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3년 10월 15일 | ISBN 9788932024554

사양 변형판 144x215 · 255쪽 | 가격 12,000원

분야 장편소설

책소개

“영원의 맨 처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어디에도 끝은 없다
죽음을 향(向)한, 죽음의 의식만이 있을 뿐

백가흠 장편소설 『향』이 출간되었다. 2001년 등단 이후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신중히 발표하면서 독자적인 개성을 선보여온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향』은 세번째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출간시 평론가 이광호가 지적한 대로 “모든 치열한 예술가들이 내용에 대한 깊은 탐구의 끝에서는 장르와 문법에 대한 날카로운 자의식이 탄생”하듯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작가가 그 변화의 중앙에 진입해 있음을 알게 한다. 숨겨진 끔찍한 사실들이 불쑥 솟아오르는 백가흠만의 직시가 분명한 가운데서도 그 대상은 ‘죽음’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이끄는 이미지의 조합으로 미적 효과를 극대화해내고 있다. 이러한 재현을 넘어선 소설적 응시는 필연적이고 정직한 문학적 변모가 보이는 백가흠 작가의 새로운 소설을 가져왔다. 백가흠의 독자들은 이제 신선한 충격과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向 ― 죽음 그리고 죽음의 죽음, 프로메테우스적 순환 고리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향』은 ‘죽음’을 소설 전체의 구성적 요인으로 가져간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죽어 있거나 죽어서도 죽음을 ‘반복’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항시 ‘죽음을 향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죽음과 환생 같은 차원을 뛰어넘는 이행이 아닌 단지 살아서도 죽어서도 죽음을 향해가는 지난한 여행(삶)의 연속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왜 이런 지독한 관념에 시달렸을까. 왜 리얼한 세상에 더 세밀한 접사렌즈로 밀착해 있던 작가가 망원렌즈를 들고 ‘죽음’이라는 인간 근원의 문제를 조망하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리얼한 세상에서 어느 순간 죽음의 극한, 생의 경계를 경험한 작가가 자신이 맞이한 아침에 지금이 생시인지 사후인지를 묻는 ‘보편’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죽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깨달을 수 없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문턱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해성과 케이를 비롯한 인물들은 여러 문턱을 넘으면서 죽음과 재생을 반복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치열’도 허무하게 되지만 죽음의 죽음, 그러니까 영원의 순환 고리에 걸려 ‘탄생’ 이후의 인간이 이 끝없는 삶에서 느끼게 되는 무력, 이 숭고는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뜨거운 삶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벌거벗은 삶”을 말하는 백가흠 본연의 모습에 맥을 잇는 지점이기도 하다.


 

香 ― 생의 흔적,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오직 하루의 시작이 있을 뿐’이라는 키냐르의 명제가 떠오르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저 아침에 깨어나 사랑을 하고 식사를 하고 여행을 떠나며 ‘하루’라는 세상의 질서에 순응해 다만, 살아간다. 그 가운데 이 소설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인물이 각자의 생과 업을 받치고 살아가면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물의 지형도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케이는 영국의 한 소도시에서 가족이 모두 불타 죽은 후 축구선수로 자라나지만 곧 부상과 관계 부적응 등으로 고향을 떠나온다. 그러던 중 줄리아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함께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를 견딘다. 한편 해성은 대학 입학 후 프락치로, 보좌관으로, 다시 국회의원으로 살아가다 비리를 저지르고 떠난 여행지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다 케이가 묵던 호텔의 직원인 으엉을 만나는데, 이 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양한 사연을 품고 숲으로 흘러”든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나가며 독자들은 사실 이들이 여행 중에 각자의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을 목도하게 되는데, 계속 의심을 갖고 소설을 따라가게 되는 이유는 이들이 죽은 이후에도 또 죽은 뒤에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도 자신들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숲으로 들어간 해성이 자신이 길을 잃고 사라진 시간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까 봐 날짜를 열심히 세는 장면은 무력한 인간을 더욱 애잔하게 느끼게 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이들은 마을에 안착한 사람이건 떠도는 사람이건 도시와 숲을 오가는 가운데 있고 다만 인연이 닿았던 누군가에게 향긋한 ‘재스민’ 향기로, 혹은 지독한 ‘암내’로 기억될 뿐이다. 폭력과 복수와 속죄의 신화소가 소설 곳곳에 얽혀 있고, 다양한 인물이 유영하듯 숲으로 흘러드는 이미지로 연결되는 복잡한 서사가 이 소설의 본 모습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끝내 숲으로 들어가야” 하듯, 우리도 이제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본문 중에서

호숫가 한쪽에서 작은 점 하나가 안개를 뚫고 나타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풍경에 압도되어, 케이는 흡사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멍하니 안개가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던 케이가 천천히 일어섰다. 안개가 서서히 물러나자 한 여자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땅을 보며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괜스레 케이의 가슴이 요동쳤다.
p. 15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참으로 품위 없는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씁쓸해졌다. 빼곡하게 늘어선 거대한 나무들 사이, 하찮은 미물이 길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햇빛은 하루의 마지막을 해성의 몸에 선사하고 있었다. 붉은 석양빛이 부드럽게 해성의 몸을 감쌌다.
p. 29

해성의 눈에 숲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숲에 들어오고 사흘이 지났으니, 셈이 맞다면 목요일이었다. 그는 날짜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만이라도 언제 어떻게 얼마나 없어졌다 돌아왔는지를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숲 속에 자기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한없는 외로움에 빠져들게 했다.
pp. 25~26

때론 운명처럼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왜 그런지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때가 되면 알 수 있게 되겠지요. 당신과 으엉이 그런 인연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말하지 못해도, 으엉은 들을 수 있으니까요.
해성이 루카스의 등 뒤에 숨은 으엉을 눈으로 좇았다. 작은 몸의 으엉은 그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나오지 않았다.
p. 95

……앨리스, 너 죽은 거야?
앨리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케이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무척 평온해 보여, 하마터면 어머니가 죽은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어머니 옆에 섰을 때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케이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머니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케이와 앨리스, 그리고 갓난아이의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고 있었다.
p. 165

루카스는 두 손을 모아 물을 떠 계속해서 두 딸의 머리에 부어주었다. 차가워진 물에서 따뜻한 온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루카스가 부은 냇물이 두 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에서 나가는 대로 떠나렴. 너희들이 숲 속에 또 다른 마을을 만들거라. 울타리를 치고 숲으로 들어오는 아이들과 사람들을 돌봐주렴. 모두 지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테니, 자식으로 삼고, 부모로 삼으렴.
……예, 아버지. 그렇게 할게요.
정혜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고, 으엉이 루카스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각자 사용하는 서로의 말을 배우고, 가르치려무나. 알았니? 정혜야.
p. 194

목차

케이
농라를 쓴 여인
레드 라이트
암흑의 방
블러드샷 아이
시간은 과거로만 흐른다
숲 속 마을
줄리아 아시알라
티크나무 숲
생명의 내
운명의 고리
심판
재회
현재라는 시간

해설_신성한 숲을 찾아서/권혁웅

작가 소개

백가흠 지음

197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명지대 문창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 『힌트는 도련님』, 장편소설 『나프탈렌』 『향』 『마담뺑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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