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점 찍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60

홍신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5월 29일 | ISBN 9788932019598

사양 · 120쪽 | 가격 7,000원

수상/추천: 김달진문학상

책소개

사유와 감각을 끌어 모아 빚은 삶과 죽음의 우주적 섭리

우연을, 점 찍다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 홍신선이 7년 만에 새 시집 『우연을 점 찍다』(문학과지성사, 2009)를 발간했다. 총 3부 61편의 시들로 꾸려진 이번 시집은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다. 1991년부터 발표한 「마음經」연작의 대미(3부)가 포함되어 있는 이번 시집은 그간 시인이 걸어온 시적 행보를 일단락한다. 다른 한편, 이번 시집은 40여 년간의 시들을 망라한 『홍신선 시전집』(산맥, 2004) 발간 이후 첫 시집이기도 하다. 2008년, 오랜 세월 걸어온 교육자의 길에서 벗어난 시인이 삶 속 죽음의 허무를 지나 발견한 시에 대한 ‘초심’으로 쓴 ‘새로운’ 시들은, ‘지금까지의 시’들과 차이를 이룬다.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젖히는 시집 『우연을 점 찍다』는, 그러므로 “홍신선이 자신의 모든 경험과 사유와 감각을 끌어모아 빚은/빚을 ‘홍신선 시’의” 새로운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1996년에 발표한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춘식은 홍신선의 시 안에서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이자 ‘선택’이고 ‘지향점’이며” 그러므로 “시인은 ‘죽음’을 욕망의 틀로부터 해방되는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시인은 자서를 통해 “싱싱한 탄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행보에 늙음이 급제동을 밟는다”고 말하면서 그 끝에 “이제 생도 시간 앞에 고개 숙이는 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나와 다른 개체인 죽음을 안기 위한 시인의 이러한 노력은 “목숨 밖의 깨달음으로까지 연결”되며,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시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홍신선의 노력은 죽음을 당연시하여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삶/죽음을 아우르는 ‘생의 전체’를 꿰뚫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죽음 껴안기’는 그 이후 계속된 「마음經」 연작 등의 작업을 통해, 13년이라는 더딘 시간을 견디며, 섬세하게 다듬어져 일곱번째 시집 『우연을 점 찍다』에 이른다.

다시, 시의 광야에서
시집 『우연을 점 찍다』의 첫 시인 「나의 시」는 다소 노골적인 그 제목 그대로 이번 시집을 묶는 홍신선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준다. 마치 응축되어 있는 가스처럼 터지기 직전의 ‘시’는 그 어디를 향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목소리가 아닌, 견디고 견디다 “필생의 결단처럼 양손 가볍게 놓아 버”리고 “수백 수십 길 곧추 떨어”질 듯 위태롭다가, 기어이 “대명한 하늘땅 사이/먹먹한 목청 큰 사자후 한 방”으로 터져 나온다. 이렇게 터져 나올 시에 대한 각오이자 일종의 예고는 지금의 것이 아닌 미래의 것이며 이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알게 되는, 직시하는 자에게 돌아올 “빛나는 포상”이다.
홍신선에게 “빛나는 포상”이 될 사자후의 시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교직 생활(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로부터의 은퇴에서 기인한다. 시인인 그가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이 기묘하고, 일견 모순된 정황은 그의 시를 다시 처음으로, 하지만 아주 처음과는 같지 않은 자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시인 본인이 직접 뒤표지 글에 밝힌 것과 같이 다시 광야로 돌아간 초인은 이제 목청을 놓아 ‘사자후’를 부릴 것이다. 그 ‘사자후’는 이전의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과거형도 현재형도 아닌 미래형이며 다짐 섞인 명령형이다. 이 시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첫 시가 되는 「나의 시」 이후로부터 찾아오는 모든 시라고 할 수 있다.

세속성에 대한 통찰
『우연을 점 찍다』의 60여 편의 시들은 모두 “세속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된다. 벚꽃이 떨어지는 벚나무 아래서, 11월 설악산을 올려다보며 쓰는 것뿐 아니라, 퇴직을 하여 자신의 빈 자리애서, 재개발을 위해 허문 성인용품점에서, 연탄불을 갈면서 찾아내는 평범하고 의외인 순간에 시는 터져 나온다. 어쩌면 홍신선만이 구축할 수 있는 이러한 세계는 속/성, 삶/죽음, 시/비(非)시 사이에 위치하며, 한몸이라 할 수 있는 이 ‘차이’를 본질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시화(詩化)한다.
이러한 홍신선만의 ‘시화’의 한 축은 불교적 언어관의 적극적 차용이다. 이는 단순한 불교적 세계관이 아니다. 홍신선은 이를 시적 장치로 이용함으로써 일상을 시로 옮겨온다. 삶과 죽음이라는 원환적 세계관은 불교의 세계관과 매우 닮았다. 특히, 일상에서 찾아내는 시는 불교에서의 선(禪)과 흡사하다. 그러나 홍신선의 삶에서 바라보는 죽음은 무심으로부터의 종착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 일상에 녹여버린다. ‘초인’의 목적은 시이지, 깨달음이나 깨우침이 아니다. 이 둘은 시와 닮았으나, 다르다. 특히 홍신선의 오랜 화두인 삶과 죽음에 대한 천착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의 생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우연을 점 찍다』를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사랑과 회한, 깨달음과 각오의 말들로 가득 차 있”는 시집이라고 평하면서 시인의 “죽음 자체에 있지 않으며, 죽음이 삶에 간섭하는 방식과 그것을 수용하는 존재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 주목한다. 특히, “기필코 오고야 말 완전한 죽음을” “시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맞이하는” 홍신선의 시적 태도는 “진정한 ‘나의 시’를 완성하는 시인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삶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삶을 지고 죽음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살아버리는 시인에게만 허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經
1991년부터 발표되어온 「마음經」의 대단원도 이번 시집을 주목하게 만든다. 연작시는 각 개별의 시들 묶어 한 편의 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20여 년간 한 제목으로 연작시를 쓴다는 것은 보통 역량의 일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이면서 일상의 풍경인 「마음經」은 그러므로, 홍신선 시 세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마음經」을 “몸이 경험하는 숱한 유동과 이합집산, 생명 충전과 죽음의 과정을 대자연(우주)의 경전을 베끼는 “사경(寫經)”의 행위”로 규정짓는 평론가 김수이는 “대자연의 경전은 실물과 언어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만, “없는 경전을 베끼는 “사경”이란” 무상한 일인 동시에 “한존재가 그의 삶의 일부이자 외부를 이루고 있는 ‘사경(死境)’을 끊임없이 살아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처럼 「마음經」은 시인 본연의 삶/죽음의 풍경이며 그것은 대자연의 모습을 닮은/같은 시의 몸인 것이다.

시작이면서 끝인 시집 『우연을 점 찍다』는 경계의 시집이다. 그 경계에는 늘 ‘시적 찰나’가 존재하고, 그 ‘찰나’에서 시인은 어디에서든 시를 발견해낸다. 그러나 그 찰나가 놀라운 현상이 되고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사자후가 되는 것은 오직 진정한 ‘나의 시’를 완성하는 ‘시집’에게만 허락되는 일이다. 홍신선의 시집 『우연을 점 찍다』가 단순히 시인의 약력에 더해지는 한 권이 아닌 까닭이다.

■작품 속으로
나의 시

왜 전신 마비 침대의 사내처럼 너는 늘 등밀이 등밀이로만 누워서 흐르는가
절벽에서 꼭 한번만은,
어떡하긴
필생의 결단처럼 양손 가볍게 놓아버려라
수백 수십 길 곧추 떨어지다 일어서다 마침내 한 방 먹이거라
대명한 하늘땅 사이
먹먹한 목청 큰 사자후 한 방
귀청 장렬히 터진 뭇 회중들의 먹은 귀때기들도 쓸어버려라
죄다 묻어버려라

폭포여
시여

벚꽃 대전(大戰)

웬 갑병들 곳곳에 화사한 진채를 벌여놓았나
워커힐 경내 늦은 봄밤
나이 칠팔십 줄 노경의 벚나무는
제 안 방방에 칸데라 불을 밝히고 섰다
음송하듯 어린 민며느리가 읽는 세창서관본 삼국지라도 듣는지
장판교 위에서
장팔사모로 장비가 백만 적군의 간담을 콱,콱 꿰어 떨구는지
저 늘그막의 벚나무 짚신짝만 한 귀에 골똘히 쓸어 담고 있다
시간은 한낱 낡고 추레한 몇 벌 갑주일 뿐이니
골 깊은 속적삼 속으로 등긁개 넣어 긁는지
옆의 또 옆의 벚나무 시간을 흉갑을 훌훌 벗어 터는지
아니, 필마단기의 고요가 수수십만 벚꽃 대군들 무찌르는지
바람도 없는 공중에
임자 없는 모가지들 자욱하게 끊어져 날린다
마지막이 있어서 늘 장엄한 저들
대살육판의 낙화여
앉아라 앉아라
서서 서성이지 말고
피자집 자리 나기를 대기하는 사람들이
마음속 소리 죽여 읽는 것도 바로 이 벚꽃 대전 몇 대목인가
머지않아 낙화판 낙화처럼
저도 그렇게 진다고 별수 없다고
간이 의자들 옆 고삐 놓인 융마(戎馬)들처럼 몸 부르르 부르르 떨면서……

포상, 빛나는

인사팀 담당자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그동안 여러 십 년 짐 졌던 세간(世間)을 마침내 부렸구나 했으나
웬일, 땅 멀미하듯 몸이 일순 휘청했다
이 현훈(眩暈)도 무위도식에 대한 무슨 포상인가
평생 듀오백 의자처럼 비비고 기대어온 등받이가 없어진 거기
행정실 광막한 허전함에
폐품 직전 누더기 등짝 하나 붕 떠 있었지
일과 끝난 텅 빈 연병장의 쓸쓸한 하기식처럼
속의 절규들 퉤, 퉤 뱉어낸 퇴역의 깃발처럼
나는 거기
낯익은 공간에 한순간 깜박 혼 놓고 떠 있었지
본관 건물을 걸어 나오며 입안에 왜글거리는
임대 못 한 상가 동을 꿀꺽 삼킨다
네 귀 접힌 채로 보관함에 담긴 앞날을
어디에 다시 게양할까
과연 새로 앉을 등받이 의자는 물컹한 말인가 기억인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 일어나 퇴장하는 거기
일장춘몽 생애에 대한 가장 빛나는 포상은 죽음임을
머물던 세간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짐이자 등받이 부실한
한때 일터임을

마음經·44

누가 우그러든 양은솥 밑바닥을 득득 달창 숟갈로라도 긁는가.
허공에는
설 누른 밥티처럼 켜켜로 일어나는 것, 무시로 떨어지는 것,
저 묵음 처리 잘된 낙화들
발 디딜 틈 없이 떴다.

성근 묏비 속에 비설거지 채 못 한
왕벚나무들이 열어놓은 양은솥들, 양은솥들,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입구까지의.

지금도 그 큰 솥에 다시 안쳐서 삶는 것은
죽음인지
시간인지
뒤적대는 빨래 주걱으로 수수십 동 종이 빛 인조견 건져 널고 있는데……

생전의 김구용이 읽다 만 목판인가.
끝끝내 해독 안 된 자구(字句)들 며칠째
절로 들어가는 마음 길에
제법 폭우처럼 쏟아진다.

마음經·45

어느 때는 처마 끝 녹슨 풍경 안에 은신한 청동 물고기로
후, 다, 닥 튀어 올랐다가 잠적하는

어느 때는 엉뚱하게 도청길 바쁘게 날리는 낙화들 틈새
잠깐 뒷모습 두었다가 잠적하는

그렇게 잠적에서 잠적으로
뭇 현상들의 뒷길로만 경공술로 나는 듯 자취 없이 달리는
천 길 깊숙한 잠행이여

텅 빈 허공에서도
그립다 마음 쏟으면 불쑥 나타나 보이는
보이다 불쑥 안 보이는
누군가의 가뭇없는 발소리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고 흐르는 바람이여 인연이여

■시인의 말
호랑이 등에 올고 달리면 끝장까지 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기호지세(騎虎之勢)’란 옛말 그대로 시를 타고 달리다 어디쯤 나도 끝날 것이다. 요즈음 운명이란 그런 것이고 삶 역시 그런 우연이란 생각에 곧잘 황홀해한다.

그동안 오래 더듬더듬 매만지던 「마음經」도 일단 마무리했다. 생각의 좀도둑질도 끝난 셈인가. 개별 시집으로는 이번이 일곱번째다. 결코 부지런한 다수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밀고 갈 수 있는 한 갈 생각이다.

2009년 초여름
홍신선

■뒤표지 글
한 시절, 나에게 문학은 절대의 물신(物神)처럼 군림했다. 대신 발 디딘 현실은 모질고 끝 모를 황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 쥐뿔도 없고 턱없이 막막했어도 문학 탓에 그 황야를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좌충우돌했었다. 그 감각이 다시 온 걸까. 퇴직 후에 그런 황야를 다시 만난다.

왜 늙음이고 죽음인가. 그것에 저항하는 몸의 전략이 이즈음 나에겐 시다.

마음도 개개인을 떠난 보편적인 마음이 따로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육조 혜능은 마음이란 개개인의 구체적인 평상시 마음임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일상의 구체적인 마음-무명(無明)을 벗은 그 참모습의 발견이 ‘도’라고 설파했다. 그렇게 그는 일상생활 속에 선(禪)을 끌어들였다. 농사를 짓는 것도, 나무하고 물 긷는 일도 선이다. 시 쓰는 일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작가 소개

홍신선 지음

194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전문지『시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홍신선 시전집』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했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3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