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을 가리키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58

위선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9월 15일 | ISBN 9788932026596

사양 변형판 128x205 · 202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끊임없이 편류로 흐르며
농축된 이탈의 서정, 치열함의 역사

우주적 인식과 존재론적 사유를 시로 빚어내며 뜨겁고 밀도 높은 서정의 세계를 구축해온 위선환의 여섯번째 시집 『수평을 가리키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1960년 서정주, 박두진이 선(選)한 용아문학상[시 「떠나가는 배」로 잘 알려진 용아 박용철(1904~1938)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나 1969년 말에 시를 끊었다. 그간 위선환은 과거의 시작 활동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1999년부터 시를 써 2001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자신을 소개해왔으나, 이번 시집에서 1960년대에 발표한 열세 편의 시를 처음으로 모아 수록했다. 등단 직후인 청년기에 시인은 문단과 가깝게 지내지 못했는데,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번 시집의 해설에서 당시 시단의 문화와 지형을 설명하여 그 맥락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1960년대의 그의 시들은 당시의 한국 시를 지배하고 있던 서정주·유치환, 그리고 청록파의 자연에 근거하는 인생파적 표현이나 그 경향의 반대편에 있던 김수영·신동엽의 사회비판적 진술의 어디와도 친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외부의 지시체를 거부하고 순수 내면의 형상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가장 친근하다고 할 수 있으나 김춘수의 시가 감정을 은폐하는 객관화를 지향하는 데 비해 위선환의 시는 사유의 형상을 주관성의 운동 그 자체로서 드러내려 하고 있다. (정과리 해설, 「세상의 풍요에 저항하는 이의 가난의 먼 행로」)

위선환은 “시가 나를 옭아 죄어서 시를 생각하면 턱턱 숨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러 시 쓰기를 그만두고 30년간 공직 생활을 했다. 하지만 “몇 해째 (시에 대한) 공복”으로 “허기와 쓰림과 욕지기”를 가슴에 담고 있다가 결국 시단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존재의 흔들림으로 불타는 유별한 서정

1960년대뿐만 아니라 돌아온 오늘날의 서정시 지형에서도 위선환의 위치는 무척이나 특별하다. 기존의 서정시들이 보여준 ‘진리를 향한 황홀’이나 ‘낭만’ 등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위선환 시도 분명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려는 서정적 지향을 드러내지만, 이를 위한 집념 혹은 고통, 더 나아가 이러한 합일 불가능성이 가진 빡빡한 면모에 더 집중한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수원대학교 국문과 교수)도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위선환의 시는 전통적 서정시를 고전적으로 견지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떤 형이상학적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킨다. 위선환이 주시하는 자연 너머의 공간은 도달 불가능한 무한의 세계이며, 그것에 대한 좌절은 그의 시에 적막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시 말해 허무와 적막의 공간은 시인이 엿본 우주의 비밀인 무한의 높이를 음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008년 현대시작품상 심사평)

그리고 이번 시집이야말로 위선환 서정의 가장 무겁고 밀도 높은 정수를 담아낸 책이라 할 만하다. 그간 시인은 “뚜렷한 변화보다는 꾸준히 천착하며 조금씩 깊어지는 방법”으로 작품 세계를 심화해왔다. 이러한 방식은 악절을 매번 변주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이탈로서의 길을 선택하는 시인의 과감한 태도로 가능했다. 그 선율을 탄 이탈의 행로가 이번 여섯번째 시집에 이르러 가치의 본질을 상실한 소비사회 앞에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존재가 어떻게 새 삶을 향한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누가 내 동공에다 정을 대고 쪼아서/오래전에 먼 눈빛을 캐내”듯(「예감」), “거죽과 속살을 벗고” “골격으로 서서” “이 심한 바람 속에 갇혀, 내가/아직 있다는 것”을 실감하듯(「산책」) 눈멀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새로운 생의 가능성이 주입된다. 이렇듯 위선환의 시 쓰기는 조용하고도 강력한 저항이며 동시에 생동(生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직을 가리키다_풍요의 세계 앞에 드러낸 앙상함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위선환의 시는 일종의 ‘수직성’을 공유하고 있다. “뼈”나 “주검” 등의 소재로 헐벗고 가난한 존재들이 빽빽이 서 있는 듯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위선환의 수직성은 그의 비극적인 세계관에 의해 지탱되며, 비루한 생의 면면을 드러낸다.

無垢한 모든 것은 따뜻하고
나의 손끝에 닿는
하늘은
찬가
-「雅歌 1」 부분 (1963년 발표작)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내리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것 또한

폭설인 것을
-「폭설」 부분

정과리는 위선환의 초기 시에 내장된 적빈성이 ‘가난한 시 쓰기’에서 비롯됐다면, 이후의 적빈성은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주체의 독립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대 시의 수직성은 시적 주체의 비상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가 지상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주체에게 쬐이는 빛처럼 드러났지만 근자의 시들에서는 수직성이 상처와 운동, 완성과 폭발로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로도 궁극의 수직적 비상에는 실패하지만, 부족한 자원이나마 최대한도로 짜내고 압축하여 (성공 가능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떤 변화를 이끄는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시적 작업을 수행하여 비상의 의지와 행동을 점화한다는 점이 위선환 시가 가진 근원적인 에너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을 가리키다_역설적 동시성의 균열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가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폭설」 부분

이번 시집에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수평’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이 ‘수평’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삽입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 위선환 시에서 존재했던 수직성에서 미묘한 시간적 차이를 포착해 드러난 것이다. 수평성은 앞서 인용된 「폭설」에서 보여주는 상승과 하강의 동시성은 새 떼(상승)와 물고기(하강)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도 볼 수 있다. 시선이 새 떼에서 물고기로 이동하면서 추락하는 동시에 상승하는 느낌의 관성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자의 형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폭설」의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는 시적 상황 속에 있지만 시 속에 묘사되는 인물 ‘그’와는 분리된다. 이로써 시인은 몰입과 객관화 사이의 진동 또한 동시 불가능성의 진동을 독자에게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상승-하강, 몰입-객관화 사이의 동시 불가능성에서 발생하는 떨림이 바로 이번 시집에서 위선환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수평’인 것이다.


■ 시집 속으로

백지에다 긋는 밑줄 위는, 허공이다. 송곳니에 악물린 틈새기, 허공이다. 꾹 감고 견디는 깜깜한 눈구멍 속으로 나비 한 마리 팔락거리며 날아가는, 허공이다. 혼자 걸으며 호주머니 속에서 그러쥔 빈 주먹, 허공이다. 오랫동안 간절하더니 한참 동안은 그윽하더니 잠깐 동안은 글썽하더니 눈물 자국만 남은, 허공이다. 씻어서 말린 이목구비에다 분가루 덧칠해서눌러놓은, 분 냄새나는 새하얀 낯바닥, 허공이다.
– 「허공」 전문
1

빈집에서 머문다.
저문 날
광에는
몇 섬이나 안개가 쌓였다.
길을 모른다.
여자를 기다리며, 오래 주고 싶던
내밀한 것들을
줍는다. 밤에는 오직 별이
모일 것이다.
별을 위하여 묘지는
모든 봉분을 열고
죽은 이들의 두개골에
낱낱이 불을
밝힐 것이다.
2

여자 몸에 든
죽은 아이의 이름을 잊었다.
내 속에서
더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
모든 潛在한 것들은
神이다.
손톱과 발톱을 밀고
거처의 빗장을 걸어두었으나
한밤은
내가 내장한 것들을 일깨워
목숨을 줄 것이다.
나는 많은 아이들을 여자 몸에 두었다.
3

모든 이웃에 두고 온 童貞을
염려한다. 內宿한
아이의 혼례를 위하여
내 남은 한 개 갈비뼈를 닦는다.
자정에
어둠 속에서 여자의 흰 몸이
나를
통과한다.
시간을 잊은 여자가, 벗은
속살을 들고
문밖에
섰다.

✽ 1968.

– 「孕胎期」 전문


■ 시집 해설

최초의 시적 형태를 간직한 채로 끊임없이 그 의미 구성을 바꾸어온 위선환 시의 시적 과정을 무어라 이름 붙일 것인가? 여정이란 이름은 너무 한가한 것이다. 한계 돌파로서의 거듭된 변신의 과정이었으니, 저항적이었다,라고 말하는 게 나으리라. 그 저항은 한편으론 같은 악절이 매번 변주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긴 노래 같았고, 다른 한편으론 계속 달라지는 길이었기 때문에 길의 끊임없는 이탈로서의 길, 즉 편류 같기도 했다. 그 선율을 탄 이탈의 행로를 통해서 위선환의 시는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존재가 어떻게 새 삶을 향한 항구적인 운동을 가동할 수 있는가를 선연히 보여주었다._문학평론가 정과리


■ 시인의 말

1960년대에 쓴 시 13편이 남아 있었다. 싣는다.
시를 끊은 30년을, 나를, 용서한다.
첫 시집에 썼었다.
“시를 시작하고 끊었던 한 시기의 아픔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라고.
불편하다. 남은 시간은 고작 짧은데, 나는 아직 試圖한다.

2014년 가을
위선환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허공은 날카롭다/아침에/수평을 가리키다/폭설/月尖/낡음에 대하여/더디다/예감/海神祭/天・地・玄・黃 간에/허공/울음소리/直面/구멍/돌팔매/바람그늘/깊이/화석/모퉁이/떪

제2부
안개/바다의 기울기/등피를 닦다/어둠의 순서/정오/바람의 기억/갈밭/한 해가 지나다 1/한 가 지나다 2/誌銘/달빛을 건너다/포옹/結尾/한로/正色/바람의 제의/계절풍/불면/저무는 동안

제3부
발자국/폐역에서/틈새로 언뜻/폐광촌/11월/달을 먹다/가슴을 때리다/겨울광장/無等/충장로/2001년 광주/그, 해에/시민, 들/2013년 서울

제4부
빈 소리

제5부 1960년대에 쓴 시편들
雅歌 1/雅歌 2/短想/病後/노을 소묘/빛의 肉體造形/孕胎期/선율/산책/작별/균열/새의 滅入/聖. 汭陽邑에서 시 끊기

해설 | 세상의 풍요에 저항하는 이의 가난의 먼 행로・정과리

작가 소개

위선환 지음

시인 위선환은 1941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60년 서정주, 박두진이 선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197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었고, 1999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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