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문학과지성사가 주목하는 젊은 시인들

이철성 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6월 20일 | ISBN 9788932011738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39쪽 | 가격 6,500원

분야 시 선집

책소개

[개요]
『문학과사회』 통권 50호를 기념하여,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작품집. 현재 문단의 가장 젊은 층에 속하는 시인들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시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나게 된다.

[기획의 말]
『문학과사회』가 통권 50호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50권의 책들이‘문학과사회’라는 이름을 달고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해온 이 세상을 항해해온 것이다. 그 ‘50’이라는 숫자 앞에서 우리는 새삼 숙연한 감상에 젖는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마땅히 우리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점검하면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에 잠긴다.

문학 잡지가 담당해야 할 일차적인 역할은 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켜주고, 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문학 안팎의 다양한 현상들의 의미를 규명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활동하고 있는 문학 인력의 활동 무대를 제공해주는 일 못지않게 문학 생산의 유능한 인력을 새롭게 발굴해내고 그들의 문학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일 또한 문학 잡지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에 우리는 통권 50호의 자리에 선 『문학과사회』의 현 위치를 점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지금까지 『문학과사회』를 통해 데뷔하거나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의 신작 시들을 한자리에 모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참고로, 그 동안 『문학과사회』를 통해 데뷔한 작가로는 정남식(1988년 봄), 박인택(1988년 가을), 김휘승(1988년 겨울), 차창룡(1989년 봄), 함성호(1990년 여름), 엄원태(1990년 겨울), 김태동(1991년 가을), 심재상(1992년 겨울), 한강(1993년 겨울), 연왕모(1994년 여름), 김연신(1994년 겨울), 임후성(1994년 겨울), 서정학(1995년 겨울), 송철한(1996년 봄), 이철성(1996년 봄), 김점용(1997년 겨울), 이찬(1997년 겨울), 배신호(1998년 봄), 우종녀(1998년 봄), 이기성(1998년 겨울), 고은경(1999년 봄), 김중(1999년 봄), 진은영(2000년 봄)이 있다.

이 자리에 모인 시인들은 그 중에서도 1960년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1960년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의 시들을 한자리에 모아본 것은 현재 문단의 가장 젊은 층에 속하는 시인들의 시를 통해서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가늠해보는 계기를 마련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였다. ‘시의 죽음’이 운위되는 요즘, 오늘의 시, 혹은 미래의 시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그렇게 희망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꾸준히 투고되고 있는 많은 시들은 투고작의 수준과 관계없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시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자리에 모인 시인들 가운데는 이미 한국 문단의 중요한 자리에 올라선 시인들도 있고 이제 막 풋풋한 날갯짓을 펼치기 시작한 시인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문학에 대한 열정과 빛나는 상상력의 지느러미로 스스로를 발전(發電)시키며, 이 세계라는 바닷속으로 더욱 활기 있게 헤엄쳐나가기를 바란다. 그들이 윤기 있는 비늘을 빛내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변함없는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2000년 6월,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해설]

죽음으로 죽음을 부정하는 역설의 미학

박혜경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는 일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즐겁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젊음과, ‘더 이상 젊지 않은’ 시의 운명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의 운명 위에 드리워지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는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모아놓은 이 선집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시는 그 스스로 죽음을 살면서 죽음의 가락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문제는 시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그 죽음을 살아내느냐라는 것, 다시 말해 시가 지닌 죽음의 정체성을 얼마나 치열하게 생동하는 언어적 활기로 끌어안느냐라는 것이다. 시의 죽음이 말 그대로의 죽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살아 있어야 할, 아니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증거하는 생명의 젖줄이 될 때 시의 죽음은 시의 또 다른 태생지가 된다. 그때 시는 세상의 죽음을 증거하고 대속하는 자리가 된다. 이것이 시가 죽음을 사는 진정한 방식이다.

이 선집에 실린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논리의 틀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부질없는 일로 보이기도 한다. 젊은 시인들이 연주하는 다성적인 운율의 숲을 거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이라는 건 어쨌든 최소한의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언술의 강박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선집에 실린 시들에서 두드러진 양상으로 감지되는 하나의 특징을 잡아낸다면 역시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들려주는 다성적 운율의 숲 곳곳에서 죽음, 혹은 소멸에 대한 기억은 마치 음울한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처럼 순간순간 산책자의 발목을 휘감는다. 시인들에게 삶이란 다가올 시간을 사는 일이 아니라 흘러간 시간을 사는 일이며, 삶과의 대면이란 끊임없이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얼굴과 조우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은 젊은 시인들의 젊음을 어두운 휘장처럼 감싸고 있는 그 무엇, 그들의 시를 ‘젊어서 이미 늙은’ 것이 되게 하는 그 무엇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그들을 다른 세대와 구분지어주는 어떤 실험적 시도나 새로운 시의 어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그러한 생각을 부추기는 하나의 요인이다. 그러나 이들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그 늙음의 징후들은 노숙함이라거나 달관, 혹은 정신적 무기력 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늙음은 그들이 더 이상 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시인됨의 운명으로 이 세계와의 대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세상과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손쉽게 피해가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다만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녘의 풍경을 응시하는 것이다. 생을 악착같이 거머쥐지도 또 무심히 놓아버리지도 않는 그 무연한, 그러나 간혹 소진되지 않은 열망과 회한과 간절함이 그 망막 위로 한 줄기 어두운 섬광처럼 떠올랐다 스러지는 검은 눈동자로.

시인들이 감지하는 삶 속에 미만된 죽음의 모습은 각각의 시들에서 다양한 단조(單調)의 울림으로 변주된다. 함성호의 시에서 죽음은 생의 보이지 않는 깊이에 이르기 위한 길이다. “죽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깊이/나는 그 깊은 침묵의 바닥에서/갈대의 빈 몸을 바라보고 있다”(「모미」)라고 시인이 노래할 때, 시인은 죽음을 통해, 혹은 죽음의 고통을 통해 “다른 우주의 넓이”를 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고통”이며, 이 세계의 복잡성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생의 아름다움이며, 그 생에 대한 멈추지 않는 추억이며,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이며, 마침내는 “스스로 방전하는 나무처럼/어쩔 수 없이 확장하는 번개처럼” 허무 속에서 뻗어나가는 정신의 춤이다. 시인이

가엾은 당신이여, 그 비좁고 긴 골목을 아직도 맴돌고만 있구나 어떤 문을 두드리지 못해 당신은 땅속을 걷는 발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모든 장소에 서서 한곳을 응시하며 서 있는지 당신은 거기에서 벽을 짚고, 가랑이를 벌린 채 고개 숙이고 있다 전경들이 짬밥을 먹던 그 대학의 무너진 담 밑과 식민지의 간이역,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을 담아주던 세탁소, 길모퉁이의 24시간 편의점 간판의 불빛 아래에서도 당신은 더러운 발자국처럼 그림자로 서 있다
―함성호, 「비좁고 긴 골목」 중에서

에서 치욕스러운 역사의 비좁고 긴 골목을 헤집어 기억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거나, “나는 마지막 괘를 버리고/아직 들리지 않는 먼 옛날의 울림을 만지리라”(「封印」)라고 말하는 것은 생의 도저한 허무 앞에서 그것을 견디는 나름의 방식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시간에 대한 추억의 무게는, “내 곡조는 왜 이렇게 지난한 끼니처럼/자꾸 얹혀서 끄윽끄윽 헛트림만 틀고 있는지/무성한, 정말 무성했던 날이 있었는가?”(「封印」)라는 삶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회한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시간, 덧없이 소진되어가는 생의 허무를 버팅겨준다. 시인은 사라져가는 생, 끊임없이 죽음의 바다로 흘러드는 생 앞에서 추억의 이름으로 그 사라져가는 시간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낸다. 시인은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삶을 봉인하는 죽음의 가락을 연주함으로써 오히려 거기에서 ‘어둠 속의 불’인 삶의 역동적인 어떤 근원에 가 닿으려는 것이다. 이때 죽음이란 죽음이 아닌 삶에 이르는 비좁고 긴 통로에 다름아니다.

함성호의 시가 보여주는 그 죽음의 반대쪽 극단에 이기성의 시가 있다. 이기성의 시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는 삶과 연결된 어떠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비친 모든 풍경들은 죽음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눈에 비친 풍경들 도처에서 우리는 “그가 벗어두고 간 검은 구두가/혼자서 동굴 속을 저벅저벅 걸어다”(「내가 본 것」)니는 소리를, “검푸른 인화지에 말라붙어/한없이 얇아져가는 한 장의 아슬아슬한 생”(「먼 길」)을, “한 발자국씩 녹슨 철로 위를 걸어온/누군가 마지막 한숨인 듯 떨구고 간/구두의 벌어진 입은 다섯 개의 발가락들이/나란히 누웠던 무덤처럼 깊고 아늑해 보이”(「어떤 풍경」)는 풍경을 만난다. 어둡고 메마르고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의 조각난 풍경들로 채워져 있는 이기성의 시에서 죽음은 어떤 추억도 거느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완벽하게 현재형, 혹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언술들 속에 생생한 육체성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건이다. 그 죽음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죽음 속에는 현재와 미래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의 시간은 이기성의 시에서 유일하게 과거형 문장으로 제시되어 있는 “내가 보았던 마지막 빛은 검고 차가운/시멘트 벽에 새겨진 화석의 검푸른 꽃들,/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그것은/심장을 할퀴는 최초의 고통 속에서 활짝 피어났었다”(「내가 본 것」)에서처럼 죽음의 이름으로 현재화된 시간의 비극성을 더욱 강렬하게 돋을새김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시멘트 벽 위에 새겨진 화석처럼 존재하는, 그러나 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과거의 시간은 동굴 속을 질주하는 전동차의 굉음 속에서 “멀고 먼 실업의 나날 혓바닥 위에서 바위처럼/굴러다니던 모욕과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던 고통”과 더불어 한순간에 죽음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리고는 “쪼그라든 방광에 매달린 가느다란 호스로 검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나”(「망각」)가는 긴 망각의 시간이 찾아드는 것이다. 이기성의 시에서 사라져가는 시간 저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은 망각으로 대체되고 삶이란 끊임없이 망각의 시간 속으로 흘러드는 무의미한 현재와 희망 없는 미래를 견디는 일일 뿐인 것이다.

이처럼 추억과 망각 사이에서 죽음과 대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재에 대한 인식은 이 선집에 실린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기차의 레일과 레일 사이, 잡초 몇 가닥이 팽개쳐 있다. 검은 기차들의 날카로운 굉음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잡초들의 머리를 짓뭉개고 간다. 사방은 온통 뜨겁게 들끓는 돌밭이다. 잡초들은 미친 여자처럼 웃고 있다. 간이역 입구엔 시뻘건 칸나 꽃들이 무심하게 피어 있다. 소나기는 내리지 않는다. 바람은 시든 머리칼처럼 허공에서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네모난 유리컵에 담겨진 물고기들처럼 차창에 매달려 있다. 〔……〕 도시는 거대한 인큐베이터처럼, 박제된 물고기들을 품고 있고, 나는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나의 머리를 밟고 지나가는 악몽들에게 나는 무관심해졌고, 무료할 때면 안락사에 대한 논쟁을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한다.
―이경임, 「버려진 삽화들」 중에서

저승길 노잣돈 내고 차들은 계속 하관식을 치른다
허씨에겐 저 위에 높은 빌딩의 묘비가 서 있고
늘 부장품이 굴러들어오는 이 주차장이
세상에서 가장 나중까지 피어 있을 무덤꽃이다
허씨는 한없이 뻗친 주차장 허구렁에 물을 뿌린다
―윤의섭, 「지하 주차장 관리인 허씨 地下經」 중에서

한약 상가
골목길 돌아, 돌아서자, 돌아서자마자
앞발 쳐든 커다란 검은 짐승!
그러나 그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점원은 이 박제된 흑곰 옆에서
약재를 굽거나 썰기만 할 뿐
과세된 일용의 시간을 굽거나 썰기만 할 뿐
흑곰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생을 잃고 야수를 저버리고
검은 가죽 털의 한끝에 매달려 있다
―정남식, 「경동시장」 중에서

이 침 흘리는 기억의 습지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저곳에서 무엇이 나올까
오, 이제 보니 그의 의자는 거의 꽃잎과 가시의 지붕에 떠밀려 한구석에 버림받듯이 파묻혀 있다
저 자리에서 그는 생을 어눌하게 바라보게 하던 정체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독한
색깔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노란 우울의 진액에 닿기 위해 의식의 넝쿨손을 피워올렸단 말인가
―임후성, 「화원의 순간」 중에서

이러한 구절들 외에도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 하얀 재를 한 움큼 쥐어본다”(진은영, 「정육점 여주인」)나, “할머니는 남편 보내고 두 개의 무덤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매만지지 않아 평평한 무덤입니다. 젖이 모두 빠져나간 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할머니 가슴 쓰다듬자 솟아나는 무덤은 쌓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매만져 튀어오르는 욕망의 무덤을 꿈꾼 적도 있지요 무성한 풀들을 키우며 언젠가 아들 하나만이 아니라 무수한 아이들에게 빨리고 싶은 젖이었지요 남편이 아니어도 아이들에게 젖 물리면 탱탱 부풀어오르는 젊음 탕진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요 지금은 할머니 할머니는 젖무덤 두 묘 만들었습니다”(이찬, 「할머니의 젖무덤」)와 같은 구절들에서도 우리는 생의 활기를 파먹어들어가는 메마르고 황폐한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게 된다. 이들의 시에서 죽음, 혹은 죽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끊임없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생생한 삶의 활기와 격정적인 실존의 감각이 가능했던 어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내적 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삶의 실존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시간대로 역류하는 기억의 어두운 소용돌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습지,’ 그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 삶과 죽음, 혹은 현존과 기억이 고통스럽게 길항하는 지점에서 그들은 안락사를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하거나 생을 잃고 야수성을 상실해버린 박제된 흑곰의 검은 털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거나 메마르고 시든 꽃나무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화원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라는 정남식 시의 한 구절처럼 현재의 삶이 “생을 잃고 야수를 저버”린 죽음의 시간이라는 인식은 사실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되풀이되어온 진부하기 짝이 없는 현실 인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가 여전히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한, 아니 우리의 시가 처한 현실이 변함 없이, 아니 더욱더 전망 없는 세계의 늪지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주제의 진부함 그 자체보다는 젊은 시인들이 그들의 시 속에 그 닳고닳은 주제를 새롭게 갱신해내는 시적 표현 능력을 얼마나 내장하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현재의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기억의 지층 속을 배회하는 현재의 서자, 과거의 적자들인 이들 시인에게서 과거란 싱싱한 야수성이 살아 움직이는 추상의 시간이다. 그 야수성이란 물론 현대적 삶을 지배하는 파괴적인 힘으로서의 야수성이 아니라(정남식은 그의 「경동시장」이라는 시에서 정액과 교성과 온갖 탐욕들로 끓어넘치는 그 현대적인 야수성의 한 단면을 잘 그려보인다), 생명이 지닌 본질적인 생의 욕망으로서의 야수성을 말한다. 「경동시장」이라는 시의 첫연을 이루고 있는 앞서의 정남식의 시는 시의 끝연을 이루는 “한약 상가/골목길 돌아, 돌아서자, 돌아서자마자/앞발 쳐든 커다란 검은 짐승, 짐승!/흑곰이다! 그것은 놀랄 일이다/박제된 검은 곰의 으르렁으르렁/짧고도 긴 저 검은 정자는 빛난다!/사물과 사람의 모든 욕망의 굉음을 삼켜버린 듯/야생의 정력 도시에 간판처럼 세워진/저 몸짓과 소리는 신화적인 박제임에 틀림없다”라는 구절과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시에서 박제된 곰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적 삶이 지닌 야수성의 제단에 바쳐진 흔해빠진 제물일 뿐이다. 그 박제된 곰 속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원시적인 야수성의 포효를 듣는다는 것은 이미 낡은 비유이긴 하지만, 이들 시인들이 꿈꾸는 세계의 한 지점을 가리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서정학의 시들은 그 야수성이 상실된 지점들을 훨씬 더 정교하게 언어화하고 있다. 시인의 삶은 모든 것이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는 계획 도시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 계획 도시 속에서는 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이나 꿈조차도 그 계획된 프로그램의 일부일 뿐이다. 「세일러 문―달빛 왕국 (수)(목) 오후 6시 15분」의 세계는 오후 6시 15분 「세일러 문」이라는 만화의 시작과 더불어 사랑의 환상이 시작되는 세계다. “동화 속 마법의 세계로 손짓하는 저 달빛” 속에서 “달빛 왕국을 가로지르는 은빛의 사랑”은 시작되고 그 달빛은 “괜찮아, 지금 이 순간은 꿈”이라고 말한다. “변신! 메이크업도, 무대 의상도 완벽!!”한 세계가 현실을 대체하고 저 “기적의 세일러 문”은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너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몽롱한 환상이 절망적인 현실을 지워버린 세계는 그러나 사육되는 너구리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의 골목길에서 시인은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을 헤맨다”(「고양이, 클라라」).

이 골목에서는 개나 고양이들이 너무 쉽게 없어진다 〔……〕 나는 고양이를 기억한다 그 꼬리와 털의 감촉과 축축한 목소리와 국화의 줄무늬 처량한 표정 날카로운 드라이버들 골목은 조용하다 고양이의 눈동자 잊혀진 이름 너무 조용해서 청록색 털을 봤을 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내 눈동자를 뜯어먹는 고양이들 복수일까 눈동자에서 기억들을 먹는다 나는 고양이와 함께 있다 골목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다 클라라를 잃은 것은 변함이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먹혀버린 세계 고양이만이 남았다
―「고양이, 클라라」 중에서

“먹혀버린”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는 세계 속에서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기억들을 먹”는, 바로 잊혀진 기억을 찾아 헤매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찾아 헤매는 그 고양이의 야수성조차도 이미 계획 도시를 움직이는 정교한 프로그램의 항목들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안다. “너구리란 동물은 이쁘게 생겼지 그래 좋은 곤충이야 만화에서 보지 못했니 〔……〕 너구리란 좋은 거야 맛도 있단다 뜨거운 물을 조금만 먹이면 몸이 알맞게 불지 앞다리는 참 맛있단 말야 〔……〕 너구리는 혓바닥이 길어서 재미있는 말도 잘해 너구리란 괴물은 보석을 탐내지도 않지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 사육비도 얼마 들지 않는다는 말이야 너구리가 꼭 필요해 너구리를 돌려줘”(「3. 3 너구리 헌장」)에서 너구리는 거세된 야수성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사육 프로그램 속에 갇혀버린 삶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이기도 하다.

이 세계가 어떤 보이지 않는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세계라는 인식은 이원이나 김홍중·성기완 등의 시들에서도 엿보인다. 그들의 시에서 그러한 인식은 현대의 첨단 정보화 사회를 움직이는 전자 시스템의 논리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자의식을 동반하기도 한다.

문자 메시지가 왔어 더 이상의 방송 출연은 이제 불법이야 최소한 공중파는 절대로 안 돼 초록의 고무 괴물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어 ‘알겠음’ 詩人의 마음은 계속 유지해도 돼 핸드폰을 쓰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게 문제라는 견해가 담긴 문건을 당국에 제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나는 만류했어
―성기완, 「초록의 고무 괴물―4회」 중에서

자연에서 징발한 물 불 흙 공기로 발전소는 동그라미를
돌린다 돌아돌아 이 무모한 영겁 회귀는 전기를 낳고
기억나지 않는 수레바퀴 너머, 상징의 현기증 너머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누르고 전기가 가는 길은 노란 구릿길
콘센트
그의 호기심 많은 눈동자, 우리의 삶을 엿보는 틈
―김홍중, 「ELECTROCOSMOS」 중에서

적어도 이제 기계들은 삶에 먼저 도착했다
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고 있었다
내게는 314라는 유사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신경외과의 저녁 식단은 무국과 탕수완자 세 알이었고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통하는 복도에서는 피 냄새가 아니라
기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도 그 속도를 따라가야 했다
―이원, 「바코드」 중에서

이들 시에서 문자 메시지, 콘센트, 바코드 등은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 통제 프로그램들이 작동하는 지점들이다. “시인(詩人)의 마음은 계속 유지해도 돼”라는 문자 메시지가 오고 전자 회로를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이 콘센트를 통해 우리의 삶을 엿보며,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야 하는 삶에 대한 인식은 물론 젊은 시인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들에게 이러한 환경 변화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들의 내적 삶의 형식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러한 상황에 대해 대타적인 인식의 거리를 취함으로써 상황과 그것을 바라보는 지점 사이의 경계선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보이는 이원의 시와는 달리, 성기완의 「초록의 고무 괴물」 연작에서는 어지럽게 착종된 시적 언술 속에서 그 경계선이 모호해지거나 아예 지워져버린다. 성기완의 ‘초록의 고무 괴물’은 기계와 인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지점이 아닌 이미 그 분리가 불가능해져버린 지점, 바로 기계―인간의 출현, 혹은 기계와 인간이 하나의 몸 속에 공서(共棲)하는 지점을 가리켜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그것은 죽음과 삶이 공서하는 삶의 또 다른 변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선집에 실린 시들에서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죽음의 얼굴 못지않게 그 죽음에 맞서는, 혹은 죽음을 넘어서는 신생(新生)의 삶에 대한 어떤 간절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봄날은 간다」라는 시에서 김태동은 “묘비에 서서 천천히 번져가는 삶의 잔영이시여 굴을 지나온 사내는 푸른/물굽이에 처박혀 웁니다 그의 마음은 아련한 물꽃의 환영을 먹고 호흡이 가빠요/〔……〕/내 머리에서 나무는 울고 내 가슴뼈를 뜯으며 새는 멀리서 울며 걸어오고/벌레는 햇빛 뜨는 공터에 배를 뒤집고 몸부림을 친다 모두/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두 살고 싶어서 저렇게 구구절절이 울고 있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살고 싶어서 구구절절이 울어대는 울음,’ 어쩌면 그것은 바로 젊은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시적 상상력이 발원하는 가장 근원적인 지점일는지 모른다. 함성호의 시에서처럼 이들에게 죽음, 혹은 죽음을 견디는 삶이란 죽음을 넘어서서 신생의 삶에 가 닿기 위한 일종의 통과 제의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묘비에 서서 천천히 번져가는 삶의 잔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죽음과 맞서는 생명력의 강렬한 진원지로서의 시원(始原)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어째서 어둠은 있는가 어째서/그림자는 서성이는가 가물거리는 전생을 잡고 그대는 건너가는가 죽지 않은/술이 있던가 본디 너는 어디서 왔던가 없는 것이다” 등의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주술성을 강하게 드러내보이는 김태동의 시적 언술 역시 시원성의 세계와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선집에 실린 시들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진정한 삶이 가능했던 시간대로서의 과거란 실재했던 시간이 아닌 추상의 시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지 않은, 아니, 보다 엄밀하게는 다가오지 않을 미래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이다. 결국 그들의 시에서 시원의 세계란 어떤 불가능의 지점을 가리켜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시원성을 상징하는 그 추상의 세계는 지금의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감으로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다.

그때 나는 가벼운 공이었다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고
언제든 터져버릴 수 있는
―연왕모, 「나는 공이었다」 중에서

바닷가 언덕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면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네
초등학교 때 전학간 내 짝꿍 영희네 집도 가고 싶었지만
스와니 강이며 로렐라이 언덕
저편 건너 희망의 나라도 가고 싶었네
―김점용, 「하모니카의 반음」 중에서

승객들에게 노래부르며 구걸하는 눈먼 노인은
머나먼 시절의 전설을 들려주는 음유 시인이다

고향이 그리워 행복했던 추억 잊혀지고
잊혀지고……

노인은 다음 칸으로 건너간다 한 세기를 건너뛴 듯
노래는 점점 아득해진다 노래는
그러나 언젠가는 저 끝에서부터 다시 들려올 것이다
노인은 바구니를 책처럼 들고 고향을 노래할 것이다
―윤의섭, 「지하철 노선 地下經」 중에서

그리고 이곳은, 내 몸이 낳은, 새로운 몸의 거처랍니다
늘 깨어 있는 잠속에서, 그 검은 내부를 수천의 올로 펼쳐 빠져나오는 세계가, 자신의 무덤 같은 자궁 속, 깊은 잠의 껍데기와 심장을, 다각도의 유리공으로 뭉쳐, 늘 보아오던 사물들을, 처음 보는 어떤 것으로 바꿔놓고 있지요
―강정, 「거미 인간의 초대」 중에서

가벼운 공, 스와니 강, 로렐라이 언덕 등의 어휘들이나 지하 세계를 떠돌며 구걸하는 눈먼 음유 시인이 들려주는 머나먼 시절의 전설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현재 젊은 시인들이 처해 있는 비극적 상황의 단면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윤의섭의 시에서 시인은 고향의 상실을 노래하는 자이면서 또한 고향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최후의 인간이기도 하다. 시인의 노래 속에서 고향은 고향 상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추상의 세계이다. 고향이라는, 그 존재하지 않는 추상의 세계가 시인들로 하여금 이 죽음의 현실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이외의 다른 시인들, 이를테면 차창룡·이경임·정남식·진은영 등의 시들에서도 죽음의 현실 이면에서 어떤 신생의 삶을 향한 욕망이 다양한 울림으로 울려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 인용된 시들 가운데 특히 강정의 경우 그 욕망은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어떤 밝고 환한 빛무리를 전신에 내두르고 있다. 강정의 시에서 번져나오는 그 빛무리 속에서 죽음이란 다만 신생의 순간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역동적 에너지에 다름아니다. “어느 날, 수많은 날과 날 사이에 박혀 죽은 또 다른 날, 죽은 별똥 하나 잠든 내 이마를 두드렸습니다”(「거미 인간의 초대」)에서 ‘무덤 속 같은 자궁 속’에 누워 있는 시인에게 찾아든 신생의 기운은 “어떤 분명하지 않은 시원(始原)을 암시하고 있”(「알을 품은 시인」)다. 그 신생의 역동적 에너지는 “성긴 시간의 마디들을 새로이 조이고 묶어, 전혀 다른 시간의 얼개를 펼치”기도 하고, “개천을 싯붉은 용의 등짝으로 달구어버”(「內歷」)리기도 하며, “과거의 상흔을 뚫고/수천 마리 내 육신의 이형(異形)들이 터져나”(「우주 괴물」)오게도 한다. 「알을 품은 시인」에서 고딕체로 표현된 ‘그’는 바로 신생을 부르는, 혹은 신생의 단계로 들어선 존재를 암시한다. “아, 그는 그러나 자꾸만 내 시선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어렴풋한 진공을 보게 만든다 명료하지 않은, 더 깊은 세계의 포말을”에서 신생의 순간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공이라는 어떤 추상의 지점을 향해 있다. ‘명료하지 않은, 그러나 더 깊은’ 그 추상의 세계는 오래 전에 사라진, 그러나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혹은 존재해본 적이 없는, 그러나 계속 존재해온 어떤 역설의 지점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강정에게 그 역설의 지점은 또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알을 품은 시인이란 곧 시를 품은 시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는 여전히 죽음으로 삶을 노래해야 한다는, 아니 죽음으로 죽음을 부정해야 한다는 그 역설의 지점을 배회하고 있다. 신생의 삶은 추상이고 죽음의 삶은 현실인 세계, 그 속에서 시인들은 저물어가는 저녁 해를 보며 시원을 꿈꾼다. 저물어가는 시의 운명을 바라보며, 그러나 가장 시원의 문학 양식인 저 시의 죽음을 끝없이 죽음 이후의 삶으로 밀고 나가며.

목차

기획의 말

정남식
경동시장 / 조산부인과 / 독지리, 서해 갯벌 / 바다

박인택
아파트 / 권투 선수 최천두씨 / 불청객을 위하여 / 소낙비

차창룡
禪雲山 禪雲寺 / 내소사, 선운사, 동불암 똘감 / 부서지는 책들 너머에서 / 목탁 17

이윤학
양배추 수확 / 혓바늘 / 길 2 / 늙은 참나무 앞에 서서

함성호
비좁고 긴 골목 / 聖者는 맛있다 / 封印 / 모미

박형준
초생달 / 나무의 눈 / 유곽의 한 계절 / 사막에

김태동
봄날은 간다 / 헛간 도살장에서 / 개나리 천국 / 풍광에 누워

강정
內歷 / 거미 인간의 초대 / 알을 품은 시인 / 우주 괴물

이원
콘센트에 관한 명상 / 바코드 / 서부극, 냉장고, 플러그 / 사이보그 1

김소연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 백년해로 / 너의 눈 / 온도

연왕모
나는 공이었다 / 탈색 / 낯익은 그림 / 파도

윤의섭
돌 속의 하루 / 물의 默示 / 지하 주차장 관리인 허씨 地下經 / 지하철 노선 地下經

성기완
초록의 고무 괴물―첫 회 / 초록의 고무 괴물―2회 / 초록의 고무 괴물―3회 / 초록의 고무 괴물―4회

임후성
화원의 순간 / 심해의 순간 / 먼빛으로, 약속 장소 / 빛나는 눈길

서정학
맨해튼 計劃 / 고양이, 클라라 / 3. 3 너구리 헌장 / 세일러 문

이철성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 꽃잎 / 이러한 시 / 눈

이경임
어떤 살풀이 / 호수에 무늬를 만드는 소금쟁이 / 버려진 삽화들 / 교감

김점용
자살의 형식―꿈 읽기 31 / 손―꿈 읽기 12 / 하모니카의 반음―꿈 읽기 /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찬
할머니와 포르노 / 할머니와 냉장고 / 할머니와 기둥시계 / 할머니의 젖무덤

배신호
풍경, 삶 / 잊혀지지 않는 寓話 / ready made의 생 / 21c, 어디서 어디로?

우종녀
그 무엇이 너를…… / 절망의 시쓰기 1 / 절망의 시쓰기 2 / 흔들리는 존재

이기성
내가 본 것 / 먼 길 / 망각 / 어떤 풍경

김중
ELECTROCOSMOS / 西遊記 / 옥상에 올라가 먼 곳을 보세요

진은영
카프카의 연인 / 야간 노동자 / 정육점 여주인 / 귀가

[해설] 죽음으로 죽음을 부정하는 역설의 미학·박혜경

작가 소개

이윤학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그림자를 마신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나를 울렸다』 외에도, 장편동화 『왕따』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 『나 엄마 딸 맞아?』, 산문집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 등 다양한 책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을 수상했다.

정남식

정남식은 1963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학과사회>> 봄호를 통해 시단에 등장했으며 시집으로 <<시집>>이 있다.

김태동

김태동은 1965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문학과사회>> 가을호를 통해 시단에 등장했으며, 시집으로 <<청춘>>이 있다. 문화무크지 <<이다>>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태동"의 다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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