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뒤의 풍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최하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1년 7월 5일 | ISBN 9788932012612

사양 신46판 176x248mm · 105쪽 | 가격 7,000원

책소개

[내용 소개]
최하림은 새 시집에 『풍경 뒤의 풍경』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름만으로도 그 은총의 세계를 보다 깊이 호흡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은 ‘풍경’보다는 오히려 ‘뒤’라는 말에 먼저 가 닿는다. ‘속’을 취해도 될 법한데 굳이 ‘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시인이 ‘풍경’을 대하는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
최하림의 풍경 참여는 삶의 이편을 결코 이탈하는 법이 없다. 기쁨과 탄식, 황홀과 비참, 몰입과 반성이 공존하는 ‘풍경 뒤의 풍경들’은 그대로 우리 삶의 한 상징이 되기에 충분하다. 『풍경 뒤의 풍경』을 인간적 풍경의 보물 창고라고 불러도 좋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체가 빈약한 화려함이, 뒤돌아보지 않는 찬탄이 풍경시의 내일을 넘보는 얄궂은 풍토에서 이만한 솔직성과 균형 감각은 그리 쉽지 않다.

[표지글]
이 산 밑에 이르러 시와 나는 근거리로 이마를 마주하고 있다. 귀를 모으면 시의 숨소리도 들린다. 나는 시가 무엇이며, 왜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시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퇴화해버렸다. 나는 시 가까이, 가만히 있을 뿐.

[해설]

흐르는 풍경의 깊이
_ 최현식

요 몇 년 사이에 발표된 최하림의 시를 다시 읽는 동안 고흐와 모네의 풍경화가 자꾸 아른거렸다. 곰곰이 생각하자니, 아무래도 시인이 ‘풍경’을 바라보는 눈이 그들의 그것과 겹쳐 보였기 때문인 듯싶다. 풍경화·풍경 사진 등이 환기하듯이, ‘풍경’이란 말은 변화와 들썩임보다는 정지와 고요의 이미지에 훨씬 어울리는 것처럼 생각된다. 고흐나 모네의 풍경화를 처음 접할 때 받는 강렬한 인상의 상당 부분은 그런 기대의 배반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풍경화는 전체적 윤곽의 정밀한 부조나 단편적인 세부 묘사보다는, 색채의 과감한 혼합과 굵고도 힘찬 붓 터치에 기댄 역동적 분위기의 표출에 집중되어 있다. 풍경의 특정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시키기보다는 특히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혹은 사물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흐름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요한 풍경의 고정된 표층이 아니라 역동적인 심층을 더듬던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예리한 시선을 다음과 같은 최하림의 시구로 바꾸어본다: “나는 고요히 세계를 보고 있다” “눈이 닿는 곳에서는 고요가 일어선다”(「저녁 무렵」,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범속한 영혼은 단지 “고요히 세계를” 보는 것으로 풍경의 삼매경을 구할지도 모른다. 그런 평안은 ‘나’를 탈속의 경지로 쉽게 이끌지는 몰라도, 그 풍경의 풍경됨을 새로이 엿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와 달리 세계의 진실한 이면에 가 닿고자 하는 각성된 영혼은 자신의 온몸을 열어 풍경을 호흡하고 거기에 숨의 리듬을 맞추고자 할 것이다. “눈이 닿는 곳에서는 고요가 일어선다”에 담겨 있는 ‘나’와 풍경의 감도 높은 상호 조응과 활성화는 그런 자기 개방의 결과 허락된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하림은 새 시집에 『풍경 뒤의 풍경』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름만으로도 그 은총의 세계를 보다 깊이 호흡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은 ‘풍경’보다는 오히려 ‘뒤’라는 말에 먼저 가 닿는다. ‘속’을 취해도 될 법한데 굳이 ‘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시인이 ‘풍경’을 대하는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풍경은 시간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된 역동적인 무엇이다. 동일한 공간의 풍경이라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 및 그에 따른 환경의 변화에 의해 전혀 다른 풍취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니까 시간의 개입에 의해 특정 풍경은 스스로의 몸을 끊임없이 바꾸어 입게 되는데, ‘뒤’란 그 지속적인 변화의 소용돌이를 지칭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뒤’는 풍경에 변화의 지속이라는 속성뿐 아니라 순환이라는 속성 역시 부여한다. 왜냐하면 풍경(특히 자연 풍경)은 해와 계절, 달, 날의 순환을 통해 그 변화를 또렷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선이 주로 시간 단위가 바뀔 무렵, 이를테면 저물녘·늦가을·해빙기 등의 풍경을 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뒤’는 지속과 순환에 의해 드러나는 풍경의 속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시인의 말을 빌린다면, “시간과 장소가 동시에 같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적 장치로 선택된 말인 것이다.

움직이고 흐르는 풍경은 시각의 특권적 지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타의 감각들, 특히 청각과 촉각의 도움에 크게 기댈 때에라야 그 역동성을 생생하게 표출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서 ‘바람’과 ‘소리’의 속성과 이미지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풍경에 참여하는 일의 참뜻을 탁월하게 점묘해낸 바 있다. 바람은 그 자체로 공기의 파동이자 흐름이며, 소리는 공기의 파동을 통해 울려 퍼진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흐름’으로써 “사물을 흔들고 사물을 산란하게 한다.” 발레리가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삶의 의욕을 다졌다면, 시인은 바람을 통해 바깥과의 경계를 지우고 세계와 악수한다. 가령 그는 “창밖”에 흐르는 바람을 보며 “소리들이 골짝 너머/여울목으로 사라지고 어느 곳에선가는/일어서면서 먼 산을 흔드는 소리를 듣는다”(「언덕 너머 골짝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바람이 일으키는 사물의 흔들림과 소리가 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말하자면 서로 다른 존재들이 교통하고 반향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영매이자, 풍경(風景)이란 사원이 늘 잠깨어 있음을 알리는 풍경(風磬) 소리인 것이다.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가을날에는」 전문

『풍경 뒤의 풍경』에서 ‘흐르는 풍경’은 많은 경우 ‘소리’의 이미지를 통해 그려진다. 위 시에서 보듯이, 각각의 소리들은 개별 사물들의 풍요로운 존재감을 지시하는 악기가, 그것들의 “연쇄 반응”은 풍경의 화엄을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곡이 되고 있다. 그 소리들은 대개 유장하기보다는 요란하고 급박하다. 소리의 빠른 속도감은 풍경의 생동감을 한층 고양시킬 뿐더러, 경계에 선 시간들의 급박한 변화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런데 그런 시들에는 객관적 정황의 사실성 못잖게 중요한 요소가 존재한다. 풍경에 반응하는 ‘나’의 태도가 그것이다. ‘풍경’은 대체로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나란히 가지 않고, 자기 나름의 리듬으로 때로는 느리게(「가을날에는」, 「겨울 내소사로」, 「호탄리 詩編」) 때로는 빠르게(「저녁 예감」, 「가을의 속도」) 간다. 시인의 엇나가는 호흡은, 그 속도야 어떻든, 풍경의 경험을 하나로 모으는 대신 여러 갈래로 분산시키는 심리적 장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때 풍경의 경험은 시간의 경험으로 바꾸어도 무방한데, 풍경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온전히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날개를 들고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빈집」 부분

‘새’의 귀소 과정을 통해 흐르는 풍경 속에 담긴 시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시이다. ‘새’가 시간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있는 것은 이 시 말고도 「다시 빈집」과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가 있다. 이것들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에 속한다. ‘시간’의 의미 맥락이 제대로 짚이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어떤/시간을 보았다”나 “시간의 거울 속으로 빠져나가면서”(「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를 참조한다면, ‘시간’은 우선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뒤’의 시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새’는 날면서 운다는 점에서 ‘바람’과 ‘소리’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사는 존재이다. 따라서 ‘바람’과 ‘소리’를 통해 지시되는 풍경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은 ‘새’를 통해서도 지시될 수 있다. ‘새’와 ‘시간’이 맺는 관계는 이런 맥락에서 얼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은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이다. 새와 시간의 유추적 관계를 생각하면, 이 역시 ‘뒤’에 오는, 다시 말해 미래의 풍경에 대한 조심스런 예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꿈”이나 “무한 공간”이란 낱말, “해빙기 같은 소리”를 듣는 ‘나’의 모습은 이 시의 ‘시간’에서 자연적 시간 이상의 어떤 것을 환기시킨다. 시간은 우리 삶의 진행 원리이기도 하지만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심연이기도 하다. 특히 ‘죽음’으로 표상되는 후자의 측면은 단절의 공포와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연속의 욕망을 시간 경험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연속의 욕망은 시간의 순환과 가역성을 전제할 때에라야 실현될 수 있다. 세계의 영원한 반복과 순환에 대한 믿음이 없고서는 죽음의 공포가 극복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시에서 ‘새’는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넘나드는 존재로 상상되고 있다. 앞으로만 흐르는 자연적 시간의 규율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질서를 일탈하는 ‘새’의 모습은 시간에서 해방된 존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드는 새의 비행을 시간 질서의 개방 행위로,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를 새로운 시간에 참여하는 존재의 설렘으로 바꾸어 읽고 싶어진다. 그 설렘은 물론 존재의 연속에 대한 기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해빙기 같은 소리”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나’의 행위는 그 기대가 시인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시인이 풍경에의 참여를 “깊이 확대된, 시간과 장소를 호흡하며 함께하는” 것으로 의미짓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 어디쯤 있을 것이다.

다음 시에는 시인이 풍경에의 참여를 통해 꿈꾸는 새로운 삶의 한 전형이 담겨 있다.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디로?」 전문

『풍경 뒤의 풍경』을 통틀어 풍경에의 몰입이 가장 순도 높게 표현된 시이다. 황혼과 나무, 사나이의 욕망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이 자유자재의 경지는 시적 대상들의 온전한 개별성이 풍경의 전체성으로 응집되면서 성취되는 것이다. 각자의 시간에 충실한 삶이 전체의 삶을 거스르기는커녕 그것의 풍요로움에 이바지하는 이런 정경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삶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어디로?’라는 지향 의식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이 황홀한 풍경의 흐름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 발맞추되, ‘나’의 숨이 가쁘지 않을 어떤 리듬을 찾아내어 그것을 타고 흘러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無極의 시간,” 다시 말해 ‘시적 순간’은 결코 일상화될 수 없다. 그것이 항시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면, 시라는 언어 행위는 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인이 풍경 속에서 경험하는 충만한 현재는 어쩌면 미학적 가상(Schein)이거나 실제일지라도 잠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나이’라는 객관적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사나이’는 ‘나’를 객관화시킨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과 ‘사나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거리화는 시인이 현재 풍경의 문턱에 서성거리며, 풍경 안의 이상적 자아를 상상적으로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것은 이미 「빈집」에도 드러나 있다. 거기서 ‘나’는 새가 내는 “해빙기 같은 소리”를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듣고 있다. 풍경의 안에 ‘새’가 있고 풍경의 바깥에 ‘나’가 있는 주객 분리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객의 완전한 분리는 아니다. 그들을 경계짓는 것이 ‘유리창’이기 때문이다. 유리창은 차단과 투시의 이중성을 본질로 한다. 그러니까 ‘유리창’은 ‘나’와 ‘새’를 떼어놓으면서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리창’에 ‘나’가 “얼굴을 대고” 있다는 것은 ‘새’로의 전이를, 다시 말해 풍경으로의 스며듦을 강하게 의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어디로?」는 그런 의욕이 최대치에 다다랐을 때 분비된 심리적 결정체일 것이다.

최하림 시에 늘 끼워져 있는 ‘유리창’은, 그가 지금·여기의 현실과 풍경의 현실을 냉엄히 구분하면서도 그것을 따뜻하게 교통시킬 줄 아는 각성된 지성의 소유자임을 새삼스럽게 증거한다. 이 투명한 의식은 풍경의 은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어떤 위기와 위험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성찰하는 시편들의 산란지이기도 하다.

더 이상 종달이는 높이 날지
않는다 봄날은 지나가버렸다
긴 의자에 사람들은 오지 않고
시간은 주춤주춤 고장난 시계처럼
흘러간다 나는 창문을 빠끔히 열고
시간의 자국들을 보고 있다
[……]
오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 바람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날개에는 솜털 같은 은유들이 실려 있고
은유들은 희망도 없이 부서져내린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부분

앞서 본 시편들에 비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다. 가슴 저린 황홀보다는 왠지 모를 심란함이 짙게 느껴진다. 이러한 정서는 ‘봄날’의 풍경이 문명에 의해 오염, 파괴되고 있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빚어진다. ‘시간’이 “주춤주춤 고장난 시계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저질의 도구적 이성은 결코 “살고 아파하고 이동하는 것들에 대해/우리는 관심을 하지”(「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않는다. 타락한 문명의 무자비한 확산은 삶의 위기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바로 존재와 시의 위기가 된다. 시의 본질과 임무는 세계의 자기화를 통해 존재를 심화하고 확산하는 것에 있다. “솜털 같은 은유”의 원천인 자연의 파괴는 시의 황폐화를 불러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인이 설 자리 역시 없어지고 만다. 시인이 포플러들에게 찬란했던 과거를 “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라고 강하게 주문하거나, “나는 두렵다 나는 눈 뜨고 있다”(「황혼 저편으로」)라고 고백하고, 더 나아가서는 길 위에서 혼자 “떨고 있”는 것(「길 위에서」)도 모두 그런 불안 때문이다. 여기서 ‘뒤’의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났다고 해도 좋으리라. ‘뒤’는 앓고 있는 풍경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다.

풍경이 처한 처참한 상황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절대적 이상으로 추구하는 대신, 끊임없이 현실의 지평에 올려놓고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실의 폭력적 원리와 복잡다단한 삶의 드라마가 제거된 풍경은 아름답지만 공소하기 짝이 없다. 그런 풍경에의 반성 없는 도취는 “세계의 중심에” “배고프게”(「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서 있어야 하는 시인의 참된 사명감을 기꺼이 밀쳐버리게 한다. 생명 혹은 환경과의 친화라는 명목 아래 남발되는 고상하고 우아한 서정(?)들의 폭주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눈앞의 현실임을 뼈아프게 깨우친다.

떨림과 멈춤이 거의 동시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간들을 빨랫줄에 넙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이상 방 안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사기그릇 속의 햇살은 넘치면서 적멸의 소리로 울리지만

소리들은 영토를 넓히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사라져갑니다
―「손」 부분

풍경과 관련된 시인의 불안은 문명의 침탈이라는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만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기그릇에 찰랑찰랑 넘”치는 햇살이 울리는 “적멸의 소리”를 영원히 봉인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서, 또한 그것을 기록하는 시인의 유한한 삶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흐르는 풍경의 완전성은 오히려 그 한계들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매우 담담하다. 그것을 턱없이 과장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회피한다면, 시는 더 이상 씌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햇빛 속으로 찰랑찰랑 흘러가는 나”(「햇빛 한 그릇」)가 저절로 시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를. 하긴 ‘흐르는 풍경’이 허락하는 큰 은총 가운데 하나가 보채지 않아도 제때 찾아드는 시간의 순연함임에랴.

최하림의 풍경 참여는 삶의 이편을 결코 이탈하는 법이 없다. 기쁨과 탄식, 황홀과 비참, 몰입과 반성이 공존하는 ‘풍경 뒤의 풍경들’은 그대로 우리 삶의 한 상징이 되기에 충분하다. 『풍경 뒤의 풍경』을 인간적 풍경의 보물 창고라고 불러도 좋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체가 빈약한 화려함이, 뒤돌아보지 않는 찬탄이 풍경시의 내일을 넘보는 얄궂은 풍토에서 이만한 솔직성과 균형 감각은 그리 쉽지 않다. 어디선가 “빈 하늘을 회오리처럼 울”(「다시 빈집」)리고 있을, 이 시집의 ‘뒤’에 오는 풍경들은 그래서 더욱 기다려지는 것이리라.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가을날에는
빈집
다시 빈집
바람이 이는지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이제는 날개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새여
썩둑썩둑 시간을 자르며 나는 가리니
다시 구천동으로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겨울 갈마동 일기

오늘 밤에도 당신은
어디로?

제2부
가을의 속도
저녁 예감
겨울 내소사로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의자
호탄리 詩篇
함티 가는 길

전화 벨이 운다
한밤중
바람이 대숲으로 빠져나간 뒤
물 그림자 위로

제3부
나는 다리 위에 있다
싸락눈처럼 반짝이면서
마애불이 돌 속으로
겨울 월광
불국사 회랑
겨울 내몽고 1
겨울 내몽고 2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마애불을 생각하며
雨水

제4부
억새풀들은 그들의 소리로
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동강에서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햇빛 한 그릇
봄 길
가을의 집
첫 시집을 보며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68번 도로에서

제5부
강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황혼 저편으로
비루먹은 말처럼
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날이여
길 위에서
낮은 소리
농부들이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삽살개 같은 것들이
하늘소
별아 !
에튀드

▨ 해설·흐르는 풍경의 깊이·최현식

작가 소개

최하림 지음

1939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散文時代)’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 「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 『침묵의 빛』 등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이 있다.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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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2001.07.10 오전 12:00

    멀리서 보고 또 가까이 다가가서 발견하게 되는 자연에 대한 다양한 해석.
    마음에 그려지는 내 안의 자연,풍경,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