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 배수아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8월 8일 | ISBN 9788932022918

사양 양장 · · 223쪽 | 가격 11,000원

분야 외국소설

책소개

문명의 죽음…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허상이었다.
내가 헌신한 조국은 폐허였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의 백 년 동안을 끌어온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평화시대의 삶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1917년 취리히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에 레닌은 없었다!
1917년 레닌은 취리히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를 타지 않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스위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SSR)이 설립된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세번째 장편소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는 1차대전이 끝나지 않고 96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대체역사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SSR 뉴베른의 당지도원인 ‘나’는 어느 날 비밀 전보를 통해 스위스령 잘츠부르크의 혁명위원회로부터 브라친스키 대령이라는 사람을 체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브라친스키는 이미 도망쳤고 ‘나’는 그의 뒤를 추적한다. ‘나’는 스위스소비에트 최후의 보루인 알프스 요새를 찾아가 브라친스키를 만나지만 체포하지 못한다. ‘나’는 광기에 빠져 있는 브라친스키를 통해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이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충격적 진실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독일군의 맹렬한 폭격의 와중에 요새에서 빠져나와 배를 탄다.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와서 문명의 진보와 인간적 가치가 결합된 유토피아를 꿈꾸던 주인공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체와족이 된다. 사람들은 동아프리카에 건설된 근대적 스위스식 도시들을 떠나 사바나로 돌아간다. 도시는 황폐화되고, 도시를 설계한 스위스 건축가는 자살한다. 이렇게 오디세우스적인 귀향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지도원 동지는 항상 모든 걸 다 믿었나 봐요.”
크라흐트는 세계의 모든 패권국가들이 참여하는 100년 전쟁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그가 우선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 착란과 혼돈을 헤쳐 나가는 한 인간의 운명이다. 『나 여기 있으리』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SSR 뉴베른의 당지도원이 전쟁의 세계와 결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며, 그 귀향은 곧 어떤 기만과 착란에서의 깨어남, 즉 자기 각성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 속에서 SSR은 가장 이상적인 “정의로운” 국가로 묘사된다. 독일인이나 영국인들이 유대인이나 흑인에 대해 인종주의적 차별과 박해를 하는 데 비해, 스위스는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원주민들을 식민지적 착취에서 해방하고, 스위스인과 동등하게 대접함으로써 SSR의 이상과 가치를 전파한다. 스위스적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깊이 내면화한 주인공은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체포했어야 할 브라친스키를 통해 그가 깨달은 실상은 달랐다. 스위스소비에트가 보여준 물질적 진보와 아름다운 이상에 현혹돼 정체성을 포기하고 스위스인이 되어 진짜 스위스인보다도 더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소비에트에 헌신한 그는 실상 전쟁을 위해 동원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노예였던 것이다. 요새에서 이런 현실에 대한 각성을 한 주인공은 심각한 자기 회의에 빠진다.

그들은 정녕 내 형제들이었을까? [……] 언제나 그들을 최우선으로, 그리고 가장 나중에서야 백인들을 내보내던 순간, 그때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 아프리카 출신 장교인 나는 이 모든 참혹함에, 아무도 쳐다보는 이가 없을 때면, 그냥 귀를 닫아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내 민족을 위해서 눈물 흘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진정으로 그들이 내 형제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아, 눈꺼풀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그때가 도래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_141~142쪽

그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관념에 매몰되어 노예로 동원된 형제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나’는 누구인지를 고통스럽게 찾아가야만 한다.

 
크라흐트가 그리는 디스토피아? 현실!
기테 쵸흐는 크라흐트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율이나 관습적인 행태를 위반하는 사람, ‘옳은’ 것과 ‘그른’ 것, ‘진실’과 ‘거짓’이 존재하는 흑백논리의 세계에서 도망치는 장난기 섞인 악한”으로 표현한다. 크라흐트에게 있어 ‘하나의 정의’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가치’는 훌륭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그 ‘하나’가 지배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나 여기 있으리』에서 주인공 ‘나’는 전체주의화된 위선적인 스위스소비에트의 진실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의 반대편에 선 무정부주의의 현신이 된 요새의 무리에서도 데카당을 본다. 
대체역사기법을 써서 낯선 시간을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은 마치 암울한 미래상을 그려놓은 환상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을 보는 듯하다. 그렇지만 1차대전(1914년)으로부터 96년 동안 전쟁이 이어졌다는 사실에서 계산해보면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2010년이다. 어쩌면 크라흐트는 2010년(현재)의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노예는 아닌지 자문해보도록, 좀더 신중할 것을 동시에 좀더 자유롭기를 촉구하는 것은 아닐까?

■ 이 책에 바쳐진 찬사들
 최근 발표된 독일어 산문 중 가장 아름다운 글. _『쥐트도이체 차이퉁』
 단연 올해의 소설로 꼽을 만하다. _『디 차이트』  
 위대한 스위스 문학작품이 탄생했다! _『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눈부시게 아름다운 참혹한 소설! _『디 벨트』

 
■ 본문 속으로
전쟁은 이제 아흔여섯번째 해로 접어들었다. 여름의 원래 모습을 한 그런 여름이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언제였던가? 마지막 보름달이 있었던 때는? 그런 기억은 시간의 물살에 모두 씻겨 가버렸다. [……]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의 백 년 동안을 끌어온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평화시대의 삶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_15~16쪽

보복주의자. 반유대주의자. 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증오심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가? 저자는 차라리 독일에, 북쪽에 가서 사는 게 더 편할 것이다. 혹은 영국이나. 그를 교환하면 좋겠다. 아니면 잡아넣어버릴까. 아니지, 그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야. 당은 살인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SSR의 강점은 바로 다름 아닌 인간미가 아닌가. _25쪽

태어나서 한 번도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노파들이 자전거에 올라탄 채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쟁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_26쪽

“아프리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최초의 대륙. 우리의 모험. 우리의 후방. 따스한 온기, 초록빛 풀, 그리고 태양의 나라. 그곳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놀겠죠, 안 그런가요? 난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답니다. 스위스는 아프리카에 많은 빚을 지고 있죠.” [……] “당신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엄격하네요, 지도원 동지.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죠. 우리가 당신을 그렇게 키운 셈이니까요.” _44~45쪽

“지도원 동지는 항상 모든 걸 다 믿었나 봐요.”
“그렇습니다.”
“교육받으면서 배웠던 내용 모두 다를요.”
“그렇습니다.” _58쪽

그러나 한밤중 나를 엄습하는 악몽 속에서, 메뚜기 표본이 든 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가 산산이 깨어지는 장면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심장이 없는 내 왼쪽 가슴의 맨살 위로 차가운 청진기의 금속판이 와 닿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온몸이 떨린다. 구역질의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몸으로부터 다른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처럼, 몸속에서 뭔가 분열하면서 탈피하는 것처럼, 마치 인체 내부의 피부가 벗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_77~78쪽

새카맸던 아버지의 머리칼은 형들이 죽은 이후로 백발이 되었다. 형들은 밤중에 군사훈련을 하던 도중 동료부대원들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 그들은 보어인들이 머스터드 독가스를 풀어놓은 중립지역에 맨발로 들어섰다. 그들은 일반 사병이었다. 그들의 총은 단 한 번도 장전된 적이 없었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인력도 없었다. 나는 장교가 되어야만 했다. _93쪽

그리하여 동아프리카 전역에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을 때, 오두막마다 전깃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밤이면 해안 도시들의 불빛이 선박들의 길안내를 하게 되었을 때, 농작물을 실은 열차가 남쪽으로, 그리고 의약품을 실은 열차가 북으로 달리게 되었을 때, 마침내 예전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평등이란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제야 스위스인들은 아프리카인을 군인으로 교육시킬 군사 아카데미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진행 중인 정의로운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하여. _98쪽

“당신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제라고 부르는 그런 사실 말입니다. 당신은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세뇌를 받아왔으니까.
[……]
반혁명이니, 반공산주의니, 이단이니. 그런 건 전부 애들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당신은 스스로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지도원 동지, 당신은 사실 노예입니다. 알고 계시나요? 당신은 스위스의 노예라고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훈련받고 노예로 만들어진 거죠. 당신과 당신의 민족은 그냥 대포밥이예요. 로봇이라고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위조입니다.” _160~62쪽 

작가 소개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1966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뉴욕의 세라 로런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독일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90년대 중반 『슈피겔』의 인도 특파원으로 뉴델리에 갔다. 그 뒤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했으며, 그의 여행기는 독일 주간지 『벨트 암 존탁』에 게재되고 책으로도 출간됐다. 1995년 출간한 첫 소설 『파저란트』는 평단의 관심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독일 현대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게 되었다. 작가 에크하르트 니켈과 함께 잡지 『데어 프로인트』를 발행하고, 2006년에는 북한을 방문한 뒤 사진집 『총체적 기억―김정일의 북한』을 출간하는 등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설 『파저란트』 『1979』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는 14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2012년 신작 소설 『임페리움』은 출간 즉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배수아 옮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지은 책으로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 인형』 『홀』과 중편소설 『철수』,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나의 첫 번째 티셔츠』 『불안의 꽃』 등이 있다. 2003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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