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64

신영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7월 24일 | ISBN 9788932019727

사양 · 126쪽 | 가격 7,000원

책소개

미묘하고 신비한 그림자의 판각들

한국 현대 시에서 ‘여성적 시 쓰기’ ‘여성-몸으로 시 쓰기’의 날카로운 징후를 보여준 시인이 있다. ‘여성적 상상의 모험’이라는 전선을 따라 이동한 한국 현대시의 전위 속에서 시적 육체 내부의 불온한 다성성을 폭발시키며, 이 시인은 ‘여성 혹은 소녀의 몸의 상상력’으로 ‘물의 담화’와 ‘물의 드라마’를 생성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시인은 초현실적이고 환영적 이미지를 실재로 만들어내며 그림자를 육체적으로 수행하는 두번째 시집을 내놓는다.
한국의 여성시의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젊은 시인 신영배가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에 이어 두번째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파란색의 첫 시집이 물의 이야기였다면 저녁 어스름을 닮은 색의 이번 시집은 그림자 이야기다. 오후 여섯 시, 길어진 그녀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첫 시집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시인의 언술은 여성이라는 질환의 증상이자 증후, 그것에 대한 주술이자 여성적 몸의 상상적 모험이 체험하는 ‘환상 통로’의 기록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물의 이미지였다. 그녀의 시에서 물은 끝없이 흘러 다니며 편재했다. 투명한 물에서 검은 물로, 갇힌 물에서 넘쳐나는 물과 증발하는 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은 단지 비유의 대상이 아니라 언술 방식 그 자체였다. 여성적 시 쓰기의 다른 몸을 열었던 주술로서의 신영배 시는 “사라지는 시” 혹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로 향했다. 물이 ‘증발’한 그 자리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후 여섯 시에 가장 길어진 모습으로.

이번 시집에서 그녀는 그림자-몸으로 실존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강계숙은 이러한 기이하고 독특한 변이가 형태 변화의 자유와 지각 방식의 자유 낳는다고 설파한다. 크기, 부피, 길이, 넒이, 윤곽, 농도 등 형태를 가늠하는 규칙, 기준, 한정, 틀에서 벗어나는 그림자는 기고, 흐르고, 떠다니고, 흔들리고, 들러붙고, 수시로 옮겨 다닌다. 하여 그것은 영원한 변화의 다른 이름인 것이며, 고정된 형식화를 거부하는 이러한 몰형식의 자유가 사물의 형상과 눈앞의 풍경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신영배의 시에서 빌딩 속에서 나무가 일어서고, 지평선 위로 새가 흐르고, 강이 날고, 머리카락이 닿으며, 때로 얼굴이 지표면 가까이 떠다니고, 연인의 하체는 강물에 빠지고, 뱀의 꼬리는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자-몸으로 감득한 외부의 형상은 주지와 상식, 전형이나 관습과 무관한, 방금 새로 태어난 세계이며, 여기에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없고, 분별도 없고, 동화나 합일도 없고, 앞뒤나 위아래 구분 없이 서로의 일부로 붙었다 떨어지고, 각자에게 속했다 분리되고, 물리적 시공간을 잊은 채 떠돌기 때문인 것이다.

그녀의 시는 그림자의 온갖 모험의 기록이자 자기 감각과 형태의 한계를 넘어가는 예술적 자유의 도정이다. 예술적 자유란 언제나 그렇듯, 전통과 권위, 객관적 가치와 규범에 대한 전면적 부인이며, 비록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의 수인(囚人)이 된다 할지라도 개성의 미적 산출은 단지 자기 기준을 따를 뿐이며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을 생명으로 한다는 원리의 실현이다. 넘치는 자유의 길을 따라 신영배의 언어가 부조하는 미묘(美妙)하고 신비한 그림자의 판각들은 기존의 형상과 감정의 틀을 최대한 흩뜨리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형식화함으로써 예술이, 시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 정점에 선다. _강계숙, 해설 「그녀, 그림자 되다」에서

그녀의 시집 앞에서 독자들은 이전에 없던 언어가 일어서는 사태 앞에 놓이게 된다. 혼란과 낯섦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림자마저도 덜어내려는 절대적 비움, 적어놓은 이야기 전부를 바람에 날리려는 절망의 순도, 다 내려놓았으니 다 가져가라는 버림의 극치…… 또 다른 극단에 서 있는 신영배 시인의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치명적이고, 서늘하게 아름다운 그녀의 시가 한 걸음 다가설 것이다.

작품 속으로

옥상에 앉아 있던 태양이
1층 유리창으로 내려온다
유리 속을 걷는 구두는 반짝인다

구두가 접힌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밝고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으로는 지상에 없는 음악이 올라온다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는다

나의 아름다운 바지는 다리가 하나이다
지퍼 하나, 주머니는 넷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여섯 시 꽃에 닿는다
닫히는 문에 손을 찧으며
여섯 시 꽃으로 들어가 여섯 시 꽃에서 나온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지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감겨 있을
내 그림자 끝으로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꽃이 눈알을 강물에 떨어뜨린다
새가 부리를 강물에 떨어뜨린다
연인이 하체를 강물에 떨어뜨린다

뱀의 꼬리가 서쪽으로 늘어난다

얼굴은 지표면 가까이에 떠다닌다

밀은 부어올랐다
밀은 충혈되었다
말은 고름이 괴었다
말은 늙어갔다

눈은
꽃이 있는 곳에서 꽃이 없는 곳으로 간다
입은
혀가 있는 곳에서 혀가 없는 곳으로 간다
코는
향기가 있는 곳에서 향기가 없는 곳으로 간다
귀는
바람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없는 곳으로 간다

얼굴이 강을 건넌다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부연 입자의 배열로 돌아간다

목 위에 안개를 얹고 연인을 찾아간다
연인이 환하게 웃는다
나는 空의 아내
-「얼굴은 안개로 돌아간다」

건물 위에는 나무가 자란다
땅이 없이
나무는 플라스틱이다

건물 옆 고가도로에는 자동차가 달린다
정류장이 없이
자동차는 공중이다

2층에는 아직 햇살이 남아 있다

계단을 오르자
얼굴이 없이
우리는 눈물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자를 들어 올리자
떠오르는 찻잔 떠오르는 물컵

바닥에 놓인 우리들의 그림자를 뜯어
머리 위로 띄우자
떠오르는 모자 떠오르는 구두

테이블 위에는 연기와 음악
테이블 위에는 떠도는 말과 어떤 항해의 기록

창가에 햇살이 머물 때
햇살이 아직 파도일 때
푸른 천장을 밀고 온 돛단배에
우리들의 그림자를 태우자

그리고
우리들은 고요히 기록을 남기자
배를 떠나보내며

빛의 자음과 모음으로 그림자를 쓰자
-「2층 햇살돛단배」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창문을 열면
귀에서 귀로 냄새가 퍼졌다

그 발바닥을 보려면 얼굴을 바닥에 붙여야 하지
아무도 공중에 뜬 자국을 보지 못한 때
문자가 내려와 땅을 디디려는데
바람이 그것을 가져갔단 말이지

구더기처럼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 줄 남기고 다 버려 우리들의 문학수업

시외로 가는 차량 근처에 너를 떼어버리고 오다
멀리멀리 가주렴 문장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야

살갗 같았던 문장과 이별하고도
아름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는
목만 끊었다 붙였다

태양 아래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내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판다
내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내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내 그림자 무덤에 두 번의 절
그리고 축문

오늘 나는 그리자 없이 일어선다
흰 눈동자의 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내 발목을 잡는 검은 손
어제 장례를 치른 그림자가 덜컥 붙는다
발끝을 내려다봐
끊은 목 아래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이별은 계속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붙이고 붙인 살덩이를 끊고 끊어
차분히 내려놓을게
공중에 뜬 발바닥 아래로

다 내려놓을 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
-「발끝의 노래」

시집 소개

그녀의 그림자-몸은 기성의 감각으로 감지 못한 세계의 이면이나 뒷면, 혹은 사물과 사물이 맞닿으면서 일으키는 파장의 보이지 않는 면을,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사이[間]’의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그녀의 언어가 부조하는 미묘(美妙)하고 신비한 그림자의 판각들은 가장 적요하고 잠잠하지만 결코 기성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 정점에 서 있다. 그러니, 오후 여섯 시, 그녀를 따라 가장 길어져보자. 빛의 자음과 모음으로 점이 될 때까지, 점을 따라 무겁고 둔한 몸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하여 숨겨진 저 이면들 ‘사이’로 그녀를 따라 들어설 수 있을 때까지……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모래가 아직 꽃이었을 때의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내 두 다리는 문장이다.

모래가 아직 꽃이었을 때 사막은 향기롭고

두 다리가 멈춘다. 다리가 다리를 더듬는다. 흐르는 모래 위를 다시 걷는다.

모래가 아직 꽃이었을 때 사막은 향기롭고, 바람은 혀가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

다리가 멈춘다. 발목에 흘러내린 혀를 떼어낸다. 다시 걷는다.

모래가 아직 꽃이었을 때 사막은 향기롭고, 바람은 혀가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 태양은 점으로 인간을 지웠고

멈춘다. 다리가 길게 늘어난다. 그림자 끝에 내 머리가 떨어져 있다. 정수리에 꽃이 피어 있다. 닿는 순간 사라지는 꽃. 혹은 점.

걸어간다. 머리를 주우러 그림자 끝으로.

발끝의 그림자 위에서

두 다리가 걷는다.

작가 소개

신영배 지음

1972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2001년 『포에지』에 「마른 피」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기억이동장치』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물속의 피아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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