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2

신대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5월 9일 | ISBN 9788932017747

사양 · 148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오고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워한 곳
은빛 물빛 바이칼 호 앞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춘다.

신대철 시인의 네번째 시집 『바이칼 키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사십여 년의 세월 동안 신대철 시인이 발표한 시집은 이번 시집까지 총 네 권이다.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1977년 출간한 뒤 23년 동안 절필했던 시인은 2000년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2005년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2007년 『바이칼 키스』를 연이어 펴내며 활발한 시작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첫번째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나 두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에 실린 “일련의 시편들이 웅변해주듯이 그는 세계적인 냉전 체제 아래서 남북으로 분할되어 대립해온 한반도의 정치적 현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내면화하여 표현해온 시인이다”(방민호). 특히 그는 이 현실을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수용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시인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뿌리를 둠으로써 어두운 정치적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진실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울림 깊은 언어로 형상화했다.

바이칼 호수 건너 머나먼 곳을 꿈꾸는 시인

이제 2007년 『바이칼 키스』에서 그는 이전 시집 속 시편들에서 이미 예고된 대로 바이칼, 알래스카, 시베리아, 몽고의 광활한 자연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린 시절 화전민으로 살았던 경험과 청년 시절 DMZ와 실미도에서 겪었던 군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을 떠나 황량한 자연 속에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국민대 교수이기도 한 시인은 안식년을 이용해 몽고에서 일 년, 그리고 알래스카에서 반년을 홀로 살았다. 몽고 초원과 바이칼 호를 오가며 사는 동안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만남을 뼛속 깊이 체험했고, 그 체험을 고스란히 시로 완성했다. 그는 이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최전방에서 입었던 정신적 내상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듯하다. 그러나 사람, 생명, 삶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제 자신의 생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시들은 과거와 현재를, 저곳과 이곳을 겹쳐놓으면서 느낌과 의미로 충만한 시적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 그 풍경들 속에는 시의 역사에서 고사(枯死)한 이미지들의 사막 너머로 자연을 닮은 놀라운 형상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 그의 시세계는 가끔씩 풍경에서 탈취해온 것들의 가공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노년의 깊어진 눈으로 우리 민족의 발자취가 새겨진 풍경들 속에 깊은 생명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 시인은 이제 자신의 노년에 도달한 자유로운 정신과 깊어진 감수성을 은총으로 향유하고 있는 듯하다.
_시집 해설, 황광수(문학평론가)

산문적 자유로움 위에 사뿐히 놓인 아름다운 서정 운율

도시의 삶과는 완벽히 동떨어진 자연 속에서 사는 이들을 만나며 시인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이루어낸 삶의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그의 시의 특징 중 하나는 한 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도 그러한 그의 시적 특징이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신대철 시인이 시에서 애용하는 ‘주석 달기’는 이야기의 여운과 감동을 한층 깊고 세밀하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 오랜 침묵과 방황 속에서 시적 화자가 조우하게 되는 서로 다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이야기하듯 자유로운 운율 속에 펼쳐지는 시집 『바이칼 키스』를 만나보자.
‘엊저녁 꺼져가는 난로 속에 통나무를 세우고 매운 연기 속에 후우우 바람을 불어 넣던 소년’(「바이칼 소년」) 과, ‘벌겋게 까진 산길’의 ‘통나무집 한 채’에 살며 ‘손가락으로 머리 빗는 할머니’와 ‘눈보라 속을 헤쳐 나와/할머니 옆에 기대앉는 허스키’(「할머니와 허스키」)와 ‘풋풋한 바람 속에/물 흐르듯 번져가는 아득한 초원,/물 흐르듯 서 있는 만삭의 아낙’(「흘러가는 물 푸르게 흘러가는 초원에선 빛이 향기를 낸다」)과 초원의 야외극장에서 ‘활극에 야한 장면이 뜨자’ 계속 담배를 피우는 열 살짜리 꼬마 아이(「몽골 일기 6」)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인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시집 속으로

바이칼

1. 은빛 물빛

큰 소나무 위에서
품속으로 돌아온 아이들
산 능선 걸치고 잠들어가면
할머니는 먼 곳을 향해 웃으셨습니다.

잔잔한 할머니 눈가에 잡히던 은빛 물빛
바람에 눈빛승마에 반짝이던 은빛 물빛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먼 곳으로 번져갔던 웃음이
숨결을 타고 아내의 눈가로 돌아왔습니다.

눈 날리고 해 저물고

아이들이 전자(電子)사막에서 헤매다 돌아와도
아내는 모래와 흙과 먼지에 뒤덮인 채
먼 곳을 보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은빛 물빛 할머니의
할머니의 머나먼 할머니를 향해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숨결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길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숨 부드러워지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가면 한자리에 잔상으로 스치던 솜다리와 엉겅퀴와 민들레가 길언덕에 한데 어울려 있었습니다. 혼자 있어도 묵묵히 자기 대역을 하며 살아온 노인이 엉겅퀴 옆으로 끼어 들어가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엔 흰 구름, 흰 구름, 솜털 가시지 않은 처녀들이 바람 따라 들어오다 주춤했습니다.
작은 구릉 위에서 누군가 바이칼! 바이칼! 하고 소리쳤습니다. 출렁출렁 푸르게 넘쳐오는 소리를 향해 일행들이 고개를 쳐들고 돌아보았습니다. 바이칼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울란우데에서 온 노점상 부리야트 가족도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몸속 어딘가에 바이칼 숨결이 흐르고 있었던가요? 바이칼이 우리 영혼의 이름이었던가요? 물살이 스치기만 해도 가슴까지 수심이 차올랐습니다.

(바이칼,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오고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워한 곳
오래오래 꿈꾸어도
물결 소리 들리지 않으면
영혼이 머물 수 없는 곳)

우리는 허공으로 숨 몰아쉬고
높은 데로 오르고 오르다가
수심으로 푸르게 숨쉬면서
그대 눈으로 알혼 섬*을 보고
내 눈으로 후지르를 생각하고
한 영혼이 되어 호수를 건넜습니다.
3. 후지르 마을

부르한 바위 앞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모두들 알몸으로 물속에 잠겼습니다.
오색 물무늬들 어지럽게
수면을 스치는 순간
몸속에 들어와 있던 수심이
조금씩 물살로 풀어졌습니다.
가슴엔 일렁이는 푸른빛만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굴뚝 밑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끼고 울고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먼 곳에서 왔다가
다시 먼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던 할머니,
그 먼 곳을 무서워하며 그리워하던 시절부터
머리 위에 붙어오던 까마귀떼들이
벼랑 위 자작나무**로 옮겨 앉았습니다.

흰 자작나무도 우리의 은빛 푸른 영혼?

바이칼 바람 소리
높고 은은해지고
솔숲 우거진 산자락 아래 안 보이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탯줄 같은 구릉길, 나지막한 분지에 포근히 들어앉은 후지르 마을, 행인 하나 없어도 빨랫줄에 옷가지 흔들리고 판자 울타리 휘어지게 넘어오는 흰 감자꽃들, 언젠가 들은 듯한 자장가 소리에 보얗게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이칼 호에 있는 섬 중 가장 큰 섬. 섬 주민은 주로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사는데, 대부분 부리야트인들이다. 이 섬에는 샤머니즘 성소인 부르한 바위가 있고 우리의 인당수를 상기시키는 설화도 남아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자작나무는 하늘과 인간을 중재하는 우주목이다. 샤먼이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로 자작나무를 올라야 한다.

눈부신 소리

바이칼, 후지르 마을, 에스키모 수예품 같은 그림이 벽마다 붙어 있는 방, 문풍지 울리듯 거칠게 생나무 연기 뒤흔드는 살바람, 춤추는 불 그림자 한 가운데 꽃판을 이루는 고향의 어린 동무들

구릉으로 야생화로
바이칼 소년으로
꽃판 자주 바꾸어도
잠 오지 않는 여름밤

호숫가 벼랑 위에 앉았다. 별빛 흐려지는 은하수 근처에서 별똥별이 쏟아진다. 소원을 말해봐, 누가 속삭인다, 비밀이야, 누가 속삭인다, 누구더라, 누구더라, 아린 목소리만 남은 고향의 어린 동무들

너는 소원도 비밀도 없니?
누가 속삭인다.

■ 시집 소개 글
자연과 인간이 행복하게 어울리는 시원의 세계는 현대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집 『바이칼 키스』는 그러한 세계를 찾아 바이칼 호수로, 알래스카로, 시베리아로, 몽고의 초원으로, 그리고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리고 시들은 과연 그러한 아름다운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나지막한 소리로 증거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고요한 곳에도 궁색한 현실이, 가녀린 애기괭이눈 옆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있음을 어쩔 수 없이 목격한다. 그래서 숭고하고 장엄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더욱더 비극적이다.

■ 뒤표지 글
어느 이른 아침 소년을 따라 물 길으러 갔다. 구릉 분지에 깊은 샘이 있었다. 소년이 깡통으로 물을 푸는 사이 짐승들이 흰 구름 밑에 와 있었다. 소년은 물을 퍼 올리는 대로 쏟아 붓고 쏟아 부었다. 햇빛을 쏟아 부은 것처럼 물거울이 눈부셨다. 열풍 속에 빈 물통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다시 물 길으러 갔다. 짐승들이 좀더 가까이 와 있었다. 소년은 또 물을 퍼 올리는 대로 돌바닥에 쏟아 붓고 쏟아 부었다. 돌바닥이 흥건해지면서 흙바람도 잠잠해졌다. 샘 밑바닥에 맑은 물이 비치고 소년의 얼굴이 반짝였다. 소년은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물통을 찰랑찰랑 채웠다.
제 또래와 한 번도 어울려본 적이 없는 소년은 겔에 돌아오자 팔짱을 끼고 둔덕에 앉았다.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아까 누구한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소년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짐승들한테요, 물이 움트면 또 온다고요.’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바이칼
눈부신 소리
바이칼 소년
할머니와 허스키
바이칼 키스 1
바이칼 키스 2
바이칼 키스 3
푸른 무덤
시베리아 횡단열차 1
시베리아 횡단열차 2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황야에서 1
황야에서 2
황야에서 3
황야에서 4
황야에서 5
빗방울 화석
흘러온 물 푸르게 흘러가는 초원에선 빛이 향기를 낸다
고산 유목민
흐르는 초원
아기 순록
초원길
초원의 빛
몽골 일기 1
몽골 일기 2
몽골 일기 3
몽골 일기 4
몽골 일기 5
몽골 일기 6

제2부
모퉁이길 잔상
분꽃씨
합대나뭇골
흰 진달래꽃
첫 목도리
천마의 시
벌하고 꽃한테만 일시키지 말고
국경
천지에서 부르는 노래
압록강
애기괭이눈에게
두만강 첫 다리를 스치며
두만강
흑풍 속으로
자작나무
백두산 천지 1
백두산 천지 2
향로봉에서 그대에게 2
새, 바람, 무슨 생각
벼랑 능선
곰배령 넘어
알스트로메리아
박새 가족과 봄노래를
군락(群落)
가을이 오면
세 잎 양지꽃
지리산 1
지리산 2
산늪을 품고
사이 1
사이 2

해설|은빛 푸른 영혼 ·황광수

작가 소개

신대철 지음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와 연세대 국문과,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국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8년 「강설(降雪)의 아침에서 해빙(解氷)의 저녁까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다.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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