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96

문충성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1년 8월 1일 | ISBN 9788932022277

사양 신46판 176x248mm · 153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질박한 언어로 빚어내는 세월의 주름,
그 속에 켜켜이 담긴 핍진하고도 순정한 시선

■시집 소개

“자신의 ‘진정성’에 충실한 시인”(문학평론가 김춘식)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제주와의 교감을 바탕으로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 문충성의 열번째 시집 『허물어버린 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77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왔고, 그 이듬해인 1978년에 첫번째 시집 『濟州바다』를 냈으니 33년 동안 부지런히 열 권의 시집을 낸 셈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기돈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시간 위를 부유하는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며 이러한 사실들은 『허물어버린 집』에서 “인식의 층위를 뛰어넘어 체감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하고 있다. 고희(古稀)를 지나 팔순(八旬)으로 내닫는 시인의 눈에 비친 “한 장 꿈속 세상”이 시집으로 거듭난 것이다.

역사를 되살리는 기억의 자취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번 시집의 제1부는 시인이 보고 듣고 겪은 제주 4ㆍ3 사태를 담고 있다. 4ㆍ3 사태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7년 7개월 동안 희생된 사람들만 잠정적으로 2만여 명에 이르는, 아직까지도 전체 상이 채 드러나지 않고 있는 우리 역사의 참혹한 마디 중 하나다. 그리고 1938년에 제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이 4ㆍ3 사태를 자신의 10대에 오롯이 묻었다.
정직한 시어들로 쌓아올린 제1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물리적 장소에 더욱 가깝다. 칠성통, 다랑쉬굴, 속냉이골 등 가본 적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시가 전하는 잿빛 풍경이 눈앞에 고스란히 되살아온다. 시인에게 제주는 여전히, 살육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못한 고통의 공간이며 4ㆍ3 사태는 진행태로 살아 있다. 박제화하지 않은, 이 선연한 역사적 증언 앞에서는 그 무엇도 단예할 수 없다.

무서운 세상
무릉도원 아닌 삶 찾아
1948년
다랑쉬굴로 피난 간 종달리
하도리 주민들 11명
그 중엔 아홉 살짜리 어린이도 있었다
길을 잘못 찾았다
무릉도원 아니었다 다랑쉬굴은
군경합동토벌대가 지른 연기에 숨 막혀
주민들 목숨들 굴속에 묻고
망각 속에 혼을 묻었다
무정세월에 육신을 묻었다
—「다랑쉬굴 근처」 부분

이렇듯 우리는 시인의 눈을 통해 씻을 수 없는 역사를 직시한다. 역사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시인의 가슴속에, 우리네 현재 삶 속에 깃들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제1부에 수록된 시들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역사적인 사건 4ㆍ3과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시적인 긴장을 획득해나가는 동시에 생생한 사료(史料)로 기능한다.

언어, 그리고 세계를 향한 순정한 인식
시인의 지난 시집들과 달리, 이번 『허물어버린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주어로 씌어진 시들이다.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제주어로 십수 편의 시를 적으며 시인은 그 어디에도 표준어 해설을 덧붙이지 않았다.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질적인 언어가 아닌, 있는 그대로, 읽히는 대로 제주어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시인의 바람이 담겼다.
일견 낯설고 이국적이기까지 한 제주어지만 가만히 응시하며 시어들을 더듬다 보면 의미가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단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의미를 모른다 해도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풍광의 총체성에는 덜함이 없다.

6·25 때
똥고망 찢어지는 가난허곡
일본제 각시영
서귀포에
피난 왔주

깅이 잡앙 먹으멍
깅이 그리멍
쇠도 그리멍
바당 절 시퍼렁허게
이는 바름
가슴속에 재우멍
사랑했주
—「깅이 혹은 이중섭(李仲燮)」부분

또한 이번 시집에는 자연의 흐름을 좇는 시편들이 적지 않게 배치되어 있는데, 계절감이 생동하는 시어들을 함께 엮어내어 계절의 변화, 즉 자연의 흐름에 대한 시인의 기민한 감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인에게 자연은 늘, 허물어버려서는 안 될 집과도 같은 존재이다.

파란 달빛 소리
파르르
눈 떴다

아무런 생각은
잠자고

방 하나 그득
넘쳐난다 달빛이

파랗게 떠간다 파랗게
아무런 생각이
동동
—「동동」전문

수십 년 동안 둘이면서 하나인 인생을 꾸려온 아내에 대한 애정도 시집 도처에 배어 있다. “병든 나”와 “아픈 아내”가 “아직은 둘”이라는 시인의 인식 속에서 그 애틋함은 한층 배가되어간다. 풍경은 사라져 어느덧 시간 속에 고였다 흘러가기를 거듭하지만, 가뭇없는 세계의 변모 속에서 여전히도 “작은 산 초록 풀 냄새” 피어나는 사랑은 금빛으로 타오르듯 환하게 빛난다.

아내
퇴원하는 날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고
그 시술이 아주 잘되었다고
처방 약 잘 드시고
보름 후에 병원으로 나오시라고
주치의는 환하게 웃는다
아내 얼굴이 환해진다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하다
—「온 세상이 환하다」전문

텅 비어가고 있는 한 장 꿈속 세상을 그려나가고 있으되, 시인의 모든 것은 문학 속에서 기억되고 감각되며 그로 인해 생명을 얻는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문학은 현실 안에서, 현실을 끌어안고,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계기로 작동하는 셈이다. 저물면서 더 환하게 빛나는 그 순간은 이러한 세계 인식 속에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 관한 이 순정한 믿음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홍기돈).

■ 작품 속으로

섬 하나가 만딱 감옥이었주마씸
건너가지 못 허는 바당은 푸르당 버청
보는 사람 가슴까지 시퍼렁허게 만들었쑤게
희영헌 갈매기들 희영허게 날곡

눈치 보멍 보말이영 깅이영 톨이영 메역이영
해당 먹엉 살았쑤게 총 든
가마귀들은 불타는 중산간
마을서 시커멍허게 날곡

밤이믄 산폭도들 쳐들어오카 부덴
숨도 제대로 못 쉬었주마씸
하늘님아 하늘님아 하늘님까지
누렁허게 무서웠주마씸 경해도

경정 살아난 볼레낭 아래서
꿩새기 봉그곡
불탄 자리엔 고사리들 왕상허게 크곡
구렝이들 허물 벗는

석석헌 바름에 눈이 시령 4월
바름 어디선가
자꾸 불어왕
연둣빛으로 꺼꾸러지곡 연둣빛으로

무싱거마씸
자유가 어디 있었쑤강
죽음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만딱
—「섬 하나가 만딱」전문

허물어버린 집이 요즘
꿈속에 나타나 온다
할머니 어머니가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허물어버리면 안 될 집을 허물어버렸다
그 할머니 어머니 꿈속에 없어도
그 집이 꿈속에 나타나 온다
대추나무
감나무
당유자나무
산수국
매화나무
후피향나무
동백나무
채송화 몇 그루
저 멀리 혀 빼물고 헬레헬레
진돗개 진구가 나타나 온다
시간이 사라져 없는 풍경 속으로
오늘도 들어가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풍경이 된다 어느새
—「허물어버린 집」전문

■ 시인의 말

제주어(제주 토박이말)가 사라져간다.
제주인도 사라져간다. 사라지기 전에 이 언어로
제주 4․3사태 등에 대한 몇 편의 시를 썼다.

미래보다 과거를 향한 시선이 아직도 강렬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젊은 날부터 목말라해온 한 편의 시 쓰기.
이번에도 나는 그 한 편의 시는 못 썼다.

아, 한 편의 시 쓰기.
그 그리움의 미지, 미지의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마지막 항해를 나는
꿈꾼다.

2011년 초여름
문  충  성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내 유년의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길은 허공에 있었다.
곤충이거나 새 따위,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일본 제로전투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처음 보고 놀라버렸다.
태평양전쟁 중이었다.
대여섯 살 때였다.
60년도 더 저편 이야기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득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 유년은 그리 멀지 않다.

우리는 지난 일들을 아주 잘 기억한다고 믿고 있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에
견주어 잊어버린 일들이 더 많은 것을 깨달았을 때 슬퍼진다.
그것이 사람일 경우 더욱 그렇다.
기억의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진짜로 슬픈 건 나는 그를, 그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그들이
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망각 속에 있는가.
내가 가야 할 새로운 길.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져가고 있는 그 기억의 길 위에서
나는 이미 저물어들고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내 유년의 꿈은?

목차

제Ⅰ부
4·3의 노래/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새술왓 학살 터/섬 하나가 만딱/다랑쉬굴로 가는 길/빌레못굴/속냉이골 돌무더기 둔덕/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빈 무덤/다랑쉬굴 근처/칠성통(七星通)/병든 사랑/회귀(回歸)/정뜨르 비행장/백조일손(百祖一孫)/말[馬]고기

제Ⅱ부
동동/그렇게 /고희(古稀)/방어의 노래/썩어버린 시간/김현 생각/바보제/가짜 사기꾼/맹꽁이 운다/금빛 미친 사랑 노래/제주대학교 참나무 한 그루 서서 죽다/갑자기/강아지풀/사이/어떤 장수풍뎅이들의 사랑놀이/대동강(大同江) 물 풀렸습니까/늦가을 빗소리/묵주가 고장 났다

제Ⅲ부
칼 물고 뜀뛰기/허물어버린 집/이미 하늘 잃고/대나무 지팡이/동그랗게/다음 정거장에서/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빗소리를 듣는다/땀에 젖은 구두를 달빛에 말리다/나풀나풀 콧소리/제주 올레/하느님 안 계신 날/추석(秋夕)/종일의 노래/여름 감나무/일당 김태신(日堂 金泰伸)/
민들레꽃이 피면/하늘이 병들었습니까/아직은

제Ⅳ부
조금만 더 가면!/봄빛/뉴질랜드 출신 하얀 앵무새가/지옥으로 가는 길 위에/황태콩나물국밥 먹으며/깅이 혹은 이중섭(李仲燮)/어떤 문화인과 예술인의 제조 공장/겨울잠 속 연둣빛 봄날을 꿈꾸다/온 세상이 환하다/강강술래/나팔꽃의 노래/남대문시장 풍경 2009년 6월 어느 날/언제나/벨도오름[別刀峰] 자살바위 위에서 한 친구를 만나다/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까/날지 못하는 제로센/연꽃들 지고

작가 소개

문충성 지음

시인 문충성은 1938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제주바다』 『섬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내 손금에서 자라나는 무지개』 『떠나도 떠날 곳 없는 시대에』 『방아깨비의 꿈』 『설문대할망』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 『허공』 『백 년 동안 내리는 눈』 『허물어버린 집』 등이 있고, 연구서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한국의 현대시』가, 번역서로 『보들레르를 찾아서』가 있다. 『제주신문』 문화부장·편집부국장·논설위원(비상임)을 역임했다. 현재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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