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김진혜, 김태환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8월 8일 | ISBN 9788932022901

사양 양장 · · 255쪽 | 가격 12,000원

분야 외국소설

책소개

혼란과 가치관 붕괴의 시대 청춘의 자화상
자신을 찾아 떠나는 20세기의 오디세이아!

 

『파저란트Faserland』는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데뷔작이자, 독일 현대문학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알린 작품으로서, 출간된 지 수년 만에 현대 독일문학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정전의 반열에 오른다. 독일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내 독문학계에서 이 작품에 바쳐진 논문만 해도 6~7편에 이를 정도다. 그 작품이 이제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다. 출간된 지 시간이 좀 지났지만 이 소설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더 이상 어떤 현실적 위협도 느끼지 않게 된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공허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그 공허의 늪으로부터 과연 어떤 구원이 가능한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파더랜드Fatherland, 파저란트Faserland
이 소설에는 바버, 폴크스바겐, 브룩스 브라더스, 에어만 등 70여 개의 상표명이 등장한다. 크라흐트는 소설 내내 상표명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상표들로 범람하고 있으며, 상표가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환기하고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가 곧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크라흐트가 보여주고자 한 상표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제목에서 ‘파저란트’로 지칭되는 그 나라. ‘파저란트Faserland’는 크라흐트가 만들어낸 말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조국Fatherland』을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로 ‘조국’을 의미하는 Fatherland를 독일인이 부정확하게 발음할 때 Faserland가 되기 때문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은 나치가 2차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가정한 대체역사소설로서 1964년 히틀러의 75세 생일에서 시작한다.『파저란트』의 화자 ‘나’는 가는 곳마다 나치의 흔적을 발견하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나치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왜 크라흐트가 이 소설에 ‘파저란트’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파더랜드』의 독일이 여전히 나치즘 국가라면,『파저란트』의 독일은 표면적으로는 나치 시대를 뒤로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치의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포스트 나치즘 국가다.
크라흐트는 왜 지금 나치즘을 다시 논하는가? 크라흐트는 나치즘을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낸 지극히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괴물이라기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본질적인 면에 대한 반영으로 본다. 그에게 나치즘이란 모든 개인의 고유성을 지워버리고 상품들의 세계 속에 획일화시켜버리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에 대한 제유이며, 이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들을 배제하고 징벌하려 드는 인간들의 태도다. 요컨대 『파저란트』에서 나치라고 욕을 먹는 것은 전체의 규율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개인들이다.
 

나를 찾아, 안식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 소설은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며칠간의 여행의 기록이다. 주인공은 매우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내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1장은 쥘트 섬, 2장은 함부르크, 3장은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안, 4장은 프랑크푸르트, 5장은 하이델베르크, 6장은 뮌헨, 7장은 란다우, 8장은 취리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각 지역에서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히 여러 지인들을 만나고 또 그들로부터 달아나 다음 여행지로 향한다.
  하지만 이 여행이 왜 시작되었는지, 여행 이전에 그가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는 인간이었는지는 이 소설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떠나온 곳도, 또 정착할 곳도 불투명하며, 어떤 지향점도 갖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부유할 따름이다.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 속에서 제공되는 물질적 풍요 외에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삶의 고차적 목표나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정은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공허와 절망을 위무할 것은 오로지 화려한 상품세계, 파티, 팝음악, 알코올, 마약, 혼음뿐이다.
  이러한 아무 의도도 드러나지 않은 여행 중에 주인공은 문득 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자연에 정착해 사는 상상을 두 번이나 한다. 시작도 목표도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순간의 쾌락과 기분을 따라 움직이지만 ‘나’의 여행은 어떤 유토피아적 세계를 찾기 위한 여행은 아니었을까? 그는 과연 자신의 안식처를 찾는 데 성공할까?
 

■ 이 책에 바쳐진 찬사들
크라흐트는 시대에 근접한 자신의 이야기를 황량한 실존의 감정과 결합하는 예술가다.
                                          _『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존탁스차이퉁』
크라흐트는 비틀어진 세계에 대해 한탄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결산한다. _『슈피겔』
상표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정밀한 지각, 공허 속에서의 명료한 의식, 헤어나올 수 없는 집단적 진부함, 거기에 섬세한 구별의 감각 — 나는 이 모든 것이 아디에서도 그렇게 투명하게 묘사된 것을 본 일이 없다. _그레고르 폰 레초리(작가)
 

■ 본문 속으로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했기에 바다 구경을 앞두고 잔뜩 설레 있는데 나무 널빤지가 햇살을 받아 따뜻한 향기를 뿜어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친근한 냄새였고 뭔가 희망적이고, 글쎄, 따뜻했다고 할까. 지금 다시 그때 그 냄새가 난다. 나는 거의 울 것만 같아 얼른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 바버 재킷 소맷부리로 이마를 닦는다. _18쪽

만약 지금 누가 기차 화장실에 앉아 오줌을 눈다면 그 오줌이 기차 밑바닥으로부터 위로 튕겨 올라와 진행 방향으로 아주 미세하게 내 얼굴 위에 흩부려져서, 나는 얼굴 위에 얇은 오줌막이 생긴 것도 눈치채지 못할 테지. 그리고 혀로 입술을 핥는다면, 낯선 이의 오줌을 맛보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열 살 때였다. _30쪽

택시 운전사는 다행스럽게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둘이 동년배인데 나는 데이비스&선즈 재킷을 걸치고 자기는 임금 투쟁 시위에 간다는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_39쪽

택시운전사와 나이젤과 나는 담배를 피운다. 택시운전사가 우리에게 몇 대 건네준 거친 오버슈톨츠 담배를.[……] 그리고 이제 말하자면 하층민 간의 형제애 같은 것이 생겨난다. 우리가 평생 결코 오버슈톨츠 담배를 피우지 않으리라는 것을 택시 운전사가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_50~51쪽

경영협의회 대표 한 사람이 비난하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본다. [……] 내가 만약 외국인이고, 그가 월급의 반은 지불해야 살 수 있을 이런 재킷을 입고 있지 않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게 한마디 했을 것이다. [……] 나는 그를 노려보고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 입 닥쳐, 너 사민당 나치. _73~74쪽

나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금연석에 앉아 있는데도 말이다. [……] 그곳이 사실상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최후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금연석 말이다. 그렇게 하면 언제나 재수 없는 비흡연자들에게 제대로 ‘파시스트 같으니!’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들은 결국 금연석이니까 담배를 꺼달라고 요구해오기 때문이다. _80쪽  

그래도 사실 녹색당에 투표해야 한다거나,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극도로 멍청한 구호에 따라,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거나 뭐 그런 대화였다. 그러면 나는 항상 모든 주에 관장(灌腸) 병원을 하나씩 세워서 정치 상황에 대해 흥분하는 사람은 모두 행정명령에 따라 관장을 받게 해야 할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_103쪽

네카라우엔. 네카라우엔. 이 단어는 사람의 머릿속을 아주 유순하게 만든다. 독일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없엇다면,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학살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독일도 네카라우엔이라는 단어와 비슷했을 텐데. _120쪽

내 셔츠는 전부 브룩스 브라더스 제품이다. 그 어떤 셔츠 제조사도 이렇게 멋진 물건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브룩스 브라더스 셔츠와 랄프 로렌 셔츠 사이의 차이는 물론 랄프 로렌 셔츠가 훨씬 더 비싸고, 만들기도 훨씬 잘못 만들고, 모양도 사실 개떡 같으면서, 대개는 왼쪽 가슴에 거지 같은 폴로 마크를 달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_130쪽

나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말하겠다. 일정한 나이 이상의 독일인들은 모두 다 완벽한 나치처럼 보인다. _ 131쪽

엄청난 부자들이 히피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일이 왕왕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다른 것은 모두 보고 체험했고 뭐든지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어느 날 공포스러운 내면의 공허를 발견하는데,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는 돈 쓰는 생활을 벗어나 내면으로 침잠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_172쪽

폴렌린데 달리기는 정말 상당히 힘든 일이었고 [……] 그건 졸리모지 선생님이 슬라브족의 이름으로 우리 독일인에게 하는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내가 폴렌린데까지 뛰어갔다 돌아오는 것으로 나치 범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말이다. _202쪽

좋은 자동차를 몰아야 하고, 좋은 마약을 하고, 좋은 술을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들어야 하는 선민들 말이다. 한편 그들 주변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행위를 한다. 단지 아주 약간 살짝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선민들은 오직 그런 걸 약간 더 좋게, 약간 더 세게, 약간 더 세련되게 한다는 믿음에 의지해서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_217쪽

목차
작가 소개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1966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뉴욕의 세라 로런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독일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90년대 중반 『슈피겔』의 인도 특파원으로 뉴델리에 갔다. 그 뒤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했으며, 그의 여행기는 독일 주간지 『벨트 암 존탁』에 게재되고 책으로도 출간됐다. 1995년 출간한 첫 소설 『파저란트』는 평단의 관심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독일 현대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게 되었다. 작가 에크하르트 니켈과 함께 잡지 『데어 프로인트』를 발행하고, 2006년에는 북한을 방문한 뒤 사진집 『총체적 기억―김정일의 북한』을 출간하는 등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설 『파저란트』 『1979』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는 14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2012년 신작 소설 『임페리움』은 출간 즉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김진혜

연세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지겐 대학교 문화/매체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연세대와 경기대에 출강하고 있다. 주한독일문화원 문학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독일 작가들의 문학을 번역 소개했다.

김태환

1967년 소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푸른 장미를 찾아서』 『문학의 질서』 『미로의 구조』 등이, 옮긴 책으로 페터 V. 지마의 『모던/포스트모던』, 한병철의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 
『삶과 나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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