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박성원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8월 8일 | ISBN 9788932023236

사양 양장 · · 241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동의 없이 태어나 허락 없이 불시착한
‘우리’의 어느 하루

 

무한대의 그물, ‘인타라망’을 짜는 소설가
박성원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모든 일들이 긴밀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펼쳐 보이며 문단에 신선한 화두를 던진 소설가다. 그가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등 네 권의 소설집을 내며 꾸준히 자신만의 질문을 던지는 동안 문단은 그에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여하며 화답했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다섯번째 소설집 『하루』에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질감의 메시지를 담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하여 작가가 짜고 있는 그물 ‘인타라망’에 한 코를 보탰다. 박성원 소설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히는 수록작 사이의 교통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낯선 ‘하루’의 시작
박성원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가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때 연극배우였고 노래 잘하는 무명가수였으며 생물학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 업소의 파트타임 가수로, 대학 자퇴자로 살아가고 있다.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어느 순간부터 삶의 동력을 잃어왔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관성에 삶을 의지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살아지지 않는 때가 오고 만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살아진다는 것의 위험성
표제작 「하루」에서 여자는 오늘 중으로 계좌이체를 해야 하는데 인터넷뱅킹을 할 줄 모른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잘 살아졌다. 그런데 오늘 ‘하루’는 뭔가 다르다. 여자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아이를 차에 태워 은행으로 가야만 한다. 눈발이 흩날리고 도로는 정체되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은행에 도착하지만 은행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차에 두고 서둘러 은행 일을 보는 사이, 차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차 안에 있던 아이는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되는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견인기사 때문이야. 아니야, 진하게 코팅한 탓이야. 아니야, 은행 영업시간 탓이야. 아니야, 정체 탓이야. 아니야, 연극 탓이야. 아니야, 아버지 탓이야. 아니야, 모르겠어. (p. 33)

여자가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울부짖는 이유는, 아무리 되짚어봐도 비극의 결정적인 원인을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실제로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진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이 항상 가능성으로 존재해왔다는, 잔혹하고도 선뜩한 진실을 깨닫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주스러운 꼬리 물기
박성원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정된 틀 안에서 살고 있으며 우연이란 없다. 「하루」에서 여자의 차는 그냥 사라진 게 아니다. 여자의 남편은 후배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하고 후배 직원의 아들은 학원에 다녀오는 길에 견인 장면을 목격, 아무 의미 없이 견인 고지서를 떼어 읽어보다가 은행을 막 나선 여자와 부딪히는 바람에 그것을 길바닥에 흘리고 만다. 후배 직원은 아들에게 주려고 장난감 견인차를 사서 귀가하던 중 해직을 당한 허망함에 술을 한잔 마시고 폭설이 내리는 벤치 위에 몸을 뉘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동사한 채 발견된다. 이런 식의 하루를 반복해서 겪다 보면 세계의 본질을 짐작하게 될 터, 「볼링의 힘」 첫 문단은 그러한 인물의 체념 어린 발언으로 들린다.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게 진짜 세상이라기보다 누군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은 슬며시 구부러지고, 건물들은 마주 보거나 아니면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바깥은 여름이고, 나는 마흔이다. 알고 있다. 바보 같은 나이다. (p. 43)

그렇다면 이 저주스러운 꼬리 물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이수형은 이를 “그물코로 이루어진 그물 전체를 조망하려는 총체적인 기획”으로 정의하고 이 기획은 관념적으로나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짚어낸다. 세계의 폐쇄성을 인식하고 출구를 찾아나서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것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출구’에 대한 새로운 탐구
박성원은 마지막 수록작 「흔적」에서 ‘생물학’을 빌려 ‘부분’이 곧 ‘전체’의 본질일 수 있다고 말한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라”는 충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제안이지만 부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교수의 옛 제자 J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다. J는 생물학 시험 시간에 소설을 써내놓고는 분명히 생물학적인 답안이었다고 한다. J의 말은 안이 곧 밖이라는 말만큼 선문답스럽지만 일견 의미심장해 보인다. 독자는 여기서 그토록 찾던 출구가 밖이 아니라 안으로 나 있을지도 모르며 진실에 다가서기에는 과학보다 예술이 유리하다는 사유에 닿는다. 박성원의 소설이 전작들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축적―재생산해내고 있으며 그 주제가 시공을 초월하여 유효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는, 하나의 과녁을 향하는 이러한 질문이 매번 새로운 방향과 속도를 띠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여자는 기대고 있던 전봇대에서 떨어져 절뚝거리며 건물 외곽을 돌았다. 자신이 다른 곳에 주차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 거야. 침착하게 생각해봐. 여자는 건물을 돌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 도는 동안 여자는 모든 게 낯설었다.(「하루」, p. 24)

친구가 세운 공식대로 명문대와 대기업을 나온 친구의 아이도 나중에 김밥천국을 운영하게 되는 걸까? 어쨌든 그 친구는 한 달 전쯤에 김밥을 말다가 천국으로 갔다. 쥐어짜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볼링의 힘」 p. 48~49)

여자는 남편을 보며 시계 소리를 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돌처럼 서 있었다. 여자는 남편이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편의 귀에 대고 다시 말했다. 째깍, 째깍. 여자는 남편이 배를 잡고 웃을 거라 상상했지만 여자가 시계 소리를 낼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룩」 p. 79)

-그런데 왜 이혼을 했지요?
우산의 그늘에 가려 있어 주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글쎄요. 각자의 침대만큼 고독했기 때문이지요.(「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p. 108)

들리는가? 들리는가? 지금 허락 없이 불시착하겠다. 매우 불안정하다. 몸이 떨리고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대답은 없었다. 안테나가 부러졌거나 통신 장치가 고장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들에겐 처음부터 안테나나 통신 장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p. 148)

나는 사건 분석 자료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내는 01시 40분경에 왜 택시를 타고 있었는가. 그 야밤에 어린아이까지 두고. 사건 현장은 고향집에서부터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해안가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나를 만너러 오는 길일 수도 있었다. (「저녁의 아침」 p. 170)

그래 먼저 나에 대해 말해보자. 난…… 난 말이야. 별거 아냐. 우선 나는 이백여섯 개의 뼈와 사 킬로그램의 지방. 그리고 사오 킬로그램의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어. 내 키와 체중으로 계산하면 구십 리터의 물과 사 점 팔 리터의 피. 그리고 오백 그램의 소금과 이백 그램의 설탕이 내 몸 안에 들어 있지. 이게 나야. (「흔적」 p. 223)

목차

하루
볼링의 힘
얼룩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저녁의 아침
흔적

해설 고장 난 기계가 사랑을 꿈꾸는가_이수형

작가 소개

박성원 지음

1969년생. 1994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단편소설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과 『나를 훔쳐라』가 있다. 2003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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