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추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248

윤병무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10월 25일 | ISBN 9788932012049

사양 신46판 176x248mm · 118쪽 | 가격 5,000원

책소개

〔개요〕

시집 『5분의 추억』에는 지루한 일상에 아주 작은 틈새를 내는 웃음의 도끼가 숨겨져 있다. 그 웃음은 보일 듯 말 듯 배시시 웃는 것이지만 무겁고 답답한 현실 상황에다 기어이 구멍을 내고 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시는 일상의 소소함까지 묘사하고 진술하면서 슬픔과 비애를 거의 멜로드라마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은 슬픔과 절망을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신선한 유머를 시의 뇌관으로 장착시켜 그런 현실을 살짝 뒤집으면서 종래는 비판의 핵심에까지 밀어붙인다. 이는 현실을 넘어서는 시인의 삶에 대한 보다 크고 따뜻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말〕

“칼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영화 「東邪西毒」에서, 고향에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온 마적단에 홀로 맞섰던, 점점 눈이 멀어가는 어느 武士가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의 마지막 독백이다.
그처럼 나는 휙, 하고 나의 안팎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 소리 같은 찰나를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조짐을 느끼고 나의 안팎을 둘러보았을 땐 이미 ‘그 소리’는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누추한 시집은 그 끝자락에 대한 희미한 크로키이다.

2000년 가을
윤병무

〔해설〕

우수, 혹은 시간의 발견술

이광호

윤병무의 시적 화자는 어떤 창백한 우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수라는 말에 포함된 슬픔과 근심은 대개 특정한 경험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이것은 그가 지금 욕망의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열정을 식게 하고 추억의 이름으로 그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홀로 시간의 침식을 응시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흔적의 현재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윤병무의 화자는 이렇게 몰두와 초연의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는 그의 우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우수란 차라리 부재와 현존의 시간이 겹쳐진 곳에서 현존하는 부재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것, 그리하여 그곳에 “그 시간”이 있다고 처연하게 기억하는 자리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수는 기억의 현상학의 일부이다.

나는 몰랐다
그때의 기타 소리가 십일 년이 지나서
꽃 한 잎을 떨어뜨리며
현기증처럼 흔들리는 봄바람 같은
共鳴으로 다가올 줄이야

세상의 바깥엔 빛이 있었고
그 중심의 자리엔 갑작스런 정전 같은
귓전의 쇳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응시는 나를 뚫고
푸른곰팡이가 핀 벽지 위에
나의 안면을 판박이하였다
나는 판박이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었다
다 자라난 손톱 사이로 파고들어
때 낀 그날은 오래도록 빠지지 않았다

추억이란 마모되면
수만 년이 지난 어느 날의 또 다른 이름,
어느 어두운 방의 방사선이 들여다보는 찰나의 化石
그때에도 누군가 쓸쓸한 웃음을 지을까?
어쩌랴 그날은 지나갔다
이름을 갖지 못한 行星이 먼 훗날,
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지구가 궤도를 이탈해 그 時間의 이름을 찾아가든지
―「찰나의 化石」 전문

이 시의 첫 연은 “십일 년”을 건너온 “기타 소리”의 “공명(共鳴)”을 말한다. 화자가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공명이 시간을 넘어오는 과정의 의외성을 반영한다. 이 경우 기억이란 발견의 의미를 갖는다. 이 시에서 그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청각적인 요소들이다. 첫 연의 “기타 소리”는 두번째 연의 “쇳소리”와 “노래”로 전화되지만, 화자는 다시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기억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기억한다”와 “기억하지 못한다”의 의미론적 거리는 사실 그렇게 멀지 않다. 이미 “기억”에 관해 말하고 있는 이상, 기억에 대한 부정은 일종의 기억에 관한 재인식이다.

그런데 이 시는 중반 이후 의외의 시적 전개를 보여준다. ‘나’의 청각적 감각에 대한 시 앞부분의 묘사들은 갑자기 ‘나’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돌발적인 관점의 역전이 일어난다. 새로운 주체의 ‘나’에 대한 응시는 ‘나’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는 ‘나’의 ‘듣는다’와 “한 사람”의 ‘본다’ 사이에서 기억의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판박이”된 얼굴을 “손톱으로 긁”는 행위는 “한 사람의 응시”에 대한 ‘나’의 저항이며 수용이다. 혹은 타자에 의해 대상화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마지막 연은 그 시간의 우주적 차원에 대한 묘사이다. “수만 년”이라는 긴 시간의 단위와 “찰나”라는 시간 단위, 그리고 “이름을 갖지 못한 행성(行星)이 먼 훗날,/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의 아득한 미래 사이에서, “추억”은 단지 과거에 붙들려 있지 않고 우주적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지막 행의 “그 시간”은 일반적인 의미의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앞의 “추억”과 “그날”에 상응하는 어떤 본질적인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단순히 “그 시간”의 소멸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원성에 대한 사유를 내비치고 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늦은 아침 호주머니에서 나온
병뚜껑 하나

구부린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서 반으로 접힌
알리바이를 갖고 있는
오비라거 병뚜껑 하나

어두운 호주머니 속에 갇혀 있다가
내 손가락에 잡혀 올라와선
죽은 조개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序詩」 전문

여기에는 시간의 흔적에 대한 이미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시에서 “출근길”이란 노동과 생산이 시작되는 일상적 현실로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 화자는 호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오비라거 병뚜껑 하나”를 발견한다. 그 발견은 단지 맥주 병뚜껑 하나의 발견이 아니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발견이다. 병뚜껑의 시간은 “늦은 아침”의 분주한 시간과 대비되는 깊은 밤의 시간이다. 문제는 맥주 병뚜껑 하나가 암시하는 그 시간의 사건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죽은 조개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내용을 완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호주머니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을 꺼낸 “늦은 아침”의 사건은 어둠 저편의 시간과 “출근길”로 상징되는 일상적 출발과 생산의 시간의 경계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죽은 조개”로 상징되는 시간의 침묵은 그 시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존재감을 깨닫게 해주는 경험이 된다. 그 사소한 경험은 “출근길”이라는 확실성·목적성·유용성·근면성의 세계로부터 불길하고 텅 빈 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지금 나는 단지 이 시를 모리스 블량쇼의 ‘밤의 매혹’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입장에서 해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 문제적인 것은 ‘밤의 매혹’이기보다는 시간의 알리바이며, 그 알리바이가 암시하는 밤의 시간의 존재감이다.

육교의 정상에서 눅눅한 도시의 거리를 내려다보았을
어느 실직자의 깊고 푸른 밤이 가면
토사물 위로 대낮의 아지랑이가 춤춘다
내장 속에서 쫓겨난 자존심도 드문드문 섞인
만두소로 비둘기들의 푸짐한 오찬이 시작되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
가던 길을 간다 ―「출장 중 1」 일부

밤새 만나지 못하고 잠 깬 날 아침
지하철에 올라 손잡이를 잡으면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있다

지난밤 강가에 나와
물수제비질하던 손
手溫을 싣고 날아간 얇은 돌이 수면을 두드릴 때마다
얼굴들 하나씩 그리던 손 ―「순환선 지하철에서」 일부

시간의 흔적들은 주로 아침이나 대낮에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비교적 선명하다. 화자에게 시간의 저편에 웅크린 것들은 주로 지난밤의 사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출장 중 1」에서 화자는 대낮에 육교의 정상에서 지난밤의 “토사물”을 발견한다. 그 토사물은 그것을 쏟아낸 사람의 “내장 속에서 쫓겨난 자존심”을 보여준다. 토사물은 지난 시간의 흔적이면서 그 어느 누군가의 실존적 사건의 일부이다. 그것을 발견한 화자는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고 그래서 “가던 길을 가”는 것은 자신이 지금 “출장 중”이기 때문이다. “출장 중”의 시간은 앞의 시에서의 “출근길”과 마찬가지로 노동과 생산이 시작되어야 할 시간이다. 화자는 지금 그 길 위에서 한눈을 팔고 있는 셈이지만,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지하철’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아침 지하철의 손잡이에서 다른 사람의 체온을 경험한다. 그 체온은 현실적으로는 이른 아침의 누군가의 체온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지금 화자는 그것을 지난밤의 체온으로 상상하고 있으며, 그 상상은 “물수제비질하던 손”과 “대문을 열어보려던 손”으로 뻗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밤새 만나지 못하고 잠 깬 날 아침”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은 ‘밤/아침’의 의미의 대비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암시한다.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한 밤과 지난밤의 체온이 남아 있는 아침. 이때 ‘순환선 지하철’의 출근 시간은, 맥주 병뚜껑을 호주머니 속에서 발견하는 출근길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하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시간의 실감을 만나는 길이다.

검은 유리창을 둘러놓아 거리를 지날 때마다
궁금했던 카페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에서만 바깥이 내다보이는
창을 붙여놓았다 창가에 앉아
내가 걸어온 길거리의 풍경을 바라본다
술잔이 비워지자 아는 사람이 지나간다
나는 그이를 보며 웃어 보인다
그이는 웃지 않는다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이는 창가를 스쳐 지나간다 ―「낮술」 일부

다시 화자는 대낮의 시간에 ‘바깥’의 시간을 경험한다.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낮술’이다. ‘술’의 도취성과 일탈성은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낮술은 끊임없는 도취의 나락으로 시적 자아를 이끌지 않고 그에게 어떤 자기 성찰적인 계기를 부여한다. 낮술을 마시는 공간의 유리창은 “안에서만 바깥이 내다보이는” 그런 공간이다. ‘안에서만 바깥을 본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해할 때, 그 자리는 자기 안으로부터 자기의 바깥을 보는 경험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바깥에서 시적 자아가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이다. 화자는 먼저 “내가 걸어온 길거리의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그냥 ‘길거리의 풍경’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걸어온 길거리”라고 굳이 말하는 것은, 화자가 그냥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풍경을 본다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화자가 보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실존적 시간이다. 그 다음, 화자는 “아는 사람”을 보게 된다. 화자가 알은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쳐가는 사람의 모습은 “안에서만 바깥이 보이는 창”의 단절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화자가 타자와 관계 맺은 경험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그 만남이 타인과의 소통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 내부의 사건에 한정되는 것은, 지금 그가 안에서만 바깥을 보기 때문이다.

내가 까놓은 알들이 하나둘씩
흰 날개를 달고, 숙인 고개 아래서
맥주 거품의 모양으로 유체 이탈한다

물을 내리면서,
창녀의 과거를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이 싫다고
고백하며 괴로워하는 어느 드라마의 남자가 바로
나다, 라는 생각이 든다
―「좌변기의 물을 내리면」 일부

이 시에서도 역시 화자는 자신이 저지른 시간의 흔적을 보고 있다. 자신의 배설물을 “내가 까놓은 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각적인 비유의 재치가 아니다. 배설을 생산으로 뒤바꾸어놓는 것은 의미심장한 시적 인식을 동반한다. 그러니까 방뇨의 행위는 단지 몸 안의 것들을 밖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보내는 일이다. 방뇨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할 때 그것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의 태도는 오히려 자기 반성적이다. “창녀의 과거를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이 싫다고/고백하며 괴로워하는 어느 드라마의 남자”는 드라마의 상투적 인물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과거에 붙들려 있는 남자이다. 시적 화자의 반성과 그것이 동반하는 우수는 이렇게 시간과 실존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연루되어 있다.

슬픔을 아는 사람의 슬픔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
그러나 슬픔의 눅눅한 안개에 싸여
슬픔이 어디까지에 다가와 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의 슬픔은
견디는 것인 삶이기에
늦은 밤 자주 방안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마치 태아 때의 자세가 자꾸 그리워지는 것이다
―「바보 같은 사랑의 밤 1」 일부

왜 사랑이 혹은 “사랑의 밤”이 바보 같은 것인가? 화자는 몇 가지 해석의 계기를 던져준다. 우선 “슬픔이 어디까지에 다가와 있는지/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슬픔과의 거리는 물론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원근법을 공간의 차원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 적용한다면, 바보 같은 사랑은 슬픔의 원근법을 알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지금 “태아 때의 자세”를 하고 “방안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태아 때의 자세”를 그리워하는 것을 실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욕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과의 시간적 거리를 측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과의 시간을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아주 근원적인 시간으로 귀환하려 한다. 이 시의 후반부를 보면 “바보 같은 사랑의 밤”은 한 사람만의 밤이 아니며, 그리움이 소통을 부르는 사람들의 밤이다. 밤의 전화들은 그 불가능한 소통의 꿈으로 울려댄다. 그러나 그 소통이 온전한 소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쉽게 열려 있지 않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취해 있지 않았던 선배가
취해 전화를 해왔을 땐
내가 취해 있지 않았다

나는,
살 만한가 ―「한밤의 전화」 일부

윤병무의 시에서 아침과 낮이 밤의 흔적을 발견하는 시간대라면, 밤은 불가능한 소통과 만남의 욕망이 서성거리는 자리이다. 그곳은 불확실하고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욕망의 실패와 어긋남을 통해 “나는,/살 만한가”를 물어보게 되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상보로 쓰이는 조간 신문에선
한 탈옥수가 자기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어릴 적 作家가 되는 게 꿈이었다던 그는
자신에 대한 재판 결과가 억울하여 철창을 뜯고 나왔다
특공대가 침투하여 그의 동료를 사살하기 전
그를 회유하려는 전화 통화에서 그는
비지스의 「HOLIDAY」를 듣고 싶다고 했다
예측할 수 없이 끝나버린 음악처럼
노래가 끝나고 그는 천년 안식에 들어갔다

몇 시간 동안 인질로 있으며 그의 상처를 간호하던
여인은 파앙, 하는 순간 그를 끌어안았다
이쪽을 뚫고 나간 저쪽 머리에선
그의 어린 시절이 빠져나갔다

그랬다 아래층에서 설거지를 하면
위층에선 수도관이 부르륵부르륵 앓았다
그리곤 한참 동안이나 수돗물은 나오지 않았다
―「HOLIDAY」 일부

이 시에서 “HOLIDAY”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의 의미 연관을 갖는다. 우선 하나는 화자가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일상적 시간으로서의 “HOLIDAY”이다. 그곳은 누추한 세간살이들이 등장하는 공간이다. 두번째는 그 세간살이의 일부로서의 “상보에 쓰이는 조간 신문”에 나온 기사 속의 “HOLIDAY”이다. “자기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 탈옥수가 비지스의 음악을 듣고 싶어했다는 기사이다. 탈옥수가 듣고 싶어한 음악의 제목은 그 탈옥수가 처한 현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삶에 비추어보면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이룬다. 세번째의 층위는 비지스의 음악 「HOLIDAY」라는 고유명사이다. 사실 그 음악을 알지 못해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시는 기본적으로는 음악의 제목이 가지는 아이러니의 효과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것 역시 이 시의 사실성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화자의 “HOLIDAY”와 탈옥수의 “HOLIDAY” 사이의 환유적인 연관이다. 이 시가 시작되면서 독자는 화자의 일상적 현실과 탈옥수의 사건 사이의 분명한 경계를 보게 되고 그 경계를 이어주는 것은 “상보로 쓰이는 조간 신문”이다. 그런데 “이쪽을 뚫고 나간 저쪽 머리에선/그의 어린 시절이 빠져나갔다”라고 탈옥수의 죽음을 묘사한 뒤 마지막 연은 “그랬다”라는 말로 이어진다. 이런 시행의 전개 과정에서 이제 탈옥수의 “어린 시절”은 화자의 일상적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HOLIDAY”의 아이러니는 어떤 휴식도 축제도, 혹은 이 단어의 어원처럼 어떤 성스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런 시절들이 그렇게 닮아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병무의 시에 나타나는 우수의 정조는 일상적 현재의 뒤편에 있는 불확실성의 시간을 발견하는 화자의 태도에 연유한다. 그것은 단지 회한의 포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자기 성찰과 타인의 실존적 시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게 만든다. 현대적인 삶 안에서 기억이란 확실성과 동일성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재인식하는 계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병무의 우수의 현상학은 현대시의 일반 문법이 현대적인 삶의 모순의 경험과 만나는 장면을 이룬다. 그러나 시간의 흔적을 찾는 행위가 현재적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질문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범상한 자기 감상의 토로에 그칠 수 있으며, 그러한 태도가 사물과 육체에 대한 보다 날카로운 감각의 성취를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공간과 욕망의 자기 운동에 대한 언어들은 좀더 엄밀함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발표한 「마지막 첫눈」 「風요일의 오후」 「藝술架에서」 등에서 시인이 변화된 시작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 그 상태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의 분량까지 마친 걸레가 마지막 한 조각을 남기자, 열려진 베란다 창문으로 하루 한 자락의 바람이 매미 소리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내 몸 밖으로 돋아나 빼곡한 잔털들을 휘익 누이곤 급히 사라진다 그렇게, 짧은 風요일의 오후가 가고 화장실의 파란 대야 안에서 세 차례나 하얀 똥을 눈 흐린 하늘색 걸레는 베란다 밖에서 어느 바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한 소리를 서너 번 내지르며 부르르 몸을 털고는 스테인리스 봉에 매달려 여름볕과 독대하고 있다
―「風요일의 오후」 일부

일상성의 공간에 대한 소묘가 건조한 묘사적 언어를 통해 표현된 이 시에서 사물들은 단지 화자의 인간적 관점이 포획한 대상이기를 벗어나서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시에서 ‘걸레’는 시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적 주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시인의 공간에 대한 좀더 세밀한 시선을 통해 낯선 감각의 영역을 열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나는 시인 윤병무의 시에서 시간의 발견술이 시간의 원근법으로, 혹은 시간의 직유법이 공간의 환유로 전환되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병무의 화자들이 뿜어내는 고독의 이미지들은 고독의 진술이 아니라 고독의 존재감으로 구상화되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고독이란 결국 고독의 실감, 고독의 시간성일 테니…… ▨

목차

〔차례〕

▨ 시인의 말

序詩
流星
막차 뒤에 남은 사람
귀갓길
질주
그믐밤
한밤의 전화
5분의 추억
너무 이른 겨울 아침
순환선 지하철에서
출장 중 1
낮술
좌변기의 물을 내리면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
바보 같은 사랑의 밤 1
이번 정차할 곳은
처음과 사이
햐쿠타케 혜성에게
낙타의 잠
어떤 인연 1
風요일의 오후
섭씨 36.5도의 날
鳥葬
錄
HOLIDAY
바보 같은 사랑의 밤 3
밤에 듣는 소식
消燈한 여름밤
찰나의 化石
약속
건조주의보
바보 같은 사랑의 밤 5
마지막 첫눈

음악 감상
어떤 인연 2
바보 같은 사랑의 밤 4
개미의 시 읽기
超新星
측면도
말년
봄 나들이
投石
서울로 돌아가는 길
출장 중 2
‘藝술架’에서
마지막 손님
잃어버린 명함
K1
바보 같은 사랑의 밤 2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루의 타이머
추신

▨ 해설·우수, 혹은 시간의 발견술·이광호

작가 소개

윤병무 지음

시인 윤병무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다. 1955년 가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5분의 추억』 『고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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