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주유소

최대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9월 25일 | ISBN 9788932018454

사양 양장 · · 306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환상마저 현실과 한 몸이 되는 지독한 도시의 일상
건조함 속으로 젖어드는 우리들의 감추어둔 이야기

일상과 일상이 지속적으로 겹쳐지고 포개지고 엇갈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
그 근원적 공허를 실연하는 최대환의 신작 소설집

1999년 첫번째 소설집 『클럽 정크』로 실제와 가상이 서로 묘하게 겹쳐지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독특한 공간을 빚어냈던 작가 최대환이 10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 『바다 위의 주유소』를 펴냈다.
세 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마치 모자이크화의 색깔 조화처럼 맞물려 전체적으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던 그의 첫 소설집은 단순나열식 옴니버스가 아니라 극중 인물을 교차시키는 기법으로 90년대 말 한국소설의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바다 위의 주유소』는 연작 소설은 아니지만, 실제와 가상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혼융되는 현실의 또 다른 깊이를 길어내며 모든 것이 불가능하면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보였던 첫 소설집의 매력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 소설집은 총 10편의 작품이 ‘고양이’‘시멘트 광장’‘주유소’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나뉘어 실렸다. 작가는 이 세 개의 키워드가 자신에겐 참으로 도시적인 이름들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느슨한 연작을 구성하리라 마음먹기도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일까. 10편의 작품은 각각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작중인물이 겹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비슷한 메시지를 여러 층위에서 다루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첫 소설집과도 연결되는 듯하다.
첫번째 수록작 「잠 못 드는 그녀」에는 ‘클럽 정크’에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지샌 기억을 잊지 못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한밤, 편의점의 고양이」의 화자는 바로 앞에 실린 「잠 못 드는 그녀」를 쓴 작가이다. 또한 「한밤, 편의점의 고양이」에서 화자가 우연히 만나는 감미료 세트 파는 여자의 상황(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을 거라는 것과 춤을 춘다는 것)은 「버터플라이」의 여자와 겹친다. 뿐만 아니라 ‘주유소’의 키워드로 묶인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위의 주유소」 「홍콩발 이메일」은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담아낸다.
첫 소설집에서 공통된 무대였던 클럽 정크가 주인공들이 안주할 공간이 아니었듯이, 이번 소설집 표제에 드러나는 ‘주유소’ 역시 영원히 목적지가 될 수 없는, 잠시 들르는 공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도 전작처럼 각각 기승전결의 드라마로 완결되기보다는 마치 흘러가는 인생의 짧은 한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읽힌다.

최대환은 무미건조한 개인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기록자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일상이 뭔가 이야기가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사건의 연속인 것은 아니다.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하기만 한, 그래서 ‘지독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상. 그리하여 어느 날 붙박이장 안에 알몸의 여인이 살게 되어도 그녀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외에 특별할 것이 없고(「붙박이장」), 느닷없이 펭귄이 출몰하여도 삶이 크게 흔들일 것 없는(「샤워하다 뒤돌아보면」) 것이다. 문학평론가 강동호가 “ 『바다 위의 주유소』는 사건 없음의 사태가하나의 사건적 층위로 격상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일상성만이 성운처럼 그득히 미만해 있는 소설 공간을 열어놓는다”라고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공허, ‘대상이 없는 그리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감추어두었던 내면의 이야기와 맞부딪쳤기 때문일 것이다. 최대환이 담담하게 그려낸 일상의 기록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은 누구를 그토록 그리워하는가? 당신에게 이 제거할 길 없는 그리움을 안긴 사람, 지금 당신 곁을 떠나간/떠나가는 그 사람은, 혹 당신 자신일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작가의 전언처럼, 당신을 떠난 이는 바로 당신일지도 모른다. 왜 그토록 소설 속 인물들을 한없이 엇갈리기만 하는 것인가. 그 공허의 내적 원인이 떠나간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는 그리움의 주체인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촉발되는 것일 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그 공허, 다시 말해 이 게워지지 않는 부재 의식에 대한 재확인인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그리움이 ‘대상 없는 그리움’에 가깝다는 명제는 이렇게 되살아난다. _강동호, 해설 「일상의 에크리튀르」에서

작품의 줄거리

「잠 못 드는 그녀」
결혼을 며칠 앞둔 여자는 며칠째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느 날 그녀는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차를 몰고 일 년 전 혼자 여행을 하던 중에 한 번 들렀던 도시로 무작정 떠난다. 거기에는 클럽 정크라는 바가 있는데, 일 년 전 여자는 그곳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 도시의 편의점 앞에서 캔 맥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다. 여자는 혼자서 일 년 전 그날처럼 바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술도 마시고, 편의점 앞에서 캔 캑주를 마시다가 날이 밝을 무렵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녀는 이제 거의 움직임이 없다. 바에 웅크리듯 앉은 채로, 가끔 병을 들어 맥주를 들이켜는 일과 담배를 한 개비씩 피우는 일을 제외하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만약 이른 저녁쯤이라면 바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혼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라도 했을 법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녀 주위의 가라앉은 공기를 흩뜨리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세 병째 마시고 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병째 맥주를 주문하려 그녀가 손짓을 보내자 맥주를 가져다주며 바 안의 여자가 묻는다.
“……일 년 전요.”
그녀가 대답하자 바 안의 여자는, 네에, 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하지만 여자의 그런 반응은 잘 알겠다는 의미보다는 그만 물어보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는 그녀의 일 년 전에 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p. 19)

「한밤, 편의점의 고양이」
자신의 애인으로부터, 생활은 물론 작품까지도 너무 일상적이고 모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는 소설가. 하지만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삶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떨어진 비누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에 K라는 어린 여자를 만난다. 그 둘은 함께 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K는 함께 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춤’이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그는 말없이 안아준다. 여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애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며 애인에게서 풍기는 낯선 향수 냄새에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잠이 든다.

거기까지 얘기하는 사이 K와 나는 맥주 한 캔씩을 다 마셔버렸고, 봉지를 열어보니 두 개의 맥주가 더 남아 있다. 이제 좀 아껴서 마시자, 하고 말하며 맥주를 건네자 K가 씨익 웃음을 흘린다. 담배를 한 개비씩 피워 물고 그걸 다 피울 때까지 K와 나는 말이 없다.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다가 침묵이 찾아들자, 이곳이 이렇게나 조용한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다. 저 멀리 교사의 일 층 창문은 어두운 운동장 저편에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어쩌면 날이 샐 때까지 저 창의 불은 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의 남자, 혹은 여자는 무얼 하고 있을까. 잠이 들었을까. 어쩌면,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네에 앉아 있는 수상한 존재들을 알아차리고 표 나지 않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부스러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갈 기회를 노리는 고양이처럼.(pp. 61~62)

「붙박이장」
남자의 붙박이장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산다. 어떻게 해서 붙박이장 속에 있었던 건지, 어디서 왔는지, 심지어 이름이 뭔지도 모르지만, 그는 퇴근한 후엔, 한 달 전 어느 날 밤 붙박이장에 들어온 그 여자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에게는 여자가 붙박이장에 들어오기 전, 함께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사라진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여자에게 하던 그날 밤, 여자는 처음으로 그와 사랑을 나누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다. 이 작품을 쓴 작가와 인터뷰를 하는 잡지사 기자는 이 작품을 프랑스 소설 「벨라 B의 환상」과 연결 지으며, 환상과 실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터뷰를 마친 소설가는 집으로 돌아와 여자가 사라져 텅 빈 붙박이장을 보며 다시 옷을 채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식사 준비를 끝낸 그는 한족 벽의 붙박이장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똑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똑.
그가 다시 한 번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러자 그는 옷장 문틈에다 대고 말했다.
“나야. 뭐 좀 먹어야지.”
조금 후, 옷장의 문이 열리고 긴 머리의 여자가 하나 나왔다. 그녀의 살결은 놀랄 만큼 희고 부드러워 보였고, 옷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온전히 벗은 몸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온 그녀는 길게 기지개를 한 번 켠 후에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새워를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두건처럼 감사 올린 채로 식탁으로 와 그와 마주 앉았다.(p. 70)

「샤워하다 뒤돌아보면」
남자는 어느 날부터 샤워를 할 때 자신은 왜 뒤를 돌아보지 않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뒤를 돌아본다. 그랬더니 등 뒤에 펭귄이 서 있다. 혹시 동물원을 탈출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 훔친 장물인지, 이런저런 상황을 떠올리며 걱정하던 남자는 결국 체념하고 펭귄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남자 외에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펭귄으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도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생활에 스스로 만족하며 지낸다.

어느 날 샤워하다가 뒤돌아보니 펭귄 한 마리가 있었다.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한 대 지방에 있어야 할 동물이 이런 곳에 존재하는지, 그건 현재로선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내 집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녀석이 누군가가 키우던 애완동물이었든 동물원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이든, 제 발로 나왔든 누군가 훔쳐낸 것이든, 일종의 분실물 아니면 장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녀석을 경찰에 인계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안 될 말이다. 그럴 경우 법적으로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습득물을 신고하지 않고 부당하게 취득한 것이 되거나, 심하게는 장물을 취득한 것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한순간 녀석이 조금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녀석도 엄연한 생명체인데, 이 도시에서 독립한 하나의 주체로 생활을 영위해나갈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분실물, 장물 등으로 부류돼야 하니 말이다. 하기야 팽귄들의 얼음 도시에 어느 날 나 혼자 떨어져버렸다면, 녀석들도 나를 비슷하게 취급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 순간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나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혼잣말로 조그맣게 읊조리고 있었다.
“펭귄들의 얼음 도시에 나 혼자 떨어지다……”(pp. 111~12)

「버터플라이」
수영을 좋아하는 그는 늘 버터플라이만 한다. 그것도 눈을 감은 채로. 그것은 바다를 상상하며 수영을 하기 때문인데, 그런 그의 꿈은 바다에서 버터플라이를 하는 것이다. 그의 연인인 여자는 어느 날,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다른 도시를 찾아가겠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여자가 거절하자, 그는 그날 자신도 바다에 가겠다고 한다. 그날이 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여자는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걱정하다 날치처럼 파도를 헤치고 오르는 그의 환상을 본다. 다시 만난 둘은 그들이 꿈꾸었던 그것들이 그날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확실히 나는 연기력이 없는 편이다. 지나치게 태연한 내 말투를 보고,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챈 듯했다. 나중에 내가 정말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에게 모두 말해줄 것이다. 나 자신에게조차 아닌 척해왔지만 실은 내가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을 참말 그리워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자 그 그리움이 덜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이미 내가 그리워하던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앞으로 또다시 그 사람을 볼 이유가 없어진 것은 애초의 내 생각대로 된 셈이지만 오히려 더욱 깊어진 그 이상한 그리움만은 앞으로도 내내 간직하고 살 수밖에 없겠다는 체념을 안은 채 돌아왔다는 것을……(p. 153)

「풍선을 찾아 떠나는 여행」
시멘트 광장에서 저녁을 먹던 남자는 그곳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혼자 여행 중이었던 그 여자와 근처 바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아파트에 함께 간 후, 여자는 남자의 아파트에서 며칠 머물기로 하고 남자가 알려준 그 도시의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한다. 낮에 가보았던 곳을 늦은 밤 아무도 없을 때 다시 찾기도 하고, 무서워 울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 무서움을 극복할 무렵,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떠난다.

어쩌면 가끔 지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비가 내리는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내가 꼭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기다리는 대상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순간 오히려 손바닥만큼의 기다림마저 완전히 사라졌을 때의 편안함이 빗물처럼 나를 적시고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며 나를 안심시키는 해 질 녘도 아닌 데다 아무도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한 이 빗속의 광장을 실은 오래전부터 찾아와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자, 몇 해 전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나버린 그 사람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싶었다. (pp. 174~75)

「Blackbird Fly」
회사 빌딩의 옥상에서 남자는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얼마 전 회사 옥상으로 올라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친구의 이야기를 한다. 남자가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검은 새 한 마리가 하늘 위를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여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대신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러자 아까처럼 검은 새 한 마리가 높은 하늘 위에서 아른아른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서서 그 검은 새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한두 가지씩은 간직하고 살지 않을까 싶다.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고, 따라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쉽게 설명할 수도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고 나른하게 느껴지는 그런 일들 말이다. (p. 186)

「어느 날 갑자기」
주유소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어느 날 다른 도시에서 온 여자가 나타난다. 예전에 그 도시에서 역시 주유소에서 일했던 그 여자는 자신이 떠났던 남자를 다시 만나러 왔노라고 말한다. 남자의 아버지는 그 여자와는 반대로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남자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에게로 떠났고, 아버지는 말을 잃은 채 철거가 예정된 집에서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를 기다리지만, 남자는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놀이동산에서 일을 할 때, 새로운 가족과 그 놀이동산에 놀러온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밤의 교외를 차로 달리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도심 같으면 늦은 시간이라도 도로를 따라 켜져 있는 가로등과 환하게 불을 밝힌 간판들, 그리고 그 사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온함을 느끼게 해주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두컴컴한 교외의 도로를 달리다 주유소로 들어오는 자동차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넓은 주유소 한가운데에 자동차가 멈춰 서고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면, 그 안에서 나타나는 얼굴들은 환한 불빛 속에서 오히려 더욱 고독하게 느껴진다. (p. 189)

「바다 위의 주유소」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는 남자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했던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로 떠난 후에도 다시 아내가 돌아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우연히, 비 오는 바닷가에서 울고 있던 모습을 본 이후 주유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 한 여자와 마음을 나누게 된다. 여자는 떠나간 어머니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와 자신의 아버지가 바다 위에 주유소를 지어놓고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다른 배가 주유를 하러 오더라도 기다리던 사람 때문에 늘 떠나보내고 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니, 아직 꿈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실내의 모습이 평소와 너무 똑같다. 밖엔 비가 오는 것인지 커튼을 걷어놓았는데도 실내가 까만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초인종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간다. 만약 발소리를 크게 내면 문밖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 소리에 놀라 되돌아가버릴지도 모를 일 아닌가. 돌아온 걸까. 이렇게 갑자기 돌아온 걸까. 천천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문밖엔 아무도 없다. (pp. 230~31)

「홍콩발 이메일」
출장 차 홍콩에 간 남자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담아 늘 아내에게 이메일을 쓴다. 그러던 중 본사 직원들이 마련해준 관광을 하다가 남자는 가이드를 맡은 여자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 여자는 아이를 잃은 후 충격에 빠져 남편과 멀어졌고, 결국 남편이 그녀를 떠나자 홍콩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둘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쉽게 가까워지지 못한다. 홍콩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난 마지막 날, 남자는 아내에게 마지막 메일을 보낸다. 하늘로 보내는, 답장을 받을 수 없는 메일은 이제 그만 쓰겠다고. 천천히 잊어간다 해도 미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가이드를 했던 여자와의 감정을 조심스레 확인한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잊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사람이 무엇인가가 잊힐까 봐 낯선 곳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더 용기 있잖아요.”
그녀는 나의 말이 갑작스러웠는지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낯설던 이곳이 이제 손바닥 보듯 훤하고 익숙해졌는데도 아직 이 모양인 걸요 뭐. 어떨 땐 홍콩은 꼭 거대한 주유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유소……라고요?”
“사람들을 태운 차들이 끊임없이 주유소로 밀려들어와 주유를 하고 떠나가듯, 이곳에 붙박여 살기보다는 낯설고 새로운 기억들로 무엇인가를 잊으려 애쓰다 다시 떠나가곤 하거든요.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하기야 어차피 주유소는 길 위에 있으니, 영원히 목적지가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p. 271)

작가의 말

다시 한 권의 책을 묶어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된 것이 한 줄 한 줄을 쓰기 위해 오래도록 애쓰고 애달파 했기 때문이라면 모르겠으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스스로의 나태함 때문인지라 뿌듯하기보다 부끄럽기만 하다.

내게는 참으로 도시적인 이름들인 고양이와 시멘트 광장, 주유소를 열쇠말로 느슨한 연작을 구성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다.

하루하루 일에 치이며 그걸 핑계로 시간이 나면 안온한 휴식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만 했던 내게, ‘내가 작가였지’ 하고 자각할 수 있게끔 계절에 한 번씩은 원고를 청해준 몇몇 출판사에 감사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어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 같은 것이었다.

어른들이 주인공이기에 꼭 착한 사람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요정이라고 해서 굳이 새하얀 날개를 달고 있지도 않으며,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봤더라도 술을 많이 먹어서 그랬거니 하고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울타리가 없는 이야기를 동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를 포함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실상 동화의 주인공이 아닐까.

혼자서 바에 앉아 술을 마시다 혹 말을 걸어올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은 감춰둔 이야기 하나쯤은 다들 갖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각자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또 언제쯤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묶어내게 될까.
2009년 9월
최대환

목차

I. 고양이
잠 못 드는 그녀
한밤, 편의점의 고양이
붙박이장

II. 시멘트 광장
샤워하다 뒤돌아보면
버터플라이
풍선을 찾아 떠나는 여행
Blackbird Fly

III. 주유소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위의 주유소
홍콩발 이메일

해설_일상의 에크리튀르·강동호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최대환 지음

최대환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중편소설「화면 속으로의 짧은 여행」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연작소설집으로 『클럽 정크』, 중편소설로 『새드마우스의 1920년대』가 있다. 헤럴드경제 등 신문사 기자로 일했고, 현재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경제뉴스 데스크 겸 앵커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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