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준 현대 중국 관계 논설선

민두기 엮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11월 10일 | ISBN 9788932012094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632쪽 | 가격 25,000원

책소개

〔해제〕

신언준(1904∼38)과 그의 중국 관계
논설에 대하여

민두기

1

신언준(申彦俊)은 1904년 평안 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정주(定州)의 오산 고보(五山高普)를 거쳐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 영문 전수 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와 오송(吳淞)의 정치대학(政治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중국의 한두 군데 언론 기관에서 일하다가 1929년에 국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중국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1) 1936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다가 1938년 1월에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로 상해(上海)를 근거로 하여 활동하던 신언준은 안창호(安昌浩)가 이끄는 흥사단(興士團)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931년에는 상해 교민단(단장, 여운형)이 경영하는 교민 자녀 수학 기관이던 인성(仁成) 학교의 학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 공원 사건은 그 대상이 바로 몇 달 전에 상해를 무력 침공한 일본군의 장성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인의 원한을 대신 풀어주어 크게 환영을 받았고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중국의 군관(軍官) 학교에 한국인 간부 훈련단을 두어 한국인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계획·지휘한 김구가 주도하였고 신언준도 그 일에 협력하였다.2)

그의 동아일보 특파원 생활은 약소국의 특파 기자라는 불리한 처지임에도3)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중국 정계의 요인들〔안혜경(顔惠慶), 진우인(陳友仁), 왕총혜(王寵惠), 왕정정(王正廷)〕을 직접 인터뷰하거나, 1931년 5월의 국민 회의(國民會議)나 국제 공산당(코민테른) 주중국 지도자 뉴란〔牛蘭, Noulens〕재판을 직접 방청하여 현장감 있는 생생한 보도를 하였다. 또 한국의 상황에 동정적인 노신(魯迅)을 1933년 5월에 아마도 한국인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상해에 있는 그의 은신처에서 만나, 약소 민족 해방책이나 식민지·반식민지 체제에서의 국수주의 문제들을 논의한 방문기를 발표(『신동아』, 1934. 5)하기도 하였다.

또 이 책에 수록된 것 같은 많은 중국 정세 보고 분석 논설(또는 보도)을 동아일보와 국내 여러 잡지에 정력적으로 발표하였다. 1932년 1월 28일의 상해사변(일본군의 상해 무력 침공)에 즈음해서는 상해의 전쟁 상황, 피해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4)

상해사변에 앞서 1931년 7월 만주의 만보산(萬寶山)에서 한국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농토 경작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나 그것이 국내에서 대대적인 중국인 박해로 확대되자, 상해 임시 정부의 진정 호소를 긴급 발신하는 한편 중국인들에게는 그 박해 폭동이 한국인 전체의 참뜻이 아님을 여러 경로를 통해 역설하였으니 중국 언론계와 중국의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이 그 대상이었다. 아마도 중국 신문에서의 기자 생활이 이러한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열성적으로 중국인 박해의 진정을 호소한 것은, 인도적인 문제 외에도 한국에서 박해 폭동이 더 확대되면 만주에서 중국인의 한국인 역박해가 더 극렬해질 것이요, 그것은 결과적으로 만주를 군사적으로 장악하려는 일본 군부의 음모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5)

신언준은 만주의 한국 교민 문제가 중국측의 항일(抗日)적 국권(國權) 회수 운동과 일본의 만주 침략 사이에 맞물려 위험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가는 상황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일방적인 반중국 행동 대신 중국과 한국의 민간 차원의 협의회를 결성하여 민간 차원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이요 가능성 있는 날카로운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2

신언준이 동아일보 특파원으로서 활동한 것은 1929년부터지만 이미 1926년부터 동아일보에 한국 문제 및 중국 문제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력적으로 중국 문제를 보도하고 논평한 것은 동아일보 특파 기자가 된 다음부터 귀국 직전인 1935년까지의 6년 동안이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 초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여 추진하던 국민 혁명이 두 당의 분열로 변질하여 장개석 중심의 반공적인 중앙 정부가 수립되어 여러 군벌 또는 당내 반대파의 도전을 이겨나가면서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애써 구축하기 시작하는 한편, 날로 확대해가는 공산당의 공격과 날로 격화되어가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국난(國難)에 처하였던 시기로서, 1937년 전면적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장개석의 통일 추진, 집권화는 근대 국가 건설이라는 측면과 배타적 권력 독점이라는 점에서 독재자로서의 측면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끈질기게 반장개석 운동이 전개되는데 이 반장개석 운동을 더욱 촉진한 것은, 막강한 근대적 전력을 가진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남경 정부가 소극적이고 타협적이라는 점이었다. 일본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정치적 반대자를 하나로 묶는 명분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심한 경우 ‘매국적(賣國賊)’이라는 비난까지 받은 장개석의 타협책은 오늘날 ‘안내양외(安內攘外)’책으로 불리고 있으나 신언준은 ‘준비론’(항전하기 위한 준비) 또는 ‘자중책(自重策)’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여러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의 현장에서 신언준은 이들 여러 문제들의 거의 대부분에 대하여 논평·보도하였다.

이 시기의 중심 인물인 장개석에 대한 신언준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반드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 혁명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기본적 입장에서 볼 때 민중 운동과 유리되었다고 보이는 장개석의 남경 정권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독재자 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청 왕조가 망한 이래 한 번도 제대로 된 통일 정부를 가져보지 못한 중국에게 집권 지향적 통일을 가져다주어 그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시대적 과제인 반제국주의(국권 회복)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가고 있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장개석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대일 항전을 영도할 능력을 갖지 못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언준의 장개석관은 매우 굴절된 것이었다.6)

신언준은 중국 공산당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반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분배보다 생산이 (중국이나 한국 같은 경제적 낙후 지역에서는) 더 시급한 문제이며 계급 투쟁보다는 협동(협작) 조합 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당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국민당·공산당의 합작이 깨진 것도 오히려 코민테른의 일방적 지도를 받은 공산당 쪽에 책임이 더 많다고 보는 그는7) 민중 운동을 강조하는 반공적 국민당 좌파[改組派]에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권 장악을 위해 군벌과 손을 잡는 것을 보고는 그에 대한 기망(期望)도 가신 듯하다. 이 같은 실망이 남경 정부의 현실적 의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 남경 정부가 개조파와 군벌의 연합 공격[中原大戰]을 격파하고 나서의 통일 노력을 ‘혁명의 서막은 완료됐으니 이제부터 중국은 약진할 것이다’라는 표제로 보도·논평한 것은 신언준의 1930년대 중반의 장개석관(남경 정부관)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많은 비난을 받고 있던 장개석의 대일 타협책에도 한계가 있음을 신은 지적하고 있는바 일본의 직접 침략이 관내(關內)로 미칠 경우 전면 항전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는데 이 예측은 얼마 후에 적중하였다.

신언준의 중국 문제 분석의 또 다른 특색은 중국 문제를 열강의 경제적·정치적 패권 싸움의 시각에서 보는 점이다. 중국의 당면 과제인 반제국주의도 이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九一八事變]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 정세를 영국을 대신하여 대중 무역의 수위를 차지하게 된 무역 확대 위주의 미국 중심의 구세력과, ‘중공업 원료 획득과 차관(권) 확보’를 주목적으로 한 일본 이익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의 대중 정책은 호의와 친선을 기초로 한 평화적인 것인 데 비해 일본의 대중 정책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여 이 두 국가의 중국 진출 양상의 차이를 경제적으로 분석하고 있다(「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자본전의 전망」).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이익 충돌이라는 관점은 1930년대 중국 정세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경제사적 분석은 일찍이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특질을 경제적·사회적 시각에서 설명한 입장(「중국 혁명의 본질과 그 추세」)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일본의 대중 침략을 심도 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성격을 규명하지 않아 일본 침략의 성격을 단순화시키는 결과가 되어 그 폭력성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약화시켰을 수도 있다. 이는 신언준이 그 점을 몰라서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 제한과 아마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일본 침략을 단순하게만 보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된 1935년경부터는 구미 열강의 중국 압박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구미 열국의 대중국 협조책을 지적하여 그것을 남경 정부의 통일 체제 강화, 경제 부흥의 진전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장개석이 전개한 ‘신생활 운동’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그 파시스트적 성격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통일 국가 건설 방편으로서의 측면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는 것도 신언준의 중국 관찰이 결코 단선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국민 회의’에 대한 현장감 넘치는 장문의 르포르타주에 표현된 중국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지적도 마찬가지다. 이 ‘국민 회의’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통해 독자는 국민 회의에 ‘외간의 중상적 풍설과는 달리 민중의 여론·이익을 상당 정도 반영한’ 긍정적 측면도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만주의 장학량이 장개석 정권에 대해 얼마나 강한 의미를 가졌는가를 알 수 있다. 국민 회의 참가 요인 중 오직 장개석과 장학량만이 부인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음과 장학량이 사회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넌지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현장 감각을 통해 당시의 정세를 폭넓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국민 회의 잡관」).

장개석의 대일 타협적 준비론을 논하면서, 그 배후에는 ‘식민지 자산 계급의 반동성을 드러낸’ 절강 재벌이 있음을 지적한 것도 장개석의 ‘안내양외’책을 단순히 전략 차원에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 대일 항전 문제가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만, 신언준은 장개석의 대일 타협이 계속되면 민중의 일대 반항이 일어나 장개석의 정치적 명운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한편, 설사 국민당의 반장개석적 좌파(손과, 진명추 등)가 장개석을 대신한다 하더라도 항일에 무능·무력할 경우 최후의 대안으로서는 양자강 근처에서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던 공산당이 선택될 수도 있다(「수난 중국의 전모」)고 한 점은, 결과적으로 굴절을 겪었지만 중국 현대사에서 항일 문제가 갖는 중대한 변수로서의 성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1930년대 남경 정권의 관료주의의 폐해로 인민의 신망이 떨어져감을 지적하는 점도 잊지 않고 있는데, 신언준이 국가주의 운동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가지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남경 정권에 대한 하나의 대안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파심의 표현이었을 듯싶다(「극우 신흥 정당 중국 청년당 내용」).

3

신언준의 중국 문제 분석·보도는 오늘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첫째로 당시의 한국인이 이웃에서 전개되는 복잡다기한 정세 전개에 대해 갖고 있었을 깊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인 독자는 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정세를 일본 주도의 관점(또는 일본 본위의 관점)에서 보는 데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고 그에 필요한 객관적이고도 넓은 시야를 신언준은 제공했다.

둘째로 오늘날 생동감이 많이 떨어진 사료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중국 현대사를 신언준의 논평·보도를 통해 생동감, 현장감을 가지고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한 예로 당시 중국에서 공산주의자 또는 삼민주의자보다 훨씬 더 젊은이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성사(性史)』의 저자 장경생(張競生)의 유미주의(唯美主義)에 대한 소개를 들 수 있다. 장경생은 오늘날에는 10,750명을 수록한 『중국 근현대 인명 대사전』(북경: 중국 국제광파출판사, 1989)에도 수록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보다 더 많은 12,000명을 수록한 『민국인물대사전』[석가장시(石家莊市): 하북인민출판사, 1991]에서도 겨우 몇 줄밖에 소개되지 않을 정도로 경시되고 있다. 중국 현대 사상사의 어디에도 거의 언급됨이 없는 『성사』 사상의 소개를 통해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중국 젊은이의 생활 감정의 한 단편을 접하는 시대적 현장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신언준의 분석·보도에는 시간의 먼지가 가라앉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착오거나 부적절한 점도 적지 않다. 또 신언준의 지적 훈련이나 자료 접근의 한계 때문에 기술이 부정확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신언준의 글을 그대로 사료로 쓰기에는 부적당한 점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알고 조심해서 활용하면(그러기 위해 편자는 되도록 많은 주석을 달았다), 그의 기술에서 당시 중국인이 이해하는 시대상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중산함(中山艦) 사건이나 호한민(胡漢民) 감금 사건에 대한 그의 기술에 적지 않은 착오가 있지만, 그러한 기술을 통해 그 사건들을 당시의 중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 관련되지 아니한 신언준의 글에도 흥미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베트남의 독립 운동가 우옌 아이꾸옥[阮愛國-胡志明]이 보내온 월남 민족 운동 상황 문건을 소개한 것은 그 한 예이나, 이 같은 중국 관련 이외의 글은 따로 목록을 부록함으로써 관심 있는 독자에게 참고케 하였다.

1) 신언준의 경력은 193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부고에 의거함. 동아일보는 신이 근무한 중국의 신문이 중앙일보(中央日報) 및 (상해의) 세계신문(世界新聞)이라 했으나 여기의 중앙일보가 1928년 2월에 창간된 국민당 중앙 위원회 기관지인 중앙일보와 같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계신문에 대해서도 그 성격은 알 수가 없다. 동아일보는 신언준의 신분을 남경 주재 특파원 또는 상해 주재 특파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언준의 활동에 대한 최초의 소개는 민두기, 「韓國報人申彦俊(1904∼38)的蔣介石觀」(七七事變60周年紀念國際學術硏討會. 北京, 1997. 7. 4『7. 6)에서 시도된 바 있다.

2) 신언준의 독립 운동 관련 자료는 신언준의 아들 신일철 교수가 복사하며 편집한 『申彦俊論說選』에 소개되어 있다. 중국 군관 학교(한국인) 간부 훈련단에 관해서는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문학과지성사, 1994), pp. 306『16에 자세하다.

3) 이 책에 수록된 「1930년대 중국 언론계의 일단면-특파기자 생활잡기」(『신동아』, 1934『35)에 어려운 처지가 표현되어 있다.

4) 『신동아』에 실릴 예정이던 「상해대전 전황 회상기(上海大戰戰況回想記)」는 『신동아』의 1932년 3월호의 사고(社告)에 따르면 ‘부득이’한 사정으로 싣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1932년 3월 5일자 및 3월 24일자에 신언준의 생생한 보도가 보이며, 4월 12일자 및 4월 24일자에는 역시 신언준의 상해사변 정전 회담의 경과가 상세히 보도되었다.

5) 민두기, 「만보산 사건(1931)과 한국 언론의 대응-상이한 민족주의적 시각」, 『동양사
학 연구』 65집, 1999.

6) 주 1)에 든 민두기 논문에서 필자는 「요전정 통일적 독재자 장개석」과 「요담부 국가 건설화 항일 쌍중임 무적 장개석」이라는 두 장을 두어 신언준의 장개석 이해를 정리한 바 있다.

7) 오늘날 소련(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지도의 오류가 학문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신언준의 견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뒷받침해 주고 있다(민두기, 「중국 국민 혁명기(1926『28)의 이오감조 문제-국민당과 공산당의 토지 문제 이해와 관련하여」, 『中國初期革命運動의 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는 그러한 것을 밝힌 일례다.

목차

〔차례〕

서남 동양학자료총서 간행사

일러두기

해제 신언준(1904∼38)과 그의 현대 중국 관계 논설에 대하여

제1부 잡지 논설선

제1장 중국을 둘러싼 1930년대의 국세 정세
1. 태평양 문제의 열쇠를 쥔 미·러의 외교 정책
2. 만주 문제를 싸고 도는 일·미의 외교전
3. 세계 정국을 리드하는 영 제국의 극동 정책
4. 중국을 무대 삼은 열강의 쟁패전

제2장 1930년대 초의 중국 정치 정세 분석
1. 중국 국민당 분석관
2. 수난 중국의 전모
3. 전쟁이냐? 평화냐?
4. 중국의 국제 연맹 의뢰와 만주 문제
5. 장개석씨의 파시스트 운동
6. 1930년대 중국 언론계의 일단면
7. 중원 대륙의 괴물
8. 복건 정부의 경위
9. 수난기의 중국
10. 재만 동포 문제에 대하여 협의회 조직을 제창함
11. 상해사변 이후의 중국의 향방
12. 호한민씨 감금의 유래와 그 인물
13. 상승(常勝)하는 19로군

제3장 현대 중국의 사상과 인물
1. 사상계로 본 현대 중국
2. 실험주의의 철학자 호적
3. 귀족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이석증씨
4. 유미주의의 괴사상가 장경생(張競生) 박사
5. 중국의 대문호 노신 방문기
6. 중국의 여류 혁명가 송경령 여사

제2부 동아일보 기명(記名) 보도 및 논설선

제1장 중국 노동 운동의 유래와 경향의 관찰
제2장 중국의 세력 각 파벌의 일별(一瞥)
제3장 중국 혁명의 본질과 그 추세
제4장 신흥 중국의 외교적 분투
제5장 반장 운동의 해부
제6장 중국 시국 종횡담(縱橫談)
제7장 1929년 중국 정국의 개관
제8장 각 파의 합종연횡 대동란 기운의 점숙(漸熟)
제9장 양 거두의 전(電), 설전(舌戰)
제10장 중국 각 정파의 분열
제11장 장개석과 염석산의 싸움과 중국의 장래
제12장 풍옥상과 염석산 중심의 반장개석 연합 운동
제13장 현재의 2대 사조
제14장 최근 중국의 무산 정당 개관
제15장 양자강 이남의 적색(赤色) 공포 세계
제16장 첨예해진 민국의 대일 외교
제17장 혁명의 서막은 완료되고 중국에게 이제 약진만
제18장 국권 회수의 주요 대상
제19장 장학량씨의 이후 진로 여하(如何)
제20장 국민 회의와 장래의 전망
제21장 국민 회의 잡관(雜觀)
제22장 서남의 반장 풍운
제23장 시국의 열쇠를 쥔 동북 세력의 해부
제24장 거물 몰락 후 ‘룸펜’군벌 시대
제25장 태평양 회의 잡관
제26장 통일 회의 유래 및 장래의 전망
제27장 1932년 중국 정세의 전망
제28장 왕·장·호 3파와 신남경 정부
제29장 상해 사변: 오직 공포란(恐怖亂)의 상해
제30장 상해 전적 순례(上海戰跡巡禮)
제31장 정전 회의(停戰會議) 진영
제32장 이번의 국난 회의와 국민당 정치 장래
제33장 정돈(停頓)
제34장 현재 중국의 혼란상
제35장 극우의 신흥 정당 ‘중국 청년당’내용
제36장 공산군 맹렬 진출
제37장 공산군 토벌의 일대 군사 행동
제38장 세력 정립하에 만주 문제의 귀결은
제39장 소비에트 구역과 홍군의 현세(現勢)
제40장 전 동양의 적화를 음모한 뉴란 부처(夫妻) 공판기(公判記)
제41장 장개석 독재 정권 수립 준비에 매진
제42장 장·왕·손 3두 연립 정권 운동
제43장 내구외환(內寇外患) 병진(竝臻)하여 전 중국의 대난맥
제44장 국제 연맹에 대한 중측 진용(中側陣容)과 책전(策戰)
제45장 국민 정부의 전례 없는 외교진
제46장 장개석주의 승리
제47장 중국 시장 중심으로 자본 전선 대이상
제48장 내정 혁신을 목표로, 민국 신헌법 내용
제49장 절강 재벌과 국민 정부의 불화
제50장 대중책(對中策) 갱신에 초려(焦慮)하는 영 제국
제51장 송(宋) @손(孫)의 압박으로 왕조명 정권의 위기
제52장 중국 혁명에서의 제삼당과 생산 인민 혁명 운동
제53장 중국 민족 부흥과 2대 대중 운동
제54장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열강 쟁패 현세
제55장 중국 문예 부흥의 봉화로서의 대중 어문 운동
제56장 항일? 토공? 각 파의 신책동
제57장 중국을 싸고 도는 열강 자본전의 전망
제58장 현 중국의 거인 군상
제59장 왕총혜 박사 회견기
제60장 극동 시국의 현상과 장래
제61장 열강 세력의 진공(進攻)과 갱생 중국의 분투
제62장 복잡다난한 북중국 문제
제63장 중국 경제 공황 전면적으로 확대
제64장 ‘중국 본위’의 문화 건설 운동
제65장 중국의 외교 정책: 종래의 저항주의는 포기
제66장 조선 대 중국: 무역의 과거, 현재
제67장 ‘국력 부흥’ 표방한 중국의 3대 운동

부록 1 상해의 여름
부록 2 확인된 신언준 문장 총목록
발문

작가 소개

민두기 엮음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와 동양사회학 회장을 역임하였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객원 교수와 서울대 명예 교수로 활동하던 중 2000년 5월 7일 향년 68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주요 저서로 『중국 근대사 연구: 신사층의 사상과 행동』『중국의 전통과 근대』『중국 근대 개혁 운동의 연구』『중국 국민 혁명의 분석적 연구』『중국 국민 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신해 혁명사: 중국의 공화 혁명』『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험: 호적의 사상과 행동』『중국 초기 혁명 운동의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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