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5년 1월 19일 | ISBN 9788932015675

사양 신46판 176x248mm · 112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김기택 시인의 네번째 시집 『소』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첫번째 시집과 두번째 시집에서도 「소」라는 시를 실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제목을 『소』로 정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소’는 김기택 시 세계의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집 『사무원』에서부터 도시적 삶의 생태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도시화로 인해 전반적으로 변화된 삶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기조로 하고 있다. 전면적인 도시화는 자연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인의 시선은 도시화되어 번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의 모습으로 향한다.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계동 비둘기」 전문

시인은 먼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관조하며 그려내고 있다. 도로 위에 길게 이어진 두 줄기 타이어 자국, 검붉은 얼룩과 흰 스프레이, 만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가지 못하는 노파, 텔레비전을 꺼야만 귀에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 등은 도시 속에서 배척되고 소외되는 삶의 부분들이 포착된 지점들이다. 또한 시인은 인간과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도시화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에너지로 팽만한 사물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할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번개의 뿌리처럼 전율하며 끝없이 갈라지는 길은
괴팍하고 모난 돌멩이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너의 길은
길을 막고 버티는 바위를 휘감다가 끝내 바위가 되기도 하는 너의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몰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 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꽃들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몸으로 꽃처럼 많이도 임신한 너의 자궁은
불룩한 배를 가지마다 매달아놓고 무겁게 흔들리는 너의 자궁은
이빨 가진 입들을 빌려 자궁을 부숴버려야 밖으로 나오는 너의 씨앗들은

땅에 붙박인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살아도 죽어 있는 것만 같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지나온 네 몸이 발산하는 침묵은
발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
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전문

초록의 경이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생명의 작용이다. 그동안 동물이나 인간의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인은 초록의 놀라운 역동성을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침묵’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은 나무와 같이 움직임 없는, 고요한 대상에서 우글우글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인 특유의 긴장감과 활력이 부여된 식물들은 정적 속에 깃든 역동성, 오랜 시간의 지층과 유구한 생명의 본능을 파악하게 해준다.

제4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과 도시 속의 삶이 어디에서 만나 서로 소통을 도모하며 자연이 보유한 건강한 생명력과 본원에 대한 향수를 충족시키는가를 드러낸 작품이다. 정적 가운데 내포된 강력한 힘을 포착하고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들에서 역동하는 생명의 징후들을 발견했던 시인은 이 시집에서 통찰력이 깃든 섬세한 감각으로 도시적 삶과 자연이 맞닿는 지점들을 그려내고 있으며 새로이 대상과의 교감과 소통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변화하여 그 변화의 과정을 눈치 채는 것이 쉽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긴장된 김기택의 시 세계는 그러나 일상의 단면을 뚫어내는 성찰과 어렵게 이루어진 만큼 더욱 소중한 교감으로 다가오는 이 시집 『소』에서도 새로운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층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전문

* 외로운 추수꾼: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The Solitary Reaper」에서 인용.

목차

▨ 시인의 말

소가죽 구두
자전거 타는 사람
타이어
얼룩
계란 프라이
불룩한 자루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소나무


복잡한 거리의 소음 속에서
직선과 원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물 위에서 자다 깨어보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린 나무들
황토색
그루터기
머리 깎는 시간
빗방울 길 산책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유리창의 송충이
상계동 비둘기
수화

무단 횡단
재채기 세 번
눈길에 미끄러지다
거부할 수 없는 유산
다리가 저리다
타조
양철 낙엽
토끼 6섯 마리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다
상계1동 수락산 입구
흰 스프레이
주말 농장
나무들
토끼
수다 예찬
티셔츠 입은 여자
멋진 옷을 보고 놀라다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전자레인지
열대야
가로수
기이한 은총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범바위굿당 할머니들
그들의 춘투
물불
명태

분수
교동도에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 해설·거대한 침묵·이혜원

작가 소개

김기택 지음

시인 김기택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곱추」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상화시인상, 경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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