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에서 느리게 걷기

오생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3년 7월 28일 | ISBN 9788932014418

사양 신국판 152x225mm · 408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책머리에]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글은 사람이 산 만큼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 편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삶을 얼마나 깊이 있게 살고, 깊이 있게 꿈을 꾸었는가에 따라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소설가는 자신의 시대를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또 그것을 어떻게 문학적 의식으로 전환시켰는가에 따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문학의 원천이 반드시 삶이라거나 문학이 삶을 반영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인격적으로 훌륭한 작가가 뛰어난 소설이나 시를 쓴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사회 운동에 앞장서거나 체험이 풍부한 사람만이 시대정신에 투철하고 풍요로운 문학을 남긴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문학적 자원의 원천이 무엇보다 삶을 살고 있는 작가의 정신이나 태도에 기인하겠지만, 작가의 삶과 문학의 관계는 일치되기보다 어긋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찍이 앙드레 지드가 “훌륭한 생각이 나쁜 문학을 만든다”고 했던 것도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기가 산 만큼의 글을 쓰게 된다고 우리가 믿는 까닭은 무엇일까?

몇 년 전 대산문화재단의 초청으로 내한했던 알바니아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인 이스마일 카다레는, ‘분쟁 속의 작가’라는 큰 주제 아래 준비한 ‘문학과 삶의 관계’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삶은 문학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문학의 적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삶이 문학을 파괴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였다. 삶이 문학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대중의 저속한 취미와 삶을 지배하는 시장의 논리가 문학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와 문학의 질을 떨어뜨리고 문학의 대중화가 초래되는 현상을 겨냥한 발언이다. 그는 모든 인민이 문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공산주의 정권의 주장도 결국 문학을 파괴하는 수단임을 예로 들었다. 또한 그는 문학의 논리와 삶의 논리가 다르다는 전제에서, 삶의 중요한 사건들이나 프랑스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이 문학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취급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분쟁 속의 작가’라는 주제로 참가한 한국 작가들이 과도할 정도로 남북 분단의 비극적 현실의 무게를 중요하게 언급한 내용과는 상치되는 논리였다. 작가로서 알바니아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말하기로 한다면, 그가 우리의 비극적 역사보다 훨씬 더 많은 가슴 아픈 사연을 열거했을 터인데, 그와 같은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문학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그는 위대한 문학을 옹호하고, 고급한 문학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면서 삶과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사실주의적 소설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그의 글은, 문학의 의미는 분명한데 삶의 의미는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다시 말해 삶을 정의내리지 않은 채 그 둘의 개념을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논리를 전개한 것이 문제처럼 보였다. 삶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는 법이다. 카다레가 삶과 문학을 대립적인 것으로 논의했을 때,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삶은 부정적인 요소의 삶,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우리가 거부해야 할 세속적인 삶, 진부한 일상이 반복되는 삶, 그러므로 변화시켜야 할 삶을 의미할 경우도 있지만,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가치의 삶을 포함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찾고 지향해야 할 진정한 가치의 삶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훌륭한 작가란 삶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갖는 사람, 다시 말해서 허위의 삶을 진정한 삶으로 바꾸려는 열정과 의식이 분명하고 또한 그것이 문학의 형식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삶과 문학의 관계를 밀접하다고 보는 것이며, 작가는 자신이 산 만큼의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논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깊고 두터운 삶을 살면서 그러한 삶을 깊이 있는 문학으로 만들려는 시인과 작가들에 주목하였다. 비평집의 제목을 『문학의 숲에서 느리게 걷기』라고 붙인 것은 속도의 시대와 경박한 사회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진정한 가치의 삶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업을 그런 행위로 표현하는 한편, 문학적 작업을 소중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비평적 행위의 의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동차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세계 속에서 그 문명의 폐해와 역기능을 문제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이고, 또한 자동차를 타고 빨리 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며,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로운 산책에서 혼자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뒤섞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느리게 걸으면서 생각하고, 거리의 풍경과 사람의 표정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도시와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더 크게, 더 높이, 더 빨리’가 결코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도시의 허위 속에서 매몰된 숲의 진실을 바라본다.

나는 이 비평집에서 이 시대의 시인과 작가 들이 바쁘게 달려가는 현대인의 흐름 속에서 한가롭게 느린 걸음으로 걷는 산책자처럼 보이지만, 그 느린 걸음이 동반하는 사색을 통해 속도의 비인간화를 비판하고 시대의 진실을 꿰뚫으며 삶을 변화시키려는 진정한 반역의 의지를 보고자 했다.

2003년 7월
오생근

목차

책머리에

제1부
환상 문학과 문학의 환상성 _호프만, 발자크, 앙리 미쇼의 작품을 중심으로
폭력에 대한 논의와 문학 속의 폭력
‘느림’의 삶과 ‘느림’의 시학

제2부
사랑과 반역을 꿈꾸는 시와 시간 _황동규의 시
명상적 서정시의 품위와 깊이 _최하림의 시
삶의 바다와 실존적 의식 _김명인의 시
해체와 사랑, 죽음과 모성의 초현실적 세계 _김혜순의 시
사막의 도시와 그로테스크 시학 _최승호의 시
몸의 시에서 수련의 시학으로 _채호기의 시
삶의 어둠과 영원한 청춘의 죽음 _기형도의 시
고양이와 나무와 독자적인 삶 _황인숙의 시
저녁의 시간과 모성적 상상력 _나희덕의 시
삶의 세부에 대한 강인한 관찰과 시적 고행 _김기택의 시
욕망의 시대와 시인의 욕망 _유하의 시
‘번짐의 시학’ 혹은 그리움에서 사랑으로 _장석남의 시
폐허의 삶과 고통의 심연 _이윤학의 시
절망의 현실과 희망의 의지로서의 시 _김중의 시

제3부
창을 넘어 삶의 광장으로 _최인훈 소설 『광장』
삶과 내면적 아픔의 글쓰기 _이청준 중단편소설 모음 『별을 보여드립니다』
『오래된 정원』과 시간을 이기는 사랑의 힘 _황석영 소설 『오래된 정원』
도시의 폭력과 식물적 삶의 꿈과 저항 _신경숙 소설 『바이올렛』

제4부
삶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프랑스적 감수성 _프랑스 중단편소설 모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초월성을 바라보는 감동의 비평 _김주연 비평집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작가 소개

오생근 지음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소설 3부작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평단에 나왔다. 저서로 『삶을 위한 비평』 『현실의 논리와 비평』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 『문학의 숲에서 느리게 걷기』 『위기와 희망』『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등이 있으며, 대산문학상, 우호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재직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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