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문학과지성 시인선 322

이준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6년 8월 25일 | ISBN 9788932017211

사양 · 128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전혀 다른 문법,’ 이준규 시인 첫 시집 출간!

‘예측할 수 없는 대담한 상상력’으로 기성 이미지들을 재구성해온 이준규 시인의 첫 시집 『흑백』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준규의 시는 기성 시단이 보여주었던 어떤 시류에도 쏠린 바 없으며, 기성 시단에 빚진 게 없으므로 그의 시는 그간 놀라울 만큼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들을 쏟아놓아 시단을 긴장시킨 바 있다.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의 신인을 추천하는 해설에서 평론가 정과리는 이준규 시의 “언어의 풍경은 당혹스러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대담한 상상력으로 놀람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시인의 시 쓰기가 “문화적 코드를 통째로 파괴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어떤 특정한 문화적 코드(들)에 대한 도전(혹은 저항)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부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신인의 문학이 주는 충격은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온다. 하나는 시대의 변화가 문화적 감각을 변모시키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문학사가 멈춘 지점에서 입문한 작가·시인이 전혀 다른 문법을 창안하는 경우다. 앞의 것은 자연스럽고 충동적이고, 뒤의 것은 의도적이고 숙고적인 것이다. 신인 문학의 이 두 원천은 그러나 같은 장소에 인접해 있으며, 그것들이 길항하면서도 서로를 자극할 때 신인 문학을 탄생시킬 수 있다. (정과리: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서)

이준규 시인은 물론 후자에 해당된다. 즉 “의도적이고 숙고적인 것”으로써 “문학사가 멈춘 지점에서 [……] 전혀 다른 문법을 창안”한 경우이다. 그리하여 그의 “기아와 고통과 환각과 죽음 그리고 외로움의 공간”에서의 시 쓰기는 등단 이후 6년 동안 “전혀 다른 문법”들로 채워져 이번 시집에 예순세 편의 시들로 오롯이 묶였다.
이번에 발행된 이준규의 첫 시집 『흑백』은 한마디로 ‘소외된 자의 넋두리’이다. 시인은 단단하게 포장된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견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버려둔 글자들로 시인은 놀이를 감행하고, 그 돌발적 이미지들의 연상 체계는 당혹스런 세상을 창조해낸다. 6년 동안 쓴 시가 부(部)의 나뉨도 없이 한자리에 묶였다는 것은, 각 시편들의 동일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각 시편들 저마다 새로운 이미지들로 재구성된 제각각의 ‘전혀 색다른’ 시라는 의미가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전혀 색다른 시들은 마치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모뎀이 자료를 송수신할 때 발산하는 깜빡거림처럼 수많은 이미지들을 (깜빡거리며) 쏟아놓는다. 그 방식은 분명 ‘디지털’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도 한 편의 시 또는 한 권의 시집 전체를 놓고 보자면 아날로그의 이미지가 떠오를 터이다. 마치 시집 제목 『흑백』이 말해주듯.

자정이 지났을 것이다
서러움을 닮은 수증기가
유리처럼 침묵하고 있다
웅크리고 숨죽이는 우울한
들숨 너머 저기로
매끄럽고 물컹한 것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은 휴식을 바라고 있다
익숙한 입김처럼
빗줄기의 습한 냉기가
몸으로 스민다
골목이 얼음의 빛을
밟고 맨발로 서 있다
있음이 떨고 있다 (「흑백9」 전문)

『흑백』에 실린 예순세 편의 독특한 시편들은 일관되게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고독한 여정(旅情)으로 보이는데, 이 모든 행위들은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이글거리는」)는 선언에 대한 일관된 약속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를 위해 이준규 시인은 “세상의 모든 시의 실질적인 실체들, 즉 세상 시의 기저 수준low level으로 더 내려가”(정과리) ‘고독한 글자놀이’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혀 색다른 시의 문법이 탄생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첫 시집 이후의 행보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것도 바로 그때문일 터이다.

이글거리는 불면의 밤이 진행한다
두꺼운 안개가 나뭇잎을 땅 쪽으로 조금씩 밀고 있고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요란한 치장을 하고 문을 나서는 휴일의 모든 창녀처럼
도대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의 보푸라기를 일으키는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나선형 계단에서
소름끼치게 너를 다시 만나리라
너의 출렁이는 싱싱한 육체의 밤
무한히 커지며 이지러지고 물방울 돋치는 새벽
뒤통수에 뜬 달
그러나 아주 작은 별 하나도 없다
어찌 자연의 광휘를 노래하리
새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이상한 기계들의 숨가쁜 눈빛
아직도 밤하늘을 배회하는 어색한
기쁜 신의 종족들
결코 상이 되지 못하는
어슬렁 배회하는 느낌들
너라고 불러보는 부름의 짖음의 명확한 끝
밤의 차가운 기운을 쥐어짜는 허리 삔 공간 속에서
투명하게 언어를 움직이고자 하는 불가능한 기획의 막바지
언제나 출발선에 있고 언제나 문 밖에 있는
당신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뜨거움
자살 같은
벼락 같은
마약의 시공 같은
그러나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이글거리는」 전문)

■‘해설’ 중에서
『문학과사회』 2000년 여름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준규의 시는 기존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지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편들 자체가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였다. 우선은,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이글거리는」 부분)

는 간단한 시구가 독자를 놀래킬 만하였다. 누군들 그런 생각을 품어보지 않은 적이 없겠지만,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발언이었다. 단지 그 전언이 세상에 대한 전면적 도전의 공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 공표 앞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것을 감행하는 순간 그의 머리와 가슴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은 감행 그 자체의 존재태,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지가 ‘어떻게’ 드러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이준규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는 말로 드러낸 것인데, 그것은 가령 ‘나는 여직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시를 쓰리라’나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시를 완성하리라’라는 언명 혹은 ‘나는 시의 이름으로 전혀 생소한 장르를 창조하리라’고 말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긴 해도 아주 다른 말이다. 이 진술은 한편으로는 과거에 있었고 지금 태어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시”를 부인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시는 자신의 시 쓰기 이후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세상의 모든 시”라고 지칭함으로써 그가 새롭게 시작할 모든 시가 과거와 현재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시들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시작할 새로운 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새로운 시가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시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이다.
[……]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가 이 시집의 기저 동기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동기는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는 반항아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시적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궁리한 자의 절실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완성되는데, 또한 그러려면 그 타자 역시, 아마도 나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입장은 결국 세상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수용하는, 다시 말해 부정하는 방식으로 수용하는 복합적 태도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 복합적 태도, ‘당신을 통해서만’ 나를 완성하고, ‘나를 통해서만’ 당신을 완성하는 것, 혹은 불순함으로써만 투명해질 뿐만 아니라 불순함의 궁극이 투명성이라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 및 성격은 이준규 시의 방법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이준규가 쓸 시의 존재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그런 성질을 품고 있는 시야말로 이준규가 ‘시작’할 시의 실질적인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의 시는 투명한 언어의 운동으로 ‘현시’되는데 그것의 뒷면은 혹은 작동법칙은 불투명한 언어들의 혼잡한 교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그런 양태의 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이준규는 그 대답으로 그의 시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정과리의 해설 「모든 시의 기저 수준으로부터」 중에서)

■ 앞날개 소개 글
세계에 대한 이 이물감은 무엇인가? 시집 『흑백』은 할 일 없이 서성대는 소외된 자의 넋두리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단단하게 포장된 세계에 대해 참견을 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버려둔 시로 세계를 엮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풀어내려 한다. 그의 시어는 힘겹게 겨우 하나의 문장이 된다. 그렇게 간신히 한 편의 시가 된 시는 시로부터의 이물감을 준다. 주변에서 배회하는 삶의 한편에서 이 시집은 묻는다. 삶에 대한 이 언어의 이물감은 무엇인가? 질문을 향해,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 뒤표지(시인이 쓴 산문)
유치원이나 정신병원 같은 곳에 가면 글자놀이니 역할놀이니 하는 게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걸 하고 있다.
역할놀이에는 별 재능이 없고 글자놀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다. 앞으로도 글자놀이는 계속할 생각이다. 완전한 착각 속에 있고 싶다. 그렇게 될 것이다.

목차

향기
정박
자폐
빈 가지
가을을 부르다
눈동자

멸종을 위하여

나는
흑백9
흑백2
지나가는 해
전진
이글거리는
오늘과
얼룩

세월
가을이 또
사어

누런 해
흑백4
1940년대의 어떤 시
망각과
너그러운 개구리
휘감긴
약시
바나나를 씹으며
딱 한 잔
나무는 젖는다

개개비
고등어
고추꽃
그것
검은 너
뜬다
너의
베고니아……
김춘수
봄비
부침개
사과와 감
선이 그어졌다
세안과 세수
그는
흑백1
흑백3
흑백5
흑백6
흑백7
깨새
흑백8
장수풍뎅이

냉기
누군가

햇빛

해설|모든 시의 기저 수준으로부터·정과리

작가 소개

이준규 지음

1970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자폐」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이 있다. 제12회 박인환문학상(2011)을 수상하였으며 루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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