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이윤학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3월 25일 | ISBN 9788932011486

사양 신46판 176x248mm · 126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개요]
이 시집에는 평범한 사물에서 존재의 비의를 발굴해내는 시인의 날카로운 눈이 들어 있다. 시인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하나로 용접시키면서 존재의 밑바닥을 들춰보이는 놀라움과 신선함의 이미지를 펼쳐보인다. 이는 곧 독자를 존재의 표면에서 존재의 심층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키는 시의 힘이며 이미지의 깊이다. 이미지의 깊이는 결국 사물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데, 사물의 깊이에 가 닿는 시인의 예리한 의식에 의해 이 시집의 시들은 또한 의미의 깊이를 획득하여 밀도가 높은 보석처럼 단단하게 반짝거린다.

[시인의 산문]
몸을 살찌우는 데 바쳐진
기린의 머리여,
장대의 정신이여
영원한 몸의 볼모여

너는 양껏 목덜미를 늘여
끊임없이 떠나가고 있는가

잎줄기를 탐하는 입이,
끝까지 벌어져 머리를
열고 닫을 수는 없다

누가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길 원하겠는가

[시인의 말]
거의 다 잃어버렸던 것들을 불러다 엮는다.

이제 당신을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영원한
제 짝사랑의 상대입니다.

2000년 봄, 이윤학

[발문]
견딤의 미학 박형준

1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무덤에서 혼자 놀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무덤은 자신과 닮아 있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소년은 집에 있는 것도, 아이들과 노는 것도 싫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말이란 생활에서 배운다. 아기들이 한 단어 한 단어 발음할 때마다 부모는 경이감마저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더듬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소년이 처음부터 말을 더듬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 거미줄, 문제는 그것이다. 소년은 절규한다. 왜냐하면 그 거미줄은 양쪽을 붙들고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것이 싫다. 소년은 돌멩이를 쥔다. 그리고 힘껏 그 사이의 중심을 향해 던진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나무와 나무는 각기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그래야만 그 사이에 쳐진 거미줄과, 그것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소년의 행동이 포함한 의문을 풀 수 있다. 소년은 왜 이 풍경을 보고 고통에 빠진 걸까. 우리는 모두 이 소년이 시를 쓰는 소년임을 알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들 관념 속에 폐허와 절규, 고통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찬 기도문으로 인식돼 있다. 이 소년은 자신의 시에 대해 한 산문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나를 잊기 위해 글을 쓰지만, 글을 쓰고 난 다음엔 언제나 절망하고 만다. 어떤 대상을 골랐든, 어떤 의미를 생각했든, 그곳엔 나를 닮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지우려고 애썼건만 결국엔 나를 그릴 수밖에 없음에 번번이 주저앉고 만다.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

소년은 바라보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 바라보고 지켜볼 뿐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면, 자신과 닮아 있는 것뿐이다. 생각해보라. 자신과 다른 것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관찰’하는 소년을! 그래서 소년은 풍경을 빨아먹을 듯이 바라본다. 그러함에도 이 처절하리만치 지독한 응시가 자신의 내면에 비친 풍경을 인화해낸 것임은 가령 다음과 같은 시에 잘 드러난다.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화려한 유적」 전문,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이 시는 무당벌레의 무늬가 날개라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무늬는 곧 꿈이요, 희망이다. 무당벌레는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게끔 하는 열망을 등뒤에 쌓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무당벌레는 등뒤의 꿈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꿈의 무늬가 커질수록 꿈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식도 강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강렬한 부정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그 꿈과 희망은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무당벌레는 꿈의 확장과 그 꿈에 대한 부정 의식이 극점에 도달한 순간 뒤집히고 만다. 그 갈등의 폭발이 죽음이라는 인식이 이 시의 마지막 3행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년은 대체 무엇 때문에 무당벌레를 보며 꿈의 덫에 걸려 발버둥치는 고통스런 풍경을 보는 걸까. 아무에게나 쉽게 보이지 않는 무당벌레의 화려한 꿈을 발견해내는 소년의 놀라운 관찰력이 죽음의 인식으로 향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삶의 고통을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으로 인식하며, 거기서 하늘로 향해 오르는 “날개”를 발견해내는 소년이 끝내 삶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소년은 삶을 강렬히 열망하면서 또한 그 삶을 강렬히 부정한다. 그 사이에서 소년의 시는 씌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무덤에서 혼자 놀았다. 무덤 역시 혼자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소년과 무덤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노는 기쁨이었다. 혼자 놀던 소년은 어느새 무언가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덤에는 수많은 것들이 기어다녔다. 개미, 무당벌레 등 곤충들이었다. 소년은 그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무엇에 괴로워하는가 알게 되었다. 그런 소년의 등뒤로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소년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은 무덤 곁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오히려 그곳은 음침한 관 속이었다. 소년은 언젠가 내게 “영혼이 자기의 의지가 있다면, 몸 속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인 것처럼 나에게 집은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고향의 집뿐 아니라 그가 성장해서 머물게 된 도회지의 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관 속이야. 이사 가야지, 이민 가야지. 하지만 견딜 수밖에 없다.” 소년은 고향에서 집을 거부하면서 집을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어디서 살든 쉽게 집을 떠나지 못했다. 소년은 내게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이라는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며 견뎌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이 속해야 할 공간을 키워나가면서 결코 그 공간에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부정 의식 또한 강렬히 키워가는 이 소년. 나는 그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미줄처럼 매달린 소년의 내면 풍경을 서투르게나마 안내하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삼는다.

언덕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
저수지가 있었다.
내 영혼은 검은
산속에 숨어 잠겨 있었다. 길은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오지 않는다.
―「송덕리, 노을」 부분,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지금 소년이 서 있는 언덕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저수지”가 있다. 소년의 영혼은 그 저수지에 숨어 있다. ‘청동거울’의 이미지는 분명 밝고 순수하며 희망찬 것이다. 그러니 그 속에 잠겨 있는 소년의 영혼은 늘 ‘청동거울’을 반질반질하게 빛내는 숨결의 동력이다. 하지만 “영혼은 검은”이라는 시행에서 보이듯, 우선 소년의 영혼은 검다. 그리고 동시에 소년의 영혼은 “검은/산속에” 있다. 즉 이 시행은 양쪽에 걸려 있다. 이 연만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 내가 서 있는 언덕(삶)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2. 그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 저수지가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그곳이다.
3. 내 영혼은 분명 그 저수지에 담겨 있(었)다.
4. 그런데 그 영혼마저 불행하다. 내 영혼은 검은 산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영혼은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있어야 한다.
5.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길은 저수지가 있는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나도 그 길처럼 언덕 너머로 사라져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 검은 산속에 잠겨 있는, 내 검은 영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6. 그러나 나는 이곳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길마저 거기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내 영혼은 오지 않는 나(현실의 나)를 기다리다 검어졌는지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견뎌야 한다. 내 영혼이 숨어 있는 저수지는 ‘청동거울’처럼 빛나지 않는가.

소년은 현실 속에 이상이 있다고 믿는 의식이 강한 것처럼 이상 속에도 현실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그 양자 사이에서 소년은 ‘견딘다.’ 이 견딤의 의식은 소년의 시편 어디를 들춰봐도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 견딤의 강도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한눈에 보여준다.

장독을 치우고, 장독 밑에 깐 판때기를
들어냈다. 한줌의 부드러운 흙이 은밀하게
쥐며느리를 감싸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아니 문이 닫히자
쥐며느리들은 한결같이 둥글게
몸을 말고 있다. 몸 속에 다리를
넣고 있다. 상처를 견디기 위해
악착같이 몸을 구부리고 있다.
―「쥐며느리」 부분,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견딘다는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년을 볼 때마다 나는 소년의 육체가 ‘걸어다니는 기억의 집적물’이 아닌가 착각할 때가 있다. 저 조그만 몸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의 유적지를 가지고 절그럭대며 다니고 있을까 생각하면, 나는 이런 우화들이 생각나곤 한다. 여우가 있었다. 여우는 병 속에 든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병 속에 손을 넣고 얼른 고기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손을 움켜쥔 채로는 손을 뺄 수 없었다. 여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병 속의 움켜쥔 손을 바라보았다. 아마 여우는 울고 싶을 것이다. 또 한 여우가 있었다. 이 여우는 포도가 먹고 싶었다. 포도는 높은 담장 너머에 매달려 있었다. 여우가 아무리 팔짝팔짝 뛰어도 손에 닿지 않았다. 힘이 다 빠진 이 여우도 울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우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우는 갑자기 힘이 생겼다. 그래서 팩 돌아서서 뒤도 안 보고 걸어갔다. “쳇, 저 포도는 맛없는 신 포도야.” 하지만 이렇게 중얼거리는 이 여우의 말은 어딘지 힘이 빠져 보였다.

소년은 어떤 여우일까.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여우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눈치 빠른 독자라면 말을 안 해도 다 안다). 내가 이 우화를 상기시키는 것은 소년과 내가 꽤나 오랫동안 친하다는 소문이 주변에 떠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이 글이 발문 형식을 취한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그와의 추억을 서술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2
얼마 전에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와 ‘신 포도 여우’가 지일에 놀러갔다. 지일은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가 대학 시절, 혼자 산 곳이다.

하루는,
저 검은 기와집 대문 앞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나는 여자가 서 있는 곳을
지나가야 했었다

도랑에는 낙엽들이 들어차 있었고
물소리는 조그맣게
낙엽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이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자
탱자나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참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내 마음의 밑바닥은 비포장이다
시든 풀들을 밀며
거친 돌들이 튀어나온다
―「겨울에 지일에 갔다 7」 전문,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가 말했다. “내가 살던 집 아래 기와집이 있었는데, 하루는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다 그 집 대문 앞에서야 고개를 들었지요.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더군요.” 경북 경주군 현곡면 소현 2리가 지일인데,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그곳의 폐가를 돌봐주는 명목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10년도 훨씬 전인 그 시절을 회상하는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의 말 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두 여우는 저수지 앞에 앉아 있었다. 저수지 속에서 황소개구리가 한낮의 정적을 깨며 무서운 저음으로 우-우 울고 있었다. 그 울음 소리는 실제보다 몇 배나 자신의 모습을 부풀리며 연약한 두 여우의 마음에 공포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를 따라 신 포도 여우도 종종거리며 걸어갔다. 그 당시 지일은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다. 그 산골의 맨 끝에 자리잡고 있는 빈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낮은 담장 아래 발목도 안 올라오는 우물이 있었다.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가 혼자 속으로 짝사랑하던 스무 살 여자가 살던 기와집 앞이었다. 두 여우는 걸음을 멈추고 우물 밑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우물치곤 속이 깊었다. 거기에 가을의 여린 햇살이 찰랑거리며 기억의 아득한 심연 속으로 들어오라고 두 여우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가 허리를 펴고 빈집으로 올라갔다.

“지일은 바람이 유독 심한 고장이에요. 저기 보이죠. 빈집 뒤로 펼쳐져 있는 대숲 말이에요. 바람이 불면 대숲이 물 빠지는 소리로 울어요. 나는 저기서 한 일 년쯤 살았어요. 낮엔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루는 기와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찾아왔어요.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있었지요. 내가 쌀과 반찬이 떨어진 것을 알고 가져온 것이지요.”

그 다음날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스무 살 처녀와 상면했다. 아무것도 치우지 않아 쓰레기장이 된 마당에 무릎까지 차오른 풀을 헤치고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일요일 정오에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수돗가에 앉아 쌀을 씻고 있던 참이었다. 여자의 손에는 찬합이 들려 있었다. 그날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들국화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마루에서 여자와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후 그 아련한 추억은 사진의 오른쪽 귀퉁이의 얼룩으로 남아 있다.

경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사람을 피해 왕릉에서 술을 마시던 소년, 이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 무엇 하나 자신의 내부에 그려진 풍경을 지우지 못하고 화려한 유적지로 만드는 데 천부의 재질을 지닌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자라서도 소년이었다.

한 마리 개미를 관찰한다

돋보기로 보는 개미
흐릿하게 확대되어
어지러운 마음속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추웠을까?

초점을 맞춘다
―「연민」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내가 당신 무덤을 파먹었지
내가 그곳을 열어보았지
너무 깊은 데 당신이 묻혀
그 추억을 파먹는 데 꼬박
천년이 흘렀다
―「경주」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앞 시를 읽다 보면 경주의 왕릉에 앉아 개미를 관찰하는 소년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아마도 늦가을이었으리라. 소년은 자신처럼 춥게 살아온 개미가 불쌍하다. 이 소년의 손에 실지로 돋보기가 들려 있든 없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개미가 자신처럼 버려진 존재라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개미에게 돋보기의 초점을 맞춘다. 나이를 먹어도 소년은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라면 이런 발상을 하지 않는다. 설령 이런 발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소년처럼 행동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다. 소년이 그뒤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개미에게 돋보기의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경주의 왕릉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느티나무 역시 소년 자신에 다름아니다. 천년의 세월에 걸쳐 조금씩 왕릉에 뿌리를 내리며, 그 뿌리로 왕릉의 기억을 파내고 있는 느티나무. 소년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떤 기억의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뿌리를 내린다. 그 기억의 바닥에 가 닿는 순간, 천년만큼의 시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간 순간 소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도대체 소년의 기억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 걸까. 그 단초를 소년의 첫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잔디씨」에서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감자밭머리에 앉아 오래도록 기다렸네
그 아이 보이지 않고,
이십 년 가뭄도 퍼낼 수 없던
보창에 끈 풀린 별 하나 떨어져
풍금 소리 물소리에 막혔었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개구리 울음 저벅저벅 울고
독새풀 헤치고 가는 초승달을 보았네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잔디씨」 전문, 『먼지의 집』

아이가 죽었다, 그 아이의 죽음은 어떤 죄의식을 ‘내’게 남겨놓았다. 이 시의 밑바닥에는 이와 같은 정서가 흐르고 있다.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나’로 하여금 감자밭머리에서 기다리게 하는 그 아이. 죽었으면서도 마음속에서 죽지 않은 그 아이로 하여 ‘나’는 그 시절 그 아이 무덤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 후 억새 사이에서 가장 환한 빛살로 자라난 잔디씨를 훑어 누런 봉투 가득 담아 “홀로 학교에 갔”다. 20년이 흐른 지금 화자인 ‘나’가 그때 아이의 무덤에 조선잔디를 입혔는지 이 시에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무덤 위의 잔디씨를 훑어 학교에 갔다고 믿는 마음에 있다. 가장 환한 슬픔을 얻기 위해 20년의 가뭄 속에서 그 아이에게로 돌아가려는 화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2연까지 지속되고 있다. “보창에 끈 풀린 별” “풍금 소리” “독새풀 헤치고 가는 초승달”의 이미지가 그 과정의 지난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소년의 산문을 인용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반은 벙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나를 ‘반벙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더듬이, 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격해져서 욕을 하거나 마음을 가라 앉히고 노래를 부를 때는 실타래가 풀리듯이 거침없이 말이 나왔다. 하지만 평상시엔 말이 막혔다. 아니 숨이 막혔다.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책도 제대로 못 읽는 문맹이었다. [……] 그냥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풀줄기 몇 개를 묶어 줄넘기를 만들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감꽃 줄넘기. 하지만 그걸로 줄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한 번에 감꽃들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감꽃이 흩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아이가 다가왔다. [……] 홍수가 지나간 여름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냇가로 갔다. [……] “나는 이 다음에 피아노가 될 거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피아노는 될 수가 없어. 네가 무슨 나무냐. 피아노가 되게.” [……] “그럼 넌 풍금이 되라. 음악 시간이면 언제나 칠 수 있는 풍금. 냇물에 돌 처박을 때 나는 풍금 소리……” 아이는 잔뜩 삐쳐 있었다. [……] 나는 물가에서 환타병을 주웠다. 나는 돌 위에 올려놓았던 고무신을 가져왔다. 울퉁불퉁한 돌을 주어다 고무신 속에서 빨간 돌을 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무신 속의 물은 환타빛이 되었다. [……] “야 그만 집에 가자.” [……] 나는 부엌에 가서 당원 몇 알을 들고 나왔다. 그걸 가루로 만들어 환타병에 넣고 흔들었다. 그러자 침전됐던 돌가루가 물에 섞여 환타 색깔이 돌아왔다. 나는 부엌에 들어가 대접을 들고 나왔다. [……]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환타 만드는 거야. 너 먼저 먹어볼래?”
―「피아노」(밑줄 친 부분은 인용자)

소년은 이 산문을 통해 초등학교 3학년 봄에 자기 집 아래채에서 살게 된 선생님 내외와 다섯 살바기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된 부분은 중간중간 끊기긴 했지만 소년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놀지 못하고 산과 냇가로 떠돌아다니던 소년에게 다섯 살바기 여자 아이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놀이 동무였을 것이다. 물론 소년은 귀찮은 척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감꽃 줄넘기를 꼬마 아이에게 해보라고 권유하거나 냇가에서 환타를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모습에서 소년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행동은 소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타자를 자신의 내면으로 인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물로 소년과 꼬마 여자 아이는 돌가루가 침전된 환타를 나눠 먹고 똑같이 배가 아프게 된다. 소년은 아무도 없을 때 조금씩 짜 먹곤 하던 치약을 아이에게 먹인다. 치약을 먹을 때마다 뱃속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둘은 이제 오누이와 같은,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의 한 원형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관계로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흰옷을 갈아입히고 지게에 지고 공동 묘지로 갔다. 나는 얼마를 따라갔다가 무서워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개구리가 울고 있었고 별들이 유리 조각으로 변해 눈을 찔러대고 있었다. 멀리서 불 밝히고 땅 파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가 좀 와서 불이라도 밝히고 내 몫의 죄를 파갔으면. 그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꾸다 일어나 마시는 숭늉은 쉬어 있었다.
―「피아노」

아이의 죽음은 소년의 죄의식의 근원이자 기억의 출발점이다. 어느 날 아이는 소년이 놀아주지 않자 혼자 냇가로 갔다. “노을이 붉게 물들인 들판 어디에도 그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찾을 수 없었다. 이웃집 아저씨가 아이를 들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 물에 젖은 옷, 그 하얀 얼굴을 보았다.”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본 순간을 소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일에서 만난 20살 여자는 이 소녀의 또 다른 ‘환상’이다. 그것이 ‘환상’임을 알기에 소년은 “내 마음의 밑바닥은 비포장”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늘 “시든 풀들을 밀며/ 거친 돌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소년은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기억을 온전하게 껴안기 위해, 그리고 그 기억의 바닥에 가 닿기 위해 자신을 폐허화시킨다. 세상은 아픈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런 존재들에게 소년은 ‘위로’를 보낼 수 없다. 소년은 “그보다 더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픈 자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위로가 아닐까?”(산문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 하고 반문한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선 아파야 하며, 그 역인 내 아픔이 곧 사물의 아픔이라는, 소년의 시작법의 시발점은 이 지점이다.

두 눈 질끈 감고
벌렁 누워
태양의 폭음을 즐긴다

단발 머리 소녀들
토끼풀 무덤 위
흰 꽃을 꺾는다

머뭇거리다, 시드는
꽃시계 꽃반지를 엮는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일곱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토끼풀 무덤이,
잠깐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는다.
―「풀밭」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소년의 시에서 곧잘 ‘연민’의 아픔이 짙게 배어나는 것은 소년의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남자가 정오에 토끼풀이 가득한 풀밭에 누워 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남자의 얼굴로 쏟아진다. 그 남자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단발 머리 소녀들이 토끼풀 흰 꽃을 꺾는다. 그들은 꽃시계와 꽃반지를 엮는다. 그 중의 한 소녀가 또래들에게 소리친다. “나는,/마음만 먹으면/일곱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그 말이 남자의 폐부를 찌른다. 그는 회한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단발 머리 소녀들에게 자신의 회한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남자는 짐짓 그 순간을 “토끼풀 무덤이,/잠깐 흔들리다/제자리를 찾는다”고 얼버무린다. 토끼풀이 무덤처럼 가득한 풀밭에 앉아 있는 이 남자. 어쩌면 그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 나오는 주인공인지 모르겠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열차를 향해 철교 위에 선 남자는 두 팔을 치켜들고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과거는, 연어의 모천 회귀를 연상시킨다.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남자는 과거로 근접할수록 순수해지고, 그것을 보는 우리는 거기에서 역설적으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일곱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나, 다시 돌아갈래.”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지일에서의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다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신 포도 여우에게 공동 묘지로 가자고 했다. 신 포도 여우는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가 자신의 시에서 몇 번이고 써내고 했던 저수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마리 여우는 그 저수지를 다시 지나 산 쪽으로 펼쳐 있는 논둑으로 향했다. 그 옆의 밭머리에 키 큰 미루나무가 지는 빛살에 강물 같은 잎사귀를 반짝거렸다. 신 포도 여우가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아주 끔찍한 장면이 있었어요. 홍수가 나 상류에서 하류로 한꺼번에 떠밀려온 물고기가 나무 뿌리에 걸려 있었어요. 물살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바람에 물고기는 그만 나무 뿌리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살모사 한 마리가 그 물고기를 겨누고 있는 거예요. 동굴 속에서 홍수를 견디다가 나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살모사는 물고기를 향해 여유 있게 헤엄쳐 갔지요. 그리고 물고기를 한입에 덮쳤어요. 하지만 살모사는 다시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물고기가 살모사의 혀를 물고 놓아주지 않은 거지요. 그 물고기는 이빨이 상어처럼 안으로 경사져 있어 한번 물면 놓을 수 없는 물고기였어요. 결국 살모사는 물고기를 뱉어내려 요동치다가 같이 죽고 말지요.”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갑자기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후회하며 죽을 수 있다니…… 한껏 벌린 채 다물어지지 않는 그 거대한 검은 입…… 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 나는 그 시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신 포도 여우는 그 순간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에게 뭔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들킨 것같이 생각됐다. 신 포도 여우도 사실 그 시를 무척 쓰고 싶던 참이었다.

“그래요. 우리 같이 그 시를 써보죠. 우린 비슷한 것 같지만 틀린 면이 많잖아요. 나는 장시를 쓸 생각인데…… 어때요? 하지만 이 방면으론 당신이 전문가니 나보다 틀림없이 좋은 시를 쓸 것 같네요.”

두 여우의 말은 여기서 끝이 났다. 특히 신 포도 여우는 날도 어두워지고 다리도 아파 그만 차로 돌아가고 싶었다. 공동 묘지까지 따라가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의 연민에 대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는 것이 조금 끔찍스럽게 여겨졌다.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이미지」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이미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삽날에 찍힌 뱀을 보았다. 그리고 시로 썼다. 연민을 못 이겨 사라진 뱀. 그렇다. 병 속의 고기를 움켜쥔 여우는 병 속의 고기를 손에 쥐고 있던 적이 없었다. 그 소년은 병 속에 있었던 가장 찬란한 시절을 이미, 세상을 알게 된 어느 지점에서 상실했다. 어려서 늙어버린 소년은 병 속에 있는 연민을 붙잡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독한 후회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끝없이 그 이미지를 시로 그려내는 소년에게 망각만큼 커다란 안식이 어디 있으랴. 목이 잘려야만 뱀이 어디론가 떠날 수 있듯, 연민에 빠진 소년이 연민에서 헤어나오는 길은 오로지 손을 놓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우랴. 상처를 이기기 위해선 상처의 끝까지, 폐허를 이기기 위해선 폐허의 끝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 소년에게 ‘견딤’이란 곧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 속의 연민을 꺼내려는 여우에게 신 포도 여우는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소년이 끌고 다니는 낡은 지프에 올라타자, 두 마리의 여우는 곧 사람으로 둔갑했다. 시동을 걸자,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지일의 풍경이 사라지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걱정이 그 자리를 메웠다. “서울이란 곳은 신 포도야. 그래도 가봐야 되지 않겠어. 뒤돌아서서 걷더라도 말이야. 안 그래요?”
지프가 어둠에 빠진 지일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3
―아버지가 된 소년에게(附記)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는 오랜 관찰과 연민이 필요하다. 바라봄은 묘사를 낳고 연민은 진술을 낳는다. 세상이 살 만하지 않다면,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살 만하지 않은 세상을 살 만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묘사이다. 연민이 끼여들거나 연민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탓이다. 이윤학의 시는 이 연민을 묘사하려고 하는 데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의 네번째 시집에 해당하는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는 이러한 그의 시작법이 거의 극점에 달한 인상을 준다. 시는 대체적으로 짧아졌고 풍경의 묘사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방법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의 시는 90년대 시단에 있어 하나의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상상은 끝났다,
버림받는 순간,
그걸 깨닫기 무섭게
끝없는 벼랑만 남았다

눈보라치는 벌판 한가운데
끝없이 나 있는 좁은 길바닥,
내 맘을 따라온 발자국들,
흩어지고 흩어지고 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나는
나를 버리려고 헤매고 있을 뿐!
나를 따라온 발자국들, 예전에도
나를 떠났던 것, 나는 나를 지우지 못한다

나는 내가 아니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던가

길가에 쳐진 버드나무 가지들, 그
길고 가느다란 꼬랑지들 쉴새없이,
사방팔방으로 찢기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눈보라」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이렇게 처절하게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시를 한국 시단에서 보기는 드물다(아마 이용악 정도일 것이다. 나는 그를 깊게 읽어보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지만, 그 세계를 가보기에는 아직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위 시는 자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화자의 정서가 사물을 압도하고 있다. 사물이 화자에게 틈입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다. 눈보라치는 풍경 속에는 온통 화자의 정서만이 지배하고 있을 뿐, 사물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은 모두 막혀 있다. 극단적인 화자의 정서의 표출이 ‘눈보라’마저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눈보라 속에 평화는 없는 걸까. 단 한 순간의 안식도 없는 걸까. 이윤학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한다. “내 저주는,/나를 다 태운 뒤에야 꺼지는 거네”(「성환에서 1」), “걸어갈 길이 안 보인다/걸어온 길이 안 보인다”(「성환에서 2」),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그것말고는 모두가 환상이다”(「겨울의 거울에 비친 창문 저편」), “이제 나에게는/길에서 혼자 죽을 수 있는/독단도 남지 않았다”(「길」), “너는 평생 동안/가장 높은 곳에/가장 먼 곳에/통증을 모셔놓고 살았으니”(「해바라기」), “거기가 종착역이 아니다,/영원히 잘못 내린 것이다”(「기찻소리를 듣는다」), “숨을 곳이란, 자기 자신의/끝없이 어두운 동굴밖에는 없네”(「무사마귀떼에게 바침」), “썩은 물 고인 저수지는/어두컴컴한 내부만을 보여준다”(「밤의 저수지」), “어디, 자신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또 있을까”(「거울」). 어느 페이지를 펼쳐봐도 나타나는 도저한 이 비극적 상상력 앞에서 나는 그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느낀다. 나는 최근 내게는 과분한 한 문학 대담(『동서문학』, 2000년 봄호)에서 그의 시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이윤학의 시는 관찰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것을 처절한 관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내면을 세상의 사물을 관찰하여 드러내는 시인입니다. 대개가 거의 폐허와 상실, 기억이 주를 이룹니다. 개미가 추울까봐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비춰주는 시가 기억나는데, 저는 그 시가 이윤학씨 시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다고 봐요. 결국 개미는 시인의 과도한 사랑에 타죽고 말죠. 그는 폐허에서 사랑을 꿈꾸는 시인입니다. 저는 그것이 자폐적인 데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극단적이 되면 일상과의 고리가 끊어지죠. 일상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시인이 그 행위를 통해 일상과의 관계를 끊게 되면,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신을 파먹는 일만 남게 됩니다. 저는 그의 사랑에 구멍이 뚫리기를 바랍니다. 사랑도 흘러갈 곳이 있어야 풍성해집니다.

현재 그는 아내와 살고 있는 자신의 ‘작은 거울’들인 한얼이와 한비를 보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경주로 간다. 경주는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토요일에 낡은 지프를 타고 5∼6시간씩 걸려 경주에 내려가는 도로에서 그의 시는 자주 씌어진다. 마치 위험한 순간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그리하여 도로에 검게 두 줄기 바퀴 자국이 남은 것처럼, 그의 시는 생과 사, 기억과 현실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묘사의 영역을 생생하게 구축해왔다. “물 속처럼 드러나는 하늘을/룸 미러를 통해 쳐다보”(「길」)듯이, 그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과거를 향해 질주해왔다. 사실 그 누가 이처럼 지독한 추억을 현재화하여 살고 있는가. 그 생각을 하면 그저 맑은 이 소년을 껴안고 같이 울어주고 싶을 뿐이다.

이파리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감나무 가지에
무슨 흉터마냥 꼭지들이 붙어 있다

먹성 좋은 열매들의 입이
실컷 빨아먹은 감나무의 젖꼭지

세차게 흔드는 가지를
떠나지 않는 젖꼭지들

나무는,
아무도 만지지 않는
쪼그라든 젖무덤들을
흔들어댄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저 짝사랑의 흔적들을
―「꼭지들」 전문

이 시는 감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붙어 있는 꼭지들을 감나무의 젖꼭지로 인식하고 있다. “먹성 좋은 열매들”이 “실컷 빨아먹”고 가버린 감나무의 젖꼭지. 화자는 처연하게, 또 연민에 빠져 “아무도 만지지 않는/쪼그라든 젖무덤들을” 바라본다. 그 “짝사랑의 흔적들을.”

인사동 거리를 지나간다.
긴 머리 퍼머한 흑인 여자. 아이를 안고 유물들을 구경한다. 갓난아이의 등을 토닥거려준다. 아이에게 물린 젖꼭지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시선을. 엄마가 보는 풍경을. 아이가 꾹꾹 빨아먹는다.
―「봄」 전문

이 시 역시 앞 시와 비슷한 맥락에서 씌어지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봄’은 계절로서의 ‘봄’이면서 ‘바라본다’라는 의미에서의 ‘봄’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이윤학의 새로운 길을 엿본다. 아이는 엄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흑인이면 어떤가. 그는 온통 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버려진 풍경들과 자신의 동일시로 가득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통해 아이는 “엄마가 보는 풍경을” “꾹꾹 빨아먹는다.” 이제 이윤학은 자신의 “짝사랑의 흔적”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아빠는 잠만 자다 나가,/아침에 잠만 자다/어두우면 나가……”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은/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잠만 자는 방」,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라고 외치는 아이가 아버지를 짝사랑할 수 있도록 “젖꼭지”가 되어주어야 한다. “매일 밤, 술 먹고 늦게 들어와/허리 구부리고 자는 대하(大蝦)”로 머물 것이 아니라 “이제는,/종이로 접는 비행기는 시시해서/못 접겠단 말이야……”라고 외치는 아이에게 “종이로 접는 비행기”도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 그가 4년 간 카페 ‘이곳에 살기 위하여’를 경영할 무렵 우리는 서로 시를 읽어주며 밤늦게까지 어울렸다. 카페의 문이 닫힌 2시쯤 그의 집에 터덜터덜 들어가 우리는 얼마나 오락 야구를 하며 히히덕대곤 했던가. 얼마나 많은 아침을 함께 맞곤 했던가. 나는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안다. 카페의 벽 속에 또 하나의 카페가 차려질 만큼 그는 4년 간 거의 밖에 나가지 못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 그 앞에서 속으로 나는 또 얼마나 많이 고개를 숙였던가. 내가 세상을 ‘신 포도’라고 믿으며 뒤돌아설 때마다 그는 자신의 추억으로 세상과 싸우며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시를 써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거미줄, 그 견딤을 그는 이제 끝내고 싶어하는 것도 같다. 돌멩이라도 던져서 그 추억의 유폐지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몸부림이 이번 시집에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들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극점의 순간, 화려한 무당벌레의 무늬가 짐이 되는 순간, 죽음 앞까지 가본 사람만이, 그 ‘짐’으로 하여 다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왔다. 그 처절한 ‘견딤의 미학’이 그가 천형의 시인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하자.

목차

이미지
꼭지들
혓바늘
양배추 수확
풀밭
이별
배추

시냇물


경주
연민
물통들

제2부
이별 2
파리 한 마리
무화과
겨울의 거울에 비친 창문 저편
칼끝

해바라기
정지된 표면
물풀
눈보라
끈질긴 침
늙은 참나무 앞에 서서
모기
긴고랑길
마을 회관, 접는 의자들
비행기 노래를 따라감

제3부
첫사랑
달에 울다
기찻소리를 듣는다
둥지
여름 한낮
갑오징어
무사마귀떼에게 바침
밤의 저수지
돌멩이들
염색한 머리
놀이터
바람의 그림 속
소래, 어시장, 좌판 횟집들
밴댕이젓

제4부
거울
어항 속의 창들
성환에서 1
성환에서 2
들길
아버지
길 2
다시 꽃이 핀다
봄 2
썩어버린 연못
고향으로의 이사
폐비닐

반초도 안 되는 순간

[발문] 견딤의 미학 박형준

작가 소개

이윤학 지음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그림자를 마신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나를 울렸다』 외에도, 장편동화 『왕따』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 『나 엄마 딸 맞아?』, 산문집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 등 다양한 책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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