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09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5년 2월 27일 | ISBN 9771227285006

사양 변형판 223x152 | 가격 15,000원

책소개

봄호를 엮으며

잠시, 10여 년 전의 과거를 떠올려보자.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정국이 정점으로 치닫고 야당 단독으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이후 4월 총선에서 여당에 압도적 지지를 표함으로써 탄핵불가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신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국회의원 과반이 몰아내려 한다는 상황 인식은 유권자들의 분노를 낳았고, 이 강력한 공감대가 탄핵 정국을 국민적 심판대에 올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다시 기억해보면, 여당의 정국 장악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했던 ‘역사적 사건’은 50여 년 만에, 정확히 말하면 5 ・16 쿠데타 이후 43년 만에 진보정당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 좌파정당의 지지율까지 동반 상승시켰던 정국 분위기 탓이었겠지만, 대한민국 수립 이후 진보세력이 합법적 정당을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를 상기하면, 한국 현대정치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 그해 봄에 있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인 2014년 12월, 민주노동당의 후신後身인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으로 선고되어 해산되었다. 진보당의 정치활동이 국가의 존립 및 의회제도, 법치주의, 선거제도 등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하여 폭력・위계 등을 적극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 이념에 반한다는 것이 선고의 주된 이유다.
해산 결정의 시비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언론은 대법원의 판결과도 엇갈리는 지점이 있음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둘러싼 판단과 이견은 그 옳고 그름을 쉽게 따질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상황이 결부된 문제지만, 법이 궁극에는 법리적 해석일 뿐이며, 법리적 해석이란 정치적 맥락과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낳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은 의혹이 아닌 사실로 판명되었고, 최근 서울고법은 국정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선거 개입을 문제 삼은 야당의 의문에 대해 경찰청장은 선거 하루 전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여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었다. 이는 사태를 주시한 이들이 모두 기억하는 바다. 하지만 경찰청장의 선거 개입 의혹은 얼마 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를 밝힌 내부 고발자는 모해위증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판결은, 피의자의 범죄 여부를 밝히는 조건과 근거가 사안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모순관계에 있다. 국정원에 의한 선거 개입은 실제로 있었다, 이것은 유죄다, 그런데 경찰은 선거 전날 이를 섣불리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하였다(엄밀히 말해 이것은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하지 않는가?), 이것은 무죄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선거 개입이라는 위법성을 오직 조직의 수장인 한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직책의 과실 및 권한 남용의 여부에만 국한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법리 해석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들어 위 내용이 모순이 아니라고 강변하더라도,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변치 않는다. ‘불법 선거 개입’이 친여親與적 성향이 농후한 행정조직과 정부조직에 의해, 물리력이 도모되는 제도적 뒷받침을 빌려 직간접적으로 ‘있었다’는 점,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 직접 선출은 민주주의 선거의 꽃이라는 진부한 수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안의 심각성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선거에 여타 정부조직의 불법 개입이 있었다면, 그것은 법치주의 및 선거제도를 어긴 부정한 활동이 아닌가? 그것이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일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이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존립에 위협이 되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물리력과 위계를 사용하였으니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는가? 실정법의 대원칙이자 규준인 헌법에 따른다면, 이에 대해서는 어떤 합당한 판결이 내려져야 하는가? 마땅히 이러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 법의 원칙과 평등성, 합리성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당한 법리 해석과 판단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정치적 논리와 맥락, 이념적 손익계산에 얽매이지 않은 ‘법치’가 제대로 이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다.
법의 보편타당성은 그 적용과 이행 과정에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예외와 특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반을 둔다. 사건의 특수성이 다르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그 원칙에 반하는 명백한 위법과 위험이 발생하였다면, 그것의 불법성을 따져 묻는 일에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법의 평등과 균형을 실현하는 길이자 정의의 본모습임을 법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기본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초유의 정당 해산과 대통령 선거의 개입이 법과 정의의 여신인 아스트라이아의 천칭 위에서 함께 저울질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종북’과 ‘좌파’, ‘친북세력’과 ‘진보세력’을 전혀 구분 짓지 않는 정치 독단과 오해, 무지와 무잡 蕪雜의 대중적 횡행도 문제고, 이념적 자기 정체성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망상적 주체의 시대착오적인 정치 활보와 비상식적인 떳떳함도 문제지만, 생산적 비판을 이끄는 토대를 닦기는커녕 방송・언론매체에서 잡담과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소모될 뿐 법과 정치의 본래적 기능과 역할, 공적 가치를 망각해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현주소야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법과 정치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며, 결코 서로에게 자유롭지 않다. 법의 공정성과 보편타당함이란 민주주의가 좇는 헛된 환상이거나 다만 법치주의의 이상 理想에 불과한 것일까?
‘정치의 배신’은 이제 상투형이 되어버렸지만, ‘법의 배신’은 어떠한가? 후자가 우리에게 훨씬 충격적인 문구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법과 법치는 하나의 섭리처럼 간주된다. 칸트는 이러한 상황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성함과 결별한 인간적 자율이 실은 근거 없는 허방의 무 無 위에 축조된 것이며, 이것이 ‘민주’라는 명목하에 신성한 것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어떤 어둠이 그 밑에 깔리게 될지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고 직감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한 입법이 절대적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닌 한, 언제든 그것이 사회적 이해타산에 따라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음을 칸트는 간파하였던 것이다. 법을 최선의 안전책이자 최후의 보루라 여기고, 지금 이곳의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본래적 자연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시민으로 계몽되고 교육받고 통치되는 이들에겐 일종의 집단 심성과도 같다. 하지만 법의 배신이 민주주의의 달성 이후에도 지속되는 현실은 정치적 혼란과 무원칙을 종용하고 사회적 비합리성을 증가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혐의는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들, 특히 정신적・심리적 기이함과 마주칠 때 더욱 짙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면화된 상징법의 현실적 외현이 실정법의 형식을 띤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러한 법이 법치를 빌려 스스로를 배신하는 현실은 공동체 구성원의 (무)의식에 깊은 흔적과 외상을 남길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상징적 대타자의 부재가 실정법의 보편타당성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경험되는 상황이 충분히 문제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법이 공정하지 않고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의 자리에 있지 않은 법, ‘법’에서 이탈한 법이며, 그 기능은 규범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는 데 이른다. 법과의 동일시를 통해 비로소 주체화에 들어서고, 이러한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정신과 심리가 정상적 작업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정신분석학적 입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법’이라는 대타자의 부재가 주체의 자유는커녕 내적 분열과 심적 장애, 불안과 신경증을 활성화시킨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간다. 자유는 언제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자유란 오히려 심대한 불안을 야기한다는 것을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하였다. 그러니 법에서 이탈한 법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구성원들의 내면과 (무)의식, 그에 따른 행동양상은 정상성의 범주를 위태롭게 하는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태로운 표출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힘들 만큼 ‘극단적’ 형식과 내용으로 표면화되는 상황을 연일 목도하고 있다. ‘극단’의 만연과 편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해 불가능한 ‘극단적’ 현상들, 모종의 ‘극단적’ 심리와 정서, 이상하기 그지없는 ‘극단적’ 인물과 성격, 놀랍고 끔찍한 ‘극단적’ 사건을 우리는 거의 매일 경험하고 있다. 갈등이라 여겨지지 않는 것까지 갈등으로 키우고 부추기는 각종 매체의 요란함과 선정성은 도를 넘어섰고, 그로 인해 좌우갈등은 정치와 무관한 사소한 내용에서조차 극심해지고 있으며, 최소한의 공통 감각마저 상실한 발언과 행동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사회적 병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베’ 현상이나 극좌와 극우를 오가는 소신 없는 이합집산, 정치적 소통의 여부를 근본에서부터 회의하게 만드는 사회적 재난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표심의 향방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하고, 용광로처럼 불타오르던 촛불은 금세 먹고사는 일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오늘의 좌파 지성인이 내일 극우 반공주의자나 지식 장사치가 된다 해도 놀랍지 않은 게 이즈음의 우리 사회다. 문화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막장’이란 비유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고, 영화 한 편에 1,700만 명이 열광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피범벅의 주인공이 손에 도끼를 들면 ‘한국식 누아르’로 호평을 받는다. 인구 대비 자살자 수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는 한편, ‘힐링’과 ‘생명’ 담론이 산업 수준으로 팽창하고 있다. 홉스봄은 1차 대전부터 1991년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던 시기까지를 ‘극단의 시대’라고 명명하였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홉스봄이 이름 붙인 시기에 비해 덜 극단적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만큼,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이다. 양립할 수 없거나 동시적일 수 없는 것들이 요란하게 대척하면서 공존하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따라서 이번 호 〈기획〉에서 준비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가?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이 극단성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형태와 구조를 띠며, 이러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법은 과연 존재하는가? 맹정현의 글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진단과 원인 분석을 시도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타자의 변화된 위상으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겪고 있는 심리적 위기가 ‘묻지마 범죄’, 집단 따돌림, ‘일베’,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상의 병리성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시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는 초근접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타자와의 관계가 불투명해”지는 결과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주체들의 군집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타자로부터 박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그것으로 인한 타자에 대한 전가”가 수시로 일어나는 “증상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이 커뮤니티를 통해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생각이 똥의 등가물이 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그 내적인 불투명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안고 있는 배설물로 타자를 오염시키고 있다”라는 그의 날카로운 진단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박상훈의 글은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고질적 병폐가 되어가는 양극화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면밀한 분석은 심도 깊은 이해를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정치적 양극화란 공적 논쟁이 사라진 정치 혹은 과도한 파당적 경쟁만이 지배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한국 정치가 이런 상태에 이른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야당의 집권에 대한 “보수적 반작용”, 보수파의 재집권에 무기력하게 무너진 “야당의 실패”, “정치 양극화를 이끄는 강한 선호를 가진 열정적 소수에 의해” 정당 내부와 시민사회가 포획된 결과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 양극화란 “이념적 거리보다는 역으로 이념적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실제로 소란이 가라앉고 보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거나 변화의 가능성만 더 축소되고 마는 악순환의 정치”를 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라져야 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야당의 조직적 능력”이라는 그의 비판은 현재 우리가 가장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문강형준의 글은 ‘극단’을 온건과 중도의 상대적 개념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할 단초를 찾고자 노력한다. ‘극단성’ 자체가 나쁘다는 기존 통념에서 벗어나 가장 온건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받아들여져온 “민주주의-자본주의 결합체”가 오늘날 “개인과 공동체와 생태 시스템 전체를 상품화하는 극단적 경향성”을 띠는 것, “현실을 가리려는 기만성과 위선에 대한 반작용이 정치적인 내파와 극단적인 문화 서사”를 등장시키는 것, “다시 삶과 공동체를 빼앗길 위험에 처한 이들의 극단적 저항”을 불러오고 있는 사태에 주목하면서 그는 “극단적인 문화가 창궐하는 현재가 우리를 이끄는 곳은 이러한 극단성이 사라진 어떤 온건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현실에 절망해 극단적인 방식의 정치적 표현을 행하는 이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기존 현실을 뒤흔들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혼돈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똑바로 직면”할 때가 되었다는 그의 선언은 나아갈 곳의 시작점을 찾게 한다.
이번 호 〈지성〉란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빅브라더Big-brother’를 화두로 삼는다. ‘카카오톡’의 검열 논란으로 불거진 사적 영역의 준수와 표현의 자유, 검열과 법적 수사 간의 충돌은 새로운 형태의 ‘빅브라더’가 귀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 임태훈의 글은 현재의 인터넷 공간이 “폐쇄적이고 중앙 집중화된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로 인해 “기업과 국가의 패킷 감청에서 구조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환경”에 있음을 문제시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코딩 교육을 통한 가속주의적 해방과 실천, 새로운 네트워크 플랫폼의 창안, “데이터에 시한부 생명을 부여하고 죽음의 블랙홀로 끌어당기는 상상의 인터넷”을 구상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한다. 박경신의 글은 ‘빅브라더’의 은밀한 작동이 프라이버시의 침해를 둘러싸고 국가의 공적 물리력의 동원, 개인정보의 축적과 확산을 둘러싼 법 해석의 차이, 국가고유식별정보가 비공개된 영역의 침입을 용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두 글 모두 우리의 일상생활과 직접 연관된 사안을 다루고 있는 만큼 일독을 권한다.
〈동향〉란에서는 2014년 소설계의 현황을 진단하고 전망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백지은, 서희원, 양윤의, 이수형이 좌담자로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진행해주었다. 지난 한 해 발표된 작품 중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들을 선별하여 진행한 이번 좌담은 과거를 재서사화하는 경향의 의미와 그것이 문화의 역사 혹은 한국인의 망탈리테를 되짚는 형태로 기술되는 까닭을 심도 깊게 살피고 있다. 역사의 해석 및 전유를 둘러싼 장편소설계의 새로운 서사화가 영화 「국제시장」의 역사관과 대비되는 이데올로기적 다툼을 벌이고 있음을 논한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장편소설의 다양한 변화와 흐름을 현재진행형의 관점에서 밝힌 이번 좌담이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비추는 좋은 방향등의 역할을 할 것이다.
〈쟁점〉란에는 비평의 가치에 대해 열띤 문제의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소영현의 글을 싣는다. 비평이 “문학 범주를 불변의 것으로 상정하고” 스스로를 “텍스트 다시 쓰기로 한정하면서” “보호구역 내에서 생존을 보장받는 인류학적 소수인종처럼” 고립되어 “세계와의 거리는 멀어”진 채 “점점 게토화”되어간다는 진단은 통렬한 자기반성이라는 점에서 뼈아프다. 심지어 “비평장에서 뚜렷한 쟁점이 사라지거나 거의 생성되지 않는 사정도 비평이 생존을 위해 포기한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대목에 이르면 암울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세심한 고찰이야말로 ‘감성적 사유’로서의 사회비평이 담보한 시대적 타당성의 확인 작업이 될 것”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글의 후반부에서 “자본에 의해 탐구되어온 ‘인간본성’에 대한 조절과 억압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파악”하려는 비평적 실천을 텍스트 분석을 통해 스스로 도모하는 부분은 비평의 책무와 윤리가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번 호 〈창작〉란에는 반가운 얼굴이 등장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그리고 여전히 ‘핫한’ 문학적 아이콘인 백민석이 장편 연재를 시작한다. 그를 기다린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첫 회부터 펼쳐지고 있으니 필독을 권한다. 김숨, 백가흠, 이갑수, 양선형의 소설과 채호기, 박형준, 정재학, 이기성, 박상수, 김이듬, 강성은, 이제니, 이설빈의 시 또한 풍성하게 꾸며주고 있다. 더불어 제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으로 윤이형의 「루카」가 선정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알린다. 수상작과 함께 상세한 심사경위와 심사평이 본문 말미에 실리므로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심사의 수고를 맡아준 심사위원들에게는 감사를,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_문학과사회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책이란 오래된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던 내용을 실을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했다. 사물인터넷이 실현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고 있다. 매듭들 사이를 잇는 길에는 ‘내용’이 흐르고 있다. 어디든 적절한 단말기를 꽂기만 하면 그 ‘내용’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이제 책은 다른 책과 경쟁하지 않는다. ‘내용’을 담는 모든 ‘그릇’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저자의 원고를 다듬어 서점에 내놓으면 책을 사 가던 독자들이 다른 ‘그릇’에 눈을 돌리고 있다. 독자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남은 독자들은 곤혹스럽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서점의 진열대는 돈을 내고 자리를 산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책을 다루는 경우도 드물다. 취향에 맞는, 혹은 필요한 책을 찾고 고르는 일이 어렵다. 저자와 서점 사이에서 오가던 출판사들이 직접 독자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 길을 잃었고 다시 길을 찾고 있다.
많은 출판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 출판사는 책을 많이 낸다. 책으로 묶을 수 있는 ‘내용’들을 모으고 또 모아 특별한 가공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산한다. 여러 책들에서 조금씩 떼어내고 다시 묶어 맞춤형 책을 뚝딱 만든다. 여기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내용’들을 쌓아두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또 다른 출판사는 책에다 정보를 담는 칩을 심는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책에서 나오는 신호를 감지해서 자동으로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영상을 상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전자책이 종이책 안에 담겨 있다. 온라인으로 배포되던 ‘내용’을 굳이 종이책에 묻는 이유는 출판사가 책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를 독자에게 직접 전달해보려는 시도다. 또 다른 출판사는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인다. 독자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독자들의 반응이 큰 장르소설이나 웹툰을 실을 계획이다. 책이 아닌 뭐라도 읽는 사람들을 독점하고 있는 포털사이트가 모바일 환경으로 변하면서 주춤하는 틈을 노린다.
출판사만 바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한 서점은 인쇄소를 가진 큰 출판사를 인수해 일반 소매를 넘어 도서 납품 시장까지 겨냥하고 있다. 거대한 다국적 서점은 절판된 책들의 판권을 사들여 전자책 서비스를 하면서 거의 모든 품목의 온라인 상거래를 지배하고 있다. 큰돈이 필요한 드라마 제작까지 영역을 넓혔다. 올해 한국에 진출하는 이 서점의 행보 역시 비슷할 것이란 관측이다. 한국 출판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대한 자본과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길을 열어갈지 자못 궁금하다. 크고 힘센 이 서점이 출판사에 요구하는 조건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다고 알려져 있다.
출판을 둘러싼 바쁜 움직임은 분명히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문명사적 전환의 반영이다.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 안에서 모든 행위자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유심히 살펴보면 개별 출판사, 서점, 독자 들이 자신의 이익만 극대화하겠다고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 잃은 출판사와 독자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독자를 잃으면 출판을 할 수가 없다. 다른 볼거리에 빼앗긴 독자들이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독자 뺏기가 아니라 독자 늘리기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의 전제는 잘 편집된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단편적인 글을 산발적으로 소비하는 것보다 좋다는 믿음이다. 현재 문학과지성사의 고민은 이 지점에 있다. 어떻게 우리가 만드는 좋은 책을 읽는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좋은 책을 낸다면 기꺼이 읽어줄 독자들을 어떻게 더 많이 만들 수 있을까?
겨울을 지나며, 봄을 기다리며 문학과지성사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냈다.

정영, 『화류』(문학과지성 시인선 462)
서영처,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 시인선 463)
송승언, 『철과 오크』(문학과지성 시인선 464)
원구식, 『비』(문학과지성 시인선 465)
황지우, 『나는 너다』(문학과지성 시인선 R06)
이민하, 『환상수족』(문학과지성 시인선 R07)
신영배, 『기억이동장치』(문학과지성 시인선 R08)
김태용, 『벌거숭이들』
심상대, 『나쁜봄』
구병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최인훈, 『광장/구운몽』(초판 삽화 삽입판)
이청준, 『이어도』(이청준 전집 10)
김인환, 『고려 漢詩 삼백 수』
조재룡, 『번역하는 문장들』
V. S. 나이폴,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대산세계문학총서 127-128)
하비에르 마리아스, 『새하얀 마음』(대산세계문학총서 129)
마해송, 『멍멍나그네』(마해송 전집 7)
엘리자베스 조지 스피어, 『청동활』
최시한,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
전상진, 『음모론의 시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달의 이면』
크리스티안 생-장-폴랭, 『히피와 반문화』

저자와 역자 들의 땀이 밴 역작들을 독자들과 만나게 할 궁리로 마음이 바쁘다. 문학과지성사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독자가 없으면 출판도, 출판사도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더 어려워지면 시장에서 힘을 잃은 예술 장르들처럼, 초라한 정부 지원에만 기대어 명맥만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단계로 들어서면 대부분 생기가 사라지고 창의성이 마른다. 문학과 출판을 둘러싼 시장이 더 망가지기 전에 독자를 찾고 활기를 찾을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학과지성사는 배전의 노력을 더하여 열심히 만든 책을 들고 발에 땀나도록 독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설득하고 있다. 길 잃은 독자들을 다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_문학과지성사

목차

봄호를 엮으며

<기획>
21세기 한국, 극단의 시대
맹정현_불투명성의 병리학
박상훈_한국의 정치 양극화—행태, 기원 그리고 구조
문강형준_극단의 체제, 극단의 상상
—현실의 해결 불가능성이 낳은 문화적 형식들

<동향>
백지은&서희원&양윤의&이수형_좌담  장편소설 2014, 낯익은 가치들의 갱신

<지성>
진화하는 빅브라더
임태훈_프로메테우스의 정치
박경신_프라이버시의 세 가지 모습

<쟁점>
소영현_그나마 남은 비평의 작은 의무—자본, 정념, 비평

<시>
채호기_꽃병|조각가|말로는 할 수 없는
박형준_발리슛|돛이 어디로 떠나갈지 상상하던 날들|그의 창문을 창문으로 보면서
정재학_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칠머리당|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요령|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새부리 뼈
이기성_먼 훗날에|텅 빈 사람|범람하다
박상수_무의미해, 프라이드|무한 리필|리폼 캠핑
김이듬_표류하는 흑발|이민국에서|굼뜬 분열
강성은_야간비행|합창|겨울이 온다
이제니_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흑곰을 위한 문장|나무 식별하기
이설빈_어두워지는 촛대|무거워지는 촛대|죽은 자의 사랑스러운 쪽

<소설>
김숨_자라
백가흠_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이갑수_T. O. P
양선형_표범의 사용
백민석_장편 연재 1회 1공포의 세기  

제5회 문지문학상 발표 1윤이형, 「루카」
제11회 마해송문학상 발표 1장성자, 「모르는 아이」

색인 『문학과사회』 99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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