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떼를 베끼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29

위선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1월 31일 | ISBN 9788932017501

사양 · 128쪽쪽 | 가격 7,000원

수상/추천: 현대시작품상

책소개

명철한 의혹과 자기 부정을 통해 비로소 가 닿는 생의 진실

적막과 허무의 깊이를 헤아리면서도, 이순을 훌쩍 넘긴 시인의 그것이라곤 믿기 어려우리만치 모던하고 담박한 시구 그리고 맑고 깨끗한 서정의 세계로 주목 받고 있는 위선환 시인의 세번째 시집 『새떼를 베끼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우리에게 위선환 시인의 이름은 그다지 익숙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1960년부터 시를 썼으나 그 후 오랫 동안 펜을 꺾고 시단을 떠나 있었던 탓이다. 1960년‘용아문학상’(시 「떠나가는 배」로 잘 알려진 용아 박용철(1904~1938)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문단과 가까울 수 없었던 그는 1969년말에 시를 끊고 30년 가까이 공직에 머물렀었다. 그러고는 “몇 해째 (시에 대한)공복”으로 “허기와 쓰림과 욕지기”를 그 자신의 가슴에만 담고 있다가 결국 2001년에 다시 시단에 나왔고,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와 『눈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를 차례로 발표하며 시인으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보다 먼저 저물었다

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

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

저문 길에 잠깐 젖던 가는 빗발과 젖은 흙을 베고 눕던 지푸라기 몇 낱과 가지 끝에서 빛나던 고추색 놀빛과 들녘 끝으로 끌려가던 물소리까지,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 모여 있겠는가

그것들 아니고 무엇이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겠는가

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낮추어 혼잣말하듯이,

─「혼잣말」 전문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야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훤히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언제나 며칠이 남아 있다」 부분

무엇보다 위선환의 시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지리멸렬한 말들과 상투적 이미지를 “쓴다”라고 옮기면서, 그 모두를 부정하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시인 자신에게조차 의혹을 품는 순간이다. 일상적인 풍경, 이를테면 하늘과 그 위로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 낙조와 수평선에 걸쳐진 잔잔한 흐름과 이제는 주글주글해진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이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그의 맑고 날카로운 시선은 오랜 시간 손안에서 매만져 닳은 자갈처럼, 숙고와 망설임 그리고 공들인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갯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

─「새떼를 베끼다」 전문

돌멩이는 죽어 있다. 그렇다. 죽어서도 돌멩이는 구른다. 닳으며 동그래지며 아직 죽어 있다. 그런가.

머리 위 어중간에 나비가 걸려 있다. 그렇다. 굽은 갈고리에 찔렸거나 은빛 거미줄에 감겼다. 그런가.

새가 반짝이며 구름 사이로 점멸했다. 그렇다. 높이 나는 새는 불꽃이다. 하늘에다 그을린 자국을 남겼다. 그런가.

나뭇잎이 떨어져서 어깨에 얹혔다. 그렇다. 나뭇잎에 눌린 만큼 어깨가 내려앉았다. 그런가.
벌써 익은 찔레열매가 아직 달려 있다. 그런가. 바짝 마른 뒤에야 떨어진다. 그런가. 잘 익은 씨앗 몇 개 감추고 있다. 그런가.

─「거짓말」 전문

어느 대목에서는 시인이 못내 감추지 못한 재기와 순발력이 산뜻한 공감각적 빛을 발한다.

나무토막도 물고기도 아닌 그것의 휑하게 빈 아랫배가 아래로부터 찔리면서
당장, 막대에 찔리는 허공이 되는 것이다.
딱!
막대 끝이 허공의 안벽에 부딪히는 소리,
허공도 그렇게
딱.
딱.
하.
게.
말랐구나.

─「목어1」 부분

제,발,바,닥,밖,으,로,는,한,걸,음,도,내,딛,지,못,했,다.

─「발바닥」 전문

어느 시인의 눈엔들 이 세계가 완벽한 하나의 물질로 비칠 리 없다. 위선환 시인 역시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과해 보이지 않는 것에 가 닿는 시선의 궤적을 반복한다. 그리고 익숙한 세계의 질서를 비틀어본다. 이러한 그의 시도가 관념적 사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구태여 다시 한번 의심하고 곱씹는 태도를 거치는 데서 사물과 풍경, 나아가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의 전경을 새롭고 넓게 확장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위선환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얻는 가장 큰 소득이다.

머물며 기다리며 서성대며 밟히는 돌부리들을 걷어찼다.
겨울에는 왜 눈이 내리는지 왜 내가 걷어찬 돌부리들은 내 정강이를 때리며 떨어지는지
눈이 그쳤고, 겨울이 갔고, 다시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머물려 기다리며 서성대며 나를 때리고 떨어지는 돌부리들을 되밟으며
지금도 나는
돌부리를 걷어차는 짓을 그만두지 못한다. 내 정강이는 푸르다.

─「발길질」 부분

자신의 진술을 거듭 확인하고 의심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한 편 한 편의 시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들이 사물과 그 현상에 섣부르게 인간적 면모를 덧씌운 것도, 성의 없는 관찰과 추론에 근거한 것도, 시적 상투성을 남용한 것도, 무리하고 불필요한 과학적 추론을 뽐내는 것도 아니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을 경계한다. 벌써 건너갔어야 할 다리를 뒤늦게 건너는 사람답게 두드리며 건너는 위선환의 고전주의는 생각하고 쓰는 방법의 집약적 주제화이자 그에 대한 신중하고 지혜로운 실험에 해당한다. […] 위선환의 시는 아름답다. 이 말은 그 아름다움이 믿을 만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전주의는 아름다움이 진실이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나무다. _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위선환의 시는 ‘나무의 뻗침과’과 ‘새의 비상’을 통해 ‘하늘’을 지향한다. 시인의 하늘 지향은 불가능에 대한 추구라는 점에서 좌절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 좌절은 시인이 껴안고 견디며 나아가야 할 천형이며 원죄이기도 하다. 위선환은 이 천형의 고뇌를 자아와 현실의 폐허로, 그리고 적막으로 형상화한다. _오형엽(문학평론가. 수원대 국문과 교수)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돌은 박혀 있고 드러나 있고 밟혔다. 둥글고 매끄럽고 검고 반짝거렸다. 그대로 적었다. 돌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차였다. 발부리가 내내 아팠다. 그대로 적었다. 돌은 모나고 뾰족하고 뭉툭하고 우묵하고 이끼 덮였고 금 가고 쪼개졌다. 그대로 적었다. 돌은 세워도 눕혀도 묻어도 찔렀다. 깊이 묻은 돌이 그중 깊이 찔렀다. 그대로 적었다. 돌을 팔매질하고 되돌아온 돌에 맞았다. 또 팔매질하고 되맞았다. 되풀이해서 팔매질하고 되풀이해서 되맞았다. 돌이 닳았다. 그대로 적었다. 돌이 뛰어서 물 위를 건너갔다. 건너가는 저편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적었다. 돌은 길게 오래 날았다. 한밤에도 눈을 뜨면 돌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적었다. 돌이 고인 물의 중심에 떨어졌다. 겹겹이 이는 파문을 헤아리다가 그만, 손가락들이 뒤섞여버렸다. 그대로 적었다. 돌 몇 개가 발바닥에 박혔다. 빼내고, 길바닥에 내민 돌 여럿 있는 것 보았다. 그대로 적었다. 돌은 숙고 굽고 기울었다. 이윽고 꿇었다. 이마가 땅에 닿았다. 그대로 적었다.
돌이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착하지도 죄를 짓지도 않았다.
돌이었다.
잠깐 있지도 내내 있지도, 여기에 있지도 저기에 있지도, 모이지도 나뉘지도 않았다.
돌이었다.

작가 소개

위선환 지음

시인 위선환은 1941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60년 서정주, 박두진이 선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199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었고, 1999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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