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밀교(무선)

이청준 전집 18

이청준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3년 11월 15일 | ISBN 9788932020983

사양 · 449쪽 | 가격 11,000원

책소개

근원에 이르는 구도자의 자세로
스스로 이야기의 길을 개방하고 모험하는 열린 담화로서의 문학

이청준 전집 18권 『비화밀교』는 1980년대 초중반에 발표된 「비화밀교」 「시간의 문」 「여름의 추상」을 포함한 주요 중단편 6편을 묶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이청준은 죽음을 둘러싼 여정과 정치과 역사, 종교를 아우르는 ‘근본’에 대한 지향 속에서 그 토대를 얻고, 판소리의 율격이나 미학적 파격으로서의 ‘소리’를 통해 열린 담화로 나아간다. 이는 밀교(密敎)적 방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가시적인 현실 질서와 이성적 탐색 너머의 정신세계를 통찰하려는 이청준 문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억압적인 현실과 개인의 진실, 문학과 사회의 이항대립을 뛰어넘는 시도 속에 고향-근본으로 회귀하는 자아는 물론이고 자기 안의 타자까지 재발견해가는 소설 속 인물들은 바로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해당할 것이다.


 

「시간의 문」(『문학사상』 1982년 1월)에는 이청준의 초기 작품부터 그려져 온 자아망실 상태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른바 자기 실종의 황홀한 욕망에 시달리는 인물들은 때로 견딜 수 없는 지경을 견디기 위한 목적으로 그가 처한 현실을 파괴하는 우화를 그리기도 한다. 사진작가 유종열(宗悅)은 근본의 열락을 꿈꾸는 인물로 언제 어느 때나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도구인 카메라를 통해 예술과 삶의 화합을 욕망한다. 그가 월남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죽음으로 벌거벗은 인간 군상과 목도하고 의식의 변화를 맞는다. 자아와 타자, 찍는 나와 찍히는 대상 사이의 거리 혹은 벽 앞에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유종열의 마지막 행보는 바다 위 난민들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과연 죽음이 삶의 한 양식으로서 효과적인 메타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삶에 대한 완벽한 자유의 메타포로서 문학적 구원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여름의 추상」(『한국문학』 1982년 4월)은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을 일기 형식을 빌려 쓴 자전적 소설로서, 이청준 문학의 큰 줄기인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귀향 연습이 찬찬히 그려져 있다.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파편적으로 나열된 단락들은 화자의 자아 분열의 한 표징이기도하다. 이 중편소설에는 이청준과 그의 가족이 평생을 짊어진 태생적 부끄러움이 일종의 원죄의식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자아망실 상태의 인물이 자아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상징적 행위로서의 거울 들여다보기, 도시와 시골 고향의 이질적 대립을 관계적 언어(표준어)와 자율과 존재의 언어(토속어, 방언)의 대립 쌍에 놓기, 인간을 육신의 죽음에 가둬두지 않고 그리워하기 등이 한데 펼쳐진다. 또 이청준의 ‘남도 사람’ 연작에서 작가 특유의 용서의 수사학이 ‘판소리의 율격’으로 완성된다면 이 「여름의 추상」에서 언급되는 흥취와 신명도 눈여겨봄 직하다[“흥취나 신명기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의 율동이다. 있어야 할 삶, 규범적인 삶뿐 아니라 있어온 삶, 버려지고 배척된 삶, 그런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율동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모든 꿈과 욕망과 슬픔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사랑의 율동이다.”(p.140~41)]. ‘죽음은 그것을 쫓아가는 삶을 지속케 하는 일종의 미끼이며, 이야기(문학)는 욕망과 충동 사이를 길항하며 미학적으로 심화된다’라는 이청준의 세계관/문학관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무엇보다도 내가 이 나그네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삶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피곤한 구도의 모험길에서도 그는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神殿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p.223)].
「젖은 속옷」은 1982년 발표작으로 1985년에 단행본 『비화밀교』(나남)에 처음으로 실렸다. 이 작품의 작가 노트에서 이청준은 ‘소설 쓰기란 마치 젖은 속옷 제 몸 말리기와 같다’고 말한다.
「노거목과의 대화」(『현대문학』 1984년 4월)는 수령이 3백 년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를 통해 듣는 생명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의 문제를 놓고 번뇌하는 화자 ‘나’는 4월의 봄볕 속에 가위눌림을 당하면서 침묵 속에 마치 생명의 문을 걸어 잠근 듯 조용히 누워 있는 ‘노거목’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우주의 질서, 신의 섭리, 유한자에게 속한 생멸의 자연법칙을 두루 화제로 삼고 있다. 작가의 목소리임에 분명한 ‘나’는 “문학이란 어떤 뜻에서는 신과의 등돌림에서 시작하여 인간 자신의 능력과 책임 안에서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감당해나가려는 인식과 실천의 방법”이라고 정의 내린다. 한편 의인화를 넘어 신격화된 ‘노거목’은 “인간에게 더 넓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주어지고, 그 상상력이 육신과 영혼, 죽음과 삶, 차세와 내세 따위로 이해되는 2원적 생사관과 차세의 우주관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그 우주 역시 너희 인간의 상상력 자체”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자서전적 글쓰기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스스로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의식은 궁극에는 “문학은 패배한 삶을 승리로 구현코자 하는 슬픈 사랑의 길”(p.175)이란 인식으로 이어진다.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1」(『세계의문학』 1984년 봄)은 「전짓불 앞의 방백」 「금지곡 시대」 「잃어버린 절」 「키 작은 자유인」과 함께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연작의 첫 작품이다. 게재 당시 부제로 ‘머릿그림’이 붙어 있다. 「여름의 추상」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이야기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채로 과거의 특정 사건과 연루된 기억을 소환한다. 작가 이청준에게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두려운 가위눌림의 그림은 무엇일까”(p.309)라는 질문은 각각 “영원히 인화될 수 없는 옛 음화의 기억” “인화하고 싶지 않은 음화 필름” 너무 선명해서 “지워버리고 싶은 양화” “무성(無聲) 시대의 필름과 이명 현상” 모두에 공통된 ‘가난’으로 답해지기도 한다. 이청준은 “가장 인색한 구원자의 모습(!)이야말로 우리들의 생명과 삶을 안간힘으로 발버둥 치게 만드는 가장 두렵고 안타까운 숙명적 가위눌림 속의 그림”(p.311)이라고 말하며, 완전하지 않은 반쪽의 삶-모습에 구속된 인간의 두려움과 무거운 답답증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숙명론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화밀교(秘火密敎)」(『문학사상』 1985년 2월)는 폭력적인 시대와 사회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소설로 감당해보고자 한 소설가로서의 어려움, 즉 시대고의 과제를 다룬 이청준의 대표작을 꼽을 때 「소문의 벽」 『당신들의 천국』 「시간의 문」 등과 나란히 위치한다.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온 소설가 정훈이 조 선생을 따라 그 자신의 ‘근본’을 확인하고자 오른 남도행으로 시작해서, 그믐날 제왕산에 오르는 행위로 끝난다. 이 제왕산 위의 밀교적 제의에서 독자들은 이청준 문학 전반에 걸친 중요한 지점들을 포착해낼 수 있다. 하나는, 공동체의 숨은 의지가 하나로 모인 상징적인 횃불 행렬이야말로 이청준 문학의 오랜 모티프이자 원형적 장면인 ‘전짓불 공포’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상징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 밀교적 제의가 “산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세속의 질서가 사라지고 그저 한 가지 이 산 위에서만의 간절한 소망으로 자신을 귀의시켜, 그 소망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데 뭉쳐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탄생시키고, 그것을 지켜가는 숨은 근거지”(p.344)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작가의 시선이다. “제단과 신전을 태우고 난 불길이 하늘과 산과 누리를 불태우며 먼 함성의 합창 소리”(p.398)로 맺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으로 완성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다시 만인의 삶으로 함께 완성시켜나가는 이야기의 과정”을 강조한 이청준의 문학세계에 가장 설득력 있는 장면으로 볼 만하다.


 

[작품 해설] 中
이청준은 「여름의 추상」에서 죽음을 둘러싼 여정, 그리고 「비화밀교」에서 밀교(密敎)의 제의적 장소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모두 타자를 향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이란 영영 불가능할 것이지만, 그 불가능한 여정을 문학적 상상력과 용서의 실천 속에서 수행해나갈 때, 이청준 소설은 불가능성을 매개한 채로 개인의 운명을 완성될 수 없는 과정에 노출시킨다. 그 쫓고 쫓기는 이중의 운명 속에서 존재론적 열림 속에 노출될 때, 「시간의 문」과 「비화밀교」는 흥미로운 두 가지 판본을 제시해주고 있다. 바로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같은 운명을 살아내기 위한 ‘횡단’과 ‘합창’이 그것이다.
우리가 신의 가면이나 거인의 동상(銅像)이 아닌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자 할 때, 결코 우리는 사랑과 책임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방식으로 오랜 시간 이청준 문학은 제 스스로의 울타리를 넘어 가고,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왔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가 다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문을 열고, 아직 씌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이들의 이야기가 되어갈 차례다.
_박인성(문학평론가)

목차

시간의 문 7
여름의 추상 87
젖은 속옷 231
노거목과의 대화 257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1 292
비화밀교(秘火密敎) 312

해설_공안(公案)의 소설 쓰기 / 박인성(문학평론가) 401
자료_텍스트의 변모와 상호관계 / 이윤옥 425

작가 소개

이청준 지음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이,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비화밀교』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꽃 지고 강물 흘러』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 있다. 한양대와 순천대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한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7월, 지병으로 타계하여 고향 장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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