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원제 OTAKU LES ENFANTS DU VIRTUEL

에티엔 바랄 지음 | 송지수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2년 3월 29일 | ISBN 9788932013220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44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작품 소개]

“상상에 의한 재현이 현실을 압도한다!”
일상을 뒤로 한 채 가상의 세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아이들, 오타쿠!
오타쿠의 실체를 파헤치는 전대미문의 앙케트!

이 책은 크게 제1부 오타쿠 사회 속에서/제2부 사회 속의 오타쿠들/제3부 오타쿠와 옴진리교의 3부로 나뉘어 있다. 기존의 오타쿠에 관련된 국내 출간물들이 흔히 오타쿠의 주류를 이루는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게임 시장의 상품성을 나열하는 데 만족했다면, 이 책은 저자가 일본 속 오타쿠들을 직접 찾아가 앙케트하는 현장 탐방이란 방식을 취하여 생생하게 보고함과 동시에 그들을 양산해낸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사회’와 ‘집단’이란 제시어와 함께 꼼꼼히 짚어보고 있다.

“우리가 오타쿠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근대 이성의 ‘갓빠’가 키워낸 콩나물이 아닐까 하는 그것이다. 그들이 피해자든 수혜자든, 오타쿠들은 근대 이성의 합리화된 체계에 구멍을 내고 있다. 비디오 게임기 앞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어른들, 인형을 사랑하는 남자(피그말리온?). 평범한 일상을 거부하고 상식을 싫어하며 모든 생산주의적인 분위기로부터 도망쳐 달아나는 이들은, 겁쟁이일까? 아니면 혁명가들일까.”
__함성호, 「발문」 중에서

[서문]

내가 오타쿠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기사거리를 찾고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 여행 도중 나는 우연히 에티엔 바랄을 알게 되었다. 기자인 에티엔은 일본에 살며, 일어를 말하고 쓴다. 그의 일본 열도에 대한 식견은 탁월한 것으로서, 일본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마를 줄 모르는 샘과도 같다. 혹자는 그를 ‘다다미화’되었다고, 일본인보다 더 일본스럽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저 그가 일본을 좋아하며 자기의 정열을 남들과 나누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정열이 다소 격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들이 이 나라를 매도하려고 쉽게 동원하는 상투어들에 대해 그가 인내심을 잃을 때이다. 내가 난생 처음 오타쿠란 말을 들은 것은 에티엔 바랄의 입을 통해서이다. 에티엔이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나는 ‘오타쿠 현상’을 취재하기로 작정했다.1석 달 동안 우리는 오타쿠들을 찾아 도쿄 지방을 쏘다녔다. 그들을 화면에 담으면서 나는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들의 환경은 어떠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에티엔 바랄은 오타쿠에 대해 가히 기조가 될 만한 작업을 내놓고 있다. 이 책은 매혹적인 만남을, 그리고 패럴렐 세계2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다. 오타쿠 현상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인가? 그것은 새로운 가상 기술에 대한 인간의 적응 사례들을 보여주는가?그 것은 또한 목표도 가치도 없는 사회에서 출발한 젊은 세대, 너무나도 폭력적인 세상과 희망 없는 미래의 가공할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세대 나름의 대답이 아닐까? 오타쿠는 가상 제국의 첫번째 시민이자 ‘유목적nomade’ 사회의 한 예시(豫示)가 아닐까? 울타리 안에서, 고치 안에서 오타구들은 세상 현실을 도외시한다. 오타쿠들은 자신의 꿈과 욕구 불만과 환상……에 맞추어 영웅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만화, 비디오 게임, TV 연속극에서 온 인물들은 사실 노동의 세계, 어른의 세계, 성(性), 그리고 위기에 대한 방패들이기도 하다. 유년과 환상의 세계 속에 기꺼이 남길 원하면서 오타쿠는 노동 시장, 실업률, 고용 투쟁, 혹은 경제 전쟁 속으로의 진입을 최대한 지체시킨다. 반항아이자 일종의 탈영병인 그들은, 스스로가 소속되길 거부하는 우리의 세계를 사용하여 자기 나름의 세계를 만든다. 오타쿠들은 컴퓨터, 만화, 첨단 기술 제품들의 중개를 통해, 그러나 자주 친구와 가족을 소홀히하며 의사 소통하고자 한다. 그들은 화상과 인공 세계의 관조 속으로, 또는 과도하게 미디어화된 세계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서 안일 가운데 기계와 대결하는데, 비디오 게임기의 대가인 만큼 대결은 십중팔구 그들의 승리로 끝난다. 또래의 소녀들보다 화소 은하계galaxie pixel3의 여주인공들을 더 좋아하는 그들은 첨예화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고안하는 한편 방을 비디오카세트로 가득 채운다. 이런 현상을 거대한 불안의 표현으로, 세기말 젊은 세대의 심리적 퇴화의 한 표현으로, 또는 사회적 삶의 거부로 간주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오타쿠들을 좀더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들을 직접 접촉해본다면, 이 모든 것을 오히려 생산적인 측면에서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타쿠 현상은 아주 오랜 역사의 현대적 표출, 다시 말해 성년으로의 이행, 또는 가치와 전범을 찾는 유년기의 그 어떤 욕망의 한 표출이 아니겠는가? 일본 사회는 오타쿠들을 조심스레, 아니면 불안스레 고려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젊은이들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어쨌거나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이며, 그들의 기이한 탐색과 외설스런 의식(儀式)들은 사실 자기들을 낳은 바로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한 시도들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전후 세대에 속하고, 수차례에 걸친 산업 혁명의 산물이며, 겉보기에 수동적인 그들은 사회에 대해 독특한 비판을 제기하는 한편 유목적 환경에 대해 놀랄 만한 적응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점점 더 광활한, 초미디어화된, 평화로운, 그리고 첨단 기술이 보급된 우주에 산다. 그들의 숱한 편집증적 행태들은 정작 세상과 접촉하려는, 지표를 찾으려는, 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만들어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그만큼의 시도들이다. 오타쿠는 어린 시절과 성년 사이에서 머뭇댄다. 그는 소프트웨어 혁명이 낳은 새로운 풍경에, 후기 산업 혁명기의 현기증 나도록 빠른 변화에 적응하려 애쓰는 존재이다. 첨단 기술에 익숙한 그는 고안하고 검증하고 수집하면서, 종종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해에 필요한 열쇠를 제공하기도 한다. 겉보기에 수동적인 오타쿠는 사실 우리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며, 유명한 ‘유목적’ 의식들에 대해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에티엔 바랄과 더불어 앙케트를 하는 동안, 나는 비범하고 매혹적이고 감동적이고 또 매우 인간적인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소프트웨어와 비디오 게임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신제품 테스트 및 연구 기조 조성에 오타쿠들을 우선적으로 참여시키고, 또 연구원으로 고용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오늘날 오타쿠들은 세가Sega, 소니, 전문 잡지, 새로운 첨단 기술을 지향하는 기업들, 음반 회사,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들에서 일하고 있다. 그 어떤 영역도 그들에게 낯설지 않으며, 새로운 제품들과 새로운 경향들은 그들의 해박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들 덕분에 일본은 이제 고부가가치 산업 수출국임은 물론 ‘문화’ 수출국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혹시 그려낼 수도 있을 희화와 닮기는커녕 오타쿠는 한 문화의 출현, 일본이 그 중심인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구체화하는데, 그 물결은 벌써 오래 전에 일본 열도의 경계를 넘었다. 오타쿠는 세계적 현상인 것이다. 에티엔 바랄은 전대미문의 앙케트를 통해 탁월한 작업을 수행했다. 나로서는 오타쿠 현상을 발견하게 해준 그에게 크게 감사할 일이다. 우연한 이 발견과 더불어 나는 나 역시 오래전부터 오타쿠였음을 깨달았다! 한 오타쿠를 필름에 담으며 그에게 오타쿠의 정의를 내려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그 정의를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니까요.” 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디바Diva」4에 나오는 우체부 쥘Jules은 오타쿠예요! 수집하기 좋아하고, 기술 좋아하고, 물신 숭배하고, 수줍고, 도용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오타쿠지요.” 이 책을 읽으며 아마 당신은 나와 비슷한 발견을 하게 되리라. 그런데 혹시 당신은 벌써 오타쿠가 아닌지?

장 자크 베넥스 Jean­Jacques Beineix

[저자 서문]

80년대 초반에 누군가 내게 오타쿠 현상에 대해 물었다면 나는 아마도 일본 미디어가 좋아하는 일시적 유행들 가운데 하나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일시적 변덕처럼 보이던 그것이 실은 현대 일본 사회를 그것의 가장 영속적인 기능들 자체 속에서 질문하는 거대한 물결임을 인정해야겠다. 사실 일본만큼 교육과 정보와 소비를 강조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오타쿠들이 문제삼는 것은 바로 20세기 말 일본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이 세 지주이다. 오타쿠들은 이 세 분야에서 일본 사회의 과도함에 대해 일종의 촉매 구실을 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된 상처를 고스란히 떠맡는다. 아마 병든 것은 오타쿠들이 아니라 그들을 양산해낸 사회일 것이다. 오타쿠 1세대인 기리토시 리사쿠Kiritoshi Risaku는, 만약 중학교 때 친구들이 그를 따돌리고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절대로 고질라Godzilla 같은 괴물들, 그가 텔레비전을 통해 빠짐없이 시청하던 그 고질라 같은 괴물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오타쿠인 그는 연속극의 희생양인 괴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 그는 괴물들의 개입을 통해 자신을 경멸하는 학교와 도시를 파괴하던 자기의 환상을 오늘날에도 생생히 기억한다.“저는 현실보다 상상 세계가 더 좋아요. 저를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회의 규약들을 지켜서 무엇 해요”라고 지금도 그는 말한다. 오타쿠가 되는 것은 기리토시처럼 일본 사회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수백만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선택이다. 모두가 다 의도적으로 오타쿠가 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자세, 그들의 삶에 대한 선택, 그리고 그들 스스로 누에고치처럼 자아낸 가상 세계에 대한 그들의 선호는 그들이 일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겪는 어려움을 표징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왜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길을 떠나 만화, 만화 영화, 비디오 게임, 그리고 젊은 스타 가수들로 구성된 가상 세계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온 일본이 다 아는 격언이 있으니, “튀어나온 못은 두드려야 한다”가 그것이다. 이 격언은 “그룹에 이로운 사람은 그 구성원들에게도 이롭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일본 정신을 잘 보여준다. 내 논지는 그러므로 일본에게 있어 그룹이라는 이 문제적이고 편재적인 실체를, 일본 사회에 의해 배척된, 혹은 거기에서 스스로 이탈한 존재들을 통해 살피는 것이다. 끝으로, 슬프게도 유명한 사이비 종교 집단으로서, 인간 심리에 교묘히 밝은 교주가 일본 젊은이들의 병을 정확히 진단한 바 있는 옴진리교의 세계와 오타쿠 세계 사이에 공교로운 공동 작용synergies이 있음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타쿠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1999년 4월 에티엔 바랄

[발문]
오타쿠─근대 이성의 비판자들
의미 상실과 자유 상실
근대 이성의 몰락은 근대 이성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근대 이성은 어둠을 거두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둠을 덮으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근대 이성은 그 이전의 어둠을 덮고 있는 ‘갓빠’(cover) 같은 것이다. 그 안에서 근대 이전(혹은, 이후)은 적당한 습도와 어둠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처럼 번식한다. 아마도, 탈근대에 대한 이론들이 근대를 악으로 몰아부치고 있다는 의견은 근대의 ‘갓빠’에 구멍이 난 후, 당당히 밥상에 오를 콩나물 무침의 고소한 맛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신의 완전성과 물심이원론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낳았다면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명제는 데카르트와 오라토리오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논리적 근거를 엎으며 근대 이성의 ‘갓빠’에 돌이킬 수 없는 구멍을 냈다. 그리고 베버는 다시 그 구멍을 기워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과학과 이성을 심미주의적으로 해체하고자 하는 니체의 주장과 달리 베버는, 신의 죽음을 ‘통일적 세계상의 탈주술화’ 즉, 문화적 합리화로 해석했다. 베버는 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대신에 이성을 복위시키며, 신이 없는 시대를 좌절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사회의 합리화 과정에 대한 과학적 병리학자의 냉철함뿐이며, 합리성에 대한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은 과학과 법에서 탁월하게 구현되고 있는 방법론적 절차적 합리성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에서 베버는 ‘문화적 합리화’를 ‘문화적 가치 영역들의 분화’로 파악한다. 말하자면, 과학, 예술과 비평, 법과 도덕 등의 영역들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채 분화되어 각 영역들은 자신의 고유한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진화를 구가해나간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역동성과 갈등의 근원은 바로 그와 같은 문화적 가치 영역들의 분화에 있다. 문화적 가치 영역들의 분화가 가져오는 역동성과 갈등이란 다름아닌, 완고한 체계 내에서 겪는 현대인들의 상실감과 그에 따른 병리현상들을 가리킨다. 즉 베버는 사회적 합리화를 조직, 형태로 제도화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사회적 합리성이 최고의 형식으로 구현됨과 더불어 의미 상실, 자유 상실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즉 의미 상실은 문화적 합리화의 결과로, 그리고 자유 상실은 생활 세계의 화폐화와 관료화가 강화되면서 개인들이 겪는 자유 박탈을 지칭한다. 오타쿠들이 겪는 사회화 과정의 실패도 이런 박탈감과 그리 멀지 않다. 에티엔 바랄이 ‘호모 비르투엔스Homo virtuens’라고 부르면서 가상 현실에 몰입하는 오타쿠의 특성을 짚어내면서 “나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한 마틴 루터 킹과, 기계와 인간이 평등하게 될 미래를 꿈꾸는 비디오 게임 오타쿠 와타나베 고지의 말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생활 세계에서의 자유 상실과 문화적 합리화의 결과로 나타난 의미 상실을 의미한다. “좀더 범속한 차원”이라고 바랄은 말하지만 그의 책 『오타쿠』의 처음을 장식하는 이 비디오 게임광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컴퓨터 디스크 드라이브에 자기의 페니스를 삽입하고, 롬 메모리들이 꽂꽂이 침봉처럼 페니스를 찔러대며, 냉장고와 자동차와도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꾸는 이 게임광은, 현실 세계와의 의사 소통이 단절되면서 차가운 기계와의 뜨거운 소통을 나눈다. 마치 장정일의 시를 읽는 것 같은 이 충격적인 고백은 반대로, “나는 근대의 차가움과는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항변이기도 할 것이다. ‘가상 세계의 아이들’은 사실 ‘잃어버린 세계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세계의 주술성을 거두고 합리화 과정을 밟으면서 우리는 종교적 형이상학이 주던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법적 제도적 장치들, 이른바 베버가 얘기하는 문화적·사회적 합리화가 메워주지 못하는 공동으로 다가온다. 니체가 뚫어 놓은 근대 이성의 ‘갓빠’를 기워나가는 베버의 바느질은 어느새 그것을 회생 불가능한 불능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현대의 병리적 현상을 규명하면서 그 구멍을 통로로 만든다. 오타쿠 문화의 좌절감―근대의 병리와 조건하버마스에 있어서 근대화는 상징적 재생산 영역에서의 언어화, 즉 의사 소통적 합리성의 증대와, 물질적 재생산 영역에서의 탈언어화, 즉 목적 합리성의 증대를 동시에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베버가 합리화의 모순으로 본 문제를, 목적 합리성의 계속적인 확장이 의사 소통적 합리성의 영역을 위협함으로써 발생된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다시 언어적으로 달성된 합의에 의해 조정되는 의사 소통 행위는 ‘생활 세계’의 영역으로, 그리고 권력과 화폐의 매개에 의해서 조종되는 목적 합리적 행동은 ‘체계’의 영역으로 개념화한다. 이러한 생활·세계와 체계의 영역은 의사 소통적 행동을 발전시키고(생활 세계), 권력과 화폐의 매개를 통한 언어적 상호·이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도구적 행동(정치적·경제적 체계)을 발전시켰다. 특히 하위 체계인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경제적 체계는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서 그 합리성이 잠재된다. 근대화의 병리는 이러한 잠재된 합리성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또 의사 소통적 이성이 광범하게 제도화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에티엔 바랄의 성실한 인터뷰는 오타쿠들이 어떻게 ‘체계’의 영역에 절망하고 ‘생활 세계’에서 소외되어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오타쿠들은 절대 정신병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도 현대라는 사회적 병리에 대해서지 정신병리에 대해서가 아니다. 오타쿠라는 말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4명의 소녀를 살해한 27살의 미야자키 쓰토무의 변태적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여자아이들을 살해한 후 그 시체를 먹는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였고, 사람들은 그의 광기에 경악했다. 집을 수색한 결과 그는 수많은 성인용 애니메를 수집하며, 그 세계에 빠져 있던 오타쿠로 드러났다. 이때부터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는 정신병리로 인식되었고, 지금도 그 이미지는 지워질 수 없는 오타쿠들의 오점이 되었다. 그러나 오타쿠オタク는 원래 일본어의 당신, 댁(お宅)을 뜻하는 이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나 オタク란 말이 가타카나로 쓰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본래의 의미가 아닌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오타쿠 현상의 보편화를 증명하듯이 ‘オタク’라는 말은 이미 국제어다. 보통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매니아를 지칭하는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otaku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오타쿠는 팬, 매니아와 구분되며 대체로 그 다음 단계가 오타쿠라고 얘기된다.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너무 좋아해서 아주 높은 경지에까지 오른 사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좋아한다는 점은 팬이나 매니아와 같지만 여러 번의 질적인 도약을 거쳤다는 점에서 단순한 팬이나 매니아와는 차원이 좀 다른 사람들이다.(이런 단계적인 구분은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드래곤 볼』이나 『포켓몬스터』의 진화 단계는 오타쿠들이 거쳐온 진화 단계와 아주 비슷하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매니아들이 하나의 대상을 연구하기 위해 결국 그것과 관련된 사실을 모조리 연구하기 때문 거의 공통적으로 박식하다면 오타쿠들은 그런 전문가를 넘어 비평가적인 시각까지 지녀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사회적 에너지로 전환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은데도 이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비정상적이며 병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말하자면 이들의 합리성은 철저하게 잠재되어 있다. 그들은 “운동 부족으로 인해 비만하고 여드름투성이에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다.”고 에티엔 바랄은 전한다. 많은 오타쿠들의 첫번째 좌절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목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 내에서의 좌절과 의사 소통 행위의 좌절을 뜻한다.“일본에서의 오타쿠들의 출현은 이 나라 교육 제도와 별도로 고려될 수 없다. 80년대에 오타쿠들이 급격히 증가한 것에 대한 책임의 큰 부분은 일본 교육 제도의 폐단에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대중을 위해 구상된, 하지만 개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교육 제도의 희생자들인 것이다.”라고 바랄이 밝히고 있듯이 오타쿠들은 학교라는 ‘체계’에 적응하지 못함과 동시에 ‘생활 세계’에서도 밀려난다.그렇듯이 하버마스는 근대의 병리는 ‘생활 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는 잘못된 발전 과정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화폐와 권력의 체계 규제적 구조가 생활 세계의 상호이해와 합의의 사회적 통합 구조를 점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근대의 병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민화의 조건은 하버마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꼽아지고 있다. 첫째, 전통적 생활 형식들이 붕괴되어 생활 세계의 구조적 요소들(문화·사회·인성)이 광범위하게 분화된다. 둘째, 하위 체계들과 생활 세계의 교환 관계들이 분화된 역할들(노동자·소비자·민원인·시민의 역할들)에 의해 규제된다. 셋째, 노동자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게 하고 유권자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실재추상(die realen Abstraktionen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없지만 체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매체로서의 법’ 정도로 이해되어진다. 매체로서의 법이란 절차를 통해 정당화되는 하위 체계들의 조직 수단을 말한다. 즉, 법은 경제·무역·기업·행정에 관한 법의 영역에서 화폐와 권력 매체와 결부되어 종합적인 조종의 기능을 떠맡는 매체이다. 그에 반해 ‘제도로서의 법’이란 절차를 통해서도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는 법규범들을 의미한다. 기본권이나 인민주권 원리처럼 헌법의 토대들,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의 원리들, 도덕에 가까운 형법 위반 사건들―살인·낙태·강간 등의 모든 규제들이 제도로서의 법의 전형적 사례들이다. 매체로서의 법은 형식적으로 조직화된 행위 영역을 확대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제도로서의 법은 규제 기능만을 갖는다)들이 체계로부터 보상을 받고 순응적이 된 참여자들에 의해 묵인된다. 넷째, 복지국가 모델에 따른 보상이 자본주의적 성장이 계속됨에 따라 재정적으로 보장되고 그 결과 자아 실현과 자기 결정에 대한 희망들이 사적인 것으로, 즉 소비자와 민원인들의 역할 속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건들은 사물화된 기제로 인해 파편화된 의식이 발생할 때만 비로소 충족된다.사물에 거는 주술오타쿠들이 보여주는 편향적 취향과 편집증적인 자세는 일본 사회의 이런 파편화된 인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전통과의 단절은 한국의 그것과 구별된다. 한국이 전통적인 생활 관습과 단절되어 그에 따르는 물질적 토대들은 잃어버렸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성리학적인 가치들을 고수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은 전통적인 물질적 토대들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한국과 달리 전통을 의식적으로 파편화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놀라워하고 있는 일본의 집요한 장인 정신은 사실 근대화의 산물이다. 개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일본 교육 제도의 원인을 집단주의에서 찾으며 그것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말한 에티엔 바랄의 진단은 적확한 지적이 아니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그렇고 과거에도 일본인들에게 있어 유교의 영향은 미미할 정도이다. 단지 우리가 근대화를 이루면서 구습으로 여겼던 유교를 일본은 (우리 입장에서는 특이하게)근대화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 유교 윤리의 생활화는 이루지 못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갖고 있는 모든 문화적 요소를 총집적시켜 근대화를 진행해 나갔고, 그 중에서 유교는 천황제를 강화하기 위해 가장 유력하게 쓰인 요소들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그래서 일본의 전통 문화는 일본인의 정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들이 즐기는 다도나 하이꾸를 짓는 모임, 그리고 가부끼 같은 공연들은 일본인들의 정신적 유대나 정체성과 아무 상관없이 별개로 존재한다. 단지, “그들은 그런 일을 즐겨할” 뿐이다. 그래서 오타쿠들은 그들의 몰입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다. 아니, 회의 할 수가 없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이 이룩한 경제적 부가 더 얹어지면서 오타쿠들은 드디어 소비하는 인간이 된다. 그렇다면 오타쿠들은 근대 이성의 수혜자들일까? 피해자들일까?이들은 ‘체계’에서 제외되고 ‘생활 세계’에서도 의사 소통의 장애를 겪는다. 그런 이들이 자기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을 쫓아낸 ‘체계’의 도움에 의해서이다. 그 이후에야 이들의 의사 소통은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오타쿠들과 이루어진다. 즉, 오타쿠들의 의사 소통 욕구는 목적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는 ‘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체계’는 다시 오타쿠들을 포섭한다. “오타쿠 시장을 공략하라”는 ‘체계’가 오타쿠들을 대하는 방식을 말해준다. 일례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텔레비전 방영때는 시청률 7퍼센트의 인기 없는 프로였으나 방영이 끝난 후 비디오로 인기가 급상승했고 관련 상품은 400억 엔의 매출을 기록했다.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영화 관객은 30만 명이었는데 이 중 20만 매가 사전 예약이었다고 한다. 사운드 트랙 CD는 20만 매 이상, LD는 22만 매, 필름북은 30만 부 이상 등의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 열풍의 뒤에는 에반게리온 오타쿠들이 있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근대 이성의 ‘체계’가 이들의 의사 소통을 사물화된 기제로 내몰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타쿠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보다는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그들의 의사 소통 행위를 이루어나간다. 그리고 오타쿠들이 행하고 있는 사물과의 교감은 목적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는 ‘체계’에 대한 거부감에 그 원인이 있다.“저는 현실보다 상상 세계가 더 좋아요. 저를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회의 규약들을 지켜서 무엇해요.”괴물들만 모으는 기리토시 리사쿠의 말처럼 그들은 무엇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과연 오타쿠들은 베버의 지적처럼 문화적 합리화 과정이 낳은 ‘정신이 부재한 전문인’과 ‘마음이 없는 향락 인간’들일까? 어쩌면 ‘생활 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는 근대의 병리를 낳는 하버마스의 네 가지 조건은 파편화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파편화된 인식을 낳는 조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오타쿠들은 분명 근대 이성의 산물이면서 피해자일 것이다.파편화된 의식은 생활 세계의 문화적 빈곤화 현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베버는 근대의 문화적 특징을, 이전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세계상 안에서 표현된 실질적 이성이 근대에 와서는 다만 형식상으로만 결합하여 진리, 규범적 정당성, 아름다움 등의 특수한 시점으로 분열되었다는 데서 찾았다. 그런 분열은 또한 각각 인식의 문제, 정의의 문제, 미학의 문제로 전환되어 급기야는 과학·도덕·예술 등의 가치 영역의 분화가 일어나고, 그것은 또 각각 상응하는 문화적 행동 체계로서 과학적 논의, 도덕이론적 탐구, 예술의 생산과 비판 등의 전문가의 문제로 제도화된다. 이러한 전문화의 결과로서 전문가 문화와 광범한 독자층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현상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전문화된 성찰을 통해 비대해진 각각의 분화된 문화의 모습들은 그 결과 일상 실천의 소유로 되지 못하고, 문화적 합리화와 함께 생활 세계의 빈곤화를 조장한다. 오타쿠 문화는 이러한 현대의 병리 현상을 고스란히 한몸에 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신화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옴진리교의 사린 가스 테러를 상기하자). 신의 죽음을 통해 세계상의 탈주술화 과정을 겪어온 지금, 그들은 사물에 주술을 걸고 있다.우리가 오타쿠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근대 이성의 ‘갓빠’가 키워낸 콩나물이 아닐까 하는 그것이다. 그들이 피해자든 수혜자든, 오타쿠들은 분명히 근대 이성의 합리화된 체계에 구멍을 내고 있다. 비디오 게임기 앞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어른들, 인형을 사랑하는 남자(피그말리온?), 평범한 일상을 거부하고 상식을 싫어하며 모든 생산주의적인 분위기로부터 도망쳐 달아나는 이들은, 겁쟁이일까? 아니면 혁명가들일까.

_함성호(시인, 건축가)

목차

서문

저자 서문

제1부 오타쿠 사회 속에서

호모 비르투엔스의 꿈
오타…… 뭐라고?
약간의 역사
저희 어머니에게 말하지 마세요…
인형의 사랑을 위하여
인형의 왕국에서
사탄, 천사 그리고 아이 같은 여인
“내 여자 친구는 너를 서게 하지 않니?”
장난감 코너의 여고생
변태 사진 작가는 자기 패를 잘도 감추었다
17살, 비키니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다
디지털 인형의 시대
네 아이돌이 누군지 말해봐. 그러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지
하라주쿠에서의 쇼핑
나의 여신이여, 좀더 가까이
아이돌 오타쿠들의 천태만상
소녀들의 치마 아래에서
만화 마니아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만화의 영향
코미케, 팬진 왕국
소녀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제2부 사회 속의 오타쿠들

집단주의 대 오타키즘
부모의 사임
집단과 관련한 개인의 심리 구조
학교 이데올로기
학력 경쟁
이지메, 튀어나온 못 사냥
내 친구 괴물들
항상 더
‘오타쿠를 위한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의 표류
마스코미의 독재
현혹의 거울을 깨뜨리다
하얀 밤들의 검은 화면
M
오타쿠 왕

제3부 오타쿠와 옴진리교

옴의 아이들
아사하라 쇼코 또는 맹목적인 복수
아버지를 찾는 젊은이들
오타코미즘 또는 옴진리교 내의 오타쿠 문화
바람을 뿌리는 자는 폭풍을 거둔다
만약 세상의 모든 오타쿠가─결론

발문: 오타쿠─근대 이성의 비판자들

작가 소개

에티엔 바랄 지음

1964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986년에 <국제동양어문화연구소l'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INALCO)>를 졸업하고 1989년까지 프랑스 <누벨 옵세르바퇴르Nouvel Observateur>의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일본 아사히 신문의 주간지 AERA 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신기술, 사회 문제와 작가주의 영화 분야의 전문 기자로 일하고 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라디오·TV·언론사의 진행자, 기자 혹은 특파원의 자격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그는 1986년 이후 줄곧 일본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 『123.456.78. 일본인123.456.78Japonais』(Paris, Édition lIyfunet, 1991)『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OTAKU, Les Enfants du Virtuel』(Paris, Édition Denoël,1999)등이 있다.

송지수 옮김

서울대학교 불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프랑스 투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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