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6월 15일 | ISBN 9788932017877

사양 양장 · 46판 128x188mm · 372쪽 | 가격 10,000원

분야 장편소설

책소개

역사가 돌보지 않았던 이름, 벨테브레 혹은 박연朴燕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사내의 영혼을 건 전투가 시작된다

380년 전,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

동세대 어느 누구보다도, 당대의 얼굴, 당대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감각적으로 돋을새김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온 작가 김경욱이 새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문학과지성사, 2007)을 출간했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다작의 부지런한 작가로 분류되어 온 김경욱답게, 이번 소설은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전작 『장국영이 죽었다고?』(2005) 이후 2년 만에 선보인 책이고, 그의 장편 목록에서는 벌써 네번째에 자리하는 소설이다.

『천년의 왕국』은 작가가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에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한 장편이다. 앞서 가상공간을 실재의 현실세계로 탈바꿈시키는 영상세대의 적자로서 그 수다한 영상문화의 기호들에 접속하고 또 그것을 산뜻하게 변용한 글쓰기로 주목받아온 김경욱의 전작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역사소설이란 범주에 한 발 담근 채로 머나먼 시간과 우주를 현재적 감각으로 노래한 이번 『천년의 왕국』에 적잖은 놀라움을 가질 것이다. 혹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멋지게 패러디한 그의 세번째 장편 『황금사과』를 읽은 독자라면, 숨겨진 역사를 무대로 하여 새로운 서사문법에 도전하는 김경욱의 근기(根器)에서 이번 작품을 예견했음 직도 하다. 이런 다양한 시선 혹은 요구들을 짊어진 채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380년 전, 조선 땅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책장을 넘기면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다 간, 분노의 눈물과 쓰디쓴 연민의 웃음으로도 다 보듬을 수 없었던 한 네덜란드인의 처절한 고백이 펼쳐진다.

김경욱은 17세기 조선에 표착했다가 일본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 땅을 밟았던 하멜이 써서 남긴 『하멜 표류기』에 기록된 한 줄 역사에 의지하여, 1000매를 훌쩍 뛰어넘는 애달픈 서사시 한 편을 창조했다. “1653년 여름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된다. 선원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에는 후일 조선을 탈출한 후 13년 동안의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한 하멜도 있었다. 그해 가을 조선의 국왕이 보낸 사자가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인들 앞에 나타났다. 조선 국왕의 사자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이 네덜란드인은 26년 전 항해 도중 조선 땅에 표착했단다. 조선인들은 그를 ‘박연’이라 불렀다.” 『천년의 왕국』은 바로 이 사람, ‘박연’이라 불리웠으나 본시 J.J. 벨테브레라는 번듯한 이름으로 살았던 네덜란드인과 그의 동료, 그리고 당시 그들을 맞았던 조선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이다.

380여 년 전, 듣도 보도 못했던 조선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이들 네덜란드인들의 가난한 운명을 담은 『천년의 왕국』은 조선 땅 네덜란드인, 동양 속 서양인이라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내면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3인칭 ‘그’ 혹은 ‘벨테브레/박연’이 아닌 화자 ‘나’의 고백으로 일관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방인이자 아웃사이더인 인물의 중층적인 내면을 읽고 이해하는 데 주효하다. 대구를 이루는 의고체(擬古體)의 미려하고 우아한 문장은 전통 서정시의 음보율과 음수율을 느끼게 할 정도의 규칙적인 호흡을 타고 뭉긋한 감동의 파고를 견인한다. 정확하고 세세한 역사적 사료의 제시에 부러 인색한 김경욱의 서사 전략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일찍이 등단작 「아웃사이더」를 통해, 기성 질서로부터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 자들의 상처와 자의식 그리고 시선 그리기에 소설의 무게중심을 두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돼온) 김경욱의 행보에 주목해온 자라면 이번 작품이 그 어느 때보다 독서 자체에의 몰입과 거기에서 비롯된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는 데 동조할 것이다.

이번 책에서도 김경욱 소설이면 늘 함께 이야기되는 유려하고도 내밀한 문체, 적어도 열댓 번은 더 담금질했을 문장의 깊은 맛이 의고체의 호흡에 편승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한편 곳곳에서 발견되는, 조선 땅에 표착한 이방인의 의식적인 거부에 기인한 우리 말 구사의 어색함 역시 외부인의 시선과 내면을 그대로 전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과 창조력으로 이해될 만하다. 다만 이제까지 나와 내 안의 타인에게 냉담하고 가차 없던, 삶과 죽음, 죽음과 심연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허무한 시선으로 일관했던 김경욱의 목소리가 한 치 앞의 미래도 짐작키 어려운 고독한 이방인 앞에서 따스하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탈바꿈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변화일 것이다. 예의 건조하고 무심한 듯한 문체에 뭉긋한 시선과 뭉클한 감정의 결합으로 새로운 소설읽기의 매력을 선사하는 『천년의 왕국』은, 김경욱의 소설이 그 문체 면에서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짐작케 하고 나아가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더 넓고 깊어졌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줄 것이다.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복원하고 창조하는 김경욱의 역사적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작가적 고민의 투영에 다름 아니다. 동세대 젊은 작가 그룹에서 그만큼 자주 동서양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널따란 외연을 주저 없이 가져오고, 또 그만큼 사회 속 개인의 사적 진실에 천착하여 내밀하고 성찰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허구/역사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에 기대어, 그리고 이만큼이나 색다른 소재에 착안하여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아이러니, 그 이율배반적 진실이 담고 있는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또 이만큼이나 주도면밀한 자세로 소설쓰기에 도전한 작가는 정작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동세대 작가의 선두에서 전혀 색다른 역사소설의 문법 갱신에 힘을 쏟아부은 김경욱은, 번득이는 작가적 자의식과 곡진한 문장에 힘입어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 세계를 확보해가는 중이다.

■ 작품 줄거리

머나먼 바다
서구 열강의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1627년, 사슴 모피와 설탕을 가득 실은 네덜란드 국적의 우베르케르크호가 인도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중국 해적선과 폭풍우를 만나 검은 바다 낯선 해안에 표착한다. 당초 표착한 선원은 36명 중 최종 생존자는 배의 선장이자 작품 속 화자인 ‘나’ 벨테브레와 요리사 에보켄, 그리고 어린 선원 데니슨 단 세 명이다. 동물원의 원숭이를 다루는 듯 그들을 주시하는 낯선 병사들 중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젊은 관리가 있어 에보켄과 몇 마디 정보를 교환했다. 그는 이곳이 코레아 조선, 제주 섬이라고 일러주었다. 일행은 목에 쇠사슬을 차고 손을 결박당한 채 긴 행군 길에 올라 제주 관아에 도착한다. 그들이 목사라고 부르는 이곳 총독은 그들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자애로웠고, 중앙의 국왕에게 그들의 일을 보고하고 감금 대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베풀었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나 다름없는 감시당하는 삶,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유배나 다름없는 하루하루의 무력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이내 탈출을 도모한다. 예고된 실패는 지금껏 연민의 온정과 자비를 베풀어온 목사의 노여움을 사고 죽음에 이르는 서른 번의 매질을 당한 끝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뒤엎는다. 무위로 돌아간 탈출 기도 후 로테르담 출신의 어린 선원 데니슨은 말을 잃었고, 거칠 것 없는 입담과 낯을 가리지 않는 넉살의 요리사 에보켄은 더욱 집요하게 이곳 삶에 적응해간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조선인의 솜옷으로 간신히 견뎌내고 맞은 이듬해 봄, 국왕의 부름이 떨어진다. 행군 보름 만에 도성에 도착한다. 국왕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젊은 관리의 입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호위부대 병사로 임명할 뜻을 전한다.

이교도의 전사
도성에 도착한 그들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과 억측을 잠재우고자 조선 관리들이 베푸는 주연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조선일들의 성과 윤리, 종교, 생활풍속 등에 대한 정보를 하나 둘 습득해간다. 그들이 도성 수비대에 배속된 후 어린 데니슨은 화승총병을 자청하여 조선인들로부터 ‘신의 손’이라는 새 이름을 얻을 만큼 놀라운 속사의 능력을 과시하고 ‘나’ 벨테브레와 에보켄은 포병부대에 배속된 후 화포 제작에 대한 그들의 재주를 알아본 지휘대장의 눈에 들어 조선군의 새 대포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참혹한 정묘호란을 겪고 타타르 청에 대한 들끓는 증오로 쉼 없이 군사훈련에 임하는 조선 병사들에게 어느 날 밤 호랑이가 습격해온다. 급히 꾸려진 호랑이 토벌대에서 선두에 선 데니슨은 호랑이의 한쪽 눈을 쏘아 죽인다. 조선 병사들은 데니슨에게 ‘호랑이의 눈’이라는 호칭과 붙여 존경하는 한편 그의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며 두려워한다. 눈이 녹고 타타르 사신이 조선 땅을 밟은 날, 데니슨이 두번째 탈출을 시도하다 역시 실패하고 만다.

고귀한 야만
타타르 사신에게 서구인의 체류를 알려 국운을 위태롭게 한 데니슨의 신병 처리 문제를 놓고 조정의 격론이 벌어진다. 서구 이방인의 지식과 재주를 이용, 부국강성을 도모했던 국왕조차 조정대신들의 뜻에 자신의 호의를 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데니슨의 처형은 조선인 무장 전사 둘과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우는 결투의 형식으로 결정된다. 승부가 예고된 잔혹한 처형에 저항하던 벨테브레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처절한 결투 끝에 치명적 상처를 안고 그대로 옥에 갇힌 데니슨은 결국 곡기를 끊어 열여덟의 나이로 이국의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푸주한의 아들로 태어나 이방인의 영웅이자 나라의 죄인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겨울이 가고 다시 이른 봄이 찾아오고, 벨테브레와 에보케은 국왕의 특별 허가를 얻어 데니슨의 시신을 거둔다. 그리고 불에 태워 바다로 날려 보낸다. 수 일 후 몸을 추슬러 에보켄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외출한 벨테브레는 한 무당의 굿을 목도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영험한 예지를 지닌 영매 ‘자줏빛 구름’이라 불렀다. 군중 속에서 벨테브레와 에보켄을 발견한 그녀는 알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공포와 환희로 복잡해진 표정으로 땅바닥에 혼절한다. 이듬해 초 남서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민심이 술렁이고 국왕과 조정은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는 청 타타르의 기세에 휘둘리며 불안한 국운에 근심이 쌓여간다. 이후 에보켄은 ‘자줏빛 구름’과 살림을 차려 나가고 오막에 혼자 남겨진 벨테브레는 화포장 영감을 도와 대포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탈출을 위한 배를 몰래 수소문한다.

영혼의 전투
데니슨의 사건을 계기로 도성을 떠나 남쪽 바닷가 병영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에 처한 벨테브레는 새로 부임한 병영사령관의 의도적인 무시와 횡포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새 병영사령관은 화승총과 대포보다 활이라는 원시적인 무기에 더 매료된 인물이었다. 에보켄의 거절에 혼자 탈출을 감행한 벨테브레 역시 도로 붙잡힌다. 죽음이란 처벌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희소식이 날아들다.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화포를 싣고 바다로 나갔던 사령관이 폭발 사고를 일으켜 전함의 이물이 날아가고 일곱 병사의 목숨이 날아간 일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죄가 알려져 그를 석방하라는 국왕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틈에 벨테브레의 탈출을 부러 알려 오히려 그의 목숨을 구한 에보켄은 ‘트리어의 늑대’라 불리우며 이단 심판관이자 마녀사냥의 핵심인물이었던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후 벨테브레는 다시 대포 제작에 총력을 기울이고 여러 겹의 종이로 방한의 지혜를 터득한 조선인의 말에 힘입어 화력이 뛰어난 대포 제작에 성공한다. 그 와중에 조정 대신의 아들의 아내를 사랑했던 이방인의 친구 젊은 관리가 그 남편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면직을 당하고 타타르 청으로 사신 행렬에 자청하여 스스로 유배의 길에 오른다. 만방에 꽃이 필 무렵 사신 행렬은 전운의 어두운 소식을 안고 돌아온다. 일시에 조정은 화친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진다. 그해 겨울 타타르 12만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국왕의 도성으로 진격해온다. 순식간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국왕과 주요 대신은 인근의 강화도로 급히 피신한다. 이어 남쪽의 산성에 한 달을 겨우 버틸 정도의 식량만을 가진 조선군 병력 1만 2천에 끼어 벨테브레와 에보켄은 죽음의 전투를 준비한다.

■ 본문 속으로

이 왕국의 이교도들은 태양의 뜨거움과 달의 차가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극단을 쉬이 넘나드는 저들의 병적인 활달이 나는 두려웠다. 물 위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야만적이면서 시적이고 불경하면서 신성한 활달이었다. 격렬하게 약동하는 모순이야말로 저들 삶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68~69)

그들의 머릿속을 분주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의 눈에 비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교도들은 우리의 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우리의 풍속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평판에 대한 관심이 그러하듯 바깥 세계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은 거의 병적이었다.
이교도들은 세계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을 숭배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들의 심연 속에 가둘 것이었다. 이 은둔의 왕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바람과 구름과 새뿐이었다. 새로 만나는 이교도가 늘수록 나의 불안은 붉게 달궈졌다. 달궈진 불안은 내 영혼과 심장을 갉아먹었다. 이교도의 초대를 받으면 나는 전날부터 굶었다. 나는 이 은둔의 땅에서 배부른 광대로 죽을 것이다. (108)

내 가난한 영혼은 한 줌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온 우주를 헤매었으나 주인 없는 바다는 떠도는 영혼에게 한 순간의 안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국왕이 내려준 이름은 내 육신을 결박했으나 내 영혼을 정박시키지는 못했다. (117)

때때로 나는 국왕이 내린 신분증에 적힌 내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가해한 내 운명의 표정이 보였다. 내 장래의 향방은 그 표정 속에 있었다. 이교도들은 나를 ‘박연’이라고 불렀다. 국왕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교도들이 나를 ‘박연’이라 부를 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교도들이 나를 재차 ‘박연’이라고 부를 때 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흰옷을 어색하게 걸친 나 자신이 거기 있었다. (120)

무엇을 두려워 말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이교도의 뭍에 표착한 순간부터 두려움은 내 생존의 방편이었다. 내 두려움의 내력은 깊고 질겼다. 분노와 경멸은 두려움의 배다른 형제였다. (293)

십 년! 꿈같은 세월이었다. 나는 이미 천 년의 세월을 살아낸 것 같았다. 산성, 대포, 국왕의 병사들, 타타르 군대, 이교도보다 더 이교도 같은 에보켄……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꿈속의 꿈처럼 아득했다. (356~357)

세 개의 이름을 전전했던 사내는 세번째 얻은 이름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 어떤 이름으로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사내, 이 우주의 고독한 이방인이 내게 남기려 했던 말은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우주의 이방인이 또 다른 이방인에게 생사를 다투며 남기려 했던 전언의 의미를. 그것은 남겨진 자의 생을 통해 완성되리니 온 세상을 덮은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을 건 나의 전투는 이제 시작이다. (367)

■ 작가의 말

1653년 여름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된다. 선원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에는 후일 조선을 탈출한 후 13년 동안의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한 하멜도 있었다. 그해 가을 조선의 국왕이 보낸 사자가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인들 앞에 나타났다. 조선 국왕의 사자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이 네덜란드인은 26년 전 항해 도중 조선 땅에 표착했단다. 조선인들은 그를 ‘박연’이라 불렀다.
짐승도 목에 금줄을 걸치고 다닌다고 알려진 동방의 미지의 왕국에 26년의 시차를 두고 흘러든 네덜란드인들의 대화를 역사는 짤막하게 기록한다. 짤막한 대화는 1627년 표착한 이 네덜란드 사람에게 두 명의 동료가 있었으나 이미 망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뿐이다. 역사는 1627년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에 인색했다. 이 소설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난한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가 그들을 상세히 기억했다면 이 소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줌의 사실 위에 허구의 성채를 건축하려는 자에게 역사의 불친절은 차라리 축복이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내면을 상상해야 했다.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면 수수께끼와 같은 동방의 왕국을 바라보는 이방의 시선은 자연스레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역사가 돌보지 않은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것은 애당초 가당찮은 일이었다. 복원할 수 없다면 창조해야 했다.
380여 년 전 이 땅에 난파한 이방의 내면을 상상하던 내내 나는 내 안의 카오스를 응시해야 했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카오스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니체였다. 소설을 탈고한 지 한 계절이 지난 여태 카오스의 결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독일 철학자의 말이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머리 위에서 춤추는 별보다 내 안의 카오스가 더 소중하다. 자살로써 혼돈의 생을 마감했던 일본 작가는 자식보다 부모가 더 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우주의 춤추는 모든 별은 자신을 낳은 카오스를 노래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안의 카오스를 노래하라. 나는 내 안의 카오스를 노래할 것이니. 별은 춤 춰도 상관없고 춤추지 않아도 무방하다. 두려움 없이 노래하라. 그것으로 족하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허구다. 몇몇 인물들과 사건들, 그리고 세부들은 기왕의 자료에 근거했다. 조선의 역사와 문물에 대한 글을 비롯하여 조선을 다녀간 이방인들이 남긴 기록과 조선에 표착한 이방인들에 대한 글이 그것이다. 암중모색의 허구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특히 하멜이 남긴 보고서는 이 허구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에서 허구와 사실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역사적 사실도 ‘큰 허구’의 틀에서는 ‘작은 허구’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차

*
머나먼 바다
이교도의 전사
고귀한 야만
영혼의 전투

관련 연보
도움 받은 책들
작가의 말

작가 소개

김경욱 지음

김경욱은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위험한 독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장편소설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황금 사과』 『천년의 왕국』 『동화처럼』 『야구란 무엇인가』 『소년은 늙지 않는다』를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종합예술학교 협동과정 서사창작과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787-7 | 가격 7,000원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6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