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또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

김광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1년 3월 24일 | ISBN 9788932021959

사양 신46판 176x248mm · 136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생에 밀착한 언어로 빚어낸 투명한 시

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긍정이 담긴 따뜻한 시선

–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묶은 김광규의 열번째 시집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생활 세계 속의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일상 시’의 영역을 꾸준히 개척해온 시인 김광규의 시집 『하루 또 하루』(2011, 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되었다. 시인 김광규는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30년 넘게 꾸준히 시를 창작해온 한국 시단의 거목이다. 이번 시집은 그의 열번째 시집으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십진법의 기수에 1을 더한 숫자 10은 두 자리 수가/시작되는 출발점”이기에 “새로 떠나야 할 시점”인 지금, “헌 신발 끈을 다시 조여”매며 각오를 다진다.

시집 『하루 또 하루』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으로부터 얻은 인상, 이제껏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반성,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고, 여행지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별세한 지인들에게 보내는 추모의 내용 등이 담겼다.

 

 

푸르미,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 시선

김광규의 시에 현현되는 자연은 타자로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닌 발화의 주체이다. 그의 데뷔작 「靈山」과 「有無1」 등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온 자연과의 합일된 정서는 이번 시집에서도 완만하게 이어졌다. 특히 1부 「푸르미」에 묶인 시 속의 자연물들(뿌리, 달, 능소화 등)은 그 자체가 시인이자 시가 되어 싱싱한 푸름으로 살아나기도 하고(「푸르미」), 외로운 밤 따뜻한 위로(「나 홀로 집에」)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인은 자연을 들여다보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삶과 눈을 맞추는 자세를 취하며, 자연으로부터 받는 인상들을 통해 삶의 이치들을 깨우쳐간다.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나 홀로 집에」 전문

 

관계, 그 절실한 반성

더하여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를 환기하며, 이에 대한 고민들을 조촘조촘 시에 새겨나간다. 김광규 시인 특유의 따뜻한 눈길로 이웃, 친구, 가족 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이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상처 주었던 지난날을 아프게 반성한다. 교대역에서 50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지인과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악수만 나누고 헤어”진 만남이 마지막이었음을(「교대역에서」), 동네 박공집 쓰레기 더미에서 자고 있는 사내를(「전망 좋은 방」), 나이 들어 잔소리하는 아내의 얼굴에서 발견한 누나의 모습을(「다섯째 누나」), 시인은 바라보고 생각하고 또다시 시로 풀어낸다.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교대역에서」 전문

 

시대, 고단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김광규는 깨어 있는 감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 또한 잃지 않는다. 시인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들의 박한 임금(「굴삭기의 힘」),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소외(「나뉨」), 위안부 문제는 외면한 채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탐욕(「인수봉 바라보며」)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는 시 속에서 노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논리적으로 똑똑하게 문제 지점을 잡아간다. 문학비평가 오생근이 말했듯 김광규는 “비천한 현실을 파괴하고 해체하기보다는 현실을 적절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삶을 긍정”하고 있다. 그는 거지에게 빵 하나를 줄 수는 없을지언정 거지를 세상의 추문으로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른다.

 

소형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옛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 「나뉨」 전문

 

외국인, 여행지에서의 깨달음

4부 「다리 저는 외국인」에서는 시인이 각국을 다니며 여행지에서 깨달은 바를 적은 시들이 담겨 있다.

 

고즈넉한 해변의 공항
파리를 오가는 소형 제트기가 하루에
네 차례 뜨고 내린다
지중해의 눈부신 햇빛
투명한 공기와 라벤더 향기 속에
은빛 날개가 바다 위로 날아오른다
11시에 통관대를 닫고 직원들은
점심 먹으러 나간다
비행 스케줄을 잘못 잡은 외국 승객
몇 명만 남아 대합실을 지키다가
2층 레스토랑으로 옮겨 앉아
오후 비행기 편 기다리며
프로방스 포도주를 맛본다
예정에 없이 한참 쉬어간 이곳을
여행객들은 나중에 관광 명소보다
오래 기억할지도 모른다
-「해변의 공항」 전문

 

위 시에서 해변의 공항은 여행객들이 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잠깐 거쳐 가는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여분으로 얻은 시간이기도 하다. 빈틈없이 꽉 짜여진 여행 일정 속에 잠시나마 숨 쉴 틈을 주는 여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거하고 있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시공간에 묻혀 있는 잘 드러나지 않는 빈틈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언뜻 열린 틈새를 통해서 숨겨진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이렇듯 시인은 약하고 희미한 공간과 교감하는 시를 통해, 이 세계의 약한 존재들에게 뿌리 깊은 긍정의 언어를 전한다.

 

레퀴엠, 앞서 간 벗들을 위한 추모 시

마지막 5부 「쉼」에 이르면 시인이 별세한 지인들에게 보내는 추모의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홍성원과 함께 페리선 난간에 기대어 찍은 사진을 보며 그리운 마음을 토로하는「회색 사진첩」, 소설가 이청준과 젊은 날 함께 문학에 대해 논하고 삶의 아픔을 나누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가는 「미백 영전에」 등이 이러한 시다. 더하여 종심(從心)의 나이에 이르러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초연하게 죽음을 바라보는 노시인의 담담함도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귀에 익은 목소리 들린 것 같아

뒤돌아보니 저기서 그가 손짓하네

– 오래간만이야

악수를 건네려고 반갑게 다가서보네

그러나 다가갈 수 없네

밀랍 인형처럼 한자리에 서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네

하룻밤 사이에 생긴 간격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안타깝게 마주 바라보지만 우리는

서로 육성으로 말할 수 없네

유현한 시공 속에 잠시 공존할 뿐

기억의 강물 건너편에 그는 바위처럼 서 있고

나는 혼자서 자맥질하며 떠내려가고 있네

가위 눌린 꿈도 아닌데 지금

가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이곳에서

어제의 그 모습과 아쉽게 헤어지네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전문

 

쉽게, 그러나 아프게

많은 비평문에서 언급되었듯 김광규의 시는 쉽다. 이것이 쉽게 씌어진 시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김광규의 시는 외적 평이함 안에 내적 비의가 담겨 팽팽한 긴장을 갖는 시이기에 아프게 쓴 시이고, 또한 아프게 읽히는 시이다. 시인은 담담하게 말한다, “생활을 하듯 시를 쓰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활 세계와 현실에 대한 열린 태도로 삶에 밀착해 시를 써내려가며, 서정의 정신과 시적 언어의 자유로움을 이어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시를 써내는 시인 김광규. 이제, “하루 또 하루”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그 속의 통찰이 고스란히 담긴 예순일곱 편의 시가 독자들을 향하기 위해 헌 신발 끈을 묶는다.

 

 

■ 시집 속으로

 

댓돌에 한 발 올려놓고

헌 신발 끈 조여 매는데

등 위로 스치는 손길

여름내 풍성했던 후박나무 잎

커다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무의 기척

-「나무의 기척」 전문

 

전화 다이얼 누르면 경쾌한

멜로디와 상냥한 여자 목소리

내선 번호를 눌러주세요

영업부는 1번

경리부는 2번

제작부는 3번…….

이렇게 시작하여 시키는 대로

주민번호 비밀번호 온갖 숫자를

꾹꾹 눌렀어요

다이얼이 늦었으니 다시

걸어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그 많은 숫자를

꾹꾹 눌렀지요

그래도 또 늦었다고 하네요……

숫자가 되어버린 침묵과 인내와 반복

아무 쓸모없어요

자동응답기의 재빠른 지시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나의 느린 손

무딘 손가락……

몇 번이고 신속하게

접속을 차단하는 기막힌 서비스

갸름한 손끝으로 날쌔게

콕콕 누르지 못하면

모든 문의를 숫자로 바꾸게 할 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

완벽한 ARS

-「콕콕 꾹꾹」 전문

 

 

■ 시집 소개 글

 

시집 『하루 또 하루』는 약한 존재들에게 바쳐진다. 약한 소리, 약한 존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가 김광규의 시적 과제이다. 그러나 시인은 세상 뒤편에 놓인 약한 존재를 함부로 파헤쳐내지 않고, 언뜻 열린 틈새를 통해 숨어 있는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는 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약한 존재들과 교감한다.

 

■ 뒤표지 글

 

왼쪽과 오른쪽의 대칭 구조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하여 나는 30여 년 전에 「도다리를 먹으며」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기저기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상당히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그런데 당시에 내가 지니고 있던 좌우 상칭 개념이 나이 들면서 차츰 불균형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끊임없는 독서와 집필의 도구로 사용해 온 두 눈이 몇 년 전부터 그 자동 기능에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왼쪽 눈의 시력이 0.2로 떨어져 버렸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아직 1.0이지만, 짝눈으로는 제대로 보기 힘들다. 이제는 사전을 들추어 볼 때, 확대경을 찾게 되고, 도무지 잔글씨로 인쇄된 책은 읽기 어렵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왼쪽 무릎을 다쳐서 고생했다. 개를 데리고 뒷동산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오솔길을 내려오는데, 숲에서 갑자기 꿩병아리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놀란 개가 날쌔게 그놈들을 쫓아가면서, 미처 목줄을 놓지 못한 주인을 넘어뜨린 것이다. 뼈나 인대를 상하지 않고, 무릎 근육만 다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이어 2주일 동안 반깁스를 하고 다리를 절면서 해외여행을 다녀오느라고 큰 곤욕을 치렀다.

왼쪽 눈과 왼쪽 다리가 이렇게 되자, 몸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다. 「도다리를 먹으며」시에서 두 눈이 오른쪽으로 몰려 붙은 “우 도다리”를 비웃던 서정적 자아가 스스로 도다리처럼 되어버린 셈이다. 좌우 균형의 유지가 생득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인간의 뇌도 좌우로 갈라져 있어, 그 맡은 기능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논리와 계량에 어둡고, 고유명사나 보통명사 들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 나의 뇌도 왼쪽이 시원찮은 모양이다. 오른쪽 뇌가 창조적 감성을 관장한다니, 그래도 천행으로 여겨야 할까. 하지만 왼쪽이 약해지면, 오른쪽만 계속 혹사하게 되어, 결국 양쪽을 모두 못쓰게 되기 쉽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균형을 잃지 않는 일이다.

목차

제1부 푸르미

뿌리의 기억/푸르미/솔벌터 소나무 숲/능소화/나 홀로 집에/할머니 손길/나무의 기척/저녁나절/가을 나비/청설모 한 마리/봄 소녀

 

제2부 빨래 널린 집

빨래 널린 집/녹취록/좁은 문/교대역에서/물뫼의 집/술병/침묵의 나이/전망 좋은 방/다섯째 누나/고요의 모습/파리 떼/호모 에렉투스/생선 장수 오는 날/잘못 다닌 길/빈집

 

제3부 굴삭기의 힘

좀도둑처럼/이른모에게/굴삭기의 힘/나뉨/곰의 포옹/인수봉 바라보며/인문지리는 잘 모르지만/그 울던 아기/콕콕 꾹꾹/창피한 사이/가난의 용도/시체는 차갑다/그들의 내란

 

제4부 다리 저는 외국인

고려의 남서쪽/낯선 간이역/옛 절/향나무 한 그루/남해 푸른 물/원 달러/시칠리아의 기억/해변의 공항/아이제나GM 가는길/지중해 항로/선상 박물관/동굴 주점 에스터하지/와인 코너에서/나이아가라/다리 저는 외국인

 

제5부 쉼

쉼/어둠이 손짓 하던 날/갚을 수 없는 빚/하루 또 하루2/위험한 마음/꿈속의 엘리베이터/회색 사진첩/미백 영전에/바닷가 무덤/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종심/물기2/몰년

 

작가 소개

김광규 지음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에서 수학했다.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후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표하여 제1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했고,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제11회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등을 펴냈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하이네 시선, 페터 빅셀 산문집 등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영역 시집 Faint Shadows of Love(런던, 1991), The Depth of A Clam(버팔로, 2005),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빌레펠트, 1999), Botschaften vom grünen Planeten(괴팅엔, 2010), 중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등을 간행했다.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화상(2006)과 한독협회의 이미륵상(2008)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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