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12월 10일 | ISBN 9788932018294

사양 · 112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형체를 띤 세상 모든 것들에 가해지는
무한, 생생, 발랄 시적 상상의 힘!
언제까지고 떨림이 그치지 않는 “만개한 적막”의 세계

황인숙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안내문구. 지난한 생의 절망과 비의를 곱씹되 가볍고 살가운 이른바 ‘황인숙풍 언어’로 슬쩍 띄워 품어줄 것. 지상 위 생명들에게 약동하는 상상력의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 줄어들지 않는 탄성으로 지표에 붙박인 의식을 팽팽히 조일 것. 대개 이런 자장 안에서 읽혀온 황인숙 시인이 여섯번째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를 출간했다. 직전의 시집 『자명한 산책』(2003) 이후 4년여 동안 발표한 시 가운데 총 57편을 가려 묶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전도적 상상력(오규원),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대립(김현), 독특한 탄력과 비상의 언어(정과리),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사랑의 방식(김진수)으로 설명돼온 황인숙의 시세계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 시적 ‘묘미와 깊이’가 큰 폭으로 확대되고 있다. 첫눈에 내용과 형식의 간결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언어의 혼동, 목소리의 혼란 속 틈새의 발견이 사물이나 관계의 명징함을 깨우치는 것 이상으로 근사하고 의미 있는 작업임에 주목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 세상 어디건/ 어느 쪽인가의 반대쪽”(「입장과 방향」)이란, 발설하기 무섭게 군내 나고 트림마저 비어져 나올 듯한 흔하디흔한 잠언 앞에서조차 부지불식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황인숙 시의 언어적 묘미와 정서적 깊이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쉰 살 문턱을 넘는, 24년차 직업시인은 등딱지처럼 지고 가는 물리적 시간의 무게도 가뿐히 압축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순간의 기억을 올올히 새긴다. 단지 주어와 술어가 자리를 바꿔 앉거나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건너뛴 그 자리에서 얄밉도록 짤막한 그러나 긴요한 시구를 뽑아내는 황인숙 시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찰나다.

이번 시집의 얼마쯤은 ‘오후 4시’의 몹시 피로한 시적화자가 차지한다. 또 얼마쯤은 구슬프고 서정적인 파두가, 고적함과 권태와 깊은 졸음이, 그리고 또 얼마쯤은 “세상의 모든 비탈”과 골목 어귀, 지붕 위를 거니는 사람과 고양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어 말한다. 이전 시집들에서 조연쯤에 그쳤던 이들은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당당히 주연배우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결국 겹겹이 쌓여가는 삶의 결을 읽어내는 작업일 텐데 여기서 시인은, 되돌리고, 되돌리고, 또 되돌려봐도(「repeat」) 구태의연하고 지리멸렬하게 계속되는 삶이란 것이 항의하듯, 신음하듯, 애소하듯, 혹은 누가 죽어가는 듯, 미치겠는 듯(「버지니아 울프」) 소리소리 지르다가도 이내 커다랗게 깔깔깔 웃어보이고(「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 대꾸하지 않아도 상심하지 않는 옹알거림으로, 투덜거림으로, 킬킬거림으로(「無言歌」) “그래, 이대로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하고(「여름 저녁」), “좋아,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는!”(「흐린 날」) 하고 ‘버럭’ 중얼거려보는 걸 거라고 얘기한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낮잠」). 세상은 어쩌면 딱 이만큼만 복잡할 뿐이다. 대단찮은 생이란 결국 이런 것이라고 말이다.

넘어야 할 담도
넘고 싶은 담도 없다
담이 없으니 문도 없고
개구멍도 없다
담도, 문도, 개구멍도 없으니
들 일 날 일 없어
몸도 없는 듯
땅바닥에 빗긴 금이나 (어떻게 되나 보려고)
넘어본다, 고 하지만
쿵! 아구리를 한껏 벌린 쓰레기통에도 떨어지고
고가도로 밑 복개천에도 떨어지고
저무는 한강 물에도 떨어지고
장난감 기찻길에도 떨어지고
(좀 복이 있다면,
현재 습도 사십칠 퍼센트
낮 최고기온 이십오 도 오 부인 날
벚꽃 밑에도 떨어지고)
위조한 공문서에도 떨어지고
엿본 사문서에도 떨어지고
듣고 싶지 않은 의무 조항에도 떨어지고
애걸복걸에도 떨어지고
죽어라 도망가는 고양이 위에도 떨어지고
발랄한 멧돼지 위에도 떨어지고
눈 덮인 기타 등등 외로운 etc.에도 떨어지고.
―「spleen」 전문

도시의 골목, 골방, 기울고 생채기 난 곳이면 어디든 속 깊은 눈길로 응시하는 시인은 “꿈인줄 알면서도 어색하다/ 어찌나 어색한지 꿈같지 않다”(「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라고, 혼몽과 혼돈의 경계 이쪽저쪽을 넘나든다. ‘황인숙의 고양이’라는 마치 고유명사화된 그 유명한 고양이의 실체와 목소리를, 대체 시적화자가 시인 본인인지 아니면 고양이인지 구분이 모호한 대목도 바로 여기이다.

지붕들이 품고 있을 크레바스와 동굴들, 겹과 틈까지
샅샅이 굽어본다
와우, 저 지붕을 쫘아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견적을 뽑는데
[…]

뒤안길도 사라진 이 도시에서
지붕 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지붕 위에서」 부분

얄팍한 시집의 전반부는 고양이를 닮은 봄날의 나른함과 여름 장마의 선뜻함이 메우고 있고, 후반부는 “쇠대야 하나/ 왱댕그랑 뒹굴며 바람의 행렬에 합류”하는 ‘가을의 끝’을 향해 재촉하다가 그만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에 이른다.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전문

“속이 탁 트이도록/ 멍해지도록” 소리소리 지르며 달리고 난 후에 얻는 카타르시스 대신 왠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을 먹먹하게 하는 이번 시집이다.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진 뒤에도 오래도록/ […]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잊어버린 듯한”(「유령」) 그곳을 향해 시인의 마음이 낮게, 차분히 가라앉아 간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쇠락이 교묘하게 공존해 있는 대륙의 끝, 항구도시 리스본을 향해 달리는 야간열차에 실린 시인의 몸과 마음이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게 만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전하는 파두의 기타 선율을 타고 흐르는 것일까.

■ 시집 해설 中

시란, 뭔가 생의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좀 이상한 ‘이야기=감각’을 펼치며 ‘필자=독자’를 새롭고 낯선 감동의 장으로 꼬드겨 올리려는 ‘이상한 찰나’의 게임 아니겠는가. …… (황인숙에게) 외경은 소위 생명의 거룩함 운운과 다른 외경이며, 두려움 너머, 종교 너머 시의 외경이다. 그 ‘외경=시’는, 부드러움을 견고한 외계와 동일시하면서 애초부터 발랄은 나이를 먹어감에도 불구한 발랄이 아니라, 나이 먹을수록 자연스러워지는, 생명이 가벼워지는, 다이어트 되는 결과로서 발랄이라는 것을 족히 깨우쳐준다. _김정환(시인)

■ 시인의 말

문득 궁금하다. 내 속에 아직 시의 씨앗이라는 게 살아 있어, 촉촉이 비 내린 뒤 햇빛 쏟아지는 날들엔 발아할까. 아니면 이미 모래알처럼 굳어버린 걸까. 다른 이들도, 근면해야 시를 거두는 걸까, 아니면 절로 풍요로운 시의 정원을 홀홀히 거니는 시인도 있는 걸까.
또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졸린데 꾹 참고 일어나곤 하는 걸까, 아니면 늘 나만큼 졸립진 않은 걸까.

■ 앞날개 소개글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들의 흐름 속에서 물비늘처럼 언뜻언뜻 드러나는 낯선 시간과의 신비한 조우에 대해 노래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집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고양이들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일상의 시간과 낯선 시간의 어렵고 불편한 대면을 주선하는 시간의 중매쟁이다. 이 느닷없는 두 시간의 결혼으로 인해 우리는 잊고 있었던 원초적 시간의 얼굴과 냄새를 온몸으로 충돌하듯이 맞닥뜨리게 된다.

■ 시인 에세이(뒤표지)

지하철에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란 책 광고판을 보면서 불쑥 중얼거렸다. 꽃은 아름다운 돈이겠지. 모든 게 살짝 역겨웠다. 돈, 돈!
‘돈’이란 단어를 발설하는 것만도 창피해, 피치 못할 땐 방점을 찍으면서야 입 밖에 내던 시절이 까마득 오래전이다. 언젠가는 크리넥스 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가득 채워 휴지처럼 뽑아 쓰고 싶다는 농담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했었지. (이젠 그도 성에 안 차, 집 안에 현금인출기를 하나 들여놓고 뽑아 쓰고 싶다.)
도무지 모든 게, 모두가 살짝 역겹던 어느 날, 서울역 못 미처 동자동 대로를 걷고 있는데 확성기로 거리를 울리며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죄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이거나 극우 반공 인사의 성난 일갈이려니 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돈은 영혼을 파괴하고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려 그 차를 바라봤는데, 이미 멀어져가고 있는 차에서 청아한 선율이 들려올 뿐이었다. 내 영혼이 선동되면서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설움에 차, 그 선율의 따스하고 깨끗한 물살에 몸을 적시며, 서 있었다……

작가 소개

황인숙 지음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있다.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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