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노스탤지어 -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 심희찬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11월 7일 | ISBN 9788932026671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27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세계는 폐허, 관계는 거절, 개인은 절망에서 출발하는 이외에는 없는바,

여기에야말로 무한의 희망이 있다.” _이시카와 규요

내면의 시선으로
근대 일본의 역사, 문학, 종교를 재해석하고
균열과 틈새, 여백으로서의 열린 사유 공간을 모색하다

일본의 소장학자로서 종교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소마에 준이치 교수의 대표작 『상실과 노스탤지어』가 출간되었다. 한국의 탈식민주의 연구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재일 조선인, 소수자, 디아스포라 같은 주제에 천착하고 있는 이소마에의 책이 완역되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의 근대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과감한 체제 개혁을 단행한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되어, 이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고 미합중국의 점령을 받게 되는 등 사회 격동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근대 일본이 사로잡혀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 내지는 상실감을 포착해 그것이 어디에서 근원했는지를 살피고 우리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을 성찰한 책이다. 저자는 ‘내면과 여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의 역사, 문학, 종교를 독창적으로 읽어내고, 내셔널리즘과 민족 개념, 천황제와 국가신도 문제 등을 고찰한다. 또한 담론과 지역 연구, 일본인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대문자 역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한 코에 꿰어 분석한다. 나아가 저자는 학문을 하는 연구자는 자신이 현실의 맥락에서 초월해 있다거나 혹은 현실과 타협하는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며,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날선 조언을 하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4)

우리는 모두 내면에 여백을 품고 있다
새로운 이해 가능성을 여는 어긋남에 관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며,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동화되지도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생각만큼 명확한 존재가 아니며 자기 내부에 어떤 어긋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어긋남, 여백을 혼성성이나 어중간한 상태, 혹은 이질성이나 과잉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곧 타인과 관계하려는 의지, 그리고 표현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이처럼 내면의 여백을 긍정하면서, 국민의 사고와 의식을 동질화하는 평등의 허망함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초법적 존재를 상정하고 균질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내셔널리즘 혹은 국민국가의 환상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쉽사리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민주주의 사회라는 환상 역시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생겨난 부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저자는 근대 일본의 역사를 내면과의 투쟁으로 해석하고 내셔널리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기존의 동질화와는 다른 불균등한 것들의 평등을 논의의 전제로 삼을 때 비로소 새로운 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한다.

한편 저자는 일찍이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등에서 말한 ‘내면’ 개념은 공동체의 동일성을 상정하고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을 상정함으로써 내부로부터의 저항 가능성이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면서, 가라타니로 대표되는 근대 일본 담론의 연구 전통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사카이 나오키나 해리 하루투니언 등의 텍스트 독해를 통해 모색하고 있다.

전후 일본 사회의 담론과 역사 인식에 관한 전면적 비판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왜 반대에 부딪치는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곤 하는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논쟁들과 그에 관한 저자의 견해도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종교학자 무라카미 시게요시는 야스쿠니의 제사가 근대에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자기편의 병사만을 제사 지내는 것은 일본 고유의 원천평등 사상과도 반목한다는 점 등을 맹렬히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소마에는 역사적 작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역사적 본래성을 띠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근대 일본이라는 공간 속에서 제사가 어떤 형태로 상기되었으며 사회와는 어떻게 결부되어 있었는가의 문제를 그 관계성과 함께 동시대의 지평 안에서 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A급 전범의 합사나 ‘국가’에 의한 제사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쟁점 이외에도 야스쿠니에서의 제사 행위를 빚어내는 논리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제사 행위는 결국 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목적에 복무할 뿐이다. 저자는 이처럼 제사 자체의 불가능성을 상기시키면서, 거기에서 생겨나는 균열로부터 후방의 전쟁 피해자와 타국의 피해자를 생각할 틈새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족이 느끼는 사자의 원통함이나 사자에 대한 책무의 감정은 야스쿠니가 제공하는 전쟁 긍정의 서술에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전사로 내몰았던 국가에 책임을 추궁하는 반反전쟁의 이야기와 결부될 수도 있는 양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비타협적 태도를 권하는 이소마에의 날카로운 역작

저자는 문학, 역사학, 종교학, 민속학, 그리고 자문화와 타문화, 과거와 현재, 윤리와 정치, 수필과 논문의 형식을 넘나들고자 분주히 노력한다. 학술제도와 그 훈육을 통한 기법의 경계들을 무화시키면서 내면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다. 역사학적 분석이 이루어지는 한가운데에 문학작품이 인용되고, 여기에 다시 마르크스주의적 초월성의 경향이 천황제와 함께 겹쳐진다. 미시마 유키오, 야나기타 구니오, 이시모다 쇼,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무라카미 하루키, 나쓰메 소세키 등 각자의 분야에서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다양한 지적 고투와 좌절,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와 특공대, 사소설, 마르크스주의, 담론 비판, 외국 생활, 미국의 일본 점령, 네이션, 종교 개념, 조상숭배, 정교분리, 천황제 등의 사태가 이를 위한 각각의 알레고리로서 작용한다.

한편 저자는 문체에 관해서도 깊이 사유하고 있다. 학술적 담론과 훈련을 통한 문체로 이루어진 글은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가 새겨졌다고 보기 힘들며, 그렇다고 마음 가는 대로 단어들을 쏟아내는 것도 타자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자기 위안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 속에 행해진 저자의 첫번째 실험이다. 이 책 곳곳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이는 독자를 텍스트의 피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 존재로 소환하고자 한 의도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학문 연구의 자세에 대해서도 뼈아픈 반성과 조언을 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에 대해서는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자신의 인식이 기존 담론의 틀에 제약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몹시 둔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단자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전체와의 ‘협조성’을 지키는 가운데 스스로 앙상해져가는 학계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동질화된 사고와 정체성에 여백을 삽입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비평이 오늘날 완전히 퇴색하고 만 것 역시 이러한 지식 사회의 황폐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과 학계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이 책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의 구성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모두 4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간체로 쓰인 감각적인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1부 「가까운 곳으로의 회귀」에서는 내면과 여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일본의 담론 비판과 이문화 이해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2부 「내면과 여백」에서는 이를 확장해 근대 일본 사상의 전개를 문학, 역사 등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분석한다. 3부 「죽은 자와 산 자」에서는 국가 내셔널리즘의 문제를 죽음과 제사, 상실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4부 「텅 빈 제국」에서는 전후에 초법적인 천황제가 어떻게 불려나오게 됐는지 그 사회적 맥락을 종교학자이자 역사학자의 눈으로 분석한 뒤, 역시 수려한 문장으로 쓰인 에필로그로 글을 맺고 있다.

당연히 너, 나, 우리는 동일한 존재일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도 간극을 지닌다. 학문 제도나 국민국가와 같은 기존의 경계를 횡단하고 그 내부와 외부에서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지식이 태어날 토양의 네트워크 또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 각자는 이 내면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유하고 적용해나갈지 고민하고, 우리의 주체성과 윤리적 연대를 정초할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확실히 우리는 생각만큼 명확한 존재가 아니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악함과 더러움을 내부에 간직한 존재입니다. [……]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가 『마음』에서 말한 “나는 죽기 전까지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흉금을 터놓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타인에게 어리광을 피워서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방을 구하고자 하는 아슬아슬한 한계점에서 발화된 말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프롤로그」, 28쪽) 

확실히 소수자나 디아스포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깊은 곳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꺼림칙한 기분’을 품고 있으며,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하는 자신에게 때때로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바바나 사카이의 표현을 빌려서 말해보자면, 이 꺼림칙한 기분이야말로 우리의 새로운 유대가 출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다만 이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오늘날 통속적인 의미에서 입에 담는 차이나 타자 개념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혼성적인 결정 불가능성을 본질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구속된 존재인데, 그렇다면 결정 불가능한 자신이란 각각의 사회적 상황에 제약된 채 개별 주체로 분절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틈새에서」, 82쪽) 

그러나 전후 역사학이 마치 잠든 것처럼 여겼던 내셔널리즘은 오늘날 다시금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로 되살아났다. 사실 근대 일본의 좌익 계열 지식인들이 내셔널리즘의 문제와 맞서게 된 것은 적어도 이것이 네번째라 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되돌아가다 보면 1960년대 후반의 요시모토 다카아키 등 신좌익계 지식인의 내셔널리즘론, 그리고 위에서 본 1950년대 초의 민족론을 거쳐, 1930년대 전반에 발생한 공산주의자의 전향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아도 내셔널리즘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단어로 단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퇴치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우리의 ‘상상’은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병의 근원이 잠복해 있기에, 내셔널리즘은 언제까지고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유령과도 같다. (「일상이라는 리얼리티」, 100쪽) 

사람의 목숨이 끝나지 않는 한, 잿빛 먼지로 변한 후회와 향수라는 이름의 건망증도 지워지지 않는다. 역사와 종교는 여기에서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 나와 당신의 틈새에서. (「내면을 둘러싼 항쟁」, 161쪽)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잠시 과거에 묶인 채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어째서 당신이 지금 여기에 없는 거지? 일찍이 르낭은 기억하는 것이란 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잊지 않으면 새롭게 기억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이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기억이란 마음속에 들러붙어서 잊고자 해도 쉽사리 잊히지 않지만, 잊고 싶지 않은 것은 도리어 간단히 퇴색하고 만다. 내 안에 있으면서 잡을 수 없고, 움켜쥐려 하면 도망치는 기억. 함께하고픈 심정을 배반하는 어긋남, 그리고 그 엇갈림이 낳는 함께하고픈 마음. (「죽음과 노스탤지어」, 166쪽)

호국의 신은 쉽게 원령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전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경질적일 정도로 야스쿠니의 제사에 심혈을 기울여온 것이다. 이에 반해 유족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바라는 바는 누가 어떤 논리로 제사를 관장하는가라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감정의 갈증을 얼마만큼 가시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서술의 강력함이다. [……] 국가 제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만일 여기에 전쟁 찬미 같은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면 그 투쟁의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도 생겨나는 것이다. (「사령 제사의 정치학」, 204~205쪽) 

확실히 정교분리의 원칙은 서양의 교권과 국권의 투쟁이라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고안된 교훈이며—이슬람 사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모든 사회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의 야스쿠니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지금까지 논해온 것처럼 비서양 사회로서의 일본의 특질에 대한 이해 위에서 서양에서 유래한 종교적 담론이 어떻게 분절되었는가를 고려해야만 종교와 국가의 관계, 혹은 제사의 본래적 형태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는 비단 정교분리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것이 제도이며 담론인 이상 언제나 그 외부나 내부에는 여백이 생겨나게 되며, 따라서 사회의 실태에 꼭 들어맞는 제도나 담론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초법적인 것의 그림자」, 256쪽) 

돌아갈 곳이 붕괴되고 근원적인 자신의 불안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현대적인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적어가야 한다. 사르트르의 『구토』처럼. 주어진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이 결여된 사람의 이야기를. 그러한 어긋남 속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중단된다. 카프카의 어디에 있어도 꺼림칙함을 느끼는 이야기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등을 계속 써가는 것이야말로 표현자의 책무다. 그와 같은 표현과 마주하는 곳에서, 더 이상 종교학이나 역사학 등 기존의 학문 형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소설도 그럴 것이다. 나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표현의 형태를 각자가 발견해가야만 한다. 차이와 동일성의 사이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절대적인 장소도 해답도 없다. 그저 돌파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278~79쪽)

목차

한국어판 서문 | ‘여백’을 생각한다-한국의 독자들에게
프롤로그 | 어디에도 없는 당신께-역사와 종교가 태어나는 곳

1부 가까운 곳으로의 회귀
역사와 종교를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담론, 네이션, 여백
문화의 틈새에서-이문화 연구와 자문화 이해

2부 내면과 여백
일상이라는 리얼리티-이시모다 쇼와 『역사와 민족의 발견』
내면을 둘러싼 항쟁-근대 일본의 역사․문학․종교

3부 죽은 자와 산 자
죽음과 노스탤지어-야나기타 구니오의 『선조 이야기』에 관해
사령 제사의 정치학-위령과 초혼의 야스쿠니

4부 텅 빈 제국
초법적인 것의 그림자-근대 일본의 ‘종교/세속’

에필로그 | 두 척의 배-과거와 마주하기, 그리고 표현이라는 행위
미주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작가 소개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시즈오카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하버드대학, 런던대학, 취리히대학 등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일본여자대학을 거쳐 현재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포스트구조주의 및 탈식민지주의를 기반으로 주체와 타자, 문체와 표현 행위의 의미를 묻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일본 종교학과 역사학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최근에는 식민지 조선과 대중음악의 분야로까지 연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그 계보近代日本の宗教言説とその系譜』(2003), 『문턱의 사고閾の思考』(2013), 『더 타이거즈ザ·タイガ—ズ』(2013), Religious Discourse in Modern Japan: Religion, State, and Shinto(2013), 『종교와 식민지 근대』(공저, 2013) 등이 있다.

심희찬 옮김

계명대학교 일본학과를 졸업한 후,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현재 리쓰메이칸대학 전문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한일 근대사상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의 사상을 중심으로 현재적 보편성의 가치와 윤리적 연대를 구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공저로 『종교와 식민지 근대』(2013)가, 주요 논문으로 「근대역사학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거리: 이마니시 류가 구축한 조선의 역사상」(2013) 등이 있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6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