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원종국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3년 4월 26일 | ISBN 9788932023915

사양 양장 · 변형판 145x210 · 285쪽 | 가격 12,000원

수상/추천: 문학나눔사업 우수문학도서

책소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인간, 현실보다 살고 싶은 가상공간
차갑고 단단한 세계를 견디는 이들의 그래도, 다시 살아가는 일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원종국의 두번째 소설집 『그래도』(문학과지성사, 2013)가 출간되었다.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하게 변주해가며 탄탄한 이야기 위에 통통 튀는 상상력을 선보여온 원종국의 14년간의 시도와 실험이 고스란히 담겼다. SF적 상상력과 실험적 기법을 동원하여 생명 복제와 이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루며 지속적으로 발표된 <믹스언매치> 연작 3편을 비롯한 총 8편의 단편이 이 소설집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어딘가 한쪽씩 고장 나고 쪼그라든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그래도”의 가능성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한다. 멋진 해결이나 대단한 해소 없이도 자조와 좌절에 파묻히지 않는 ‘그래도’들의 이야기가 읽는 이들의 마음 한편에도 작게나마 간질간질한 봄을 피워올릴 것이다.
그래도,라는 작은 기대

앞선 이야기를 인정‧수용하면서도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귀결될 때 쓰이는 접속부사 “그래도”. 마치 이전 삶에 대한 부정성을 모조리 긍정으로 전환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의 클리셰처럼 사용되기도 하는 단어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등등 ‘그래도’가 범람하는 오늘 여기에서, 원종국의 ‘그래도’는 무엇일까?

“K는 오전에 삼 년 연속 보험여왕을 거머쥐었다는 여자와 자서전 대필 계약을 하고 온 차였다. [……] 그 돈이라면 친구들한테서 빌린 오래된 빚을 갚고 나서 반지하의 허름한 집이나마 전세방을 알아볼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 사실, 좀 알아보았어요. 등단하고 나서 활동이…… 미미했더군요. 문단에서 주목도 못 받았고, 아직 책도 못 묶었고. [……] 여왕이 실소유자라는 바, ‘그래도’는. 언제라도 술 생각나면 들러서 양껏 마시고 가요. 지배인한테 일러놓을 테니. K는 작위라도 받은 것처럼 우쭐해서 명함을 받들어 지갑 안쪽에 찔러 넣었었다. 그래도, 그래도라. 언제라도 마시고 싶은 술을 실컷 마실 수 있다는 희망.”(「서울, 2009년 봄」에서)

언제라도 진탕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궁색한 희망으로서의 술집 “그래도”처럼 팍팍한 오늘과 불안한 내일을 머리에 이고 웃픈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것은 현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작은 것들뿐이다. 세상의 풍파에 조금씩 마모되고 어긋난 이들이지만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작은 기대를 간직하며 꼼지락거림을 계속하는 것이 원종국의 그래도다. 어떤 조건에서도 지금과 같이 ‘심장이 뛰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염려가 돋보인다.
복제인간의 복제불가능성, 가상공간의 체험진실성_Mix-and-Match

여기 남자가 있다. 열두 살에 4개 국어를 말했고, 열세 살엔 서울대 교수도 못 푼 수학문제를 풀었으며,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깡패를 만나 비운의 죽음을 맞은 천재 이명주의 체세포 복제품, 제2의 이명주. 빨리 성장하여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보이길 무언중에 압박해온 부모에게서 형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 어린 시절부터 강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 그는 스스로 이명주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달리’라 불리길 요구한다.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깊은 동질감을 느끼는 그는 흰 벽에 달리의 작품을 끝없이 변주 모사하여 그려내길 반복한다. 명주에게도 달리에게도 이르지 못하는 자신으로부터의 방황,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인 달리.

여기 여자가 있다. 어린 시절 버림받아 레즈비언 커플에게 입양되어 성장한 유리. 대학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녀는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유전병을 앓고 있다. 순간적으로 무도병에 들리면 연구하던 개미 떼를 보고 전갈이라며 기겁을 하기도 하고, 종종 현실과 환상,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든다. 그녀는 아이폰eyephone이라는 기기로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로부터 제공받는 ‘행복동’이라는 가상공간에서 깊은 안착감과 희망을 느낀다. 가끔 서버로부터 연결이 끊기면 외부로도 내부로도 갈 수 없는 안개 속 세상에 머무르게 되는, 지극히 허구의 공간. 그곳에 그녀의 궁극의 삶과 행복이 닿아 있기에 무엇이 거짓인지를 가름하기가 어려워진다.

원종국의 첫번째 소설집 『용꿈』(문학과지성사, 2006)에 총 3편이 수록되었던 <믹스언매치> 연작은 이번 소설집에도 각각의 개성이 채색된 3가지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Mix-and-match: 어울리지 않는 것끼리의 짝 지움,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듯 달리와 유리는 아이러니한 삶의 지점들 속에서 어긋나고 빗대어진 것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촘촘하게 어우러진 연작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후에 암시되는 무언가를 느끼게 되면서도 구체적 결말을 찾기가 어렵다. 해피엔딩도, 좌절도, 자조도, 초현실주의도 아니다. 후행문이 부재한 ‘그래도’처럼. 천재 아들의 재림에 실패했지만 복제된 아들의 손을 맞잡는 어머니, 달리의 그림을 모사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 달리, 뿌연 안개 속에서 달리를 기다리는 유리. 그저 그래도 기다리고, 새로 시작된다. 그래도 뒤에는 무언가가 있다.
차고 단단한 삶 속에 달콤함이 숨어 있는 누가바 같은 생(生)들

첨단 과학기술이 극단에 이른 미래에서의 삶이든, IMF 이후 장기 불황이 계속되는 빈곤한 서울내기의 일상이든, 집을 나와 PC방을 전전하다 결국 당산철교 위에 오른 소녀의 어느 날…… 그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우리의 감각, 관계, 사랑은 그대로일까? 약하고 소소한 인물들이 부수고 나가기엔 너무나 견고하고 차가운 생이다. 그래도, 그 안에 숨은 달고 폭신폭신한 우유크림처럼 작디작은 기대들로 다시 일어나길 계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원히 실패로 회귀할지 모르는 희망이더라도,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어떤 작은 기대들을 응시하는 것이 원종국 소설의 큰 매력이다. 복제인간에게서 더욱 리얼한 인간을, 가상공간에서 진짜 삶을 발견하도록 하는 저자의 재기가 놀랍다. 소설 하나하나 서사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탄탄한 구성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인물 하나하나에게 쏟는 애정 어린 눈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각박하고 지친 삶을 응시하면서도 조금씩 웃음이 비어져 나오게 되곤 하는 소설집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갈고 닦은 이야기꾼 원종국의 소설집이 독자들을 향해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 본문 소개

있잖아, 실은…… 널 찾아오기 전에, 개마고원엘 갔었어. 유전자 치료받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문득…… 사는 게 지겨웠거든. 거기 가면, 자살 기계가 있다길래. 좀 비싸긴 해도, 아무것도 남김없이 세상을 뜰 수 있다더라구. 거긴 바람이 많이 부니까…… 캡슐을 하나 분양받은 뒤에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자살기계가 모든 걸 알아서 해준대. [……] 아! 개마고원까진 가지도 못했어. 함흥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자꾸 집에 두고 온 화분이 생각나더라구. 저거, 네가 준 은행나무 화분 말야. 내가 저 녀석한테 내 나이만큼 이파리가 달리면 아파트 앞 화단에 옮겨 심어주기로 약속을 했었거든. 저 녀석이 눈앞에 삼삼한 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져야 말이지. ……야, 웃지 마. 정말이라니까.(「나는 달리다」에서)

예쁜…… 예분…… 이 예분?
아파트 앞 화단 모퉁이를 돌다가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이름이 생각났다. 이예분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건 마치 예고도 없이 밤하늘을 그어대는 별똥별처럼 뇌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이예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혀끝으로 이름을 굴려보았다. 딸을 낳았다며 할아버지가 작명을 자꾸 미루자 외할아버지가 놀러오셨다가 단번에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했다. 이 예 분, 이 예 분, 이 예 분…… 지팡이를 땅에 짚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았다. 참 예쁜 이름이었다.(「이름이 사라졌다」에서)

영민은 물을 건너면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통화 대신 문자 메시지를 넣었다. 네잎 클로버를 두 개나 발견했어.*^^* 이번엔 왠지 잘될 것 같지 않니? 예쁘게 코팅해서 우리 하나씩 나눠 갖자^^! 희연의 답문자는 영민이 읍내를 세 바퀴나 돌아 마침내 불 켜진 약국을 발견했을 즈음 도착했다. 그런 걸로 잘될 것 같았으면 뭐….. 아니야, 그렇게 해. 영민 씨, 파이팅!! ^^v(「벌초」에서)

 

■■  작가의 말

‘그래도’는 ‘그러하여도’와 ‘그리하여도’가 줄어 생긴 말이란다. 긍정의 느낌과 부정의 느낌이 함께 드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둘 다 아니기도 하다. 앞말에 대한 여운이기도 하고, 반전이기도 하다. 소설과 닮았다. 개인의 삶 또는 사회 현상과도 닮았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적혔을 법한 말, 토정비결이나 정감록의 어느 구석에 가필되었을 법한 말, 어느 누군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내뱉을 것 같은 말…… 소설과 닮았다. 이런 식의 제목을 언젠가 붙여보고 싶었다. 그래도, 여러 번 망설이긴 했지만.

두번째 소설집을 묶는 데 육 년이 걸렸다. 첫 소설집 ‘작가의 말’ 끄트머리에 “이제 다른 이야기들을 새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설렘이 더 크다”고 적었는데, 두번째 소설집을 묶고 보니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편수도 같고, 구성도 비슷하다. 끝난 줄 알았던 ‘믹스언매치Mix-and-Match’ 연작이 세 편 더 늘었고, 「용꿈」 후속으로 「개꿈」이 따라붙었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따로 읽으셔도 좋겠지만, 이참에 첫 소설집 『용꿈』을 찾는 독자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더러 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송구한 일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믹스언매치’ 연작의 두 주인공, 달리와 유리가 그립다. 미래에 살게 될 캐릭터들이 과거에서 하마 그립다고 하면, 내가 지어낸 작위(作爲)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휘둘렸던 그들이 이제와 그립다고 하면, 가식일까 위선일까. 지금 근처에 살고 있다면 찾아가서 오랫동안 안아주고 싶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닐는지 모르겠지만. 『용꿈』 시절의 그들은 많이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시절엔 여하간 함께할 수 있어서 조금쯤 나았으려나…… 그래도, 아쉽고 안타까운, 어쩔 수 없는 생의 반복이겠지만. 다양한 가능성으로 형성될 온갖 형태의 가족을, 그들의 ‘어울리지 않는 짝 지음’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달리와 유리가 그립다.

이즈음 “문학은 자유다”라는 말을 종종 듣고, 자주 생각한다. 아무러하든 자유를 지향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어눌하고 어색할 테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누려보고 싶은 말이다.
어쭙잖은 소설들에 흔쾌히 해설을 맡아주신 우찬제 선생님과 늘 신세만 지게 되는 문지 식구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소설 쓰는 일로 더 즐거운 나날이길 빈다.

2013년 봄
원종국

목차

두 사람이 보이는 자화상

나는 달리다

다시, 살아가는 일

서울, 2009년 봄

개꿈

이름이 사라졌다

기억과 흔적

벌초(伐草)

 

해설 달리와 달리_우찬제

작가 소개

원종국 지음

원종국은 197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9년『진주신문』가을문예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용꿈』, 르포집『그날 그들은 그곳에서』(공저) 등이 있다. 현재 ‘작업’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원종국"의 다른 책들

관련 보도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1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