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7월 20일 | ISBN 9788932017976

사양 · 176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없는 존재가 없는 세계를 노래하는 느낌의 공동체

시인은 화자의 너머에 존재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귀신처럼 화자의 내부를 통과한다. 그것은 이제 서정에서 일탈하여 다른 서정에 도달한다. 이 미묘한 화자의 위치야말로, 그녀의 시가 가진 낯선 서정의 비밀이기도 하며, 이제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이기도 하다. _이장욱(시인, 문학평론가)

전통적인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고 무모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낯설고 모호한 시들이 한국 현대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이 있다. “서정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 긴장이란 면에서 2000년대 시인의 등장 이전에 독보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고 직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쓰는 시인”(신형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행숙 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1999년 『현대문학』 6월호에 「뿔」 외 4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김행숙 시인은 당시 심사위원인 조정권, 김사인씨로부터 “풍부하고 유려하게 시적 몽상을 수행하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이는 사물과 정황의 내밀한 동향에 스며들 수 있는 눈과 귀가 트여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나아가 그는 ‘봄’과 ‘들음’을 언어로 치러내는 법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다”는 평을 들은 바 있다.
등단 이후 4년 만인 2003년, 『사춘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내면서 시인은 전통적인 의미의 서정시와 뚜렷이 구분되는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며 활발한 시작 활동을 펼쳤다. 의미나 이미지보다 느낌과 감각을 살린 그녀의 시는 “풍부하고 유려”한 “시적 몽상의 수행”의 작법을 상황과 장치로 활용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장욱씨가 밝힌 바와 같이 “서정에서 일탈하여 다른 서정에 도달한” 시인의 행보는 “ ‘현대시’의 어떤 징후”가 되었고, 이 첫 시집을 통해 그녀는 “시를 쓴다는 것은 윤리학과 온전히 무관한 사춘기적 ‘경계’에 머문다는 뜻”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 ‘사춘기’를 지나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두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권으로 나왔다. “경계에 걸려 흔들리는 불안한 감성”이 첫 “시집의 미학을 조준”(이장욱)했다면, 이번에 나온 새 시집 『이별의 능력』에서 그녀의 시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시뮬라크르들을 사랑하라”고 “은은하게 권유하고 발랄하게 유혹한다.”(신형철)

이별의 능력▶사랑의 능력▶시인의 능력
김행숙 시인의 언어는 특정한 시적 의미로 수렴되지 않고 의미의 바깥으로 흩뿌려진다. 그래서 그녀의 언어는 “원심적 언어, 기표와 기의의 빗금선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면서 흘러다니는 언어”로 표현되곤 했다. 그녀의 시는 의미 확정을 통한 단일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 낯선 언어 앞에서 독자들은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행숙의 시가 매혹적인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그녀는 “ ‘세계’를 느낌의 조각들로 분해하고 ‘나’를 개별적인 느낌들의 도체(導體)로 개방”한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헛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세계가 분해되며 ‘나’도 해체된다. 결국 그녀의 시는 없는 존재가 노래하는 없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김행숙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현상은 ‘상징’이 아니며,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실존적인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특정한 느낌의 전달만을 목표로 할 뿐이다. 이러한 특정한 느낌을 신형철씨는 “시뮬라크르”로 설명한다. 또한 그는 “시뮬라크르로서의 대상을 포착하는 섬세한 감각, 혹은 대상을 시뮬라크르화하는 방법론적 가벼움이 그녀의 시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덧붙인다. “한없이 사소해지기를 원하는 시, 정말이지 순수한 헛것들에게만 헌신하는 시,” 그것이 바로 김행숙의 시가 가진 매력이자, 김행숙 시의 문을 열기 위한 하나의 열쇠라는 것이다.

한편 신형철씨는 해설의 서두에서 『이별의 능력』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사랑의 능력’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이다. 그는 이것을 “느낌의 공동체”라 명명하였다. “느낌의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구성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은 능력”인 것이다. 김행숙 시인의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김행숙 시인은 “어떤 특정한 느낌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느낌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녀의 시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시가 보여주는 느낌의 조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김행숙의 시를 만남으로써 “느낌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이것은 “사랑의 능력”이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시인의 능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의 시는 은은하게 권유하고 발랄하게 유혹한다. ‘시뮬라크르들을 사랑하라.’ 김행숙 시의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 작품 속으로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_「이별의 능력」 전문

호르몬이여, 저를 아침처럼 환하게 밝혀주세요.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태풍의 눈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 자가 제게 사기를 쳤습니다. 저 자를 끝까지 쫓겠습니다.

당신에게 젖줄을 대고 흘러온 저는 소양강 낙동강입니다. 노 없는 뱃사공입니다. 어느 곳에 닿아도 당신이 남자로서 부르면 저는 남자로서

당신이 여자로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세번째, 네번째, 일곱번째 사다리에서 거지가 될 때까지 카드를 만지겠습니다. 녹초가 되게 하세요. 호르몬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눈꺼풀을 내리시고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 검은 스크린이 될 때까지 호르몬이여, 저 높은 파도로 표정과 풍경을 섞으세요. 전쟁같이 무의미에 도달하도록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
_「호르몬그래피」 전문

옆모습은 너의 절반일까
똑같은 눈
똑같은 코
냉장고와 프라이팬에 나뉜 고깃덩어리처럼
꽁꽁 어는 것
불 위에서 녹고 타는 것

옆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어디까지 확장될까
상상은 잘 펼쳐지지 않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구부러진 팔을 상상하는 순간
무서워!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처럼
팔은 꿈속에서도 먼지 속에서도 자란다

선반은 언제나 너무 높고
네가 발꿈치를 들 때
손이 손을 떠나 네가 문득 비었을 때

똑같은 손이란 무엇일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네가 네게 칼자국을 몇 개 긋고
싱싱한 화초처럼 불꽃을 심을 때
오그라드는 살과
명확해지는 뼈
너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하여

천천히 회전한다
네게 박수를 보낼 수가 없어!
오른손이 왼손을 모르고
오른손이 오른손도 모르고
너는 자꾸 벗어난다
_「옆모습」 전문

어둠이 몰려서 온다. 녀석들. 녀석들
검은 비닐봉지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면서 찢어지는 얼굴을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죽은 건 줄 알았는데 개의 죽음은 또 아주 멀었다는 듯이 발을 모아 높이 뛰어오르고, 착지와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선상에서 음표처럼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 아닌 바퀴들이 지나가고

오른쪽 어깨 위에 어둠, 왼쪽 어깨 위에 어둠, 나는 어깨인지 어둠인지 녀석들인지 나는 나에 한정 없이 가까워

나는 거의 끝까지 멀어지고. 어둠에는 초점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잔치를 위해 돼지가 돼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분할되고. 환하게. 남녀노소 고기를 씹는다. 이빨 사이에 고기가 끼고. 그러나 고기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나는 코만 남아서 정신없이 냄새를 맡는다. 냄새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녀석들의 코. 돌출적인. 뭉툭한. 냄새는 약 기운처럼 퍼져 여기 오래 있으면 냄새를 잃게 돼. 우리들은 장소를 옮겨 코를 지키자. 어둠이 우리를 벗겨내는 곳으로

툭, 다른 곳에 떨어지는 물체처럼 죽은 건 줄 알았는데. 녀석들 어둠 속에서 얼굴을. 얼굴을. 나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_「얼굴의 탄생」 전문

■ 시집 소개

시집 『이별의 능력』은 블랙 유머와 위트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확정된 것이 없다. 하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이것’과 ‘저것’은 서로 경계가 없이 넘나든다. 이 세계는 우리가 안정된 세계라고 믿는 세계를 붕괴시키고 조롱한다. 언어가 구축하고 있는 기지 넘치는 이 세계는 언어 그 스스로를 해체하기도 한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저녁 해처럼 뚝 떨어지는 팔이여, 사랑하는 팔이여, 미워하는 팔이여, 저 휘어지는 채찍이 나의 얼굴을 다른 세계로 돌려놓는다.

당신이 흐느낀다. 당신이 감싸 쥔 얼굴. 쪼개진 몇 개의 얼굴을 나는 흡수한다.

나는 고요한 호수처럼 주름을 펴고, 높아졌다 낮아지는 산과 산속에 숨어 사는 사람과 여러 가지 숨소리와 한쪽으로 날아가는 검은 새들과 실종 43일을 흡수한다.

맹목적인 팔이여, 문득 가벼워지는 우리들의 손목이여, 끝까지 팔을 뻗어 높은 선반에 닿지만 닿을 수 있는 곳을 지나 팔은 꿈속에서도 먼지 속에서도 자란다.

작가 소개

김행숙 지음

시인 김행숙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사춘기』를 펴냈다. 현재 강남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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