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3월 9일 | ISBN 9788932017679

사양 · 125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소멸의 흔적 위에서 부활을 꿈꾸는 혹독한 기다림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평론집을 내며 거침없는 필력을 발휘한 김윤배 시인이 새 시집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로 독자들을 찾았다.
한국 시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여 주목받았던 『사당 바우덕이』 출간 이후 3년 만이지만, ‘문학과지성 시인선’으로 만나기는 2001년에 나온 『부론에서 길을 잃다』 이후 6년 만이라 그 반가움이 더하다.
그는 지난 2006년 화성시 교육장을 명예퇴임하고, 현재 경희대, 고려대, 아주대, 인하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미평문학관 시경재’의 집필실에서 시작(詩作) 활동 중이다. ‘미평문학관 시경재’는 시인의 집필실이자 활동 중인 시인들의 진필 원고를 전시하는 문학 공간으로, 개인적인 시작 활동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과 문학적 소통에도 힘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에서 우리는 “삶의 흔적을 찾아 떠도는 시인의 발자국”(시집 소개 글)을 따라가게 된다. 그곳은 “차마 입에 올리기 싫은 떼죽음이”(「북제주 조천에서」) 있었던 조천 바닷가처럼 피로 얼룩진 역사의 기억을 담고 있거나, “내가 그토록 출렁이며 흐르던 강줄기”가 “거대한 강의 흔적 적소로 남”(「흔적」)긴 몽골 소금강과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처럼 모든 것이 소멸되고 흔적만 남아 있는 곳이다.
이렇게 국내와 국외를 경계 없이 떠도는 시인의 발자국을 좇다보면, “생의 황무한 소멸” 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속에서 삶의 허무와 상실감을 떨치기는 힘들 것이다. “황무한 소멸”은 상실로 이어지고 상실은 아픔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아픔은 바라보는 이에게 그 자체로 상처와 회한을 남긴다. 그의 시는 이 과정을 직접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정경 속에 독자를 끌어들여 그가 느끼는 정서와 하나가 되도록 공감의 자장을 펼쳐놓는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이런 그의 특징을 두고, “시인의 대상과 자아에 동화를 우리 자신의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며, “그것이 김윤배 시의 힘이고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시적 자산”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희망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집에서 보여주는 희망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단지 생의 허무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나타날 뿐이다. 거대한 강이 사라진 자리에 지독한 아픔의 울음이 그냥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폐허의 가슴에 소금꽃으로 솟아오른다”고 상상하거나 “기어이/ 가슴 치고 나가는 강물 소리”(「흔적」)를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시인이 말하는 희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시인은 표제작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에서 상상적 변용을 통해 이러한 절망의 폐허를 기다림에 의한 부활의 공간으로 바꾸었다. 호수의 죽음은 수정처럼 눈부신 소금의 결정을 남기는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부활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을 가능케 한 것이, 시인이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시간을 초월한 “혹독한 기다림”이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이번 시집의 해설에서 “사랑에 바탕을 둔 처절한 기다림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않겠느냐고 시인은 비통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며 “그의 시야와 상상력과 목소리는 외로운 서정시인의 나약한 호소와는 달리 넓고 훤칠하고 우렁차다”고 표현하였다.

한편 김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지난 5년은 내게 가혹하리만치 거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며, “그런 속에서도 더러 시가 내게 와주었던 것이다. 그 시편들을 엮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거친 시간 속에서 그가 발 디딘 곳 어디나 그에게 시가 되어 왔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삶의 흔적을 찾아 떠돈 그의 발자국이 이번 새 시집에 오롯이 담겨 있음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욕망의 폐허와 폐허를 넘으려는 욕망을 함께 보여주는 보고서이다. 이 다음에 그가 어떤 행로로 접어들지 예측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다만 지금가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음 행선지를 찾아서 최선을 다해 시인의 길을 걸으리라는 점은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 때로는 사막을 건너는 늑대의 눈빛으로, 때로는 광야를 질주하는 말의 갈기로, 때로는 꽃잎 가장자리 밟는 헐거운 마음으로, 그의 행보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_이숭원(문학평론가)

■ 작품 속으로

내 가슴 그토록 출렁이며 흐르던 강줄기는
거대한 강의 흔적 적소로 남겼다
나는 소금 적소에 갇혀
생의 황무한 소멸 울었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다
오랜 흐름을 멈추며
아프지 않았을 강물은 없어
울음은 폐허의 가슴에 소금꽃으로 솟아오른다
소금꽃은 수십 킬로씩 이어져
그 아픔 얼마나 지독했었는지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몽골 소금강의
흔적은 네가 나를 건너간
희미해진 상처였지만 기어이
가슴 치고 지나는 강물 소리 듣는다 ─「흔적」 전문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전문

헌 집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낡은 마당을 어슬렁거릴 뿐
후박나무 그림자가 길어져도 문 여닫는 소리가 없다
바람이 혼자 산다
바람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발소리도 말소리도 없다
바람을 먹고 사는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은
그녀를 떠나 있던 물 긷는 소리도 오고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온다
헌 집은 소리들, 미세한 소리들로 차고 기운다
후박나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그녀는 후박나무 아래서
바람을 더듬는다 바람의 여린 뼈가 만져진다
그녀는 주름투성이의 입술을 문다
후박나무 잎새들이 검게 변한다
헌 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그녀의 새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후박나무 그림자는 안다

시간이 조용히 다녀간 헌 집 늙은 개 한 마리 봄볕에 졸고
바람꽃 찾아와도 물 긷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헌 집」 전문

남자는 팅팅 불어 떠올랐다
젊은 여자 갈대밭을 달려나간다
더러운 소문은 한동안 갯벌을 떠돌았다
어도횟집 간판이 먼 바다를
내다보며 늙어갔다
갈대밭이 조용히 일렁인다
시간이 갈대 사이를 통과하는가 보다
갈대꽃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잎들 빠르게 갈색으로 변한다
어도횟집 간판 한쪽이 기운다
끝내 균형을 버리지 않고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갈대꽃이 몇 번이나 피고 졌는지
늙어 다신 태어난 여자
느린 걸음으로 갈대밭을 기어나온다
물속에서 남자가 젊은 여자의 허리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이 여자에게 갈대밭은 없었을
어도가 육지를 향해 떠난다
늙은 여자 떠나는 어도를 지켜보다
풀썩 주저앉는다 ─「어도 여자」 전문

오래된 몸 서러운 색깔로 물들이는
복사꽃잎, 연분홍에서 진분홍에 이르는
첩첩한 꽃길, 젊은 날 그 길을
그토록 두려워 떨며 걸었던 것이다
한 세상 여는 일이
세미하게 채도 다른
꽃잎 밟는 일인 것을
꽃잎 밟을 때마다 숨 멎는 줄 알았던
묵시의 시간들은 아팠다

이제는 헐거운 마음으로
저 연분홍 꽃잎 가장자리 밟으며
바람 느릿느릿 지나는 조치원에서
한나절 보낼 수 있겠다 복사꽃잎
흩날리는 아름다운 적소 황홀한
꽃길의 자락

■ 시집 소개

시집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에는 삶의 흔적을 찾아 떠도는 시인의 발자국이 그대로 들어 있다. 시를 이루고 있는 언어들은 발과 지면이 닿을 때의 감촉과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 발자국은 제주, 봉화 등의 국내나 고비 사막, 바이칼 호수 등의 국외로 경계 없이 떠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역사나 일상의 진부함에 가려져 있던 현실은, 시의 조명을 받아 비로소 부활한다.

■ 시인이 쓰는 산문

차령산맥 자락에서 산새 소리에 취하기도 하고 호수의 물빛에 취하기도 한 일 년이었다. 하루 종일 찾는 사람이 없는 시경재는 바람이 혼자 놀다 가고 산그늘이 오래도록 창을 기웃거렸다. 달빛이 서러운 날은 호수가 혼자 울었다. 호수의 울음은 조용하고 깊었다. 호수가 울음을 멈추면 수천 개의 달이 호수에 떠올라 놀란 날도 있었다. 나는 호숫가에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구두가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구두 속으로 물소리가 차올랐다. 낡은 구두 속의 물소리가 나를 끌고 갈 것이라는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북제주 조천에서
백령도
귀신고래의 노래
접어둘 수 있는 이야기
아내의 늦은 만가
북제주 조천에서
레일
황제의 미소
오래된 삽화
비선대 오르는 길 위의 햇살
흐르지 않는 강
집시의 딸들
금강빌리지의 달빛
필담
설산의 아우야
열네 살의 테러리스트
살아남은 자

제2부 틈입의 꿈
너는 내게 폐허의 제국이었다
황무지에 뜨는 달
예기치 않은 죽음들
황무지에서 황무지로
틈입의 꿈
전언
붉은 눈빛
흔적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가시떨기나무의 길
내 안의 오보
소녀의 몸이 투명하게 빛나다

제3부 새와 여인
상처로 상처를 경작하는
장고항
봉화군 봉성면 달맞이꽃
새와 여인
헌 집
우는 돌
어도 여자
금광호수 상류에는
낮달
거진항 가던 날
사리의 여름 시간
수음의 붉은 시간들
찔레꽃
삽화, 달빛 엉덩이
세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씌어지지 않은 시
진달래 꽃그늘

제4부 몸의 기억
복사꽃 흩날리는
풍녕 사내들
가을 무주
몸의 기억

일몰
갯지렁이의 상사
굴참나무 숲에 들다
시인과 발레리나
몸이 시를 관음하다
강 울음
단양, 강 얼음 속
간척지에 내리는 눈
소태면의 겨울 이야기
영목항 일박

해설|폐허를 넘는 늑대의 꿈·이숭원

작가 소개

김윤배 지음

194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겨울 숲에서』『강 깊은 당신 편지』『굴욕은 아름답다』『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부론에서 길을 잃다』『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장시『사당 바우덕이』와 산문집『시인들의 풍경』『최울가는 울보가 아니다』『바람의 등을 보았다』, 평론집『온몸의 시학 김수영』, 동화집『비를 부르는 소년』『두노야, 힘내』를 상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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