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속의 영화 —영화 이론 선집

이윤영 엮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1년 4월 18일 | ISBN 9788932021911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76쪽 | 가격 22,000원

책소개

“영화, 오로지 영화만이!”

20세기 최고의 지성들이 쓴 영화 이론의 고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루돌프 아른하임, 발터 벤야민, 앙드레 말로, 모리스 메를로-퐁티, 앙드레 바쟁, 크리스티앙 메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20세기를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지성들이 영화에 대해, 영화를 통해 치밀한 사유를 전개한 글들을 묶어 펴낸 『사유 속의 영화—영화 이론 선집』(이윤영 엮고옮김)이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20세기 거의 전체에 걸쳐, 적어도 서구 유럽에서 영화는 예술 일반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체의 총아였다. 영화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인문학의 주요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대가들이 각기 ‘영화’에 주목하고 이를 대상으로 치밀한 사유를 펼쳐나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벤야민, 메를로-퐁티,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 아른하임과 같은 예술심리학자, 파노프스키와 같은 미술이론가, 말로와 같은 작가, 메츠와 같은 기호학자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글은 단순한 외도나 현학이 아닌 “온갖 방향에서 영화의 우주를 개척한” 글들로, 영화에 대한 현재의 사유는 여전히 이들이 개척한 자장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 소개된 에이젠슈테인, 바쟁, 리베트, 나르보니, 보드리, 우다르 등은 영화계 내부에서 치밀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영화계 밖의 심오한 논의 못지않은 사유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영화의 우주’는 영화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담론들 안팎에서 담론들과 더불어 형성되었고, 영화와 담론 사이에는 밀접한 교차/얽힘/횡단의 관계가 존재한다. 이 책은 이런 담론들 가운데 “영화에 대한 사유의 어떤 근원적 부분을 건드려서 이후 무시할 수 없는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영화 이론이나 비평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글”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모두 열네 편(+1)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영화 이론의 고전을 묶은 앤솔러지이자 인문학적 사유에 깊이를 더해주는 풍요로움의 기록이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1)

 

 

영화에 대해, 영화를 통해, 영화와 함께 사유한다는 것


영화를 가리켜 “모든 논쟁에 특권적인 공명상자”라고 일컬었던 세르주 다네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20세기 서구 유럽에서 영화는 모든 사유의 물결을 집약하는 저수지였다. 이 책에 묶인 각각의 영화 이론들은 영화 자체에 대한 사유의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를 통해 각기 다른 사유의 지평을 열어나간 글들이다. 이러한 영화 관련 주요 논문들을 직접 엮고 옮긴 이윤영(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영화전공 교수)은 전문가적인 식견과 면밀한 텍스트 분석력을 바탕으로 대가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완성된 책으로 독자들 앞에 스스럼없이 풀어놓는다. 무엇보다 4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강의와 연구를 거듭하며 이 책을 준비해왔다. 이렇듯 결코 쉽지 않은 작업에 몰두한 엮고옮긴이의 학자로서의 성실함과 탁월하고도 꼼꼼한 번역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는 것이지만, 몇몇 글은 다른 기회에 다른 역자들에 의해 이미 우리말로 옮겨졌던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 아른하임의 「영화와 현실」, 메를로-퐁티의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바쟁의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 그러하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현재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벤야민이 1936년에 직접 불어로 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겼다는 점이 흥미롭다. 현존하는 네 개의 판본 가운데 세번째로 씌어진 이 불어판은 한국어로는 처음 소개하는 것으로 독일어로 된 다른 판본들과 대조 및 비교를 거쳐 영화 연구뿐만 아니라 벤야민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열네 편(+1)의 글은 연대기 순으로 배열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순서대로 읽어나갈 경우, 하나의 성찰이 또 다른 사유를 추동하고 그것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사유의 독특한 궤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른하임의 글(「영화와 현실」)은 벤야민의 글(「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직접 인용되며, 벤야민의 글은 말로의 글(「영화의 심리학 개요」)에 다시 등장한다. 말로의 글은 메를로-퐁티의 글(「영화와 새로운 심리학」)에 인용 및 변주되며, 바쟁의 글(「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다시 등장한다. 이렇듯 전체 책의 흐름 속에서 통시적인 상호관계를 읽어나간다는 흥미로움이 있지만, 엮은이는 무엇보다 이 글들의 ‘공시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통시적인 상호작용 속에서도 각기 다른 사유의 지평을 열어나갔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에 대한 사유의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주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기만의 사유를 기존의 사유가 가본 적이 없는 한계선까지 밀고 나가 현존하는 ‘영화의 우주’를 가장 예리한 각도로 규명하고 개척한 글로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에 대해, 영화를 통해, 그리고 영화와 함께 사유하는 이 책은 영화 이론의 정전 텍스트들을 묶은 빛나는 목록이자 최근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영화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 책 속으로

 

생기를 불어넣은 이미지인 영화는 연극과 스틸사진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영화는 공간을 제시하지만 무대에서처럼 〔삼차원〕 현실 공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보통 사진에서처럼 이를 평평한 표면으로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유로 공간적 인상은 스틸사진처럼 약하지 않다. 일정한 깊이의 환영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사진과 또 다른 점이지만, 영화는 상영 도중에 무대 위에서처럼 시간이 경과한다. 이 시간의 경과는 현실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견고하지 않아서 이런 단절이 관객에게 시간의 경과를 파괴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서도 시간상의 단절이 개입될 수 있다. 영화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인 이미지에 들어 있는 본성의 어떤 것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지는 길거나 짧거나 원하는 만큼의 시간 동안 제시될 수 있고, 또 이들 이미지가 시간상으로 완전히 다른 시기를 묘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씩 하나씩 순서대로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연극처럼 부분적인 환영을 제공한다. 영화는 어느 정도까지는 실생활의 인상을 제공한다. 실제로 영화는 연극과 달리 (모의가 아닌) 실생활을 실제 환경 속에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에는 현실의 성분이 가장 강하게 들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무대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진의 본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색채와 삼차원적 깊이의 부재, 주변부에 의해 날카롭게 경계 지어진 스크린 등에 의해 영화에는 충분할 정도로 리얼리즘이 제거되어 있다. 영화는 항상 우편엽서와 같이 평면적 사진이면서 동시에 생생한 행위가 벌어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2장, 루돌프 아른하임, 「영화와 현실」, 64~65쪽)

 

영화, 오로지 영화만이 우리가 좋든 싫든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정당하게 취급한다. 만화영화 같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영화는 중립적 매체가 아닌 물질적 세계와 사람을 조직해서 양식을 부여할 구성을 이루어내고, 심지어 환상적인 것도 심오하게 상징적인 것도 될 수 있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예술가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리적 사물과 녹화기계의 실제적 조작을 통해서 이루어낸다. 영화의 매체는 물리적 현실 그 자체다. 즉 19세기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물리적 현실이거나, 웨스트체스터 교외에 있는 주택이라는 물리적 현실이다. 〔……〕 이 모든 대상과 사물이 예술작품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배치될 수 있지만, 이들 물리적 현실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의 표현주의적 배경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를 선-양식화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는 흥미 있는 실험 이상의 것이 아니며 사태의 진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현실과 맞서기 전에 현실을 미리 양식화해버리는 것은 단지 문제를 피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작업한 결과물이 양식을 가질 수 있도록 양식화되지 않은 현실을 조작하고 촬영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화보다 오래된 다른 예술들이 〔영화에〕 제시한 그 어떤 제안보다 도달하기 어렵고 또 적절한 제안이다. (3장, 에르빈 파노프스키, 「영화에서 양식과 매체」, 101~102쪽)

 

영화에서는 배우가 관객의 눈앞에서 다른 어떤 사람을 연기하는 것보다 장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화배우가 시험적 성격의 테스트 때문에 겪는 이러한 변신을 가장 먼저 느낀 사람 중 하나는 피란델로였다. 소설 『촬영!』에서 그가 이 주제에 대해 했던 언급은, 그것이 비록 이 문제의 부정적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고 또 무성영화만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인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유성영화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무성영화는 하나의 장치 앞에서 연기하고 유성영화는 두 개의 장치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뿐이다. 피란델로는 이렇게 쓴다. “영화배우들은 스스로 유배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장면에서 유배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유배당한 것이다. 그들은 슬픔, 뭐라 말할 수 없는 공허감, 심지어는 좌절의 느낌을 갖고 막연하게 이렇게 언급한다. 즉 자신들의 육체가 현실성을, 생명을, 목소리를,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를 빼앗겨서 거의 사라지고 무화되어 한순간 스크린에 명멸했다가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무언의 이미지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관객 앞에서 작은 기계가 이들의 그림자로 유희하게 될 것이고, 이들 배우는 이 작은 기계 앞에서 연기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질 수도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이것이 또한 영화의 작업인데—인간은 아우라를 포기한 채,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만 살아가고 행동하라고 강요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인간의 지금과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우라에는 어떤 복제나 재생산도 없다. 관객은 무대 위의 맥베스에게서 분출하는 아우라를, 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의 아우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스튜디오 촬영의 독창성은 장치가 관객을 대체했다는 점에서 나온다. 영화배우를 둘러싼 아우라가 관객과 함께 사라지고, 등장인물의 아우라가 배우의 아우라와 함께 사라진다. (4장, 발터 벤야민,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122~24쪽)

 

유성영화는 분명 이 문제의 기반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말처럼 무성영화를 ‘완성시킴으로써’ 그런 것이 아니다. 엘리베이터가 마천루의 완성이 아닌 것처럼, 유성영화는 무성영화의 완성이 아니다. 마천루는 철근 콘크리트,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발명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영화는 무성영화의 주인공이 말하게 되었을 때 이 대사를 들려줄 수 있는 가능성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이미지와 소리를 결합시킬 수 있는 표현가능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소리의 표현이 단지 녹음기에 지나지 않았을 때, 유성영화는 사진적 기록에 머물러 있을 때의 무성영화만큼이나 하찮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영화연출가가 소리의 조상이 〔기록용〕 디스크가 아니라 라디오 극의 구성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유성영화는 예술이 되었다. (5장, 앙드레 말로, 「영화의 심리학 개요」, 150~51쪽)

 

바로 이 때문에 영화에서 인간의 표현이 그렇게나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이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영화는 인간의 사유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인간의 행위와 행동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세계에 현존하는 특별한 방식, 사물과 타인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을 우리에게 직접 제공한다. 이것은 우리가 몸짓과 시선과 거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각각을 명백하게 규정해준다. 영화가 우리에게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으면, 다캥이 「로프에 매달린 대원」에서, 말로가 「희망」에서 하려고 했던 것처럼 〔주관적인 시점 샷으로〕 현기증을 느끼는 내면 풍경을 묘사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기증을 외부에서 바라봄으로써, 바위 위에서 뒤틀리는 균형을 잃은 신체를 바라보거나 어디서 오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의 전복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현기증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 그런 것처럼 영화에서도 현기증, 기쁨, 고통, 사랑, 증오는 행위다. (6장, 모리스 메를로-퐁티,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181쪽)

 

많은 무성영화의 이론가들이 말했거나 또 암묵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영화는 분명 언어 체계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관용어의 배치와 다른 방식으로 조정된 배치 속에서 유의미한 요소들을 조직하는 한, 그리고 현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각적 총체를 복제하지 않는 한—현실은 우리에게 연속적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 영화는 언어로 간주될 수 있다. 영화적 조작은 현실의 시각적 복제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는 어떤 것을 담화로 변형시킨다. 순전히 현실과 유사하고 연속적인 의미작용—움직이는 사진, 즉 시네마토그라프—에서 출발해서 영화는 통시적 성숙을 해가는 와중에 점차 순수하게 기호학적인 몇몇 요소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순수하게 기호학적인 몇몇 요소는 단순한 시각적 복제의 무정형적 단면들 속에 산발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8장, 크리스티앙 메츠, 「영화기호학의 몇몇 문제」, 217쪽)

 

너무나 오랫동안 영화의 에로티즘은 영화내적 차원에서 주목되고 탐구되어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치 ‘카메라-시선’이나 감독에 의한 세계의 소유 등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부적절하게 카메라 움직임의 에로티즘에 대해 말해왔다. 그런데 사실상 관점상의 본질적 이동이 일어났다. 즉 영화 특유의 ‘유사-관람’ 현상은 오늘날에는 단지 에로티즘의 조건으로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에로티즘의 조건은 영화와 영화적인 것의 분절에서 확인할 수 있고 기표와 이 기표를 전달하는 현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영화적 담화의 본성이다. 영화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에로티즘에 대해 말한다는 것, 영화가 항상 에로티즘이 의미작용을 할 수 있는 특권적 장소라는 것은 아마도 프리츠 랑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발견일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어떤 귀결이 도출되지는 않았지만, 이 발견은 영화 전체와 관련된다. (9장, 장-피에르 우다르, 「봉합」, 217쪽)

 

따라서 영화는 지배이데올로기가 규정한 모델에 호응하는 일종의 대체적 심리 장치로서 나타날 수 있다. (우선은 경제적인) 억압적 체계는 일탈이나 이 ‘모델’에 대한 적극적 고발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유비적으로 ‘무의식’이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장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의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하는 영화의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무의식에 영화의 생산 양태, 다시 말해서 수많은 결정 요소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 과정이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기본 장치에 대한 성찰이 영화의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이론에 통합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11장, 장-루이 보드리,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286쪽)

 

예술작품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예술작품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아닙니다. 예술작품은 커뮤니케이션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작품은 최소한의 정보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술작품과 저항 행위 사이에는 근본적 친화성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렇습니다. 예술작품은 저항 행위라는 자격으로서만 정보나 커뮤니케이션과 같이 뭔가 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시간도 없고 때로는 예술작품과 최소한의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소양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예술작품과 저항 행위 사이의 이 신비로운 관계는 무엇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아주 멋진 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고 예술에 대해 아주 단순한 말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죽음에 저항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의 대답이 상당히 좋은 대답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보다 3,000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조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점으로는, 최소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술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항 행위와 예술작품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여기서 나옵니다. 예술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는 저항 행위이기는 하지만, 모든 저항 행위가 예술작품은 아닙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저항 행위는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예술작품은 저항 행위입니다. (13장, 질 들뢰즈,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323~24쪽)

 

그러나 결국 나는 내 모든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고 혼잣말로 말하게 된다. 1960년에 카메라 움직임 하나가 시체를 미화했고 30년 뒤에는 오버랩 하나가 죽어가는 사람들과 부자들을 춤추게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기서 중세적이면서도 초현대적인 ‘죽음의 춤’의 사육제를 볼 수 없는 나 역시도 바뀌지 않았다. 합의된 ‘아름다움’을 잘 고려하는 저속한 채색화의 지배적 개념도 바뀌지 않았다. 형식 자체는 약간 바뀌었다. 「카포」에서는 아직 ‘지켜야 했던’ 거리를 미세하게 없애려 했다고 폰테코르보를 원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트래블링은 감독인 그와 관객인 나를 우리가 없었던 곳에 위치시키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이곳은 어쨌거나 내가 있을 수도 없었고 있고 싶지도 않았던 곳이다. 왜냐하면 그림 속에 나를 강제로 포함시키기 위해 폰테코르보는 증인으로 참여한 관객의 내 실제 상황으로부터 나를 ‘강제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리가 있지 않은 곳에 자리 잡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면, 고다르의 정식〔“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다”〕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14장, 세르주 다네, 「「카포」의 트래블링」, 357~58쪽)

 

목차

서문

 

1장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1929) |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2장 영화와 현실(1932/1957) | 루돌프 아른하임

3장 영화에서 양식과 매체(1934/1947) | 에르빈 파노프스키

4장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 | 발터 벤야민

5장 영화의 심리학 개요(1939) | 앙드레 말로

6장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1945) | 모리스 메를로-퐁티

7장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1945) | 앙드레 바쟁

8장 영화기호학의 몇몇 문제(1966) | 크리스티앙 메츠

9장 봉합(1969) | 장-피에르 우다르

10장 영화/이데올로기/비평(1969) | 장-루이 코몰리 & 장 나르보니

11장 기본적 영화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1970) | 장-루이 보드리

12장 반反영화(1973) |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13장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1987) | 질 들뢰즈

14장 「카포」의 트래블링(1992) | 세르주 다네

14-1장 천함에 대하여(1961) | 자크 리베트

 

원문 출전

찾아보기(인명)

 

 

작가 소개

이윤영 엮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제3대학(소르본 누벨) 영화학과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9월부터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구舊 영상대학원)에서 영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 등이, 옮긴 책으로 다니엘 아라스의 『디테일—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과 ‘죽은 시간’의 모험」 「멀리서 바라보기—영화 속의 숭고」 「기억, 사회, 영화—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중심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 나타난 공간과 공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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