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

김이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1년 4월 25일 | ISBN 9788932021997

사양 신46판 176x248mm · 200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 책 소개

 

규정되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며 시단의 한 그룹을 형성한 시인 김이듬.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했던 첫 시집과 “도저하고 명랑한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두번째 시집을 거쳐, 그녀의 세번째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이 독자들을 찾아왔다.

2007년 말 출간된 전작 『명랑하라 팜 파탈』에서 김이듬 시인이 들려주었던 세이렌의 노래를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세이렌의 노래」, 『명랑하라 팜 파탈』)라는 표현처럼 치명적인 월경으로 유혹했던 시인은 이 세상에 없던 불길한 세이렌의 시간 속으로 듣는 자를 인도했었다. 그리고 이 ‘팜 파탈-세이렌’의 ‘명랑’은 고통을 다른 쾌락으로 만드는 시적 체위로써, 시인이 가진 시적 에너지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당시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가 쓴 해설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세이렌이여, 그 한없는 몽유, 혼몽의 시간 속에서 명랑하라. 영원히 유령처럼 놀아라.”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지리라. 흥청망청 삶을 다 사용할 테다”(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 파탈』). 김이듬 시인의 ‘명랑’, ‘유령처럼’ 노는 방식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진 그 자리에서, 시인은 “삐걱거리는 책상, 치고받는 부모와 우는 계집애, 그치지 않는 빗소리, 무기가 된 내 걸상과 찢어진 얼굴, 내가 죽인 애인들의 빛나는 얼굴, 쓰레기와 오물, 면사무소와 읍사무소와 포도청을 향하는 진흙길, 떡이 된 고양이, 도주하는 자와 사로잡힌 자와 도피하려는 자와 친구 없는 친구들의 막다른 골목. 입구에서부터 달려와 내 몸을 푹 쑤시고 마구 애무하다 사라진 이 모든 것들의 뿔, 얼핏 번쩍했던 순간 뒤의 칠흑, 진흙처럼 흘러내리던 시간”(시인의 산문, 『말할 수 없는 애인』)을 만났으리라. 그리고 이것들은 오롯이 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이 한 말이 아니라고 이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은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럴듯하고 좀더 감동시키고 슬프게 하는 말”을 찾는 시인에게 애인이 말한다. “이제 내가 네 몸에 뭐라 쓰는지/숨을 몰아쉬고 받아 적어”(「지방의 대필 작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독자들은 ‘말’이 아니라 ‘몸짓’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몸짓(마임)’으로 시연하는 것일까. 『명랑하라 팜 파탈』의 해설에서 이광호는 김이듬의 시에서 상징질서 내부의 주체화를 거부하는 혼종적 주체인 화자와, 온갖 대립적 경계가 갖는 상징적 권위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언어에 주목했다. 이것은 시인의 시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말할 수 없는 애인』은 거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발성 우리의 언어”를 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구렁텅이 삶조차 구원일 수 있다고 시인은 열연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격 미달 함량 초과 안전도가 미심쩍은 우리”이기에 “타고난 발성”(「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우리를 규정짓는 이들에 의해 언제 입이 봉해지고 목청이 제거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온몸으로 ‘마임’을 펼쳐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파탈』)을 더듬어보았던 시인은 이제, 몸부림을 치며, 온몸으로 쓰고 또 쓸 것이다. 여전히 빛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들의 말할 수 없는 빛남에 대하여. 그것을 끝내 말하지 못할 때까지.

 

 

■ 작품 속으로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말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 자로 벌렸지

매일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 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려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 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말할 수 없는 애인」 전문

 

 

 

당신의 노래가 나를 흔드네 나를 흔들어 심지어 지금에 와서도

나를 내려다보며 내게 미소 지으며 나를 위해 노래한다 노래하네 하얀 레이스 강보에 싸여 나는 베리 굿 맨 스윙스윙 흔들거리네

당신의 노래는 커리 소시지 반쯤 탄 빵

나는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따라 수면에서 수면으로 이동하는 물고기

당신의 노래는 머리맡에 죽은 새

내가 깰까 봐 얹어놓은 검은 코러스

나는 방해하지 않네 더 이상 소란 피우지 않아 당신의 노래는 내 머리맡에 죽은 쥐

죽은 쥐의 배 속에 까마득히 아름다운 거

 

당신은 내 매스리스 위로 기어올라와 물에 젖은 체리 케이크 같은 얼굴로

몸을 굽히고 노를 저어

난 수면에 빠져 숨을 쉴 수 없는데

좋아?

만져볼래?

사정해도 돼?

 

아가리를 벌린 진열대 생선처럼 난 눈이 안 떠지네 내 심장과 배를 훑고 귀를 기울이다 냄새를 맡아 내가 잠든 척하면 당신은 떠나겠지 아예 잠들면 당신은 떠나겠지

 

또다시 당신의 노래는 나를 흔드네 날 흔들어 심지어 지금에 와서도 절고 축축한 매트리스에 무릎 꿇고 내 이마를 쓰다듬지 당신의 노래는 머리맡에 죽은 쥐 그 배 속에 우글거리는 슈거볼같은 거 귓속으로 밀려와 내 심장과 배를 훑고 허리를 잡고 뇌로 올라와 오 나의 사랑 이제 그만 쉬어라 난 온종일 가물가물 수면에서 수면으로 흘러가는 매트리스 당신의 코러스가 내게 귀를 기울이지 당신들의 노래 모두 한 입술로 다시 해봐 잘될 거야 토닥토닥 내 발아래에서 머리 끝으로 애무하듯 끌어올리는 이 지퍼 당신의 코러스

-「당신의 코러스」 전문

 

 

나는 이 구렁텅이가 싫지 않아요 삼월은 붉은 구렁을 흘러넘치게 하죠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넌 쉽게 눈에 띄어 그러나 아무도 우릴 구별 못 할걸

 

그래서 뭐

 

동생이 탕 안에 똥을 싸는 바람에 우린 ㅤㅉㅗㅈ겨났어요 발가벗은 채 탈의실에 누워 눕자마자 배가 고파요 다시 면접과 위생 검사 등급 판정을 기다려야 해요 의사는 내 피를 한 번 태반 추출물을 세 번 뽑아갔어요 넌 죽지 않을 거야 더럽다고 태만하다고 때려죽이지 않을 거야 내가 구해줄게 동생이 날 달랩니다 잘 자 우리는 두 개의 캐비닛 안에 침상을 배정받았어요 오 제발 수용소 격리 시설로 보내달라고 애걸했지만 시간은 호송 열차처럼 달리고 언제나 자격 미달 함량 초과 안전도가 미심쩍은 우리는 툴툴거립니다 꿀꿀댄다고 하는데 오해 없기를 이건 불평이 아니라 타고난 발성 우리의 언어 전혀 외국말은 몰라요

 

사람들은 불을 피우지만 우리를 위해서 불을 피우는 건 아니에요 게으르고 더러운 우리는 계속 게으르고 더럽고 싶습니다만 뜯어먹지 못해 안달이네요 정원이 넓은 저택에서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고요 난 병에 걸리고 싶어 땅을 파헤칩니다 지푸라기 부패해가는 얼굴의 검은 노래가 깊은 고랑 너머 저녁이 될 때까지

 

진흙 구렁텅이 깊숙한 정원으로 가는 호송차를 탔지요 나는 고립된 마을 이상한 공기에 호감을 느껴요 이 붉은 구렁이 맘에 들어요 내 동생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예쁘지만 매몰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툴툴거리며 나는 산을 오릅니다 기분이 썩 좋다는 뜻이에요 도살장으로 이동하는 번거로움 없이 축사 옆 웅덩이로 최초로 사람들 구경꾼의 관심까지 받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저 신날 거예요

 

나는 이 진흙 구덩이 안이 좋아요 똥을 싸도 괜찮아요 만날 따돌림받았는데 어쩌다 동반 자살도 시도했었는데 세 수도 없이 한꺼번에 산 채로 토막 나고 뒤죽박죽 피투성이로 처음 마주친 우린 서로 똥과 피를 흙을 퍼부으며 장난쳐요 최초로 심장이 불타오릅니다 아버지 울지 마세요 눈깔에서 폐수 좀 흘리지 말라고요 미리 팔아먹지 못해 안타까우세요 내가 춤추며 불타오르지 않아 찜찜하고 수도관 타고 흘러들어갈까 봐 불안하세요

 

그래서 뭐요

 

세상은 거대한 봉분 고랑 너머 위생적인 사육장 삼월이 가고 꽃 피는 사월이 가고 나에게 오월을 묻지 마세요 폭우가 쏟아지지 않아도 삼월이 붉은 구렁에 흘러넘치지 않아도 난 지금 사라지는 내가 지독한 악취가 처음 마음에 들어요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제목.

-「삼월은 붉은 구렁을*」 전문

 

 

■ 시집 소개

 

죽음의 환락 속으로 거칠게 틈입하는 김이듬의 ‘마임’은 김수영이 일찍이 건설한 ‘온몸-게토ghetto’의 성실한 시민, 아니 ‘흔들리는 난민’으로 주체를 등록하기 위한 ‘자해’와 ‘헌정’의 몸짓이다. 말 그대로의 “타고난 발성”은 입을 막거나 목청을 제거하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불충분하고 불안정하다. 그녀의 ‘온몸’이 언어이고 입이어야 하며 그녀가 ‘온몸’에 구멍을 계속 뚫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 그곳은 말할 수 없는 애인끼리의 모럴moral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대화가 갱신되고 성숙되는 원형 공간 자체이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2,3년 쓰다 말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세번째 시집을 묶는다. 이렇게 된 데는 시를 향한 사랑이나 의지 같은 거보다는 그것들을 상실하고 상실해가려는 내 육신이 있었을 뿐. 나는 구석에 서 있다. 삐걱거리는 책상, 치고받는 부모와 우는 계집애, 그치지 않는 빗소리, 무기가 된 내 걸상과 찢어진 얼굴, 내가 죽인 애인들의 빛나는 얼굴, 쓰레기와 오물, 면사무소와 읍사무소와 포도청을 향하는 진흙길, 떡이 된 고양이, 도주하는 자와 사로잡힌 자와 도피하려는 자와 친구 없는 친구들의 막다른 골목. 입구에서부터 달려와 내 몸을 푹 쑤시고 마구 애무하다 사라진 이 모든 것들의 뿔, 얼핏 번쩍했던 순간 뒤의 칠흑, 진흙처럼 흘러내리던 시간들이 이 시집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쓴 시가 아니다. 나는 유령 시인 대필자이다. 그끄저껜 편집자가 여기저기 바로잡아주었고 한참 뒤엔 서점 아가씨가 찾아낼 것이다. 아주 가끔 시인에 대한 비난과 동경이 뒤범벅된 심정으로 시를 써보지만 3년째 「필균의 침대」를 쓰고 고치고 다시 쓸 뿐. 오늘도 나는 몸부림친다. 침대가 된 의자 밑에서 죽은 애인과 함께, 다리 부러진 걸상 뒤에서 낡고 오래된 음반과 함께, 안 들리는 노래와 떡이 된 개와 고양이의 다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말과 함께, 너와 함께,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나 말고는 아무도

함박눈

겨울 휴관

말할 수 없는 애인

인공호흡

사생아들

꽃다발

날치고 훔치고

거기 누구 없어요

문학적인 선언문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페와 이발사

파도

날마다 설날

12월

호수의 백일몽

 

제2부

기적

기타의 행방

모계

백발의 신사

너무 놀라지 마라

당신의 코러스

카트를 타고

질 & 짐

생활의 발견

마임 모놀로그

자살

버린 애

옥상에서 본 거리

도플갱어

오빠가 왔다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지방의 대필 작가

나의 파란 캐스터네츠

어머니의 방

달래보기 시리즈

부부 자해공갈단

권태로운 첫사랑

나는 세상을 믿는다

동시에 모두가 왔다

크라잉게임

아케이드

이상한 모국어

 

제3부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응답

성으로 가는 길

전람회, 동피랑, 골목

종업원

오늘도

마지막 연인

스침

제자리뛰기

슬럼프

등단 7년

저물녘 조언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세레나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

행진

고향의 난민

 

해설|‘마임 모놀로그’의 행방_최현식

 

 

 

작가 소개

김이듬 지음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1년 계간 『포에지』 가을호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와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가 있다.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상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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