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문학과지성 시인선 444

이준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2월 26일 | ISBN 9788932026077

사양 변형판 130x205 · 108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시어를 감싼 여백들의 매혹적 현기증
슬픔을 돌파하며 시작되는 아주 긴 배회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
한국 시단의 독자적인 징후이며 예외적인 프로파간다로 회자되는 시인 이준규의 네번째 시집 『네모』(문학과지성 시인선 444)가 출간되었다. 시적인 구성을 도모하지 않고 짧은 줄글로 작성된 72편의 산문시들은, 내용도 형식도 없는 기표들을 제시함으로써 적막한 외관을 구축하고 있다. 온갖 수사를 배제하고 극미한 진술만을 통해 멈추어 있는 이 정물성은 감각에 순수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시인의 기획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데 간섭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차단하고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감정의 요동은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준규의 시어들은 완벽히 고립되어 있다. 동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수명은 이러한 이준규의 시를 가리켜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라고 했다.

이준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텍스트가 파괴되는 감각, 그것일 것이다. 시의 자리가 불가능해지는 감각이며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이다. 차라리 무차별적인 방사의 감각이다. [……]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 내용도 형식도 없이 움직이는 프로파간다 말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서 깊고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무력감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_해설, 「호모 트리스티스」에서


 

여백과 여백 사이에 놓인 시어들, 멈출 수 없는 유희
이준규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든 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제시와 불친절한 단절의 외연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피하고 부사와 형용사를 절제한 결과, 시어에 감정의 물기가 스밀 틈이 없고 단어와 문장 들 사이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동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있다” “있었다”와 같은 단순 진술만으로 포착된 이준규의 세계에는 아찔한 여백들이 시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 여백은 단순히 빈 자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시어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준규의 시는 시어와 시어 사이에 여백이 놓이는 게 아니라 여백과 여백 사이에 가끔 시어가 놓인다.

공터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끝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 옆에는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그곳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도로가 있고 도로 위에는 육교가 있었다. 공터의 다른 끝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트램펄린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트램펄린」 전문

이 시는 화자의 시선이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 공터를 시작으로 공터 주변의 대상들을 훑은 뒤 다시 공터 한가운데 놓인 트램펄린에 가 닿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화자의 위치를 허공에 두고 사물을 조망한다는 습관적인 독법은 이 시를 맛보는 데 별 소용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을 읽어낼 때 비로소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는 화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공터 가운데서 높이 솟구치길 반복하며 공터의 끝, 교회의 너머, 테니스장의 근처에 있는 밭과 비닐하우스까지 눈에 담는다. 대상들은 화자가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사이사이에, 즉 여백과 여백의 틈에서 잠깐씩 드러난다. 시의 후반부에서 공터의 다른 끝, 화자의 시선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를 의식하는데, 그 아파트는 화자가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집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화자는 이 즐거운 유희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아주 기나긴 배회의 시작
현실의 유희는 제한적이다. 트램펄린 위에서 아무리 솟구쳐봐야 발이 닿는 곳은 다시 트램펄린인 것이다. 감정의 역동성은 좌절을 동반하고 시인은 그런 현실이 슬프다. 『네모』는 이 고통스런 감정이 머무는 자리다. 트램펄린으로는 닿지 못할, 이상을 향한 불가능한 시도들은 시를 영글게 했고 그렇게 태어난 시들이 『네모』를 형성하고 있다. 수록된 작품 중 「겨울」은 슬픔에 관한 비교적 뚜렷한 이미지로 눈길을 끈다.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지. 그녀가 말했다. 해가 지고 있으니 뭘 할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술 마실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울지 마.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울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술 사 올까. 그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는 술을 사러 나간다. 해 지는 겨울. 그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에 그녀는 죽지 않겠지. 그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다. 그는 가게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졌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_「겨울」 전문

「겨울」의 두 인물은 지금 무언가 슬픈 일을 겪은 직후인데, 울어도 그 슬픔은 덜어지지 않는다. 고립되고 건드릴 수 없고 완성된 슬픔, 사각의 완고함처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다. 울고 있는 ‘그녀’를 위해 ‘그’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는 이 슬픔을 돌파하고자 “계속 걸”어간다. 그러나 ‘그’가 도달하는 곳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막 아주 기나긴 배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 시인의 말
슬픔만을 남기고 싶었다.


■ 시인의 산문
너는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너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불을 켜고 나는 불을 끈다.

목차

시인의 말

문장 / 트램펄린 / 네모 / 거리 / 빛 / 한 칸 / 얼굴 / 부엌 / 황조롱이 / 고양이 / 아버지 / 금붕어 / 멍 / 등대 / 꽃마리 / 고구마 / 봄 / 당나귀 / 낙수 / 골목 / 해 / 창가 / 잔 / 지렁이 / 울새 / 우기 / 엘리베이터 / 언덕 / 스프링클러 / 앰뷸런스 / 앞 / 사철나무 / 고개 / 잔반 / 밥솥 / 매미 / 담배 / 잔 / 마루 / 침대 / 헬리콥터 / 구두 / 달개비꽃 / 가을 / 양말 / 볼펜 / 커피 / 물푸레나무 / 얼굴 / 어스름 / 쇼핑카트 / 햇빛 / 눈 / 방파제 / 미역국 / 얼굴 / 눈 / 눈 / 꽃담 / 돌 / 고양이 / 겨울 / 이 / 나각 / 얼굴 / 바다 / 의자 / 마트료시카 / 겨울 / 눈 / 봄 / 여보

해설 | 호모 트리스티스・이수명

작가 소개

이준규 지음

1970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자폐」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이 있다. 제12회 박인환문학상(2011)을 수상하였으며 루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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