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공생

우찬제 비평집

우찬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3년 2월 27일 | ISBN 9788932013954

사양 신국판 152x225mm · 428쪽 | 가격 14,000원

수상/추천: 김환태평론문학상

책소개

[책머리에]

통도사에 간 적이 있다. 통도(通度)가 되었든, 통도(通道)가 되었든, 내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좇아 떠돌던 무렵이었다. 세상의 하고많은 길들 중에서 내 앞으로 열린 길은 전혀 없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릴 수만 있다면, 하는 따위의 턱없는 감상에 젖어들기도 했던 무렵이었다. 가망 없는 소망이었음에 틀림없는 그런 감상 때문에 나는 더욱 불안했다. 불안의 그림자를 덮으려는 포즈 탓이었는지, 나의 불안 신호는 남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나 같은 남이라 여겼던 이들조차, 나의 증발 증후군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하긴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물며 나 같은 남이었으랴. 사방으로 길은 막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통도사에서 통도(通度)도 통도(通道)도 보지 못했다. 단 하나, 본 것이 있다면 지옥으로 열린 길이었다. 명부전이었을까. 지옥도(地獄圖)가 있었다. 출생 연도별로 죄를 지으면 간다는 지옥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 경우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이 아닌가. 혀가 길게 뽑혀 나와 땅에 질질 끌려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무한 고통을 반복해야 하는 지옥의 그림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 불안의 뿌리, 내 고통의 뿌리가 바로 저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증발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아연실색했다. 말하고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에게 그 지옥도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적확한 느낌이었고, 그래서 확실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굳이 ‘통도’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가능하면 적게 말하고, 적게 쓰겠다는 다짐 속에서도 그렇지 못했던 때, 통도사에서의 발설지옥 체험은 나를 더욱 억누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말과 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근본 신호다. 무의식마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전언을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어 체계에 의지하지 않고 나를 드러내거나 남과 소통하기란 거의 어렵다. 언어적 동물인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입증하고 타인들과 더불어 산다. 그런데 작가 이청준의 말법을 단순하게 빌리자면, 개인적 존재적 언어도 그렇지만 특히 사회적 관계적 언어의 경우 흔히 탈 나기 쉽다. 순간적으로 홍성원의 소설 「무사와 악사」가 떠오른다. 사회적 관계적 언어의 경우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악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단순하게 몇 가지 관계적 언어의 조합을 만들어볼 수 있겠다. 1)나에게나 남에게나 악기가 되는 언어, 2)나에게는 무기가 되지만 남에게는 악기가 되는 언어, 3)나에게는 악기가 되지만 남에게는 무기가 되는 언어, 4)나에게나 남에게나 무기가 되는 언어, 등의 조합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무기의 성격을 다시 나누면 더 미분화된 조합을 생성해낼 수도 있다. 물론 지극히 드물겠지만 가장 소망스런 조합은 1)이다. 그쯤 되면 발설지옥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터이다. 최소한 2)가 되어도 괜찮다. 그런데 2)가 반복되면 현실의 나날에서 발설지옥을 미리 체험할 수도 있겠다. 3)은 최악이다. 이런 언어의 주체들은 필경 발설지옥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악인 이 폭력적 언어 조합이 실제로 가장 많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비관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3)보다는 좀 덜하지만 4) 역시 나쁘고 비관적이다.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삶 자체의 숙명도 그러하려니와, 언어의 숙명과 현실이 사람들을 참 성가시고 힘겹게 한다.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까지 쓰면서 오랫동안 언어의 문제를 탐문한 이청준이 한 산문에서 “삶의 실체를 바탕으로 하여 그 실체와의 약속을 배반하지 않고 말이 곧 그 삶의 실체의 모습으로서 말과 삶이 하나가 되어질 때 그 말은 우리의 삶의 창조의 질서가 될 것이고, 우리의 삶과 말 자체를 더욱 높고 넓은 질서로 해방시켜나가는 자유의 질서가 될 수 있을 것”(「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사이에서」)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참으로 소망스런 발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상태는 영원히 차연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서 언어와 언어적 상황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나 자신도 어찌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비관의 위협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문학을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문학 속에서도 종종 실패를 많이 경험하지만 말이다.

내가 오랫동안 ‘고독한 공생’이란 일종의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삶과 말과 문학과 비평의 구체적 상황이나 나의 실존적 감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번째 비평집인 『타자의 목소리―세기말 시간의식과 타자성의 문학』을 펴낼 때도 서문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데, 프랑스 문예 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Living Alone Together”란 표현을 접했을 때, 바로 이게 아닐까, 생각하며 전율한 적이 있다. 이 역설적 운명에 값하는 우리말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직역하여 ‘홀로-함께 살기’를 떠올렸다가 이내 마땅치 않아 ‘고독한 공생’으로 바꾸어보았는데, 그 또한 설명적이기도 하거니와 “Living Alone Together”의 실감을 온전히 전하지는 못한다. 어쨌거나 함께인 듯 홀로 살고, 홀로인 듯 함께 사는 우리네 삶의 어정쩡한 혹은 불우한 모습이나 실상에 대해, 나는 이 ‘고독한 공생’이란 표현과 더불어 골몰했다. 인간 존재의 숙명이 ‘고독한 공생’의 필요조건이라면, 언어적 상황이 그 충분조건이라는 거친 생각도 여러 차례 곱씹었다. 길게 늘어놓지 않겠지만, 실제 삶과 문학의 관계 역시 ‘고독한 공생’이긴 마찬가지다. 아울러 문학 텍스트와 비평의 관계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글들은 지난 몇 년 간 내 ‘고독한 공생’의 흔적들이다.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되, 결코 나일 수 없는 불안한 흔적들 말이다. 혹은 무수한 남들로부터 비롯된 타자의 목소리들을 내 방식으로 꾸려본 흔적들이다. 주로 밀레니엄 시기의 현실과 소설에 대해 나름대로 궁리한 담론들인 그것들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경계선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지난 20세기를 정리하고, 다른 한편에서 어떻게 새로운 21세기를 꿈꾸고 21세기 문학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인가를 탐문했다. 2부에서는 문학의 오랜 과제인 리얼리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몇몇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3부는 1990년대 소설 담론을 꿈의 테마와 정치적 무의식, 새로운 리얼리티 모색 등 몇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본 대목이다. 4부는 밀레니엄 시기에 특기할 만한 몇몇 문학적 풍경들을 작가/작품론 형식으로 개진한 것들이다. 정리해놓고 보니 눈도 희미하고 생각도 짧았던 것 같아 아쉬운 점이 많다.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각론 성격의 글에서 논의한 내용들이 종합적 성격의 글에서 일부 중복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민망하다. 어떠한 형태의 무기도 악기도 되지 못한 말들의 풍경이 비루하다. 함부로 쏜 화살처럼 안타깝다. 드러낸 말들도, 드러내지 않거나 못한 말들도, 거듭 발설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그 말들을 다시 길어올려 아름다운 악기가 되게 하고 영혼의 음악을 연주케 하여, 발설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소리도, 침묵도 정녕 제 자리에서 진정한 질서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발설지옥을 벗어나 통도(通道)로, 통도(通度)로 가는 길은 아직 아득하기만 하다. 절망과 응시, 혼돈과 성찰의 반복이 될 그 길 위에, 그래도 더불어 교감할 수 있는 여러 공생자들이 있음을 안다. 그분들께 두루 감사한다. 고독하지만 나는 공생한다.

2003년 2월
우찬제

목차

책머리에

제1부 경계를 넘어서

제2부 새로운 리얼리티

제3부 꿈의 서사 지도 20

제4부 꿈의 서사 지도 20/21

수록 평론 출전

작가 소개

우찬제 지음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세계의 문학』『오늘의 소설』『비평의 시대』『포에티카』『HITEL문학관』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소천이헌구비평문학상과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욕망의 시학』(1993), 『상처와 상징』(1994), 『타자의 목소리―세기말 시간의식과 타자성의 문학』(1996), 『고독한 공생―밀레니엄 시기 소설 담론』(2003), 『텍스트의 수사학』(2005), 『프로테우스의 탈주』(2010) 등이 있다. 현재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일하고 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395-4 | 가격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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