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5년 10월 14일 | ISBN 9788932016436

사양 · 148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고고학적 상상력과 여성성이 빚어낸 희망의 언어
허수경 시인 네번째 시집 출간

‘동서문학상’ 수상작인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이후 4년 만에 허수경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독일에 건너간 지 햇수로 14년, 그의 시어는 이제 어둡고 쓸쓸한 느낌 혹은 고독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보다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상상력을 발동한다. 고향인 진주 말을 살려 쓴 제1부의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상상력’이라면 그의 전공인 ‘고대동방고고학’을 연구하며 발굴 현장에서 발로 쓴 내용들을 담은 제2부 ‘새벽 발굴’의 시편들은 시공을 넘나드는 ‘거시(巨視) 상상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시인의 말’에서 언급되었듯, ‘반(反)전쟁시’들로 묶였다. 시인은 이 시편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먼 이국땅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시인이 오래된 지층 사이에서 혹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넘쳐나는 전쟁 소식을 접하며 마치 발굴하듯 모국어로 옮긴 한 자 한 자의 시어는 ‘시’가 ‘역사’를 대할 때 보일 수 있는 한 전범(典範)을 보이며 한국 시의 지평(地平)을 넓혔다.

허수경 시인이 발굴하는 언어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따라 나오는 부장품처럼 현재의 시간 위에서 부활한다. 그 시어들은 애잔한 고향 말로 되살아난 기억도 있지만 태반은 인류의 폭력을 고발하는 기억들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의 고고학 현장은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으로 층을 이뤄 발굴된다. 과거를 탐사하는 허수경 시인의 시어는 뒤표지 글에 그가 쓴 산문처럼 언뜻 “뒤로 가는 실험”처럼 보일는지도 모르지만 실은 진실을 해부하는 ‘현재의 현장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고학적 상상력과 여성성의 시어들로 빚어낸 언어는 다름 아닌 ‘희망’임을 감지하게 된다.

■ 시집 소개글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 시인은 고대의 유적들을 발굴하듯이 언어와 육체를 발굴한다. 시인이 발굴하는 언어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따라 나오는 부장품처럼, 지금은 시인에게만 속해 있는 과거 존재의 화석들처럼, 현재의 시간 위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마치 거울 들판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듯이, 내 속의 달이 걸어 나와 나를 비추듯이 현재와 맞서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시인의 발굴을 통해 드러난 잊혀지거나 숨겨진 과거의 육체와 전쟁 유물들은 거짓된 평화로 매끈해진 현실의 거울 면에 적나라하게 비친다. 이렇듯 시인은 먼 이국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의 거울에 고향을 비추거나, 머나먼 고향의 거울에 자신의 육체를 비춘다.

■ 시인이 쓰는 산문

어떤 이는 말[言]을 부리고 어떤 이는 말과 놀고 어떤 이는 말을 지어 아프고 어떤 이는 말과 더불어 평화스럽다. 말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고 말은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곤 했다. 더운 말 차가운 말, 꿈과 불과 어둠과 전쟁의 말. 나는 나를 부리고 간 말들이 이를테면 2003년 가을 어느 날, 경찰이 되어 어린 딸아이와 늙은 어미를 먹이기 위해 검문소 앞에 줄을 서 있다 폭탄 테러를 당해서 죽은 한 이라크인을 위해 있었으면 했다. 말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 좌절의 경험이 이 현대사에는 얼마든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여, 말이 그대를 불러 평화하기를, 그리고 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제 종(種)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살아남기’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한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 세상을 그곳에서 살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혹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이 롱 뒤레의 인식이 비극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 그 비극은 비극적이지 않다.
부기(附記): 어떤 의미에서는 뒤로 가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

■ 해설 중에서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는〕 현재와 과거(고고학적인 거시적 규모에서의 과거)가 반복 순환의 원리 위에서 겹쳐지고 있다. 이 시집의 많은 시편들이 이러한 겹침을 보여주거니와, 이러한 상상력을 고고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볼 수 있겠다.
이 고고학적 상상력의 비관주의는 극단적이다. 한 지층의 내용은 ‘전쟁과 살육’이고 그 지층의 끝은 파괴층이며 이러한 지층의 반복 순환이 인류의 역사이니 말이다. 그 비관은 거의 인간에 대한 환멸에 다다를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희망이다. 시집의 뒤표지 글에서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라고 쓴 시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 세상을 그곳에서 살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혹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이 롱 뒤레의 인식이 비극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 그 비극은 비극적이지 않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에 이끌려 나오는 결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간적’ ‘자연적’이라는 말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시집의 ‘시’가 그 실제 내용이다. 그것은 산문으로는 온전히 나타낼 수 없는, 오직 ‘시’로써만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것이리라. 우리는 그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시집에는 주목할 만한 이미지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달’이다. ‘달’은 기왕의 무수한 시편들 속에 무수히 등장해온, 그래서 그 자체로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는 이미지이다. 하지만 허수경의 ‘달’은 종전의 무수한 ‘달’들과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특성이 허수경의 ‘달’을 참신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물’이다. 이 역시 중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되거니와 이 시집에서 물의 결핍은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
요컨대 ‘달’과 ‘물’은 허수경 시인이 독자들에게 보내고자 하는 희망의 근거이고, 비극을 더 이상 비극적이지 않게 해주는 ‘인간적’ ‘자연적’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 본질은 요즘의 유행어로 바꿔 말하면 여성성이다. 나는 이 여성성이 여성의 여성성이 아니라 인간의 여성성이라고 생각한다. 허수경의 시는 고고학적 상상력의 비관주의가 그 여성성과 결합하여 빚어낸 희망의 언어라 할 수 있다.
__성민엽의 해설, 「고고학적 상상력과 시」 중에서

■ 책 속으로

그래, 그래, 그 잎

그 잎 여릴 적, 우리 만나 잎 따서 삶아 밥해주던 할머니집에 앉아 여린 잎에 하얀 밥 싸 먹으며 벙그러지는 입술 오무리며 깔깔거리다가 어머 어머 할머니 설겆이 많겠네, 어쩌나, 그때 그 잎 여려 할머니의 아가 같은 손힘으로도 뚝 뚝 꺾이는 것을,

그 잎 커다랗게 자라 그늘 만들고 그늘 아래 비 그으며 수박 오이가 익는 것 들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며 할머니가 떠 오는 설거지물에 마치 오랜 시간 씻듯 양은 밥주발 씻으며 할머니가 잎 옆에 달린 꽃 머리에 꽂으며 벙그렇게 웃는 것 보며 그래, 그래 저 잎 더 무성해져서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까지 붙어 있다가 그래 그래 할머니 머리에 꽂힌 저 붉은 꽃 좀 봐, 무슨 열대 섬 사는 아씨 같은 할머니 좀 봐, 그때까지 설거지 물에 담긴 양은 주발 새로운 시간처럼 씻으며, 그래 그래, 저 잎

그래 그래 그 이파리 ―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그 이파리 아가 적, 우리 보굴랑 이파리 따 삼군 밥 더머기던 할매 저방에 앉아 아가잎에 흰 밥 싸 무그며 벙그러지는 입술랑 오무리메 깔깔대메 어마시야 할매 설것방 많이나 되것네, 어쩔꼬, 그녘 그 잎 아가여서 할매 아그머치한 손뚝심으로 뚝 뚝 건기는 거슬,

그 이파리 커당게 자라 그늘 맹글고 그늘 비님 그브며 수박 오이 등거는 거 들을 때꺼지 기다리제, 하며 할매 떠오는 설것당물 오랜 시월 씨그듯 양은 밥주발 씨그며 할매 잎 곁에 달린 꽃 머리에 접히며 벙그럽세 웃는 거 볼 새 그래, 그래 저 이파리 무덩허덩허정해져

산메 더푸고 그 산메 잎그늘 메에 처처한 따의 수지븐 데 열어 버섯제기 도다오르메 그녘 또 할매 지어데 주는 버섯제기밥 먹자야 좋것네, 그 잎 아가 적 만나 무덩허덩해져 산메그늘 될 녘까지 어깨 두다가 그래 그래 할매 머리 녘 접한 저 불근 꽃 녘 좀 볼거나 어디 열대 섬 사는 아그 같은 할매 좀 보아, 그때꺼지 설것방 물 담긴 양은 주발 신상신시처럼 씨그며 그래 그래 저 이파리

물 좀 가져다주어요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시간언덕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 비씨 2100년경의 무너진 담이 나온다 담 높이는 이십 센티, 다시 밑으로 밑으로 합쳐서 일 미터를 더 판다 체로 흙을 쳐서 흙 안에 든 토기 파편까지 다 건져낸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년, 압둘라가 아침밥을 먹으러 간 사이 난, 참치 캔을 딴다, 누군가 이 참치 캔을 한 오백 년 뒤에 발굴하면 이 뒤엉킨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시간언덕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목차

■ 차례

제1부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거울들판
언덕 잠(봄)
언덕 잠(봄)―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항구마을
항구마을―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가을 물 가을 불
가을 물 가을 불―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그래, 그래, 그 잎
그래 그래 그 이파리―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대구 저녁국
대구 저녁국―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달 내음
그때 달은

제2부 새벽 발굴
낯익은 당신
우리는 촛대
해는 우리를 향하여
물 좀 가져다주어요
새벽 발굴
연등빛 웃음
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회빛 병원
우물에
그곳으로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만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오래전에 어떤 왕이 죽었다,
그때,
영변, 갈잎
붉은 후추나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침
그곳으로
엄마
시간언덕
그렇게 웃는 날이 계속되었다,
날개를 삶다

제3부 불을 들여다보다
별을 별이
박미자 하나가
흔들리는 의자
음악 선생님 또랑또랑
고요하게 손을 뻗다
달이 걸어오는 밤
기차역 앞 국 실은 차
동그라미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불을 들여다보다
저녁 스며드네
나무 흔들리는 소리
말강 물 가재 사는 물
나무 흔들리는 소리
아마도 그건 작은 이야기
눈 오는 밤
마늘파 씨앗
기차역

제4부 저 물 밀려오면
무너진 조각상
말 한 마리
검은 소 도시 혹은 여행 전에 읽은 여행길 잡이 가운데
『검은 소도시 여행길잡이』라는 책에 관하여
코끼리, 거미다리를 가진, 그 해변에서 달리가 그린, 그 코끼리
물지게
그렇게 조용했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

웃는 소리
여름 내내
기쁨이여
저 물 밀려오면

해설 | 고고학적 상상력과 시·성민엽

작가 소개

허수경 지음

시인 허수경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에서 근동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있고, 산문집으로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등이 있다. 2018년 10월 지병으로 별세하여 뮌스터에 묻혔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7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