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8

정일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3월 12일 | ISBN 9788932019413

사양 · 127쪽 | 가격 8,000원

수상/추천: 육사시문학상

책소개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놀라운 서정의 깊이

올해로 등단 25년을 맞은 시인 정일근의 열번째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 사이로 출간되었던 그간의 적지 않은 시집들에는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과 사람들이 섬세한 감성과 조탁의 언어로 담겨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시인으로 살아온 정일근의 정서가 거기에 남아 있다.
1984년 『실천문학』 제5권에 신인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일근은 첫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에서 고난 받는 이웃들을 향해 간곡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며 자신을 키워준 마산과 주변 세계에 대한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들에 다가가고자 했다. 이후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1995) 등을 펴내면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다섯번째 시집 『경주 남산』(1998)에서는 서지월 시인이 “「경주남산」 연작시를 통해 시의 정수를 독파”했노라고 극찬했듯이 그야말로 서정시의 한 아름다운 풍광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또한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의 발문에서 고은 시인은 “이번 시는 또한 하염없는 사랑의 얼굴이 마음속 그물에 찬란하게 걸리기도 하며 어린 시절 숨겨지는 얼굴이 떠올라 오늘의 자신이 거기 다가가기도 한다. 낮은 소리로 가만가만 읽어가노라면 눈이 먼저 화답하여 눈물이 어른거리지 않을 수 없다. ‘겨울 새벽’도 있다. ‘무량수 인연’도 있다. 이 시집 내고 시를 그만둘 것인가? 꼭 이승을 하직하는 노래 같기만 하구나”라는 말로 그의 시적 성과를 높이 샀다. 뿐만 아니라 안도현 시인은 “죽음 직전의, 아픔의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정일근 형의 시는 이렇게 한세상을 얻어 깊어졌다. 바야흐로 무르익은 절정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일근의 개성적인 시 세계는 그 후로 펴낸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2006)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친구이자 동료인 시인 최영철은 그를 두고, “정일근은 타고난 시인이다. 독자들은 시 속으로 들어가기 전 그 아련한 말의 그물에 걸려 한번쯤은 정신을 잃고 만다”고 평한 바 있다. 과연 그의 시는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서정의 힘과 놀라운 시적 상상력으로 충만하다. 전작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이후 3년 만에 내놓는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보면 이러한 정일근 시의 매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총 3부에 걸쳐 실린 61편의 시 한 편 한 편에 정일근 시인이 지금까지 펼쳐온 시 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제1부 「분홍 팬티」에서는 ‘바다’와 ‘고래’의 이미지가 두드러져 나타난다. 시인에 의해 호명된 그 망망대해 앞에서 독자들은 ‘바다’라는 공간보다 그것이 가지는 깊이에 먼저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 바다는 의식의 심연에 자리한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형상화된 것으로,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시인의 언어는 한 마리 고래의 모습으로 유영한다. 여기서 고래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 그 자체의 모습이자 시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끝내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지만, 독자는 그 고래의 빙산의 일각만 보고서도 바다 속에 숨겨진 거대한 실체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제2부 「채송화」에는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짧은 시들로 자연을 노래한다. 시인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은詩앗·채송화’는 한 페이지의 짧은 시를 쓰는 모임이기도 하다. 시인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조차 곁에 남아 다 받아주는 것은 자연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도 자연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을 향한 고마움, 시를 향한 사랑이 2부의 짧은 시편 속에 올올이 박혀 있다. 제3부의 제목인 「은현리」는 현재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3부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의 실제적인 현주소이자 내면의 현주소라 할 수도 있겠다. 유독 상처에 관한 시편들이 많은 까닭도 그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지만 어떤 상처일지라도 정일근 시인의 깊은 서정의 바다 위에 띄워져 “아련한 말의 그물”로 건져 올리면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노래로 탈바꿈된다. 그의 시집을 덮고도 한참 동안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고래, 孤來”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으로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나의 고래를 위하여」 전문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게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전문

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
어린 모종에서 시작해
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
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
노란 속 꽉 찬 배추를 완성하기 위해
손등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 있었기에
어머니의 배추는 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詩가 되었다
나는 한 편의 詩를 위해
등 굽도록 헌신한 적 없어
어머니 온몸으로 쓰신
저 푸르싱싱한 詩 앞에서 진초록 물이 든다
사람의 詩는 사람이 읽지 않은 지 오래지만
자연의 詩는 자연의 친구가 읽고 간다
새벽이면 여치가 제일 먼저 달려와 읽고
사마귀가 뒤따라와서 읽는다
그 소식 듣고 종일 기어온 민달팽이도 읽는
읽으면서 배부른 어머니의 詩
시집 속에 납작해져 죽어버린 내 詩가 아니라
살아서 배추벌레와 함게 사는
살아서 숨을 쉬는 詩
어머니의 詩 ─「어머니의 배추」 전문

남쪽에 큰 눈 온다는 일기예보 믿기로 하자
오늘은 밤새워서라도 눈 기다리기로 하자
무엇인가 간절히 믿어본 지 오래다
또 무엇인가 기다려본 지 참 오래다
나는 마당에 나가 벚나무와 함께 직립으로 서서
고립무원의 폭설을 기다린다
나에게서 출발했던 모든 길 버린다
나에게로 돌아왔던 모든 길 버린다
오직 하늘의 길 기다린다, 돌아보면
내가 선택했던 길은 나를 버렸다
나를 선택했던 길은 내가 버렸다
나는 얽히고설킨 세상의 그 길을
하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다
운명으로 믿었던 손금 속의 길 지운다
몸속으로 퍼져 있는 붉은 인연의 길 지운다
안과 밖의 경계마저 지워버렸을 때
하늘에서 폭설 내려와 새 지도 만들 것이다
어떤 길도 기록되지 않은 순백의 지도 위에
첫발자국으로 시작되는 새 길 만들 것이다
차가운 지도 위에 가장 뜨거운 길 내며
내가 나에게로 가는 길 만들고 싶다, 따뜻한
남족에 내린 거짓말 같은 폭설 경보 믿으며
하늘 주머니 터져 쏟아져 내릴 축복
축복의 폭설 기다리며 ─「폭설을 기다리며」 전문

시집 소개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시인에 의해 호명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이 바다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 그 공간이 갖는 깊이가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에 자리한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시인의 언어는 한 마리 고래의 모습으로 유영한다. 끝내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 고래의 이미지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모습이자 시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이 서정의 깊이에 빠져드는 순간, 이 시집에 선명하게 각인된 상처와 그 상처의 고통스런 치유 과정마저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은현리(銀現里)’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시골 마을에 둥지를 튼 지 햇수로 십 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사이 산자락에 자리한 은현리 윗동네에서 들판이 가까운 아랫동네로 이사를 했다. 낡고 좁은 누옥이지만 마당이 넓어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는 ‘청솔당(聽?堂)’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시를 쓴다. 전화도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버리고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라디오 하나만 곁에 친구처럼 남겼다.

청솔당은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숨어 있어 하루 종일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집이다. 추녀 끝에 선물로 받은 실로폰 풍경(風磬)을 달았는데 가끔 바람이 찾아와 적막을 깨고 간다. 그 적막에 길들여졌는지 대문을 지키는 ‘적막’이란 이름을 가진 개도 짖지 않고 산다. 마당의 나무도 조용히 가지를 흔들고 꽃이며 들풀도 고요히 피고 진다.

사람에게 적막은 왼쪽 가슴에 있는 제 심장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 소리가 무엇을 향해 뛰는지 알게 되는 일이다. 은현리에서 내 시는 내 심장 소리다. 오직 그 사람을 향해 뛰는 심장 소리다. 내 심장 소리를 귀 열고 따뜻하게 들어주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 햇살이 맑아 내 적빈의 밑바닥으로 시의 빛나는 몸이 지나가는지 어루숭어루숭하다. 여기까지 찾아온 시여, 고맙다 참 고맙다.

작가 소개

정일근 지음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처용의 도시』『경주 남산』『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오른손잡이의 슬픔』『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등이 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2001), 소월시문학상(2003), 영랑시문학상(2006), 포항국제동해문학상(2008) 등을 수상했으며, ‘시힘’과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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