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론에서 길을 잃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58

김윤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1년 11월 16일 | ISBN 9788932012940

사양 신46판 176x248mm · 128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시집 『부론에서 길을 잃다』에서는 외부의 사물이나 정경들이 모두 내면의 기호들이다. 아니, 시인이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릴 때마다 그곳에 있는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말하는 풍경들, 행동하는 풍경들 앞에서 시인은 동의한다, 그들이 시인의 내부라고. 외부 사물들과 내면의 심정은 서로 쓸쓸함을 주고받는다. 열망은 곧 식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사물과 심정은 이별해야 할 것이므로……

[뒤표지 글]
내가 시대를 잘못 읽었다. 모든 사물들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시대의 뒤안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충혈되어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안으로 피 흘리게 마련이다. 내출혈로 벙그는 시대의 꽃숭어리들, 나는 그것들이 두렵다. 충혈된 시대의 모순은 모순이 아니다.

충혈은 절망이며 희망이다. 절망이 절망을 향해 가고 희망이 희망을 향해 가나 그 끝은 혼돈과 광기의 공간이다. 내 시는 거기서 일어선다. 충혈된 시가 충혈된 시대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시간의 슬픔과 소멸의 아름다움 _김병익

서재랄 것도 없는 내 이층 방의 한쪽 벽에는 작고한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천관우(千寬宇) 선생이 써준 글씨로 만든 편액 한 점이 걸려 있다. “逍遙一世之上 B+天地之間”의 그 글은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것으로 그 뜻은 한문에 무식한 나도 대충 짐작은 가지만 ‘비예(B+)’란 어휘가 낯선 것이었다. 천선생에게도 들었고 사전을 찾아보아 그것이 ‘흘겨본다’는 뜻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 흘겨봄은 ‘눈을 가로 떠서 노려보다’라는 나쁜 뜻이 아니라 대상에서 조금 떨어져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본다는 좋은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구절은 세상을 느긋하게 슬슬 돌아다니며 만물을 거리를 두고 비스듬히 바라보며 음미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비예’ 혹은 비스듬히 바라본다는 말의 구체적인 모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김윤배의 이번 시집에서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이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시인이 이 구절을 알고 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시는 분명 ‘소요’와 ‘비예’로 오늘의 우리 삶의 여러 정경들을 살려 전해주고 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창마다 입김처럼 피어오르는 따스한 불빛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마지막 전동차의 브레이크 소리 빈 가슴 울리는 사당이나 구파발 종점의 어둠이 얼마나 아픈 상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할 일 없는 봄날 마음 그늘 흐드러진 진달래꽃 무덤이 얼마나 사무친 밥그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미명, 아내 유리 그릇 부딪는 잔잔한 울음이 얼마나 기막힌 위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새벽 3시 서울역 대합실 노숙의 꿈이 얼마나 속 쓰린 사랑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밤거리를 헤매고 혹은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이르며 봄 언덕에도 오르고 아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연상한다. 그가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에 담는 정경들은 “창마다 입김처럼 피어오르는 따스한 불빛” “전동차의 브레이크 소리” “진달래꽃 무덤” “아내 유리 그릇 부딪는” 소리, “노숙의 꿈” 등 가지가지이며 빛과 소리, 정경과 꿈으로 서로 다르지만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정서는 따뜻하면서, 그래서 스며드는 슬픔이다. 그것은 “따스한 불빛”이지만 “큰 슬픔”이고 “빈 가슴 울리는” “아픈 상처”이며 화사한 진달래꽃 무덤은 “사무친 밥그릇”이고 아내가 유리 그릇을 만지며 내는 소리는 ‘울음’으로 들려오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막힌 위안”이 되고 노숙자의 고된 꿈은 “속 쓰린 사랑”에서 빚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슬퍼서 아름답고 정겹기에 고통스러우며 울음이기에 위안이고 따스함이 상처가 되는, 엇갈림의 감정이 하나의 측은한 긍정의 정서로 피어나는 내면적인 모습이 ‘소요와 비예’로 갖게 되는 시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인 듯하다. 그 시선이 봄날의 화사한 햇빛 속에 진달래꽃 무덤을 바라보는 맨 가운데의 제3연을 중심으로 하여 한밤과 새벽으로 나뉘어지고 있어 그의 소요와 비예는 대체로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김윤배 시인의 근원적인 서정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예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김윤배의 이번 시집이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게 만드는 것이 제1부의 마지막에 자리한 시 「아나바스 스칸덴스를 꿈꾸다」이다. 도대체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이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니, 동남아나 인도・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농어 비슷한 민물고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뜻대로 육지를 돌아다니는 물고기climbing fish 아나바스 스칸덴스anabas scandens를 끌어온 이 시에서 시인은 제사(題詞)를 통해 “강물의 흐름에 맡겨 사색의 집을 짓던 나는 왜 갑자기 바람 부는 언덕에 서고 싶었을까” 자문하면서도 그 앞의 시들과 제2부의 시들을 갈라놓고 있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제1부에서 “강물의 흐름에 맡겨 사색의 집을 짓던” 시의 화자는 “강물을 나”서 “언덕을 향해 가슴지느러미를” 미는 아나바스 스칸덴스가 되어 “죽음의 벌판”을 헤맨다. 물을 떠나 너무 오래 소요했으므로 지쳤을까, 이 죽음의 벌판에서 함께 “몸이 부패”했을까, 화자는 “비린내를 맡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제3부에서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선다”(「잃어버린 나는 이미 그곳에 가 있다」). 그는 강가로 가고 숲으로, 절로 배회하며 때로 길을 잃고(「부론에서 길을 잃다」) 또 때로는 “평생 치유되지 않는 상처”(「침묵은 숲이 견디고 있는 상처이다」)를 입으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다시 일어선 그는 제4부에서 그의 길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사람들과 ‘동행’하며 “밀고 써는 바다, 또는 생성과 소멸을 두고” “더 오래고 견고”한 그의 원래의 자리 “해안의 침묵”으로 돌아온다(「동행」). 이 시집은 그러니까 강물 속에서 세계의 슬픈 존재론적 상황으로 우수에 젖은 한 경건한 시인이 오욕의 육지를 배회하고는 탈진한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물로 돌아오는 순례의 길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순례’란 말을 자주 쓰며 “낡은 사원을 순례”(「순례자」)하는 ‘순례자’로 자처하기도 한다.

당연히, 아름다운 영혼이 ‘순례’하는 죄 많은 세상은 넓고 황막하다. 시인은 “굴종과 배반의/아름다움”(「서안에서는 사람이 빛난다」)을 드러내는 “황토 분진의 서안”을 지나, 러시아와 이탈리아를, 그리고 이 나라 이곳저곳, “사원을 강물처럼 흘러간 기원들/몸 곳곳에 미라로 누워 있”(「순례자」)는 땅들을 순례한다. 그리고 그 ‘첫 경험’은 “참혹한 눈물”(「빨강 침대」)이었다. 그는 송탄의 양부인 제니의 집에서 “점액질의/삶이었으므로 비굴한 분노”(「빨강 침대」)를 느껴야 했고 러시아의 여인들과의 “더럽고 황홀한 순간”에서 “참혹한 분노”(「백야를 건너며」)를 되씹어야 했으며 평택에서는 “열네 살 미혼모”의 ‘비명’을 들어야 했고(「열네 살의 봄」), 폼페이의 화산 유적에서는 “성애 속으로 숨은 도시의 비탄을/페티는 납 중독으로 파랗게 변한 입술을”(「페티의 집」) 보아야 했다. 이 땅은 “처참한 육신의 해체, 피난 행렬이 무너지며 쏟아진” “오, 절망하는 모든 것들이 열고 들어가는/저 비탄의 문, 모든 기억 속의 전장”(「절망하는 눈」)인 것이다. 그 세상은 “우리도 어린 날 아메리카를 꿈꾸며/추잉껌 구걸하다 주먹감자를 먹”인 수치스런 역사가 지금도 “낮술 취해 아메리카를 노래”하는 “달맞이꽃들 노랗게 웃”는 웃음으로 되풀이되는(「달맞이꽃이 있는 풍경」) 땅이며 “적개심이 역류”하고 “매복의 밤 하얗게 질려 있는”(「철새를 꿈꾸는 총구들」) 남북이 대치한 전선이며 금 그을 수 없는 바다조차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나드느라/바람의 등은 퍼렇게 멍이” 드는 “물목 턱없이 가팔라 보이는” 휴전선 바다(「백령 뱃길」)였다. 이곳들은 “바람은 강철 같아 겨울 내내 쇳소리를” 내는 ‘동토,’ “너보다 먼저/시간 속을 달려와 언 땅 껴안고 뒹”구는 “바람의 땅”(「겨울 양수리에서」)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나바스 스칸덴스처럼 물에서 유영해야 할 시인 김윤배는 강 또는 호수와 바다에 머물러서야 섬세하면서도 깊은 상상력으로 이 세계와 삶의 속을 지느러미질한다. 그러나 그의 물은 그가 그 안에서 그것의 육체성을 껴안으며 관능적인 쾌감을 찾는 물이 아니라(김윤배는 물이 아니라 오히려 아나바스 스칸덴스가 배회하는 육지에서 관능을, 그것도 타락한 성의 부패를 발견한다), 그로 하여금 그 물을 바라보며 그 물의 존재성에서 세계의 근원적인 운명, 그러니까 시간과 그 시간이 같이하는 소멸에의 인식을 깨우쳐주는 물이다. 그가 끊임없이 서해 연안으로, 한강의 지류로 해안선을 타고 국도를 달리며 바다와 강과 호수를 찾는 것은 그 물들의 위를 흐르는 시간의 존재성이며 그 존재의 스러짐을 통해 조명되는 존재의 소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바다와 호수 혹은 강물에 익몰하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물들을 예비하고 있는 해안과 강변, 혹은 섬과 포구, 계곡과 호반에서 보는 물과 그 정경이며 거기서 가혹하게 감동당하게 되는 시간에 대한 각성의 고백이다. 그래서 그가 물을 만나는 시간은 그 시간의 흐름에 대한 정서를 충격해주는, 해가 지는, 어둠이 드리우는, 그래서 일몰의 잔광이 빛나고 밤의 고즈넉함에 젖어드는 즈음이다. 이 즈음과 정황, 그러니까 해가 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이 시간의 노을과 돋아나는 별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인은 시간의 움직임을 가장 선명하게 깨닫고 그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발견 속에서 저절로,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을 명상하며 존재의 기미를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욕망을 잠재우고 근원적인 존재성에 대해 통회하게 만든다. 그의 아름다운 시 「도비도의 일몰」은 그런 그의 시세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붉은 해는 생각을 멈춘 듯 주춤거린다
녹안리의 하늘 불타고 붉은 적막이
가파른 해안을 들불처럼 번져간다한 세기가 끝나기 전
도비도의 일몰을 보아야 한다는 듯
오랜 시간 바닷바람에 마음 내던진다
일몰의 순간 펄럭이며 떠나는 물길에 얹혀
시간이 끼룩끼룩 갈매기처럼 운다는 걸
어찌 몰랐을까 이제는
되돌아가야 할 먼 길을 염려하며
어두워지는 바다를 본다
검붉게 타오르는 물비늘에 얹혀
온갖 욕망들 거대한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일몰의 바다는 참회조차
오욕으로 바꾸어놓는다
서해의 물빛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을 헤아려
이곳 도비도를 떠난다 해도 가슴 아래
숨어 흐르는 먹먹한 시간들은
언젠가 환하게 아플 것을 안다

도비도에서의 참회는 짧고 깊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정경에 들면서 우리는 시인과 함께 일몰의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는 한 편의 엄숙한 정화의 성사를 치르는 것 같다. 시인은 세기가 바뀌는 순간의 마지막 해를 보기 위해 도비도로 달려간다. 바다는 진한 노을로 붉게 타오르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인은 조금씩 어두워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 하염없음에 두 개의 물상이 ‘얹힌다.’ 하나는 시간이 “물길에 얹혀” 갈매기의 끼룩끼룩 우는 소리와 함께 흐르고 있고, 또 하나는 “온갖 욕망들”이 “물비늘에 얹혀” 꿈틀대고 있다. 시인이 50여 년 동안 살아온 20세기가 가고 있고 이제 새로이 살아가야 할 낯선 세기가 다가오는데 어찌 욕망과 참회의 감회가 부풀며 솟구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펄럭이며 떠나는 물길”)을 눈으로 바라보며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덧없는 욕망이 지는 해와 함께 스러져가는 것을 느낀다. 이 장엄한 장면에 부닥치면서, 그렇다, 시인은 참회조차 이에 이르러 ‘오욕’이 되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숙연한 체험을 치르면서, 그제야 바다와 더불어 그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이 성결(聖潔)의 경험은 ‘짧지만 깊고’ 그의 내면 깊숙이 ‘환한 아픔’을 줄 것이다. 여기서의 욕망과 참회는 실제의 삶에서 저질러온 타락과 죄악이기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 시간에 압력을 당해야 하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처한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시인의 가장 깊은 원죄적 고백일 것이다. 그 참회와 고백, 회한과 슬픔들은 이런저런 계기마다 강화되어, 소래포구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바람에 “남루한/하루가 펄럭인다 저 바람 앞에/남루하지 않은 생이 있겠는가”(「소래포구」)고 탄식하게 하고, “산 바다와 죽은 바다를 가르는” 해안선을 달리며 “이 욕망의 길 끝에 무엇이 나를 기다려/바다를 향해 추락하고 있는/장엄한 일몰을 본다는 것인지” “소멸하는 영혼끼리/불태울 마지막 슬픔”(「조용하고 무거운 슬픔」)을 조용하고 무겁게 받아들인다. 김윤배의 심성을 주도하고 있는 바다와 호수, 강의 모티프, 그가 그것들을 만나는 일몰의 순간은 다시 보면 소멸과 침묵의 은유이고 이 은유는 ‘바람’으로 대유되기도 하는 ‘시간’이란 것의 우주적 운명과의 조우를 드러낸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바다에서나 숲에서, 강에서나 절에서 시간을 만나고 시간이 가져오는 소멸을 발견하며 시간과 더불어 이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고 살고 있다. 바다의 일몰에서 시간의 소멸을 발견하는 시인은 그러나 물이 아닌 곳곳에서도 마침내 “시간의 폭력”(「시간들의 풍경」)들에 압도당하며 그것을 견디기 겨워한다. 그 시간은 여름날의 작은 저수지 물처럼 “느리고 무거”(「작은 저수지에서 생긴 일」)우며, 그렇게 고여 있고 “침묵처럼 잠들”(「시간들의 종말」)지만, 그럼으로써 그것은 “서러운 불덩어리”로 “쿵 하고/가슴에 박”(「조용하고 무거운 슬픔」)히며 “내 생애를 관통하는 화살”(「가문비나무숲에 대한 기억」)이 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왜 이처럼 ‘광포한 힘’이 되는가. 그것은 그것이 “소멸하는 영혼끼리/불태울 마지막 슬픔”을 가졌기 때문이고 “소멸하는 빛의 두려움”을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그래, 시간은 소멸이다. 그것은 고통이고 슬픔이지만 소멸하는 시간은 그 고통과 슬픔까지 소멸시켜준다.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고통 없이 지켜보는 시인의 슬픈 시선은 감동적이다. 그 시를 읽는 우리의 가슴 속에 그것은 또 하나의, 우리 내면을 “관통하는 화살”이 되어 소멸하는 시간의 불멸성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밀어올림과 끌어내림 사이에
깊은 잠 같은 시간이 고여 있다
시간은 해변에 깔려 있는
조약돌 사이에 소리 없이 스민다
고여 있는 시간의 소멸을
나는 고통 없이 지켜본다
저 고여 있는 시간의 삼투 속에
내 생의 상처받은 시간들이 따라 스민다
―「안면도 시편」 부분

소멸하는 빛의 두려움 먼저 읽었던 너를
그 숲길에 묻으며 나는
소멸하는 것들의 광폭한 힘을 꿈꾸었다
죗값이라면 평생
멀리 있는 별 하나 품고 살 것이다
가문비나무숲에 고여 있던 시간이
내 생애를 관통하는 화살이 된다
―「가문비나무숲에 대한 기억」 부분

시인은 가문비나무숲에서 시간이 쏜 화살을 맞은 듯하다. 가문비나무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너’가 누구인지, 그가 사랑한 사람인지 시인 자신인지 혹은 그 어느 다른 것인지, 만해의 경우처럼 그 모두를 가리키는 어떤 추상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이 숲에 드는 길에서 “너를 묻고 떠나”며 거기서 그 ‘너’를 묻어버리고 그 참사가 벌어진 기억만을, 그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나는 “소멸하는 빛”만을 “별 하나”로 품는다. 그 가슴 아픈 일이 그에게는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화살”로 남는다. 사건은 시간이란 것의 추상이 되고 그 추상은 화살과 같은 아픔으로 그의 삶을 지배하며 그 삶이 존재하는 세계를 향한 시선이 된다. 그리고 불행히도, 시간이란 화살은 죽음의 경험이 안긴 상처처럼 모든 것을 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인식하며 그에 따라 세상을 살게 된다. 시인은 이 시간의 화살을 맞으면서 모든 존재를 시간의 각성제로 인식하고 공간의 장면까지 소멸하는 시간의 눈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다음 시를 보라. 

석남사 솜양지꽃 물속 같은 세월 지키고 있다

그 조용한 시간의 켜 속에
길고 느린 그림자 절집 오른다
허물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하는 절집
시간이 소멸로 가는 정적 깊게 쌓는다
느린 그림자 정적에 들어 움직이지 않는데
봄 석남사에는 꽃잎이 시간을 밟는다 ―「봄」 전문

「봄」, 석남사의 절을 찾은 시인의 걸음은 느리고 그림자는 길다. 정적과 소멸, 조용함과 움직임-없음의 이 옛 절은 곧 시간이란 것이 지닌 존재성의 구체적인 물상이다. 그런데 거기 문득 피어 있는 솜양지꽃! 그 꽃잎이 “시간을 밟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봄꽃이 시간을 이겨낸다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의 움직임 속에서 더불어 피고 있다는 것일까. 첫 행의 “물속 같은 세월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보면 뒤의 해석이지만 “시간을 밟는다”의 윗 행 마지막이 “움직이지 않는데”는 시간의 정적 속에 꽃잎만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해석은 그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저항하면서도 시간에 귀속하고 있는 두 양태를 동시에 품고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소멸하는 절집의 공간 속에 피어나 있는 꽃도 시간의 운행을 밟고 있다는 것이고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을 시간의 움직임, 그것의 양상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석남사 가는 길」에서 그에게 시간의 은유가 되는 침묵은 “바위꽃 피우기도 하고 돌계단 허물어/세월 에돌아 가게도 하지만/솜양지꽃 피는 봄 막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우리가 시간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호탄리의 시간들」은 보여준다: “시인은 물소리와 함께 나타나/시간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미소를 짓기도 하고/시간의 얼굴에 수염 자란 자신의 얼굴을 대보기도 한다/시간은 시인의 몸으로 스며 시인을/붉은 해 떨어지는 산자락 아래 눕히기도 하고/침묵들이 쌓이는 거룩한 언덕에 세우기도 한다.” 시인은 그러니까 시간과 동행하며 시간과 하나가 되어 시간이 눕히고 세우는 대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은 ‘두려움’이고 ‘상처’이며 내 “육신 찌르고 들어”오는 ‘폭력’(「시간들의 풍경」)이지만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이며 존재이고 운명이며 침묵이 된다. 「시간들의 종말」은 그 구체적인 물상을 통해 시간의 형이상학적 양상을 이렇게 뛰어난 형상으로 그려주고 있다.

시간들의 늙은 웃음 소리 쌓이는 골짜기에 와 있네
언약의 피멍 흘러온 강물들 조용한 몸짓으로
내 안에 와서 누우며 시간들의 낡은 몸 끌어안네
풀잎 한 잎의 고요한 흔들림 위에 시간들이 얹히고
시간들이 침묵처럼 잠들고 시간들이 저 홀로 깨어
달빛에 몸을 맡길 때 풀잎은 시간들이 쓸쓸해 보였네
쓸쓸한 시간들, 웃음 소리가 시간과 함께 늙어갈 때
시간들은 내 모든 것을 조용하게 만들었네

시간과, 그것이 데불고 오는 소멸은 슬프고 그 슬픔을 바라보는 이는 그것으로써 상처가 되고 회한을 안게 된다. 김윤배는 이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리하여 바라보는 정경 속에 우리를 함께 앉혀놓고 그가 느끼는 정서와 하나가 되도록 공감의 자장을 펼쳐놓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교감」이 일으키는 상징주의의 시적 효과이며 자연과 시인의 서정이 동화하듯이 시인과 우리가 서정적으로 동화당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고여 있는 시간의 삼투”에 이은, “달빛이 나를 삼투”(「안면도 시편」)하고 있음, “열매는 〔……〕 /더 많은 바람을 보내며/스스로 바람이”(「바람 속의 열매」) 되고 있음이라는, 시인의 대상과 자아에 동화를 우리 자신의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우리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김윤배 시의 힘이고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시적 자산이다.

김윤배의 시는 아름답고 정밀(靜謐)하다. 홍정선은 10년 전의 그의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에 대해 “언어들의 소리와 빛깔과 형용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중요시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시의 핵심적인 덕성인 은유의 아름다움을 더하여 뛰어난 시집을 만들고 있다. 나는 그가 근래 깊이 매여 있는 ‘시간’이란 것의 존재성을 형상화하는 데 시선을 모았지만, 그의 따뜻한 서정이 찾아가는 곳곳과 사람들, 처음에 든 ‘소요와 비예’의 시들에 대한 감동을 고백해야 했을 것이다. 가령 “오랜 세월을 두고 깊어져/바이칼 호수처럼 장엄”해진 “아내의 시간”에 대한 시인의 시선(「깊고 슬픈 강물」), 시인 김명인을 보러 간 곳에서 복사꽃의 낙화를 보며 “꽃눈 밀어올리던 힘은 이처럼 허망하여/낙화로 더러운 세상 미쁘게 건너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슬픔(「조치원」), 아마도 김지하의 시를 읽으며 느꼈을, “뭉텅 잘린 가지에 슬픔 뭉쳐 새순 돋고/뭉텅 잘린 가지에 분노 솟구쳐/죽음 부르는 저 극단의 선택/그것이 꽃이고, 열매”임을 깨닫는 전율(「무화과나무의 힘」), 그리고 할머니・어머니・동생 등의 혈육(아버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일까?)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그렇다. 그리고 시간과 소멸이 가져다주는 슬픔의 정서들과 쓸쓸한 정경들, 그러니까 칼국수 파는 가게만 있을 뿐 이제는 사라져버린 “배론, 슬픔 많은 땅”(「배론을 찾아서」)을 비롯한 시인의 순례지들도 방문하여 나의 감동을 고백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사과나무 전정을 하며” 「상실이 오랜 후에」 힘이 되는 것을 깨닫는 시의 마지막을 다시 읽는 것으로 이 시집이 일구는 소멸에의 슬픔에 대한 나의 감동을 대신해야겠다.

분신으로 한 시대를 꽃피웠을 때
상실이 오랜 후에 힘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대 죽음 기리는 일이란
그대 다녀간 이 세상은 봄이면 온갖 꽃들 피어
긴 겨울 눈꽃 생각케 하지만 상실이
더 오랜 후에 소멸인 것을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석포리 가는 길
조용하고 무거운 슬픔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작은 저수지에서 생긴 일
독곶리의 겨울
새의 무게가 나를 이긴다
소래포구
섬강 가는 길
가마우지를 위한 노래
안면도 시편
바람 속의 열매
상실이 오랜 후에
목계강물
애기동풀꽃의 물음
도비도의 일몰
삼길 포구
아나바스 스칸덴스를 꿈꾸다

제2부

서안에서는 사람이 빛난다
순례자
빨강 침대
장구와 흰 소매
물너울 걷고 있는 소년
백야를 건너며
열네 살의 봄
페티의 집
절망하는 눈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달맞이 꽃이 있는 풍경
뽕밭 속의 아그네스
겨울 양수리에서
철새를 꿈꾸는 총구들
백령 뱃길

제3부

부론에서 길을 잃다
돌모루 가며
우리는 모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다
잃어버린 나는 이미 그곳에 가 있다
가문비나무숲에 대한 기억
석남사 가는 길
달빛이 나의 옷을 찢다
내 가슴에 사과나무 생목 타고 있다
배론을 찾아서
내 안에 갇힌 나
시간들의 종말

山菊
침묵은 숲이 견디고 있는 상처이다
변하는 것은 아름답다
시간들의 풍경

제4부

그 여자는 시간을 건너뛴다
낮달
남행
깊고 슬픈 강물
정라진 항구
새벽 후포항
조치원
아카시아 군락을 보며
호탄리의 시간들
무화과나무의 힘
소리의 영혼들
밤나무들의 소망
감은사지를 가다
일죽장터
동행

▨ 해설・시간의 슬픔과 소멸의 아름다움・김병익

작가 소개

김윤배 지음

194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겨울 숲에서』『강 깊은 당신 편지』『굴욕은 아름답다』『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부론에서 길을 잃다』『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장시『사당 바우덕이』와 산문집『시인들의 풍경』『최울가는 울보가 아니다』『바람의 등을 보았다』, 평론집『온몸의 시학 김수영』, 동화집『비를 부르는 소년』『두노야, 힘내』를 상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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