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5월 4일 | ISBN 9788932023007

사양 · 124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 시집 소개

몰락의 한가운데에서 풀려 나오는 내밀한 서사
사라진 자만이 추앙되는 공화국의 주문(呪文)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와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쓸쓸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 허연. 그는 13년 후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통해 도시 화이트칼라의 자조와 우울을 내비치며 독한 자기규정과 세계 포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012년 5월 문학과지성 시인선 『내가 원하는 천사』로 다시 돌아온 허연은 삶의 허망하고 무기력한 면면을 담담히 응시하며, 완벽한 부정성의 세계를 증언함으로써 온전한 긍정의 가능성을 찾아 나간다. 우울한 도시의 아름답지 않은 천사를 그려내는 그의 거침없고 솔직한 말투가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공화국을 스치는 바람

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 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바람의 배경」 부분

허연의 시는 일상으로부터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비탄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을 유지한다. 마치 폐허를 스치는 바람처럼, 수백만 년에 걸쳐 별일 아닌 듯 있어왔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생의 ‘지독한 슬픔.’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밀어내버리고 세계와 동화되지 못한 개인은 더욱더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고립되는 세계. 이 난무하는 폭력을 관통하는 바람은 풍문처럼 허연의 시를 부유하며 세계의 왜곡을 증언하고 고발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주문

겁내지 말라고
내가 다 기록해놨다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남자는 외치지만
여자는 죽어간다
신전은 세워지고 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여자보다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가
진화상으론 하수다
-「신전에 날이 저문다」 부분

시인이 일상의 관찰과 그로 인한 속내를 진솔하게 펼쳐 보이는 이유는 어떤 삶을 반추하거나 기획하기보다는 잊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일이 하나의 삶을 값지게 이어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황량한 사막에서 2천 년 전 흘렀던 강줄기를 더듬듯,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하듯, 그의 시는 이미 없기 때문에 삶의 본질로 남을 수 있었던 것들을 찾아내고 불러온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나의 마다가스카르

나의 소혹성에서 그런 날들은 다른 날과 같았다.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소혹성의 부족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예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부족들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슬퍼진다. 어머니. 나의 슬픈 마다가스카르.
-「나의 마다가스카르 3」 부분

허연의 공화국은 이번 시집의 “마다가스카르” 연작에서 구체화된다. 아프리카 남동쪽의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수십 만 년 동안 대륙과 괴리되어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스러운 진화를 겪은 공간이다. 훼손되지 않은 날것의 세계이자 영원히 고립된 공간인 마다가스카르. “긍정이나 희망이 우리를 배신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개인의 고독한 삶을 표상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가 남긴 복제품들은 오늘도 이 장례 습관에 익숙해진다. 강력하고 조용한 저녁에 후회란 없다. 초원에서 죽음은 객관적이다. 세상이 몹시 좋았다고 짹짹대는 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
-「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 부분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일상을 기계적으로 무기력하게 반복하는 현대인의 삶을 비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듯 허연 시의 화자는 차라리 흠집이라도 새겨진, 세계와 불화하는 기억을 갈구한다. 이처럼 삶을 너무 오래 관찰한 이 화자들은 어느 시대에서든 개인의 생은 보편의 삶이 요구하는 규칙에 매끈하게 적응하기 불가능함을, 모든 생에는 부적응의 흠집이 새겨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풍문으로 실어 전한다. 조금은 서늘하지만 담담하고 조용한 이 바람이 도시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로 다가가기를 기대해본다.

시집 속으로

뭔가를 덮어놓은 두꺼운 비닐을 때리는 빗소리가 총소리처럼 뜨끔하다. 기억을 두들겨대는 소리에 홀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빗속에 들어가 나무처럼 서 있다.

언제나 어깨가 가장 먼저 젖는다. 남들보다 좁아서 박복한 어깨가 비를 맞는다. 금서의 첫 장을 열듯, 빗방울 하나하나를 본다. 투명 구슬처럼 반짝이며 떨어지는 물방울의 마지막 순간을 본다. 자결하면서 쏟아지는 유리구슬. 핏방울이 튀듯 투명 구슬이 튄다.

마당 하나 가득 깨어진 구슬로 가득하다. 나는 여전히 깨어진 구슬 한가운데 서 있다. 구슬이 나를 때린다. 뼈로 들어서는 통증. 나는 뼈아프게 서 있는 나무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 「자라지 않는 나무」 전문

남자는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신전 기둥에 모든 새들의 머리가 자신의 사랑을 경배하도록 새겨놓았다. 지혜롭다는 새들의 머리는 수천 년 동안 욕망을 마주했지만, 세월이 그것보다 먼저 욕망을 반박했다. 남자는 울부짖었지만 여자는 사하라의 먼지가 되어갔다. 파이터였던 남자는 더 많은 기둥을 세우다 미쳤고, 서풍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폐허의 불문율이 있다. 묻어버린 그 어떤 것도 파내지 말 것. 폐허 사이로 석양이 물처럼 흐를 때 속수무책으로 돌아올 것

오늘 밤 모래바람이 등고선을 바꾸고
사막여우 한 마리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콜라 병을 핥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진다.
마지막 무개화차가 지나간다.
-「마지막 무개화차」 전문

 

시집 소개글

서서히 죽어가면서 한생을 반증하는 몸뚱어리처럼, 허연의 시편들은 기꺼이 낱낱의 부고가 되어 이미 없는 시간과 존재들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되는지를 증언한다. 허연의 시는 선명한 이미지를 믿지 않고, 스스로 풍문에 실려 가는 이야기가 되기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비닐에 싸온 빛바랜 결혼사진처럼, 쓸쓸하고 허망해 보일지라도 희망을 예감케 하는 바람이 고여 있는 오래된 풍경처럼, 허연의 시는 천년의 이야기를 단숨에 들려주는 별똥별인 듯 사라지는 순간에도 눈부시다._문학평론가 김나영

뒤표지 글

내 시는 나만의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따라서
몇 명의 독자들이
내 공화국을 찾아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승리일 뿐
결코 문학 정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공화국에선
살아 있는 누구도
날 동화하지 못하며
날 감동시킬 수 없다
이것이 공화국의 질병이다
공화국에선
사라진 자들만이 추앙된다

이 부족 공동체에서
시를 적는 나는 제사장이자,
사라져버린 부족들의 과거를 불러오는
확신범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들에게
이 시집을 헌정한다

목차

시인의 말

 

마지막 무개화차/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삽화/나의 마다가스카르 1/P는 내일 태어나지 않는다/신전에 날이 저문다/몰락의 아름다움/후회에 대해 적다/늦은 부고 2/나의 마다가스카르 3/안달루시아의 무희/話者/여가수/미이라 2/늦은 부고/건기(乾期) 1/다큐멘터리를 보다 2/내가 원하는 천사/빙하의 연대기/빗살무늬토기에서 흐르는 눈물/증기, 혹은 죽음/어떤 방의 전설/자라지 않는 나무/낯선 막차/고양이와 별똥/열반의 놀이동산/바람의 배경/건기(乾期) 2/아나키스트/까마귀의 영역/역류성 식도염/신전 3/소립자 2/좌표 평면/전철은 하수다/군중/어떤 아름다움/사선의 빛/폐광/로맨틱 홀리데이/지독한 슬픔/소혹성의 나날들 2/둥지에서 떨어진 새/보리밭을 흔드는 바람/12/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Cold Case/지하 도시/지리멸렬/아침 신파/천국은 없다/패배/시정잡배의 사랑/편지/무념무상 2/뭉크의 돼지/미이라/덧칠/무념무상 1/계급의 목적/사랑詩 1/산맥, 시호테알렌/나의 마다가스카르 2/얼음의 온도/別於曲

 

해설 남겨진 것들을 위한 시는 있다 김나영

작가 소개

허연 지음

시인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십 미터』『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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