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9월 28일 | ISBN 9788932018041

사양 양장 · · 312쪽 | 가격 11,000원

책소개

통속을 걷어낸 반짝이는 상상력으로 단숨에 독자를 사로잡는 그녀의 신작 소설집.
다시, 김애란이다!

그렇고 그런 일상에 단물처럼 고이는 이야기들…
슬픔도 담담하게 쓸쓸함도 유머러스하게~

왜, 김애란인가. 2005년 말, 그녀는 문단과 각종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대산창작기금 수혜부터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식, 그리고 첫 소설집 출간. 인터뷰 기사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단과 언론은 그녀를 반겼고, 그녀와 관련된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하여 그해를 정리하는 기사에서는 “한국 문단이 거둔 최대의 수확 중 하나”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일보에 실린 ‘2005 문화 검색어 톱 10’의 다섯번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 기사의 첫 문장은 “올 문단의 화두는 세대교체였다”로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그 다음 해인 2006년에도 식지 않았고, 2006년에 주목하는 작가로 다시 한 번 그 열기를 이어갔다.
출판평론가 한기호 씨는 2005년 ‘올해의 책’으로 『달려라, 아비』를 꼽으며 김애란의 소설에서 세상의 변화를 읽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외국 소설의 범람 속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이 소설들에서 1980년대생 작가들은 자신을 ‘버린’, 그래서 늘 불면의 밤을 보내게 만든 아버지와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이는 불가해한 세상을 사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찾아갈 것이다. 이는 내년, 나아가 21세기 우리 사회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다.”
김애란은 영상세대의 새로운 문법을 구사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 전통적인 소설문법에 충실한 작가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김동식 씨는 김애란 씨의 이러한 특징을 “전통적인 소설의 표정을 지은 채로 소설의 전통적인 문법을 그 내부로부터 허물어뜨리는 작가”로 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 ‘문학의 위기’ ‘소설의 위기’ 운운했던 2000년대, 문학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새로운 신인에 목말라 있던 우리 문단에 80년대생 젊은 작가의 이토록 흡입력 있는 작품은 신선한 청량제처럼 다가온 것이다.
첫 소설집 이후 2년이 지났다. 다시 그녀의 새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그녀를 향한 또 다른 평가가 기대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그녀가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로 이야깃거리를 가득 안고 돌아왔다. 다시, 김애란이다.

우리가 김애란에게 기대하는 것들
김애란은 수식어가 많은 작가 중 한명이다. ‘무서운 아이’ ‘80년대생 소설가의 선두주자’ ‘문단의 샛별’ ‘신선한 파란’ 등 변화를 상징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그녀는 “최연소라는 수사 주위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이름 앞으로 쏟아진 다른 수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여 그녀는 그러한 주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신화가 아닌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힌 그녀였다. 그 후 발표된 작품들은 ‘이효석 문학상’(「침이 고인다」) ‘이상문학상’(「침이 고인다」) ‘현대문학상’(「성탄특선」) 등의 후보작 및 ‘올해의 좋은 소설’(「도도한 생활」)에 선정되며 문단과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래서 이번 두번째 소설집이 더욱 기대를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김애란 작가를 두고 소설가 이기호 씨는 “이 양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작업을 거는구나”라고 얘기한 바 있다. 또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는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말로 김애란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이처럼 김애란에 대한 문단의 찬사와 기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작금의 한국 소설을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 일치단결이 그렇고 그런 안간힘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은 조만간 출간될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이러한 반응이 예사로 부풀려진 것이 아님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학평론가 차미령 씨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애란의 전작들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는 ‘투명한 감성’ ‘위트 넘치는 문체’ ‘청신한 상상력’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이번 그녀의 두번째 소설집은 다시 한 번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다시, 김애란이 보여주는 것들
차미령 씨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두루 환영받은 첫 창작집 이후, 김애란 소설은 더 몸을 낮추고 더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 전작들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편의점과 원룸 역시 세련된 일상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남루한 자리였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여인숙(「성탄특선」)과 반지하 방(「도도한 생활」)이 이번 소설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러니한 제목이 각 작품에서 보여주는 비루한 일상을 더욱 가슴 아프게 드러낸다. 지상의 방 한 칸마저 끝내 허락되지 않는 젊은 남녀들에게 매해 ‘역병’처럼 돌아오는 성탄절은 ‘특선’이라 할 수 없고, 물이 들어차는 방 안에서 연주하는 피아노는 도도하기는커녕 비애가 뼈아프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 역시 김애란의 소설이 보여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춰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탈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재무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작가는 더 낮고 누추한 자리에서부터 다시 소설적 상상력을 가동시킨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특히 그 공간을 “당신과 내가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그 작은 ‘방’ ”으로 보고, 김애란의 소설이 “ ‘방’을 둘러싼 유폐와 소통의 위상학을 심화시키면서, 그것을 새로운 ‘우주 지리학’ 위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설파한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이라는 공간에 연루되어 있는 개인 서사, 그 개인 서사의 상상적 지리학”이며, “이제 김애란의 서사는 가족 로망스의 변주에서 방의 지형학에 대한 동시대적인 탐색으로 성큼 나아”가고 있음을 역설한다.
“동시대 젊은 세대의 사회문화적인 궁핍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개인성의 균열과 심연을 탐사하고, 그 안에서 실존의 지리학과 우주적 공간을 발견하는 상상적 모험을 펼쳐 보”이는 김애란의 새로운 이야기가 이 가을, 독자를 찾아간다. 조금은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꿈을 꾸는 그들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보면, 단물처럼 입 안에 고이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작품의 줄거리

『도도한 생활』
만두 집을 하는 엄마는 ‘보통’의 기준에 따라 ‘나’를 동네 음악학원에 보내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를 사서 만두 가게 안 작은방에 들여놓고, 장사가 끝난 뒤 ‘나’에게 연주를 청해 듣곤 했다. 내가 자라 대학에 입학할 즈음 아빠가 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는 바람에 집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나’는 엄마의 요구에 따라 서울에 있는 언니의 자취방으로 피아노와 함께 상경을 하게 된다. 언니가 세든 반지하에서 피아노는 그 위엄을 잃고, 주인집 눈치 때문에 칠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하루 빨리 학교에 다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워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모으던 어느 날, 장마철의 쏟아지는 비에 반지하로 물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계산대 보는 일을 하는 언니는 일이 바빠 얼른 전화를 끊어버린다. 방 안의 물을 퍼내며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아빠의 전화가 걸려오고, 이어서 언니의 옛 애인까지 술에 취해 나타난다. 좀 모자라 보이는 언니의 애인을 부축하다가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방 안에서 잠겨가는 피아노를 본 ‘나’는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본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쩌다 음악 따윌 배워 그 울음의 이름을 알게 됐으니, 조금은 나도 시대의 풍문에 빚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p.19)

『침이 고인다』
아침 마다 알람 소리에 좀더 잘 것인가 일어날 것인가 주저하는 그녀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다. 학원 체육대회가 있는 날, 이어달리기 선수로 출전하는 그녀는 아침에 화장실에서 생리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아파오는 아랫배를 쥐고 출근을 한 그녀는 자신이 학원 아이들의 논술 첨삭 일을 소개시켜준 후배의 실수로 부장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그녀는 함께 살고 있는 후배에 대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후배는 어느 날 그녀를 찾아와 하룻밤 재워줄 것을 부탁했다. 선뜻 하룻밤의 호의를 베푼 그녀는 그날 밤 후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립 도서관에서 껌 한 통을 주고는 사라진 엄마에 대한 후배의 이야기는 그녀를 부담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담스러웠던 것은 그때 남은 하나의 껌을 보여주던 후배가 그것을 찢더니 반쪽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때 아직도 입에 침이 고인다는 후배와 그날 이후 그녀는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후배와의 동거에 좋은 점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나 차츰 그녀는 후배의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후배의 단점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이불과 후배의 바지 위에 묻은 얼룩을 보고 후배에게 생리하느냐고 다그치다 결국 동거를 끝내자고 얘기한다. 후배가 떠나고 그녀는 전에 후배에게 건네받은 껌 반쪽을 씹으며, 다시 혼자임을 느낀다.

(본문)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p.61)

『성탄특선』
사내는 추리닝 차림으로 담배 한 갑과 라면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헤어진 연인을 생각한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동생과 한방을 쓰는 사내는 연인과 마음 놓고 껴안을 수 있는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반지하와 옥탑방을 전전하는 동안 연인을 그를 떠났고, 사내는 홀로 성탄절을 맞았다. 사내의 동생은 남자 친구와 성탄절을 함께 보낸다. 그들에게는 네 번의 성탄절이 있었지만 함께 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은 마땅한 옷이 없다는 이유로 여자가 시골로 내려갔고 한번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남자가 거짓말로 피했으며 마지막 한번은 둘이 헤어졌었던 것. 그들은 보통의 연인들이 하듯 저녁을 먹고 칵테일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모텔을 찾는다. 그러나 미리 서둘지 않은 다음에야 성탄절에 빈방이 있을 리 없었고, 그들은 빈방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이주 노동자들이 장기투숙을 하고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돌아나온다. 매해 똑같이 반복되는 성탄특선 영화를 보다가 무료해진 사내가 포르노 동영상을 보며 자위라도 할까 하던 중에 밤새 방을 찾아 헤매느라 지쳐버린 동생이 돌아오고, 둘은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잠이 든다.

(본문)
오늘 밤, 세계에는 많은 ‘사람의 아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사내는 성탄절에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자신이 못마땅하다. 그 안부는, 상대의 기분을 상상하느라 자주 눌러본 탓에 막상 누군가의 손에 도착했을 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멜로디 카드처럼 실패의 예감을 안고 있다. 사내는 그녀에게 자자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하고 난 뒤 홀로 주먹을 쥐었을 때처럼, 그때와 똑같이, 작게 중얼거린다.
“나는 왜 이렇게 빤한가……”(p.84)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나’는 대학 졸업 후 취업 실패를 거듭한 끝에 학원 강사로 전전하고 있다. 학원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하철에서 다음 역이 노량진 역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듣고, 그곳에서 보냈던 재수 시절을 떠올린다. 97년 IMF가 터진 다음 해, 유난히 지원자가 몰렸던 교대에 떨어진 ‘나’는 약속의 땅처럼 느껴진 노량진에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 ‘나’의 자리는 여성 전용 독서실, K-59. 임용 고사 재수생 언니와 공무원 시험 준비생 언니 사이에서 어서 빨리 그곳을 떠나기를 바라며 지내왔던 시간이었다. ‘나’를 좋아했던 다른 학원의 민식이와 시시한 로맨스도 있었지만 그곳을 떠나면 서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저 지나가는 곳이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한 뒤에도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자신을 생각해본다.

(본문)
1999년 봄 노량진 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과 ‘좆나’ 똑같은 대학생.(p.125)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 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p.148)

『칼자국』
항상 누군가를 거둬 먹이며 칼을 쓰면서 살아온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칼로 썰고, 가르고, 다져가며 해주신 음식들을 먹을 때면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켜져 아프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20여 년 동안 국숫집을 하며 나를 키운 어머니 옆에서 그 삶을 지켜봐온 딸의 이야기이다. 25년 전 인천의 한 재래시장에서 1,500원짜리 칼을 산 뒤로 어머니는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그러나 억척스럽고 거친 모습 안에서 ‘나’는 소소한 일에 크게 마음이 움직이는 어머니의 여성스러움을 함께 보았다. ‘나’는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떨어져 살면서 점차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입덧으로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하다가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오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비어 있는 집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머니의 칼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찾아와, 그 칼로 사과를 베어 먹으며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간다.

(본문)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pp.151~52)

『기도』
대학 졸업 후 잠깐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문제가 생겨 그만둔 후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나’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신림동 고시원까지 오게 된 ‘나’의 언니가 신림동에서 만난 반나절 동안의 이야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좁은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신림동 고시원 사람들의 풍경과 어떠한 위치도 갖지 못한 채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살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본문)
1층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게시판에 붙은 포스트 잇이 보인다.
─통행 시 반드시 뒤꿈치를 들고 다닙시다. 주인백.
그리고 또 한 장이 보인다.
─제 지갑 가져가신 분, 죽어버리세요.
언니의 방은 3층 복도 끝에 있다. 수십 개의 똑같은 문이 잔혹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려니 했는데도 막상 그 앞에 서니 숨이 막힌다. 어느 방 문고리에 흰색 보자기를 덧씌워놓은 게 보인다. 분홍 자수가 놓인 수예품이다. 문득 그 방 학생은 어디에서든 자기 마음에 정원 한 뙈기는 떼어놓고 살 것 같단 생각이 든다. (pp.200~01)

『네모난 자리들』
이 작품은 엄마와 함께 자신이 태어난 집을 찾아가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무언가 실종된 것들 속에서 자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나’는, 다시 한 번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선배에게서 부재의 자리를 경험하게 된다. 항상 자신의 방에 불을 켜놓고 사는 선배의 방은 선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불이 켜져 있다. ‘나’는 선배가 옛 애인을 위해 어딘가에 숨겨둔다는 열쇠를 찾아내어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끄고 나온다. 그러고 얼마 후, 다시 선배의 방을 찾은 ‘나’는 다시 불을 밝히고 그 빛을 확인한 뒤 집을 나선다.

(본문)
세상 모든 기분 좋은 소리 안에는 바람이 들어 있다. 바람 ‘풍(風) 자의 날렵한 꼬리 안에 매달린 어머니의 말들이, 낱말의 풀씨들이, 골목 같은 내 핏속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발아하는 소리처럼. 내 입속말들이 세계를 떠돌다 당신 안에 들어가 또 다른 말을 틔우는 소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사라진 말과 사라진 기억, 끝끝내 알 수 없거나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장면,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같이 느껴지는 풍경과 함께, 무언가 실종된 것들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먹고 자란 것은 아니었을까.(p.220)

『플라이데이터리코더』
관광지도 아닐뿐더러 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플라이데이터리코더는 육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섬이다. 이 작품은 플라이데이터리코더 37번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 아래 살고 있는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부터 백과사전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는 삼촌과 함께 사는 아이는, 어느 날 마을에 추락한 노란색 경비행기 근처에서 주황색 상자를 발견한다. 주황색 박스에 대해서 묻는 아이에게 삼촌은 그것이 엄마라고 둘러대고, 그 말을 사실로 믿게 된 아이는 상자와 대화를 하며 애틋한 정을 느끼게 된다. 한편, 추락한 경기행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육지 사람들이 플라이데이터리코더에 파견한 정보원들은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블랙박스의 행방을 찾는다. 그러던 중 상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를 할아버지가 발견하여 할 수 없이 아이는 상자와 이별을 하게 된다. 육지 사람들은 블랙박스를 찾아 돌아갔지만 부품 손상과 잡음으로 그것을 해독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들은 다만 들릴 듯 말 듯 녹음된 조종사의 마지막 메시지를 간신히 건졌는데 그것은 ‘안녕’이라는 말이었다.

(본문)
“근데 엄마는 왜 말을 안 해?”
“그게, 서로 다른 종으로 태어날 경우 대화를 할 수 없게 돼 있어. 그래도 몸을 기울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야. 방법은 우리가 발견해내면 돼. 지금 엄마랑도.”
“왜?”
“그게 우주의 윤리야.”
아이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찾아와준 엄마가 고마워서 그리고 삼촌의 말이 미더워서, 조금 가슴이 아팠다. 아이는 블랙박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알을 품듯 가만히 블랙박스를 감싸 안았다. 처음엔 차가운 듯했는데, 오래 안고 있으니 철제 표면에 자신의 체온이 닿아, 함께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작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이가 물었다.
“방에 갖고 가면 안 될까?”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안 된다고, 할아버지가 바다 속에 집어던져버릴 거라고 말했다. 아이의 얼굴이 먹먹했다.
“왜 그래?”
아이가 답했다.
“좋아서.” (pp.268~69)

■ 작가의 말
작가들이 ‘작가의 말’을 쓰는 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 몸을 타고 돌았을 말[言], 피, 그런 것들을 그려본다. 말이 트이는 힘은 그것을 막고자 하는 운동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며. 내가 모르는 밤, 아는 밤, 그런 밤을 그려본다. ‘소설 쓰는 밤’이 아닌 ‘작가의 말’을 쓰는 밤을 떠올리니, 그들 모두가 작아 보여 가깝다.

다시 ‘작가의 말’을 쓰게 된다면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지면이 시시하고 빤한 것이 되더라도. 항상 안다고 생각하면서 몰랐던 게 있는데, 감사의 말이 가지는 무게였다. 작가들의 그 많은 말이 닮은 것은, 그들 곁에 늘 누군가가 있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 누군가 때문에 나는 늘 빚지고, 감동하며 살아간다.

어서 전했으면 좋았을 말을 이제 전한다. 아껴서- 부르지 못한 이름들에게 인사를, 그리고 내게 위안 받았다고 말해준 독자, 이름 모를 당신. 책 뒤에 붙는 이 한 바닥을 빌려 말하니 나도, 진심으로 당신에게 위안받았다.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

2007년 가을, 김애란

목차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나갈 때
칼자국
기도
네모난 자리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해설_나만의 방, 그 우주 지리학·이광호

작가의 말

작가 소개

김애란 지음

1980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산에서 자랐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에 단편「노크하지 않는 집」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국일보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신동엽창작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소설집『달려라, 아비』『침이 고인다』와 장편소설『두근두근 내 인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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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리뷰(1)

독자 리뷰 남기기

8 + 3 =

  1. 김민준
    2015.05.27 오전 10:11

    그거 압니까.. 김애란씨는 독자와의 소통 방법 하나쯤은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는 건 잘 알고 있지만서도 간단한 근황이라도 알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