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 시인선 249

신대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10월 31일 | ISBN 9788932012063

사양 신46판 176x248mm · 124쪽 | 가격 7,000원

수상/추천: 백석문학상

책소개

〔개요〕

첫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이후 20여 년을 훌쩍 흘려 보내고서 독자를 다시 찾은 시인 신대철의 두번째 시집. 시인의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한 극지 체험은 원시적 공포감과 더불어 흙 내음에 대한 열렬한 희구, 그리고 이내 인간 내면의 집요한 탐구로 이어지고 있다. 늘 자연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 정황을 포착하는 그의 시 세계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시집.

〔시인의 말〕

자작나무 꼭대기에 검은 꽃처럼 피어 있는 새, 으르렁거리며 부딪치는 밀물 때의 얼음 덩어리들, 바람이 불 때마다 날아다니는 눈송이, 그 위에 쌓이는 회색빛 화산재. 다시 퍼붓는 눈발, 문득 개면서 하얀 산에 노랗게, 혹은 붉게, 환청 속으로 정체 모를 숨결 사이로 번지는 노을.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가 종적을 감춘 뒤 불내와 얼음 안개 속에서 나는 흙내가 그리웠다. 극지 사람들은 어떻게 흙내 없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사람을 만날 때마다 흙내를 축적하여 그것으로 숨쉬며 살아왔으리라.
나는 사물 속에서라도 흙내를 찾아보려고 숲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적을 깨뜨리면 더 깊은 정적이 울렸고 그 울림에 싸여 참새도 뇌조도 이름없는 검은 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돌연 원시적인 공포감이 나를 휘어잡았다. 그 공포감은 섬뜩하면서도 황홀하기까지 했다. 어느새 주위의 모든 사물들은 태초를 향해 있었다.

-33도, -23시
태초에서 흘러와 태초로 흘러가는 시간.

2000년 10월
신대철

〔해설〕

새의 비극과 그 깊이
─신대철의 두번째 시집

김주연

1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없고
그대는 그대가 있는 곳에 없고 ─「아이오와 4」 첫부분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없다면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네가 있는 곳에 네가 없다면? 이것은 역설도 아니고 아이러니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 그렇다, 사실은 사실에 가깝다. 이런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비근한 이런 말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갈 때 자신에게 가장 가까워진다는. 여행을 권고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때 앞의 ‘멀어진다’는 물리적인 거리이며, 뒤의 ‘가까워진다’는 내면적인 거리이다. 그러나 두 동사는 동일한 범주에 병치됨으로써 효과의 극적인 성격을 극대화시킨다. 신대철의 “내가 있는 곳에 없”는 나, “그대가 있는 곳에 없”는 그대도, 말하자면 이와 비슷한 방법론 위에 있다. 그러니까 두 가지의 ‘나’는 같은 범주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범주에 병치되어 있음으로 해서 어떤 극적인 효과를 빚어내고 있는, 그런 성격과 관계된다.

자, 보자. 두 개의 나, 즉 주체인 ‘나’는 “내가 있는 곳”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없다. 두 부분은 주어와 술어로 연결되는 기능상의 차이 이외에 바로 그 장소의 특성 때문에 범주를 달리하게 된다. “내가 있는 곳”이라는 장소에 ‘내’가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나’와 “내가 있는 곳”의 ‘나’는 현실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분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두 가지 ‘나’는 필경 같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황이 다른 상황에 위치한 ‘나’이리라는 것이다. 그 상황은 다시 크게 두 가지가 된다. 그 하나는 다른 시간에 처한 두 개의 ‘나’이며, 다른 하나는 ‘나’의 양면성이다. 「아이오와 4」에서 그것이 어느 쪽인지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즉 끝부분에 나오는 “내 영혼은 지금 아프리카에서/그대에게 가고 있다”는 대목이 강한 시사를 던진다. ‘나’는 규정된, 모든 고정된 어떤 자리 아닌, “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나’는 “내 영혼”으로 나타나는바, ‘나’의 존재 또한 육체적 실재 아닌 영혼이므로 그 자리의 유동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향하고 있는‘그대’의 자리는 어디인가. 사실 가장 불분명한 것은‘그대’의 정체인데, 이번 시집은 바로 그 정체 찾기 이외 다름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제목이 된 ‘개마고원’ 이외에도 이 시집에는 우리가 쉽게 가볼 수 없는, 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여러 지역과 지명들이 나온다. 아마도 시인 자신은 가보았음직한 그곳들은 고향 근처의 칠갑산에서 우선 시작하지만, 아이오와 들판을 거쳐 백야가 계속되는 북극에까지 이른다. 시인의 이 같은 방랑, 혹은 여행은 동경과 갈망이라는 시인 특유의 본원적이며 일반적인 욕구의 산물일 수도 있으나, 신대철에서 그것은 ‘그대’와의 만남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와 관계된다. 그 몇 곳을 시인과 더불어 동행해보기로 한다.

칠갑산에 오르면
금강 줄기를 타고 가다
아득히 시야 끝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
고향을 떠나서도 언제나
머리 위에 높이 떠 있는 강,

얼음 풀리면 그대
가슴을 향해 흐르리 ─「높은 강 1」 전문

여기서 ‘그대’는 고향의 금강이다. 금강인 것은 분명하지만, 애매 모호한 부분도 있다. 예컨대 “얼음 풀리면 그대/가슴을 향해 흐르리”에서 ‘그대’가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확실치 않은 것이다. ‘그대’인 금강은 가슴, 즉 중심을 향해 흐를 것인가, 아니면 시인이 금강의 중심으로 가겠다는 것인가. 「높은 강」은 일종의 연작시로서 몇 편 더 있는데, 그것들도 이 같은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내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관련된 어린 날의 추억과 더불어 “그대/ 가슴을 향해 흐르리”에서 ‘그대’는 주어에 가깝지 않나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대/가슴은” “그대는” 가슴을 향해 흐른다로 읽혀질 수 있고, 이때 가슴이 상징하는 중심은 「높은 강 1-1」에 나오는 “가슴 위로 떠오르다 불시에 스며들어 무섭고 이상한 아픔을 반짝이는 강”으로 다시 읽혀진다. 다시 말해 이때 중심은 시인 자신의 가슴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 가슴은 강이 보여주었던 그 옛날(동란 직후)의 무섭고 이상한 아픔의, 시인 자신의 가슴인 셈이다. 결국 칠갑산이나 금강이나 시인에게는, 그곳이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상처이다.

그러나 신대철에게 있어서 고향이 곧 상처는 아니다. 무엇보다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그는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다니! 그는 아예 자연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한다.

바위틈에 엉키는 잔뿌리들 얽으니
나는 고로쇠나무
나는 물푸레나무
나는 생강나무

산속이 잠시 나로 꽉 차 있다.
하나씩 나무로 되돌아가고
하나씩 나로 되돌아오고 ─「水刻畵 1-1」 부분

자연과의 합일이 노래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시가 보여주듯, 나는 나무이고, 나무 또한 바로 나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 속에는 한 가닥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앞서 내가 “과거의 상처”라는 말로 부른 저 동란 당시의 기억. 그것은 희미하지만 집요하게 그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것은 「수각화(水刻畵) 1-3」에서는 이렇게 빼곡이 얼굴을 내민다.

담비떼에 바싹 붙어 슬며시 밤안이를 돌아드는 저녁, 삐걱이는 사립문 더 열어제치고 가만히 내다보는 용복이 아버지, ‘살고 싶으면 때를 놓치지 말게‘

불길과 나무 사이
모닥불 피워
혼자서 빙 둘러앉았다.

매운 연기에 눈 찔리고
눈물 불로 지지면서 ─「水刻畵 1-3」 부분

여기에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자연이 교묘히 겹쳐져 있다. “살고 싶으면 때를 놓치지 말게”라는 용복이 아버지 말 속에 숨어 있는 슬픈 비밀은 아마도 시인의 집안과 관계된 그 무엇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일어난 그 비극의 기억은 “불길과 나무 사이”라는 말 속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냥 그대로 자연이면서 동시에 비극인‘불길’과 자연인 ‘나무’를 대변한다. “내가 없는” 곳에 내가 있고 “그대가 없는” 곳에 그대가 있다는 기묘한 존재 감각은 이같이 일종의, 뒤집힌 시간과 관계된다는 추론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의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나는 왜 아직 처마 밑에 깃들여/온몸으로/귀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자의식을 고백하게 된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같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다르게 다가오는 데에 따른 이른 당혹감이다. 이 당혹감의 표출은 「무슨 일이지?」 「오 무슨 일이지?」에서 은밀히 드러난다.

언 눈 언 햇빛, 뒤틀리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쇠박새가 들락날락하네

[……]

삐이, 소리만 가늘게 울리네

무슨 일이지?

내 안에서 길 안 난 길을
누군가 떠돌고 있네 ─「무슨 일이지?」 부분

또 하루 지나
새는 보이지 않고
후르르르 리요
새 울음 소리 한 줄기 손 끝에 스치다 스민다.

손 끝에 맺히는 울음, 한 방울.
─「또 무슨 일이지?」 부분

두 편의 시는 모두 새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첫번째 시는 쇠박새, 두번째 시는 그냥 뜨내기새를 끌어오고 있다. 그런데 쇠박새는 “뒤틀리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들락날락하면서 “삐이, 소리만 가늘게 울린다.” 아마도 그 새는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때 “무슨 일이지?” 하면서 의아해한다. 소리만 가늘게 울리는 쇠박새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새의 그러한 모습에서 시인은 “내 안에서 길 안 난 길을/누군가 떠돌고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내 안에서 나 아닌, 말하자면 낯설고 거북한 존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인 자신이 스스로 평화로운 자기의 일체감, 동일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더구나 길 안 난 길을 헤집고 다니는 낯선 존재라니! 쇠박새로 표상된 어떤 자연은 시인에게 매우 불편한 그 어떤 것으로 느껴진다. 이 쇠박새는 다음 시에 이르면 뜨내기새일 뿐 아니라 “날개 다친 새” “눈빛이 뜨거운 새”로 묘사되는데, 그 새는 결국 손 끝에 스치다 스민 “한 줄기 울음 소리”의 새이다. 왜 이토록 새는 신대철에게 있어서 가련한 울음 소리나 내는 불편한 존재일까? 혹시 그것은 시간에 따라 뒤집힌 자연의 어떤 서로 어긋난 형상을 말하여주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새 자체의 모습이라기보다, 울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정서 내지 상황 속에서 포착된 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우는 자의 눈에 비친 새는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 울음, 혹은 눈물은 “손 끝에 맺히는 울음, 한 방울”이 말해주듯 숨겨진 울음이었다. 따라서 자연은 아름답고, 그 자연과의 합일을 시인은 바라고, 또 노래하지만, 시인은 차라리 그 자연 속에 몸을 감추고 숨어 있고 싶어한다.

평지 끝에서 산속으로 쫓겨 들어온 그해 겨울, 물소리도 끊긴 옻샘에서 얼음 숨구멍을 쪼던 까만 물까마귀와 마주쳤네. 물까마귀는 나를 깊이 지켜보았고 나는 한눈 팔며 주춤거렸네.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네. 몸 속, 기어들면 영혼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네.

겨울 가고 겨울
바위틈에 물까마귀 언 발자국만 남기고
사람도 산도 잊고 한데에서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전문

꽤 직접적인 진술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은, 이 시인에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전사(前史) Vorgeschichte와 관계되었음이 드러난다. 이 역시 아마도 그 옛날 동란 당시의 일과 연관되었음직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의 경과에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는 그 앙금이 시인에게는 심리적 위축이었겠으나, 시에서는 자연과 만나는 특이한 모티프로 성장해 있다. 사실 여기서 시적 자아인‘내’가 과연 시인 자신인지, 아니면 어떤 타자의 대상화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후자인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시인은 시적 자아와 간접적인 매개를 통해 결국 동일화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2

시간에 따른 공간, 그 속에 존재하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라는 신대철의 철학적 관심은 그의 시를 탁월한 깊이로 몰아간다. 그 깊이가 그를 극지로 몰아간다.

가을입니다
땅이 울릴수록 하늘은 한없이 올라가 푸르러집니다. 우리는 하늘 위에 작은 얼음집 하나씩 지어놓고 하루에도 서너 번 하얗게 앉아 있다 내려옵니다. 세상은 가을과 함께 깊어가고, 이 세상의 깊이는 지금 우리의 깊이인지? 그 속에 누우면 아늑한 집인지? 불바닥인지? 어디서 패랭이꽃만하게 소리가 트이고 있습니다. ─「얼음집」 부분

이해하기 쉬운 낱말들로만 연결된 평이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썩 잘 이해되지는 않는 이 시행들이 보여주는 것은 삶의 추운 풍경이다. 가을이라는, 그토록 많은 시 작품들에서 결실, 혹은 몰락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애용되어왔던 전통적인 표상이 신대철에게서는 스산한 추위의 전조로 인식된다. 가을이 되어 하늘이 높아가지만 그 높아간 하늘 위에는 “작은 얼음집”이 지어진다. 그 집은 우리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하는, 세속적인 의미의 그 집이 아니다. “그 속에 누우면 아늑한” 집이 아니라, 오히려 ‘불바닥’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전달된다. 왜 시인은 지상의 집에 안주하는 것 대신 ‘얼음집’을 통한 ‘불바닥’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천착하는‘깊이’ 때문이다. 삶의 본질에 깊이 가지 않는 한, 모든 집은 적당히 편안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 편안함이 곧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깊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인식의 깊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린 날의 상처에서 유발된 감수성의 여린 떨림과 그 오랜 자국이 원인이 된 감성적 속박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든 어떻든 그는 삶의 피상에만 머물 수 없게 되었고,‘깊이’로 내려가고, 또 ‘깊이’로 올라간다. 그 깊이에 대한 인식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처절하다. 가령 「얼음집」 중반부에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

이 세상의 첫 그림자는 빛,
바람은 느닷없이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우리는
빛 쏠리는 쪽으로 휘어지며 이 세상 깊이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안개 낀 얼굴은 길거리마다 탈이 되어 걸려 있고 탈 벗은 자들 꿈같이 살아가는 집 안을 지나면 길은 시커멓게 그을리며 탔습니다. 우리는 햇볕 속을 따갑게 지나 정오를 지나 수직으로 올라갑니다.

“세상의 첫 그림자”가 ‘빛’이라는 진술은 「창세기」에서, “바람은 느닷없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진술은 「잠언」에서 만난 장면들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근접해 있는 이 같은 인식이 시인의 시세계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하나의 발단과 맺어져 있을 뿐, 지속적인 발전과 연계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우리는 빛 쏠리는 쪽으로 휘어지며 이 세상 깊이깊이 들어가”고 있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것은 세속화를 연상시키는데, 그렇다면 이때 빛이 하나님의 빛, 빛과 소금의 그 빛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꿈같이 살아가는 집 안”의 집이 말해주는 안식의 허구성이며, “길은 시커멓게 그을리며 탔다”는 구절이 보여주듯, 유통과 왕래의 상징이어야 할 길의 차단, 파괴됨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세속적인 행복의 기약처럼 보이는 햇볕 속에서 거꾸로 “정오를 지나 수직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안락과 세속을 거부하는 고행의 길이다. 성격적 세계관은 이때 고행 대신에 감사와 기도를 권유하고 자의적인 선택이 갖는 교만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러나 시인은 세속적 안락의 허위성이라는 측면에서 성경적 세계관과 함께하면서도, 일종의 자결적 선택으로서 ‘얼음집’을 짓는다. 엄격한 이 자기 성찰과 고행은 마침내 “눈썹 하나만 하얗게 남기는” 처절한 결과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눈썹 하나만 남은 세계에서 나는 문득 바흐만 I. Bachmann의 저 「유예된 시간」과 방불한 스산한 이미지들을 본다.

춥지?

우리의 한 끝은 비탈, 새가 나는군. 지상에 집 하나 짓고 서향창 빛 한 줄기로 날아가버린 새. 불러볼까, 저 새? 더 추워질 거야.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부분

세상은 더 추워질 것이라는 비극적 세계관이 곧 종말론적 인식이라는 단정에는 다소의 검토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위의 인용은 분명히 자연이 이제 그 포용력과 치유력을 시인에게서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가장 결정적인 것이 새다. 지상에 집 하나 짓고 날아가버린 새는 앞에서도 이미 울음만을 남기는 알 수 없는 흉조처럼 그려진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저 새? 더 추워질 거야”로 불길하게 예견된다. 그가 지은 집 역시 안주의 공간 아닌, “갇히게 되는” 공간으로 부정된다. 이렇게 되면, 시인은 결국 집을 나서게 되고 극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이때 또 다른 자연인 나무는 어떤 생각, 어떤 태도를 갖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을까.

흰 눈꽃을 피워 조용히 길을 밝히는 나무, 눈나무들, 다가서면 스스로 녹아내렸다. [……] 우리도 눈꽃 한 송이 피우다 갈까? 잠시 망설이는 동안 그들은 우리를, 그들이 한때 살아 움직인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부분

나무 또한 힘을 잃은 자연으로 투영되지 않는가. 그 나무들은 “한때 살아 움직”였을 뿐이다. 그 나무들은, 뿐만 아니라 사람인 우리들조차 마찬가지의 눈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들도 죽은 바나 다름없다. 눈꽃 한 송이 피우고 싶은 마음 없지 않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에 곧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만, 그것도 스산하다.

우리는 갈수록 서로들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이제 끝이군. 우리도 슬슬 날아오를까?
따스한 곳으로?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자기 자신 혹은 스스로 미래인이 되어.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부분

3

신대철의 시는, 거칠게 요약한다면, 자연 속에서 자라나 자연과의 친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기묘한 배신감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배신감은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연 쪽에서 책임져야 할 배신감이 아니라, 자연에 의탁했던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절망과 비극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배신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커다란 틀 속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새’표상이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그 전형적인 경우다. 작품 「새」를 보자.

다른 길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다르게 살아보려구요, ─「새」 첫부분

누가? 시인이? 새가? 새든 시인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여기서는 새일 것이다. 새가 다른 길로 나가고 싶다면 날지 않겠다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작품에 드러난 것은 뒤이어 나타난 다음 대목이 그 경과를 전해준다

무심히 서 있는 동안 몸 몰래 둥지 튼 새는 몸 몰래 날아가고, 둥지에 드나드는 얇은 새털구름떼,

새는 “몸 몰래 둥지” 틀고, “몸 몰래 날아”간다. 결국 몸은 놓아두고, 영혼만 둥지 틀고, 영혼만 날아간다는 격이다. 얼핏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이 같은 새의 모습은 이 글 첫머리에서 문제된 ‘나’와 “나의 자리”의 분리 현상의 반복 이외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불만·증오·한탄·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며 그 희원(希願)이 아니겠는가. 날지 못하고 이상한 울음만 토해내는 새, 날아도 기껏 “몸 몰래” 나는 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숨은 욕망이 마치 새 스스로 시인을 배신한 것처럼 그리게 한다.

이제 시인은 자연스러운 자연성을 거기에서 보기 힘든 자연에서 벗어나, 그리고 닫힌 공간일 뿐인 집을 떠나서‘얼음집’을 짓고 ‘알래스카’를 찾는다. ‘얼음’이 주는 동결·비분리의 이미지가 분리된 자연 속을 헤매야 했던 시인에게 강렬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한 얼굴로 극광을 보면서 광륜을 단 두 개의 달을 굴려 극야에서 주야로, 다시 백야를 향해 가고 싶었던가요.

극야를 넘어 67일째, 마침내
15분 간 떠 있던
금강에서 개마고원에서 동시에 떠오른 해.
─「극야」 끝부분

아, 얼마 만인가. 시인의 환한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앞의 시에서 시인은 금강과 개마고원에서 동시에 해가 떠올랐다는 감격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진 구체적인 공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알래스카의 극지였다. 금강에서 분리되었던 하나의 자아는, 이 얼음의 극지에 와서는 오히려 둘을 하나로 만드는 엄청난 일을 가능케 하고 있다. 고향의 자연 속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먼 얼음의 땅에서 피어난 것이다.

그날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자 당신은 ‘개마고원요’하고 얼어 있는 나와 갑자기 내 뒤에서 저절로 맞춰진 우리의 환한 얼굴까지 함께 보았지요. 그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서로 幻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극야」 부분 (고딕체 강조는 필자)

천사를 거부한 릴케가 결국 시에서 구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듯이 시인 신대철의 자연 착종, 혹은 자연의 절망은 ‘환월(幻月)’ 속에서 그 화해의 가능성을 전달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동토의 땅 극지는 “툰드라엔 광물질만 남는 고독, 휘몰아치는 폭풍설”로 뒤덮인, “새도 나무도”없는 불모지이지만, 그곳은 오히려 “당신의 아이”와 “내 아이”가 “마주보고 웃는” 곳이 된다. 먼 얼음의 땅이 축복한 시인의 새로운 내적 통일과 안정을 나도 축하하고 싶다.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시구와 더불어.

눈 속에 쓰러진 십자가를 세우며 나를, 당신을, 우리를 넘어, 쿵쿵, 쿵쿵쿵, 뜨거운 핏줄 속으로.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끝부분

목차

〔차례〕

시인의 말

水刻畵 1
水刻畵 2
水刻畵 3
水刻畵 4
水刻畵 5
무슨 일이지?
또 무슨 일이지?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높은 강 1
높은 강 2
서시
눈사진
내 나무 아이
명파리
나무 밑에서
누가 살고 있다
얼음집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넉배 고란초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첫 기억
첫 기억의 끝
비무장 지대 일기 1
비무장 지대 일기 2
神市
다락골 줄무덤에서
4월이여, 우리는 무엇인가
아이오와 1
땅에서 어두워진 수평선 하나 올라가고 있다
아프리카
아이오와 4
강가에서
가금리에서 1
가금리에서 2
백두대간을 타고 1
백두대간을 타고 2
저 물빛 아이
황해 1
황해 2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이 부네
넘은 산
알래스카 1
알래스카 2
극야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포인트 배로까지
Sam and Lee
지리산 소년
파도벽을 타고
얼음눈
노란 얼음꽃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유빙
산늪 1
산늪 2
산늪 3
나는 풀 밑에 아득히 엎드려 잎에 잎맞춘다
그대를 보고 있으면 나는 고원에 있데
무지개, 무지개, 원무지개

▨ 해설·새의 비극과 그 깊이·김주연

작가 소개

신대철 지음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와 연세대 국문과,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국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8년 「강설(降雪)의 아침에서 해빙(解氷)의 저녁까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다.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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