 승부를 통해 “정석은 안내자일 뿐 교도관이 아니”며 승부에서 이기는 것은 즐거운 일지만 이기고 지는 것에 얽매이기보다 진정 즐길 수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뜨거운 우리의 승부는 이제부터일 거야.”

한때 정선까지 내려갔던 ‘나’는 연희의 격려 덕에 호선 치수를 되찾지만, 연희는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나고 마지막 10국은 앞으로 펼쳐질 각자의 삶, 다시 말해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뜨거운 승부”로서 각자에게 남겨진다.

바둑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나’와 ‘연희’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은 한층 더 넓고 깊어진다. “연희야, 나는 오랫동안 행복을 오해했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런 방해도 없는 것을 행복이라 착각한 거야. 그런 일은 드물기 때문에 드물게 행복했어. 이제는 흑 돌과 백 돌이 번갈아 놓이듯 행복 옆에 불행이 따라붙는다는 걸 알아. 행복이란 훼방꾼이 전혀 없는 게 아니라 훼방꾼에게 눌리거나 휘말리지 않고 적절히 대응하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그렇게 끝없이 다가오는 불확실한 것들에 적절히 반응하도록 바둑이 우리를 연습시킨 거겠지.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늘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라는.”

해이수는 작가의 말에서 “십대를 거치지 않은 어른은 없으므로 모든 어른은 화흔과 수흔으로 도배된 기억의 방을 한 칸씩 가지고 있다. 〔……〕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행복했고 스스로를 많이 이해했다”고 적었다. 첫사랑과 바둑을 알려준 장소, 그가 나고 자란 그 시절 수원을 배경으로 펼쳐진 『십번기』는 “나는 커서 뭐가 될까……”를 수없이 고민하는 청소년들은 물론이요 이미 십대를 거쳐 간, 그러나 화흔과 수흔으로 도배된 기억의 방을 갖고 있는 성인들에게도 잔잔하고도 진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추천사

해이수의 이 책은 인생 1차 전성기 청춘들의 사랑과 꿈, 번뇌와 성취 과정을 바둑, 그것도 ‘십번기’라는 극한의 기법으로 풀어냈다. 번기(番棋)는 형식론적으로 말하면 ‘시리즈 대결’을 뜻하지만 내용적으론 ‘올인 게임’에 해당한다. 단판 승부야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니, 사생결단으로 완벽하게 우열을 가리자는 게 십번기 개념이다. 그렇다면 십번기의 대결 쌍방은 적의(敵意)가 생명이건만 이 소설에선 절절한 연인끼리 데스매치를 펼치고 있다. 절묘한 설정이다. 전쟁과 사랑의 대립 개념을 종축과 횡축으로 교직하는 역발상으로 바둑소설과 성장소설 두 편이 동시에 태어났다. _이홍렬(조선일보 바둑전문기자)

바둑은 재미있다. 소설 또한 재미있다. 둘 다 절대적인 몰입의 대화이고 사적 역사이고 정신의 최고도 예술이다. 아주 가끔 사람인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몇 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경지를 가진 바둑과 문학이 인생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 존재로서 가장 밀도가 높은 시기, 청소년기를 맞은 소년과 소녀가 있다. 바둑, 문학, 소년과 소녀, 즐길 수 있는 준비는 모두 갖춰졌지만 이것을 통섭하고 이야기로 발효시켜서 소설로 빚어내는 것은 진정한 작가의 몫이며 일이다. 해이수의 『십번기』는 서로 다른 생명체의 유전자를 조합해 이제까지 없던 새 우주를 펼쳐 보이는 일을 제대로 해냈다. _성석제(소설가)

책 속으로

“치수 고치기 십번기가 뭔지나 알아?”

“열 판 둬서 세 판 연속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거 아니에요?”

형은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의 어조를 한껏 낮추었다.

“인마, 그거 장난 아냐. 기라성 같은 프로 기사들도 그거 두다가 여럿 골로 갔어. 그게 일본 에도 시대에 시작된 바둑계의 끝장 대결이야.”

“끝장…… 대결이요?”

“그게 그냥 열 판을 두는 게 아니야. 둘 중 하나는 고꾸라지는 거라고. 뭔 말인지 알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두려움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끝이 간질간질해서 나는 발가락을 세게 꼼지락거렸다.

“하, 자식. 책을 많이 읽기에 똑똑한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바보네. 대회 타이틀이야 올해 못 따면 내년에도 딸 수 있지만, 십번기는 상대방과 서열을 정하는 거야. 지면 당장 무릎 꿇고 졸때기가 되기 때문에 목숨 걸고 두는 거라고.” (35쪽)

나는 사범님과 삼번기를 두며 ‘바둑 십조’의 심국(審局)과 도정(度情)이 무슨 말인지 다시 생각했다. 심국은 국면의 형세가 어느 쪽이 우세하고 약한지를 자세히 살펴서 조급히 굴지 말고 적당한 방법을 취하는 게 승리의 길이라는 뜻이었다. 도정은 고요하면 그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바둑을 두는 데도 침묵하여 이편의 마음을 저편에 보이지 않으면서 여유 있는 경기를 운영하라는 지침이었다. 그는 두 가지 조항의 중요성을 실전에서 몸으로 직접 보여줬다. (66쪽)

“바둑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 뭐예요?”

사범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사범님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도망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둘 수 있는 힘은 결국 유희에서 나와. 이게 어려운 숙제라든지, 완수할 책임이라든지, 막중한 사명이 되면 끝까지 하기 힘들어. 대부분 도망치고 싶지. 그러니까 끝까지 놀아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유희여야 해.”

그새 형은 내 포테이토를 다 먹고 냅킨으로 손가락의 기름을 닦으며 물었다.

“결국 끝까지 놀라는 말인데, 끝까지 놀기도 쉽지 않잖아요? 좀 특별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요?”

“어떤 마음을 가지려 애쓸 필요는 없고, 차라리 마음을 비워야 해. 승부에 집착하면 손가락에 쥔 돌이 쇠처럼 무거워져. 반대로 마음을 비우면 어느 순간 돌이 반짝거리지, 유리알처럼.” (69쪽)

―밝음과 어둠이 있어. 밝음만 있지 않고 어둠만 있지 않아. 바둑판에도 흑과 백이 있어. 흰 돌과 검은 돌 서로 한 번씩 주고받으며 바둑은 짜여져.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만, 확실히 아는 건 오직 한 가지야. 내가 집을 지을 때 방해자가 있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가까이 있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우리에겐 기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어. 분명한 건 뭔가 나쁜 일이 우리에게 계속 생긴다는 거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는 거야. 우리는 그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반드시 응수를 해야 해. 그런 훼방꾼이 없는 게임은 없으니까. 그 훼방꾼과 싸우며 이 판을 짜나가야 해. 있잖아, 집에 도착하니 엄마에게서 초청장이 왔어. (121~122쪽)

―네가 떠난 뒤 나는 세계지도를 방 벽에 붙여놓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그 지도 앞에서 네가 있는 곳과 내가 있는 곳을 가늠해. 위도와 경도로 나뉜 지도는 마치 바둑판 같아. 너는 좌상변에 살고 나는 우상변에 살아. 태평양을 두고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행마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어. 우린 같이 진동하고 있어. 같은 맥박으로 뛰고 있어. 너도 그걸 알지? 나는 어디에 승부수를 던져야 할까? 연희야, 네가 보고 싶어. 이번 대국의 이름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뜨거운 승부’라고 붙였어. 근사하지? 너의 영원한 기우, 훈. (161쪽)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사춘기 시절 숱하게 던진 질문의 답안을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돌이라면, 던져진 돌이 자신의 궤적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을지 새삼 미지수로까지 여겨진다. 한 판의 바둑도 결국 수를 저곳에 두지 않고 이곳에 둔 우연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67쪽)

목차

■ 차례

십번기

작가의 말
바둑 용어 해설

작가 소개

해이수 지음

1973년 수원에서 태어나 2000년 『현대문학』 중편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과 『젤리피쉬』, 장편소설 『눈의 경전』과 『십번기(十番棋)』가 있다. 심훈문학상과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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