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결

문학과지성 시인선 457

이태수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9월 3일 | ISBN 9788932026572

사양 변형판 128x205 · 149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시,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세상과 자연 사이에서 기웃거리며
인간과 신 사이를 끌어당기다

시력 40년, 열번째 인연, 열두번째 시집
올해로 시력(詩歷) 40년을 맞이한 시인 이태수의 열두번째 시집 『침묵의 결』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표류하는 자아와 방황하는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던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에서 ‘침묵’으로써 언어조차 초월한 본질에 다가가려 애쓴 『침묵의 푸른 이랑』(2012) 이후 지금까지 이태수의 시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한 시기를 차분히 갈무리하고 있다. 67편의 시들에서 신(神)과 자연 앞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어 세속을 뛰어넘는 시인 특유의 ‘넓고 다채로운 침묵의 의미역’(김상환)은 더욱 확장된 듯 보인다. 동시에 “새로운 길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아예 침묵 속으로 들어가든지”(시인의 말), 부단히 고민하며 변화를 모색하려는 의도적 방황 역시 드러나 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이 시집의 해설을 쓰며 계간 『문학과지성』 편집동인 시절 청년 시인 이태수에게 첫 청탁 편지를 손수 써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후로 수십 년, 문학과지성사와의 열번째 인연인 『침묵의 결』은, 시력 40년이라는 특별한 기점을 맞이하여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도모하려는 시인에게는 물론 그의 행보를 지켜봐온 모든 독자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 오는 9월 22일(19시 30분), 대구 수성아트피아 무학홀에서 등단 40년 및 제12시집 출판 기념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문의: 대구수성문화원053-794-1334.

시력 40년의 중진시인 이태수는 『침묵의 결』에서 신과 자연, 자연이 함축하는 언어,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불러놓는다. 시인의 소망은 ‘신성한 말’이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침묵만이 그 말을 감싸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태수에게 침묵은 말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말을 껴안고 있는 언어다. 그 언어는 성스러운 기도와 같다. 인간의 언어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성을 환기시키는 이태수의 시는 자연, 신성, 침묵이라는 명제 둘레를 맴돈다._김주연(문학평론가)


 

말을 놓아버린 시인, 침묵의 벽 앞에 서다

내 말은 온 길로 되돌아간다
신성한 말은 한결같이
먼 데서 희미하게 빛을 뿌린다
나는 그 말들을 더듬어
오늘도 안간힘으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 언저리까지도 이르지 못할 뿐
오로지 침묵이 그 말들을
깊이깊이 감싸 안고 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가 닿고 싶은 곳은
그 말들이 눈 뜨는 그 한가운데,
그런 말들과 함께 눈 떠보는 게
한결같은 꿈이다
내 시는 되돌아간 데서 다시
되돌아오는 말을 향한 꿈꾸기다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초월에의 꿈꾸기다

—「시법(詩法)—서시」 전문

이태수는 늘 ‘신성한 말’을 찾기를 갈망해왔다. 그럼에도 인간의 언어로는 신성한 말에 가 닿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인식해왔다. 안간힘을 쓰며 애써도 어딘가 숨겨진 길이 있는 것처럼, 손에 쥐지 못한 말, 잃어버린 말들은 닿을 듯 말 듯하다 제 길로 곧 돌아가고야 말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조심스레 입을 떼는 시인의 말이 단지 겸양이 아닌 것은, 번번이 손끝을 비껴 흘러나가던 ‘신성’이 언제까지나 그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좌절은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그 문은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신성한 말은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 그러나 신성한 말과 사람의 말 사이, 경계이자 접점인 벽 앞에서 이태수는 좌절하지도 개탄하지도 않는다. 영영 둘레를 맴돌지라도, 가장 근접한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침묵의 벽」). 자연의 언어 속에 신의 언어가 깃든다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발견이다.

 

새들은 마치 이 신성한 광경을
나직한 소리로 예찬이라도 하듯이
벚나무 사이를 날며 노래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내 온 길로 하나같이
다시 되돌아가버리고 말
저 침묵의 눈부신 보푸라기들

―「벚꽃」 부분


침묵을 잉태한 자연, 진정한 말이 눈뜨는 세계
이태수의 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자연은 소리로 그 존재를 증명한다. 들리지 않는 리듬에 맞추어 온갖 생명이 움튼다. 이태수는 꽃, 나무, 눈, 햇살 같은 일상 속 소박한 자연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는 “정적(靜寂)을 밀며” “이른 봄, 성급하게 부푼/개나리나 산수유 꽃망울들”의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들이 들린다. “안으로만 소리지르듯/하늘로 팔을 뻗”는 꽃잎들 곁을 맴돌고 “정적에 갈무리한 잎들을 일제히 밀어 올”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에게도 조심스레 다가간다(「봄, 봄」「봄맞이」「새봄은 어김없이」). “깊은 밤, 이름 모를 새들이/창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야상곡夜想曲」)귀고, “갑자기 나타난 까치 한 쌍”은 “정적을 난타한다”(「새벽길」). “멧새들이 가세해 고요를 흔든다”(「연잎의 물방울」). 귀에 들리든 들리지 않든, 자연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다. 아침 햇살이 “모데라토로 내리”고, 한밤 새들의 노래가 한나절 인간이 제조한 도시의 소음을, 그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며 신성한 침묵과의 운율을 빚어내는 것에 세심히 귀 기울이면서 이태수는 자연의 언어의 근원에 접근한다. “소리 없이 동이 트고, 아침이 온다”(「빈손」).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에 사람의 말은 필요치 않다. 이태수에게 침묵은 “말의 맞은편”에 있는 게 아니라 “말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말과 침묵 사이에 시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신, 혹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시가 있다는 의미”(김주연)일 테니 말이다.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랫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눈[雪]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침묵은 말이 그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침묵은 말이 그치기 때문에 시작되는 건 아니다. 그때야 비로소 분명해지므로 오늘날 은폐돼 있는 침묵의 세계는 말을 위해서라도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진정한 말이 눈뜨는 미지의 세계를 품고 있는 침묵은 그 속에 끌어안고 있는 사물들에 신성한 힘을 부여하며, 그 존재성이 침묵 속에서 강화되게 마련이다. 침묵은 늘 제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말은 침묵 없이 홀로 있을 수 없고, 그 배경 없이 깊이를 가질 수도 없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 쓰기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는 몸짓이 아닐는지……


 

시인의 말
열두번째 시집을 묶는다.
등단 40년― 되돌아보면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길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아예 침묵 속으로 들어가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난 2013년 한 해,
가을까지 쓴 작품들을 정리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달라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방황해왔다.
이젠 또 다른 새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2014년 가을
이태수

목차

I
시법(詩法)
눈[雪]
침묵의 벽
벚꽃
오래된 귀목나무

어떤 거처
아침 꿈길
서녘 하늘
신성한 숲
아기와 노인
말 없는 말들
겸구(箝口)
소음교향곡
별밤
갈 수 없는 길
침묵 저 너머

II
멧새 한 마리
새봄은 어김없이
봄맞이
봄, 봄
봄날 한때
계수나무
산딸나무
빈손
야상곡(夜想曲)
정적(靜寂)
알레그로
나는 왜 예까지 와서
바닷가 한때
새벽길
가을 달밤
한겨울 밤

III
쨍한 푸른빛
연잎의 물방울
아침 숲길
삼복염천
하강과 상승
분수(噴水)
미망(迷妄)
은목서(銀木犀)에 홀리다
한발(旱魃) 1
한발(旱魃) 2
한발(旱魃) 3
신발
그의 깃발
느릿느릿
어떤 연민

IV
강 건너 불빛
안개길
오래된 골목길
까마득한 기억이
다시 술타령
아우 가족
너 보고 싶어
입암리 처가 고택
무늬 화백(華白)
가을 아침에
오십소백(五十笑百)
어떤 연인들
설중매(雪中梅)
우리 풀리비에
어느 새벽
참꽃 천지
후주곡(後奏曲)
평화를 위하여
자연은 언제나
해설 | 예술과 자연, 하나 되다・김주연

작가 소개

이태수

시인 이태수(李太洙)는 194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 『우울한 비상(飛翔)의 꿈』(1982), 『물 속의 푸른 방』(1986),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꿈속의 사닥다리』(1993), 『그의 집은 둥글다』(1995), 『안동 시편』(1997), 『내 마음의 풍란』(1999),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회화나무 그늘』(2008), 『침묵의 푸른 이랑』(2012), 육필시집 『유등 연지』  등을 상자했다.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으며, 대구시문화상(1986, 문학), 동서문학상(1996),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천상병시문학상(2005), 대구예술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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