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 평전

원제 評傳 金史良

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5월 30일 | ISBN 9788932011646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74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개요]
이 책은 재일 교포인 저자가 한국과 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으고 검증하여 복원해낸 불행한 천재 작가 김사량의 일대기이다. 비록 일본어로 씌어진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파묻히고 만 귀중한 작가를 다시 소생시킨다는 의미에서 소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어판 서문]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일본 도쿄에 있는 암파서점에서 당시 월간으로 간행된 잡지 『문학』 편집부가 1970년 11월호에서 ‘조선 문학 특집’을 기획한 것을 계기로 다음해 1971년 8월호까지 10개월 동안 연재한 『김사량(金史良)―그 저항의 생애』를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학』지의 연재를 마친 뒤 그것을 집약해서 1972년 정월에 같은 표제로 된 한 권을 암파신서로 상자하였다. 이 신서판은 그 후 서울에서 한국말로 번역되어 책자로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그 책자를 읽었다는 어떤 독자로부터 들은 일이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근 서른 해가 지난 오늘까지 번역한 분으로부터의 연락은커녕 출판된 책자도 보지 못하고 있다.

신서판으로 출판될 원고의 교정 작업을 끝내고 며칠 안 되는 1971년 12월 27일 밤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았다. 그런데 그날 김포공항 항공기 트랩에서 내려 입국 심사대가 있는 청사까지 지상을 걸어가면서 바라본, 전깃불이 거의 안 켜져 있어서 어두컴컴한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그마한 청사 건물의 마냥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김사량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군국주의 나라 일본이 패전해서 몇 해 안 된 1947년경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도쿄에서 민족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결과 그 동안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식민지 통치를 받아 수난을 겪어온 우리 민족이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모국을 찾아 귀국하는 날에 대비하여 한글과 모국 말, 그리고 민족의 역사와 지리 등을 배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도쿄에는 일본이 패전할 무렵에 중학교나 여학교에 다녔던 재일 교포 자녀들만을 대상으로 한 학교가 한 군데 있었다. 이름은 중학교였지만 전쟁에 못 이긴 대일본 제국 육군이 쓰던 조병창, 즉 병기 제조 공장의 창고들을 빌려서 개설한 강습소라고 하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귀국하는 날에 대비해서 교포들이 여럿 사는 지역들에는 일본 국민학교의 일부 교실들을 빌려서 민족적 교양을 갖게 하기 위한 강습소들이 생겼으나 국토가 남북으로 쪼개지고 광복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귀국할 날은 자꾸 멀어지기만 하기 때문에 중학생이나 여학생들을 따로 모아 교육하게 된 것이다. 그 학교 선생들 가운데 고향이 평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역사를 전공했으며 우리들의 역사 과목을 담당한 임광철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이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역시 평양 출신이며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이 된 소설을 쓴 김사량이라는 작가가 있었다며 「곱단네」를 비롯한 이 작가의 몇몇 소설들을 소개해준 것이다. 그 소설들의 내용은 금방 잊어버렸지만 「곱단네」라는 소설의 제목이자 여성의 이름만은 어쩐지 작가의 이름과 함께 두고두고 머리에 남았었다. 아마 일본적인 냄새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이름이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김사량이라는 이름을 알았을 그 시기에, 훗날에 안 일이지만 그는 중국·태항산에 있었다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이 동맹의 소속 단체였던 조선의용군에 참가한 종군 작가로서 귀국하여, 태항산 시대에 창작했다는 희곡 『호접』을 무대에 상연하기 위하여 평양과 서울 사이를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호가장의 전투’라는 부제목을 가진 이 희곡이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 1995)의 저자이자 지금은 중국 연변시에 살고 있는 교포 작가 김학철씨와 그의 동지들의 항일 투쟁의 현장을 그려낸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임광철 선생으로서는 그런 고향 친구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여 느닷없이 수업 시간에 우리들에게 작가 김사량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내가 김사량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후에도 여러 해 지난 1954년에 재일 교포 작가 김달수 편으로 『김사량 작품집』(이론사)이 도쿄에서 출판된 이후의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빛 속으로」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으로 뽑혔다거나 작품의 완성도가 어떻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된 후카가와나 긴시초, 오시아게 등 당시의 혼조쿠, 지금의 고토쿠에서 스미다쿠의 일부에 걸친 지역은 바로 내가 태어난, 말하자면 고향땅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엔 이주 조선인이라고 불리던 재일 한국인 사회의 구성원이었던 우리 부모님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어느 가정에서나 그랬듯이 품팔이로 생활을 이어나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그 품팔이 일로 이주 교포네 집들을 빈번히 찾아다니시는 어머님을 따라 나들이를 시작한 게 바로 나의 교포 사회 탐방의 첫걸음이었다. 말을 바꾸면 김사량의 「빛 속으로」의 세계는 바로 어린 내가 엄마를 따라다닌 길과 중첩되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 생활, 그리고 분위기들은 나의 어린 날의 기억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름대로 김사량이라는 작가의 실상을 추구하려고 마음먹은 동기는 물론 이것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것도 동기의 하나이기는 하였으나 그에 못지 않게 식민지 통치하라는 진퇴양난의 극한 상황에서 목숨을 지탱한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참된 삶의 한 모습을 그의 생애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서는 이미 암파신서판을 상자할 때 서장에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실은 바가 있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 작가들 앞에 펼쳐져 있었던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김달수가 소설 『현해탄』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그들에게는 세 갈래 길이 주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눈을 감고 절망에 빠져버릴 것이냐, 굽신거리며 타협하고 ‘항복하고 배반’할 것이냐, 이 세 가지가 그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항·대결하였다든가 자기가 처한 운명에 절망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굽신거리며 타협하고 ‘항복하고 배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세 갈래 길’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현실 상황은 실로 혹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때로 절망 속에서 투지의 불씨를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혹은 좌절하고 굴복하였으며, 그리고 또다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무수한 굴절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인용에 보이는 ‘작가’라는 말을 ‘지식인’으로 바꾸면 충분할 것이지만, “무수한 굴절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조선 지식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전형적 삶의 하나를 김사량에게서 찾아낸 것이 이 책을 쓰려고 마음먹은 동기이기도 하였다.

『문학』지의 연재를 마치고 신서판을 출판한 뒤에도 나와 김사량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김사량 전집』(전4권)을 하출서방신사에서 출판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은 것도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잠긴 김포 공항에서 택시에 몸을 싣고 서울 시내로 들어가 조선 호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나서 늦은 저녁 요기를 하려고 명동 거리로 나갔는데 시내가 어두컴컴하기는 김포 공항이나 크게 다름이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난생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은 것은 『김사량 전집』에 수록하기 위하여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든 작품들을 국립도서관 등에서 찾아내어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업은 큰 어려움 없이 해결되어 한국말로 쓴 장편 소설 『낙조』와 『바다에의 노래』, 일본말로 쓰인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적잖은 자료를 새롭게 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문예 분야에 가지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겼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예평론가 임종국씨의 도움이 컸다.

그 후 『김사량 전집』은 1973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예정대로 하출서방신사에서 출판되었는데 내가 서울을 찾아간 것은 실은 일본에서 찾을 수 없었던 작품들을 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김사량을 잘 알고 지낸 분들, 따라서 평양으로부터 월남한, 지연이 있는 분들, 또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선후배들, 아니면 혈연 관계가 있는 분들과 만나서 식민지 시대의 김사량에 관하여 의견들을 나누고 확인할 문제는 확인했으면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극작가 오정민씨가 김사량을 잘 안다고 귀띔해준 분이 있었고 김사량의 글에도 등장하는 누이동생 김오덕도 서울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오정민씨는 만나기를 꺼리는 눈치였고, 김오덕은 거처를 알 수 없어서 못 만나고 말았다. 군사 정권 시절의 일이다. 이분들과 만나기를 바란 내가 너무도 철부지였던 것이다.

광복 이후 1950년 초까지의 김사량의 동향에 관해서는 도쿄에서 『김사량 전집』이 나온 후였든지 아니면 암파신서판이 나온 후였든지, 당시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사량의 조카 김정섭 박사와 중학교 시절에 평양에서 동급생이었다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거주하고 있던 김일식이라는 독자로부터의 편지가 단편적이기는 하나 전해진 일이 있었다. 그는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김사량은 과연 공산주의자였을까. 나는 광복 전후 시기를 통하여 그로부터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자, 혹은 소련을 찬양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리어 반동 분자로 지목될 행동을 곧잘 취했었다. 〔……〕

만약에 김사량이 전쟁 중에 죽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북한에서는 상류층·중류층 출신의 지식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로동당의 장안파와 연안파까지도 숙청당하는 판이다. 김사량도 그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광복 후 한국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학자나 예술가들이 월북했었다. 또한 일본에 살던 동포들도 상당수가 귀국했다는 말을 엿들었다. 그들과 또다시 만나거나 소식을 듣거나 하는 일은 어쩐지 거의 없다. 설령 김사량이 지금 살아 있다손 치더라도 그만이 예외일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란 어쨌든 1950년 이전에 끝났었다는 얘기다.

이상이 내가 어릴 적에 사실로서 보고 듣고 한 일이다.

김일식이라는 독자가 편지를 통하여 알려준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부인할 만한 근거를 유감스럽게도 나는 구하지 못했다. 아니 그와는 반대로 김일식씨가 어릴 때 보고 듣고 한 일들을 사실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간접적인 근거까지 한둘 발견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항일 독립군의 ‘최후의 분대장’인 김학철 선생이 또다시 중국땅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이 그것이다. 호가장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의 총탄을 맞아 포로가 된 김학철 선생은 일본에서도 규슈 지방인 나가사키 현 이사하야시에 있었던 형무소에서 몇 해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의 날을 맞이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서울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가서 활약하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평양을 탈출하여 다시금 중국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지극히 분명하다. 김일성 직계의 항일 부대가 아닌 연안에 있었던 독립군계, 곧 연안파였다는 게 숙청 대상이 된 근거였다. 그것도 6·25전쟁 이전에 벌써 항일 독립 운동을 해온 투사 대열 내부에 김학철 선생이 생명에 위험을 느껴서 또다시 망명을 결심할 만큼 심각한 대립과 암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몇 해 전 김학철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런 논리에 비추어본다면 김학철 선생과도 친근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연안으로부터 귀국한 김사량의 경우도 어엿한 연안파의 일원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간접적인 근거는 일본 작가 오다 마코토 씨의 증언이다. 소련의 작가 동맹이 물주가 되어 세계적인 범위로 조직망이 형성되었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작가회의의 일본 조직을 오랫동안 대표한 한 사람이었던 오다 씨는 여러 번 평양과 도쿄 사이를 다녔으며 한때는 일본에서 김일성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까지 한 일이 있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김일성과 만난 결과 아들인 김정일에게 권력을 승계시킬 문제에 대하여 김일성이 지극히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더라는 소식을 마이니치 신문 지상을 통해 발표하여 화제가 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오다 씨가 평양에 머물고 있을 동안에 한번은 작가 동맹 관계자에게 김사량의 유가족과 만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줄 것과 책자로 되어 있는 김사량의 작품들을 보게 해줄 것 등을 요청했더니 그런 소설가는 없다며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는 글을 귀국 후에 어떤 잡지에서 읽은 일이 있다.

평양에서 작가로서의 김사량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1987년경이다. 문예출판사에서 『김사량 작품집』이 출판된 것이다. 그리고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판된 『문예 상식』이라는 표제의 흡사 문학 예술 사전 비슷한 주간지만한 크기의 700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의 ‘해방(광복) 후 문학 예술’을 소개한 ‘창작가와 작품’ 난에도 김사량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게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김사량은 1987년에야 비로소 작가로서 명예 회복이 되었을까. 아니 그 동안 그가 크게 명예를 손상당하고 그의 작품이 푸대접을 받아왔다는 추측은 맞는 말인가. 앞에서 언급한 ‘창작가와 작품’ 난은 그 경위를 1954년 5월 어느날 김일성이 “김사량의 가족들에게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었으며 그 후에 김정일 역시 “……혁명적인 작가였다고 높이 평가하시고 그의 정치적 생명이 영원히 빛나도록 크나큰 믿음과 배려를 돌려” “1987년에 문예출판사에서 『김사량 작품집』을 다시 출판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출판하였다’는 것은 과거에도 출판된 일이 있다는 뜻이며 그 후에 사정이 생겨 끊어졌다는 말이다. 끊어진 것은 김일성이 김사량의 유가족에게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었다는 1954년 5월의 어느 날 이후의 일일 것이다. 김두봉이나 최창익을 비롯한 소위 연안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되는 것이 그로부터 몇 해 후에 있은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가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연안파는 공공연히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혁명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사량에게 “정치적 생명이 영원히 빛나도록 크나큰 믿음과 배려를 돌려주”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한번은 박탈당한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겠지만 김사량에 대한 명예 회복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이 책의 원본이 되는 글이 잡지에 연재되어 점차 화제가 되고 『김사량 전집』이 나오고 한 데 자극을 받은 게 틀림이 없으리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아전인수도 아니며 자화자찬도 아니다. 1987년에 재판된 작품집에 수록된 작가에 대한 해설이 그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이북의 사회 체제 속에만 있는 사회 성분, 곧 김사량의 출신 성분과 같은 부분은 이북의 현실에 맞추어서 그럴싸하게 윤색하고 있으나 그 밖의 대부분은 암파신서판을 거의 그대로 한국말로 옮긴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북에서는 일본의 여러 방면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적지 않은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김사량의 출세작인 「빛 속으로」와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짐작하게 해줄 것이다.

“이 소설의 발표를 계기로 김사량은 작가로서 재능을 가진 존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70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명작집』 3권과 『일본현대문학전집』 제69권에 이 소설이 실렸는바 이것은 이 소설의 가치에 대한 응당한 평가로 된다.”(‘창작가와 작품’)

이 글에서 말하는 『명작집』 3권이란 추오코론샤에서 간행된 『일본의 문학·명작집 3』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일본현대문학전집』에 대해서는 미처 확인을 못하고 있다.

명예회복설의 또 하나의 근거는 김사량이 이미 40여 년 전에 고인이 되었으며 이북에서는 6·25전쟁 때 인민군에 종군하여 전사했다는 게 공식 견해(‘창작가와 작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 ‘혁명적인 작가’로 고인의 명예를 회복해주는 선심을 쓴들 밑지는 무엇이 있겠는가.

끝으로, 주로 평양에서 작가 생활을 한 김사량이 어떤 작품들을 남겼는가를 살펴 작가 연보를 보충하기로 하겠다. 여태까지 이 점이 가장 분명치 않아 애를 먹었으니까. 창작 연대와 게재된 잡지나 신문들의 이름까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앞에서 보아온 ‘창작가와 작품’은 아래와 같은 작품 이름들을 소개하고 있다.

수필: 「소년 고수」, 『노동신문』, 1940년 8월 15일
희곡: 「뢰성」(4막 6장), 1946년 8월, 「지열」
시극: 「무쇠의 군악」
단편소설: 「차돌이의 기차」 「마식령」 「칠현금」 「남에서 온 편지」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종군기: 「서울서 수원으로」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 「지리산 유격 지대를 가다」 「낙동강반의 전호 속에서」 「바다가 보인다」

일본말로 씌어 있는 이 책의 원문은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문장이 결코 아니다. 특히 인용한 글들은 반세기를 훨씬 넘은 것들이라 오늘의 한국말로 옮기려면 무척 애를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 까다롭고 귀찮은 일을 훌륭히 감당해주신 심원섭씨의 노고를 치하하며 깊은 사의를 표한다.

특히 오랜 경험으로 외국말로 된 글을 제대로 번역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평론가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기회를 얻어 꼭 이 책에 대한 평을 들어야 김사량과의 인연도 끊을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 5월, 안우식

[발문]

이 책은 십수 년 전 잡지 『문학(文學)』(1970년 11월∼1971년 8월)이 기획한 ‘조선문학 특집’에 10회에 걸쳐 연재한 『김사량―그 저항의 생애』를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문학』 연재를 마친 후, 그것을 묶어서 1972년 1월 동명의 책을 암파신서(岩波新書)로 출간했다. 당시까지 수집 가능했던 새로운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사실 차원의 문제에 정확성을 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초풍관(草風館)에서 간행된 이번 책은, 말하자면 신서판(新書版)의 모형(母型)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신서라는 판형에 수반되는 지면상의 제약을 고려에 넣는다고 할 때, 보다 정확한 김사량 상(像)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신서와 이 모형을 함께 참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학』에 연재한 것을 한 권으로 모은 이유 중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김사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내가 아직 중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당시는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는 준비의 일환으로, 일본 각지에 조선인의 손으로 ‘민족학교’가 설립되었다. 자제들에게 모국어와 역사 등 이른바 민족적 교양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민족학교’에서, 평양 출신의 역사 교사가, 그에게는 아마도 동향 선배쯤에 해당할 김사량과 그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들은 김사량의 작품 중의 하나였던 「곱단네」, 이 어휘의 즐거운 울림이 나의 귓전을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았다.

김사량의 작품을 실제로 읽을 수 있었던 때는, 1954년 김달수(金達壽) 편 『김사량 작품집』(理論社)이 출판된 뒤였다. 이것을 읽고 난 뒤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이라는 「빛 속으로」에 우선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에 뽑혔다든가, 작품의 완성도가 다른 작품보다 높다든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된 후카가와(深川), 긴시초(錦系町), 오시아게(押上) 등 당시의 혼조쿠(本所區), 현재의 고토쿠(江東區)로부터 스미다쿠(墨田區) 일부에 이르는 지역은, 말하자면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의 료고쿠 고교(兩國高校), 당시의 후리쓰(府立) 제3중학교로부터 몇 분 정도 걸리는 데에 내가 ‘태어난 곳’이 있었는데, 당시 이주 조선인이라 불리고 있었던 조선인 거리의 말단에 자리잡고 있었던 나의 집에서도, 이 일대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 가정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부족해서 어머니가 메리야스 제품 마무리 등 가내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 덕분에 어린 나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메리야스 도매상 등 많은 이주 조선인 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꿔 말한다면, 「빛 속으로」의 세계는 어린 시절 내가 걸어온 길과 겹치는 것이었으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분위기는, 나의 어린날의 기억 그것이기도 했다.

내가 나름대로 김사량 상(像)에 다가가려고 생각한 이유는, 그러나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 쓴 것들이 그 동기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에 못지 않게 식민지 치하라는 더 어찌해볼 길 없는 극한 상황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조선 지식인의 모습 하나를, 그의 생애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암파신서에서 나온 책의 서장에 써둔 게 있으므로, 여기에 재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싶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 작가들 앞에 펼쳐져 있었던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김달수가 소설 『현해탄(玄海灘)』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그들에게는 세 갈래 길이 주어져 있었다.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눈을 감고 절망에 빠져버릴 것이냐, 굽신거리며 타협하고 ‘항복하고 배반’할 것이냐, 이 세 가지가 그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항·대결하였다든가 자기가 처한 운명에 절망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굽신거리며 타협하고 ‘항복하고 배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세 갈래 길’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현실 상황은 실로 혹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때로 절망 속에서 투지의 불씨를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혹은 좌절하고 굴복하였으며, 그리고 또다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무수한 굴절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이는 ‘작가’를 지식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무수한 굴절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조선 지식인의, 식민지 통치하의 삶의 모습의 전형 하나를 김사량에게서 찾아보는 것이 이 책의 동기이기도 했다.

잡지 『문학』 연재 이후 암파신서에서 책을 낸 뒤에도, 나와 김사량의 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김사량 전집』(河出書房新社)을 출판하는 작업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편 소설인 『낙조』 『태백산맥』 『바다에의 노래』 등 적지 않은 양의 새 자료들을 입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생전의 김사량과 교분이 있었던 이들로부터 귀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비서를 오랫동안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동화(李東華) 옹으로부터 들은 에피소드도 그 중의 하나다. 이 옹은 해방 직후 어느 시기, 고향인 평양에서 신문 발행 일을 보았던 적이 있다. 또 취리히에서 살고 있는 김일식(金一植)씨가 보내온 「김사량의 추억」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새로 수집한 자료들을 첨가하여 보다 충실한 내용의 책을 내고 싶었으나, 현재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최근 북경에서 살고 있는 지인 역시도 김사량을 아는 이가 중국에도 적지 않다고 전해온 바 있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도 새 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다가, 지금까지 입수한 자료들도 이 책의 세부 내용들을 사실적 측면에서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자료들을 밑바탕으로 해서 추가·개정의 기회가 있을 것을 기약하면서 『문학』 연재분을 한 책으로 묶기로 하였다. 이 책을 묶으면서 연재물이라는 조건 때문에 중복될 수밖에 없었던 내용 등을 수정·삭제한 점, 일부 문장 표현을 고친 점 등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저자

[옮긴이 후기]

세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재일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소재가 있다. 불행한 가족 관계, 그리고 이와 맞물려 있는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확인과 관련된 문제가 그것이다. 이것은 민족 교육 방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총련계 작가들의 경우도 절대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가족 관계는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버지와 가족간의 갈등 문제로 집약되는 경우가 많다. 이 아버지들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건너오게 된 이들로서 상처투성이의 삶의 이력을 갖고 있으며 현재에도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역사 속에서 받은 상처를 가정내에서 해소하려고 시도한다. 이 소설들 속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상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아버지들 밑에서 자라는 2세와 3세 아이들 역시 온전한 삶이 기대될 수 없다. 만성적 공포와 우울, 그리고 억압된 증오 속에서 일그러진 청년으로 성장해간다. 그리고 이 불행한 이들이 집 밖에 나서면 이번에는 국민적 규모의 불안에 기초한 배타 의식, 즉 차별이 기다린다. 숨을 쉬며 살아가는 공기 자체가 불안과 우울로 가득 찬 재일 한국인들의 이러한 존재 의식의 핵심을 어느 평론가는 ‘불우’라는 용어로 규정하였지만, 내게는 이 용어만으로 이들의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신음 소리를 대변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왜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올렸느냐 하면, 평양의 대부르주아 가계 출신으로서 혈기방장하고 극적인 생애를 보낸 이이며, 암흑기의 한국 지성사를 구원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신화적 작가’ 김사량이 바로 이런 이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포착했던 작가이기 때문이다. 「빛 속으로」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소설은 야학 교사인 남(南)선생과, 한국인과 일본인 혼혈 가정에서 태어나 일그러진 인간형으로 자라나고 있는 야마다 하루오라는 소년 사이의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물론 작품은 남선생이 야마다 하루오의 상처를 끌어안는 데 성공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는, 이 작품 속의 남선생이 하루오에게 일방적으로 애정을 주면서 성공을 거두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두려워하는 남선생은 남선생대로, 하루오는 하루오대로 각자의 상처를 확인하면서, 즉 ‘불우’한 자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데 성공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 의식과 그 심리적 갈등상에 대한 묘사는, 현대의 어느 재일 한국인 작가들 못지 않게 생생하고 예리하다. 그리하여 작품의 결말은 이 불행한 이들의 마음에 피어난 희미한 봄과 그 주변을 채우고 있는 압도적인 폭력성을 선명하게 대조시키면서 결말을 열어놓고 있다.

재일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문제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한·일 양국의 문제를 떠나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부상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의 창작 배경과 관련하여 김사량 자신은 묘한 흥분과 함께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말만 남겼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이 작품은 계급과 사회 구조와 인간 심리의 저 깊은 곳을 저도 모르게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실상 하나를 꽃피워낸, 마치 기적과도 같은 작품으로 생각된다. 「빛 속으로」라는 작품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했던 것 같다.

그는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아무래도 신화적 차원에 존재하기 쉬운 김사량을 역자가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작품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 스며 있는 작가의 존재 속에서는, 집단적 고통을 개인적 고통의 차원으로 깊이 각인하면서 살고 있는 선택된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의 현재적 삶의 기반에 안주하며 살 수 없는 열린 영혼의 힘, 혹은 세상의 슬픔을 향해 뻗어나가는 커다란 슬픔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사량이 특히 재일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의 극적인 생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에너지의 원형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재일’ 즉 ‘불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가시밭길을 직접 몸으로 걸으면서 그 극복의 길을 행동으로 문필로 타개해오신 분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저자가 김사량 연구와 전집 출간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데에는, 무엇보다도 저자 개인을 비롯한 ‘재일’인 모두의 상처와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이 그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식민지 시대의 상흔을 여전히 여러 방면에서 재생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본국’인 역시도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 책이, 김사량이 갖고 있는 온갖 모순된 면모들과 갈등들을 스스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해가는 기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김사량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이 이상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역자의 미숙한 번역 실력과 불성실함이 어디에나 배어 있을 것이나, 그래도 이 책이 한국에서의 김사량 연구에 조그만 기여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번역 작업과 관련하여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번역을 허락해주셨으며 인명과 지명을 포함한 많은 부분들에 대한 질의에 조언을 주신 저자 안우식 선생님, 와세다 대학의 호테이 토시히로 선생님,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선생님, 채호기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2000년 5월, 심원섭

목차

[차례]

한국어판 서문
일러두기

제1장 그 저항의 생애
제2장 도일(渡日), 일그러진 청춘
제3장 민족주의 작가의 탄생
제4장 「빛 속으로」에서 「곱사왕초」까지
제5장 『태백산맥』에서 좌절의 세계로
제6장 좌절과 모색의 나날들
제7장 탈출, 귀국 그리고 죽음

김사량 연보
발문
옮긴이 후기

작가 소개

김준오

1937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한국 근대 문학의 장르론에 대한 연구」로 계명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부산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1999년에 작고하였다. 저서로 『시론』 『가면의 해석학』 『한국 현대 장르 비평론』 『도시시와 해체시』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신동엽』 『문학사와 장르』, 공저로 『한국 문학 연구 입문』 『한국 현대 시사 연구』 『한국 현대시 연구』 『중국 조선족 문학의 전통과 변혁』, 역서로 『장르론』, 편서로 『김영랑』 등이 있다. 부산시 문화상·대한민국 문학상 평론 부문 우수상·제2회 시와시학상 평론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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