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훔쳐라

박성원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11월 17일 | ISBN 9788932012131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76쪽 | 가격 12,000원

수상/추천: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책소개

〔개요〕

첫 소설집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이 가짜와 진짜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어떻게 진짜를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 고뇌하고 있었다면, 두번째 소설집 『나를 훔쳐라』는 가짜의 진실이라는 전면적 현실이 주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그 가짜의 진실을 파괴하고 정체성의 혼돈(혹은 혼돈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소설이야말로 가짜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이 만들어내는 가짜의 진실은 다른 가짜의 진실의 ‘사기’를 간파해내고 그것이 ‘사기’임을 밝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박성원의 소설은 일종의 복화술의 소설이다. ─성민엽(문학평론가)

〔주요 작품의 줄거리〕

「댈러웨이의 창」

아마추어 사진 작가인 ‘ 나’는 2층에 세를 얻어 들어온 사내를 통해 댈러웨이라는 사진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다. 댈러웨이의 사진은 “사진 자체보다는 스푼이나, 병, 그리고 안경이나, 눈동자처럼 사진 속에서 반사되는 또 다른 눈을 통해서” 찍은 것인데, 그런 창(窓) 효과에 의해 일견 평범한 듯 보이는 사진조차 비범한 의미와 상징 기제를 함축하고 있다. 예컨대 정물화 같은 「식탁 위의 세상」이라는 사진은 한가한 농가의 식탁을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식탁 위의 스푼을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한 군인이 농부를 총으로 살해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두 번 다시 식탁의 주인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또 막연히 평화롭고 한가로이 보이던 어느 농가의 식탁은 사실 죽음의 만찬과 같다는 공포감을 주게” 만든다. 이런 창 효과로 인해 댈러웨이는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댈러웨이 신화에 매혹되었던 ‘ 나’에 의해 댈러웨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이층 사내가 꾸며낸 가공의 인물이며, 그 사진은 그가 컴퓨터 합성 작업으로 조작한 가짜임이 밝혀진다. 댈러웨이의 창에 대한 자신의 매혹이 허망한 갈망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은 “진실은 애당초 없거나, 있다 해도 우리가 절대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진실”임을 깨닫는다.

「중심성맥락망막염」

사물의 일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중심성맥락망막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던 ‘구더기 사내’가 치료받은 과정을 관찰자인 ‘나’와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짜여진 소설로 사물의 크기가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소시증(小視症), 사물이 비뚫어지게 보이는 변시증(變視症) 환자의 이야기와 더불어 ‘눈’의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은 작품.
‘중심성맥락망막염’을 치료한 구더기 사내는 지금은 “과연 세상 사람들이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제가 보는 진실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왜곡되지는 않을지…… 하는” 새로운 걱정거리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이제껏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던 ‘나’나 친구가 오히려 ‘중심성맥락망막염’ 환자였음이 드러난다. 결말에 가면 환자는 한 명 더 보태진다. “정류장에서 한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이” 버스가 그냥 지나쳐버림으로써 버스 기사 또한 그 환자일 수 있다는 암시로.

「실마리」

카프카에게서는 벌레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 실제로 벌레가 되면서부터 사건이 발생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된 벌레가 오히려 주인공 행세를 하고 그 벌레와 마주친 사람은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는 아주 독특한 소설.

자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증명할 어떤 증거나 단서도 찾지 못하는 주인공은 답답한 심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 몸과 집의 주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가슴 시린 노력을 백방으로 해보지만 모두 허사가 된다. 최근에 만나 어설픈 정사를 나누며 함께 즐겼던 베이비라는 소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그녀마저 자신을 못 알아본다. 그가 그임을 입증하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오히려 그를 대신해서 집을 차지하고 있는 벌레-인간은 실제 공간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자신의 아내마저 이미 벌레-인간의 아내-벌레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사정이 이 지경이고 보니 그는 자기가 허구라고 생각했던 벌레-인간이 실제이고, 실제라고 믿었던 자신이 허구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상한 가역 반응」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녘에 주인공은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 모를 사내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피를 흘리게 된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그의 목적지였던 H병원에 도착해 닥터 H로부터 간단한 처치를 받은 다음 피실험자 역할을 시작한다. 어두운 실험실에서 알몸으로 수갑과 족쇄와 안대에 묶여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며, 또 그때의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이상한’ 실험의 대상자가 되기로 예약한 터였다. 실험용으로 특수 제작한 침대에 누워 편하게 상상 여행을 하던 그는 옆방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기처럼 실험 대상이 된 사내 H와 H양이었다. 이들 셋은 서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사내 H와 H양은 이내 실험을 포기하고 나간다. 주인공은 계속 자기 나름의 상상 여행을 계속하며 버틴다. 아니 즐긴다고 하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던 중 닥터 H가 들어와 실험 중지를 선언한다.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는 원하는 실험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소정의 사례비를 건네받고 나오던 그는 닥터 H에게 사내 H와 H양이 며칠 동안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닥터 H는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다. 오직 그 혼자만이 실험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황당해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은 분명 실험에 참가하러 오던 날 새벽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피를 흘려 간단한 수술을 받고 붕대를 붙인 상태였는데, 막상 뒤통수를 만져보았지만 상처도 붕대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아내에게 자신이 며칠 만에 돌아왔느냐고 묻지만 아내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순간 피가 그의 뒤통수에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목차

〔차례〕

댈러웨이의 창
중심성맥락망막염
이상한 가역 반응
실마리
런어웨이 프로세서
호라지좆
왈가닥 류씨

해설·가짜의 진실과 복화술의 소설_성민엽

작가 소개

박성원 지음

1969년생. 1994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단편소설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과 『나를 훔쳐라』가 있다. 2003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독자 리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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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9 =

  1. bondandy
    2002.03.30 오전 12:00

    친구를 만났던 게 어제인지 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중하여 생각해봐도 헷갈리는 건 여전하다. ‘나’는 도대체 친구를 어제 만났던 것인가 혹은 그제였던가.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것이 실재(實在)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기억에 의존해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경험을 정리해간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모든 일들을 헷갈려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증명해 줄 것인가.

    < <나를 훔쳐라>>의 인물들은 바로 이런 상황 앞에 놓인 인간들이다. 주인공은 지금껏 지내왔던 곳과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버리는 것 혹은 살아오면서 믿어왔던 사실들이 그 믿음과는 전혀 달랐음을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을 통해 진짜와 가짜를 알 수 없는 현실에 놓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작가 박성원은 컴퓨터로 사진을 조작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 물건의 일부분이 보이지 않게 되는 중심성 맥락 망막염에 걸린 남자, 자신이 어제 죽인 벌레들의 세상으로 가게 된 사내 등을 등장시킨다.

    소시증 맥락 망막염에 걸린 남자는 자신의 성기가 쪼그라든 것처럼 보이거나 아예 없어 보이는 것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갓 차려진 듯한 밥상 위의 숟가락에는 총살 당하는 남자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 황당하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황당하다. 그러나 황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 박성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소설집의 첫 번째에 있는 < 댈러웨이의 창>에서나 마지막에 있는 < 왈가닥 류씨>에서나 지극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그런 의미에서인지 박성원은 ‘여러분’이라고 독자를 불러 놓고는 앞에 두고 얘기를 걸고 있는 듯한 말투를 자주 선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 <나를 훔쳐라>>는 야생 육식 원숭이의 동물성으로 인간을 은유했던 백민석의 < <목화밭 엽기전>>, 자살을 권고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내가 등장했던 김영하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무한한 상상력과 순수문학으로서 지녀야 할 사명을 두루 갖춘 소설들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새근발딱거리다’, ‘야지랑스런’, ‘뙤록’, ‘씀벅’, ‘가량가량히’, ‘소들소들’, ‘툽툽한’, ‘씰긋거리며’, ‘뜸지근하게’, ‘꿀적거리다’, ‘폭짝폭짝’ 등의 참신한 표현은 멋부리기식의 식상한 문장에 흥미를 잃은 독자들의 눈을 밝혀준다.

    의미있고(읽으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무엇인가가 있고) 게다가 재미있고 세련되기까지 한 소설.

  2. 김유리
    2000.12.01 오전 12:00

    이틀 전, 서점에 갔다가 따끈따끈한 소설집 < 나를 훔쳐라> 를 발견했습니다. 나온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은 책을 어쩌면 저는 그렇게 잘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신간이라고 따로 나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서문도 없고 작가소개도 길지 않은 이 소설집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김영하 이후 우리 문학의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이 소설집은 전체적으로 카오스적 상태, 즉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를 인간정신의 혼미함을 통해 나타낸 것 같습니다. < 델러웨이의 창>에서는 뒷부분의 반전이 소설을 공부하는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구요. 작가도 노력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역시 < 실마리>였습니다. 카프카의 < 변신>과 연계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한 독자로서 박성원 작가의 글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구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한번쯤 권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