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2월 18일 | ISBN 9788932011509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15쪽 | 가격 11,000원

책소개

[개요]
우리는 지금 책이라는 미디어와 단절하고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책은 마샬 맥루언이 ‘구텐베르크-은하계’라고 명명한 바 있는 한 세계의 끝에서,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뉴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을 조망하고, 인간 정신의 새로운 은하계로의 비행을 위해 과거의 유산들을 점검하고 있는 첨단의 저작이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은 이미 라이프니츠로부터 칸트와 낭만주의자 슐레겔과 노발리스를 거쳐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로 이르는 근대 철학의 ‘비주류’들의 계보 속에서 선취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전사(前史)와 뉴 미디어를 연결지음으로써 복잡한 뉴 미디어의 세계와 최신의 트렌드를 전통적인 철학적·미학적 개념들로 정리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개념사적인 테두리 내에서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으로부터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사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관한 이론의 전사를 다루고 있다. 제2장에서는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과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적 행위 이론과의 논쟁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3장에서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진화 과정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각을 특징짓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4장에서는 초현실주의의 해방된 화면 공간으로부터 시네마 미학적인 회화에 이르는 과정을 스케치한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문자라는 구텐베르크적 세계와 이별하고 하이퍼미디어 이론을 위한 기초를 다진다.

도서 문화의 종말과 뉴 미디어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이 책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한 권의 책이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로 서서히 그러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적 상황들을 체험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한 뉴 미디어의 철학적·미학적 계통들을 되짚어볼 수도 있다.

[한국어판 서문]
이 책을 처음 구상했을 때와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되는 시점 사이에는 얼마간의 시차-이 시차는 오늘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멀티미디어의 세계에서는 긴 시간이다-가 있으므로, 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들을 소개하고 이 책에 깔린 기본적인 인지 체계적 전제들을 미리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적 행위 이론 대 루만의 체계 이론
먼저 이 책의 인지 체계적 전제들에 대해 설명하겠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위대한 사회학적 이론의 두 거두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니클라스 루만을 빼놓고는 결코 뉴 미디어의 사회학적 영향들에 관해 논의를 전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범세계적으로 각광받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약간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2장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논증을 읽어보면 다소 납득이 가겠지만, 편의상 여기에서 두 사람의 견해를 도식적인 비교를 통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적 행위 이론과 마찬가지로 루만의 사회 체계 이론이 공중으로부터 굉장한 성공을 거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관계 있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이 최후의 ‘대서사’가 한낱 기만적 동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인식된 이후로, 사회 이론의 분야에는 일종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오늘날까지 근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 이론적 선택들이 등장했다.

1) 포스트모던: 대서사들의 종말에 관한 하나의 또 다른 대서사.
2) 모던의 철학적 프로젝트: 의사 소통적 담화라는 구원의 힘을 매개로 중부 유럽을 개선하려는 작업.
3) 체계 이론: 모던 사회의 생존 예술들을 그것의 맹목적인 기능 작용들 속에서 묘사하는 작업.

하버마스(2)와 루만(3)은 포스트모던의 이론(1)으로부터 똑같이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정반대되는 견해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즉 하버마스는 사회의 정당성 위기를 주목했고, 반면 루만은 사회학의 이론적 위기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가 사회 비판 이론이라는 것을 서술한 반면, 루만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해 질문했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계몽시키려고 했지만, 루만은 사회로부터 배우려고 했다.

사회를 계몽한다는 것-이것은 그렇게 절박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사회 이론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의무를 묘사하도록 그렇게 설정하고 있다-따라서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기대(요구)로서의 그에 관한 지식이다. 그의 이론 디자인의 이러한 결정적인 특징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성격지어질 수 있다. 즉 하버마스가 끊임없이 가정한 것은, 합리성 이론과 사회 이론을 위한 상호 교차적 증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성은 스스로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해 자신의 기대(요구)를 피력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하버마스는 하나의 개선된 사회화 가능성에 집착하고 있다. 그것은 생활 세계라는 전시장에서 언어적 의사 소통이라는 미디어로 이루어진다. 의사 소통은 여기에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가 말하는 해석학적 지평 혼융의 의미에서 사고된 것이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하버마스에게서는 아직 더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 언어의 구조 속에는 타인에 대한 인정Anerkennung의 상황들이 정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모던적 사회도 생활 세계적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하나의 가상적인 자체 의사 소통의 중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의사 소통에 지향된 담론 속에서 이성적인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이기에는 너무나도 멋진 발상이다. 이러한 담론의 컨셉트에 숨겨진 것은, 첫째 기술 공학화된 또는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은-대화와 토론에 의거해서 측정할 때-하나의 타락한 형태라는 선입견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이성적이고 의사 소통에 지향된 커뮤니케이션을 특권화시킴으로써, 다른 모든 커뮤니케이션 형식들에 대해서는 평가 절하하고 있다. 둘째, 사회를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총체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회학이라면 언어에 대한 과대 평가를 경고해야만 한다. 근본적으로 모두가 아는 사실은, 일상어가 복잡한 갈등들-가령 이혼 분쟁-을 해결하는 데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기에는 그 본질(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그리고 그것이 지시하는 외부의 대상의 관계: 옮긴이)상 너무 자의적이다. 언어와 사회의 관계만으로는 의미의 지주를 파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 때문에 루만은 언어를 단지(!) 바리에이션의 메커니즘으로만 이해한다. 즉 언어 속에서 사회가 변용된다는 것이다.

체계 이론가들이 기능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비교해서 비슷하게 기능하는 것이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관찰만 할 뿐인 데 비해, 사회 비판론자들은 생활 세계의 시그널들만을 듣는다. 이때 정의·이성·민주주의 그리고 연대와 같은 표상들이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들은 논증의 형태로 자기 방어를 강요하는 위협의 단어들로 기능한다. 이러한 생활 세계 개념은 하버마스에 의해 이제 흥미 있는 방식으로 체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도입된다. 체계-이것은 미디어적인 것·유증받은 것·도구적인 것·전략적인 것의 세계이다. 생활 세계-이것은 직접적인 것·상호 주관적인 것·상처입지 않은 것의 풍경이다. 의사 소통의 우호성에 대항하는 조정의 냉혹함-이것보다 양자의 대립을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의사 소통은 체계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서 체계 이론은 체계와 생활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와 주변 환경을 구분한다. 모던적 사회의 체계 이론에서는 생활 세계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부분 체계들(가령 법, 과학, 경제, 예술, 친족)로 분해된다. 아직도 여전히 생활 세계를 현재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모던적vormodern으로 논증하는 사람이다.

루만의 체계 이론적 핵심 개념인 ‘복잡성의 축소’는 정확히 아르놀드 겔렌이 말한 ‘부담덜기Entlastung’ 개념에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 여러 번 지적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권력과 화폐와 같은 조정 미디어들인데, 그것들은 의식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럼으로써 의식의 능력을 상승시켜 의식이 우연적이고 놀라운 것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러한 능력은 물론 매스미디어와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점점 더 중요해진다. 고유의 문제점은 저널리즘적 개념인 ‘정보의 홍수’라는 단어로는 그 본질이 지칭되기보다는 오히려 은폐되고 있다. 말하자면 정보라고 파악하는 것과 조작적으로 지배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 그 문제점이다.

도서 문화의 종말과 인터넷
다음으로 이 책의 핵심 테마인 도서 문화의 종말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적 상황들에 대해 살펴보자. 정치·교회·경제 그리고 미디어는 오늘날 모두 똑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즉 ‘대중’의 심금을 더 이상 울리지 못하고 있다. 대중적 메이커에 대한 점증하는 불신, 수시로 바뀌는 기호(취향), 사이비 종교에의 탐닉 그리고 특수층의 기호만을 겨냥한 읽을거리 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개인화의 표현이다. 매스미디어들은 항상 컨트롤될 수 없는 수용자들하고만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 분명히 그 어떤 공통의 미디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치 체계가 다양한 미디어들에 의해 서비스된다. 사회 통계학적·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거부권을 표시할 수 있는 비토Veto 라인들이 다양한 정보의 세계들을 구분하고 있다. 부르주아적 여론이 미디어 공동체라는 가상적 실재 속에서 해체되고 있다.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죽음이라는 진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 커뮤니케이션은 오늘날 더 이상 광역 송출Broadcasting(방송)이라는 전통적인 도식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다채널화되고 세분화된 매스미디어들 즉 소위 말하는 국지 송출Narrowcasting에 직면하여, 소비자 대중들은 틈새 독자나 틈새 시청자 집단으로 변환된다. 오늘날 심지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일대일 관계인 포인트캐스팅Pointcasting에 관해 이야기가 될 정도이다. 그래서 정보 시장이 대중으로부터 특정 목표 그룹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개인들을 겨냥하는 진보적인 방향으로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개인화-즉 만화경적으로 다채로운 시장 단위들 속에서 목표 그룹들의 해체-는 매스미디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 능력과 재조립 능력의 거대한 상승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고유의 의미를 지닌 개인들로 해체되고 있고 또다시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적 공동체Wahlgemeinschaft들로 재결합되고 있다. 그러한 선택적 공동체들이 미디어의 가상적 실재 속에서 포스트모던적 혈통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인쇄물 시장의 세분화로 비동시성들의 동시성으로서의 세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었다. 잡지들의 만화경은 시간의 섬들에서 선택적 공동체들을 투영하고 있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은 컬트로서 그리고 정보는 물신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커뮤니케이션적 쾌락은 정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잡담-즉 ‘안녕하세요, 저는 아무개라고 해요’라는 식의 그냥 끼여들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몇몇 비즈니스맨들과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항상적으로 정보들을 호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보들은 말하자면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커뮤니케이션들은 안정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정보의 반대물인 다중 안전 장치Redundenz(원뜻은 안전한 선택을 위한 잉여: 옮긴이), 공진Resonanz(체계는 환경에 대해 폐쇄적이지만 단지 예외적으로 체계는 환경에 의해 자극을 받아 흔들림 즉 체계의 예외적 진동: 옮긴이)-간단히 말해서 잡담-을 매개로 그렇게 한다.
인터넷 그리고 또한 텔레비전과 같은 낡은 미디어들도, 정보는 물신으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컬트로 프리젠테이션한다-텔레비전 토크쇼나 인터넷상의 채팅방을 한번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당신의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정보’라는 것은 결코 계몽주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뉴 미디어적 조건들 아래서의 마법이다. 최근의 컬트적 표현으로 물론 ‘쌍방향성Interactivity’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쌍방향성은 멀티미디어 사회의 물신과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개는 단지 주어진 여러 데이터들에서의 ‘멀티풀 초이스multiful choice’이다(저자는 오늘날 뉴 미디어의 ‘쌍방향성’은 그 기술적 수준이 사용자와 미디어 사이의 쌍방향성이 아니라, 미디어의 다양한 데이터들간의 쌍방향성으로 그 의미를 제한시키고 있다: 옮긴이). 게다가 진정한 쌍방향성에는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주의 집중과 노고가 수반된다. 우리가 수동적 수용 미디어를 능동적 참여 미디어로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마도 이상주의적인 인간학이 꾸며낸 일루전Illusion에 불과하다.

우리 문화는 새로운 문화적 테크닉을 배경으로 하나의 새로운 자기 묘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또한 ‘책으로부터의 작별’에 관한 문화 비판적 논쟁들의 사실적 핵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만이 하나의 새로운 자기 묘사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보편 기계Universalmachine 컴퓨터에 대면하여 자신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컴퓨터 혁명이 ‘하드웨어’(IBM 식 메인 프레임의 시대)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모든 개인을 위한 컴퓨터인 퍼스널 컴퓨터(PC)라는 혁명적인 사상과 더불어 ‘소프트웨어’(애플, 마이크로소프트)가 관심의 포커스로 부상한다. 마지막으로는 컴퓨터의 커뮤니케이션적 잠재력이 발견되었다. 그럼으로써 컴퓨터는 단순히 작업 도구나 계산기로서가 아니라 미디어로서 파악된다. 어떤 컴퓨터의 의미는 이제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넷스케이프, 자바, 넷센터) 속에서의 그 기능과 위치에 따라 규정된다. 퍼스널 컴퓨터라는 PC를 대신해서 ‘인격화된 컴퓨터Personalized Computer’(윌리엄 코프)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사용자의 특수한 자질과 관심에 맞춰진 컴퓨터이다. 그리고 또한 ‘인터퍼스널 컴퓨팅’이라는 새로운 컨셉트도 미디어로서의 컴퓨터라는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다시 말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적 관계와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 자바나 마림바와 같은 소프트웨어는 브로드캐스팅과 인터넷(소위 말하는 ‘웹 캐스팅’)의 종합을 매개로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고 공급받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직 더 섬세하게 세분화해야만 하고 또 세분화될 수 있는 것이 사용자 환경의 역사적 발전의 차원이다. 우리는 인터페이스-디자인을 미디어 테크놀러지의 수사학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드라마틱한 변혁이 완성된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일이다. 컴퓨터-인터페이스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IBM 직원들의 ‘천공 카드’와 더불어 시작했다. 사용자 환경의 그 다음번 발전 단계를 특징지은 것이 DOS 마법사들의 ‘알파벳-숫자 명령어’이다. 마지막으로 애플사는 ‘데스크탑-메타포’로써 사용자 편리성에 일대 획을 긋는다. 인터페이스-디자인의 그 다음번의 진화 단계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상적 실재’로 이어진다.

컴퓨터의 인간-기계-접촉 공간인 인터페이스는 따라서 일단은 기계와 기계 언어에 매우 가까이 있다. 그 다음에 사용자 환경과 프로그램들의 논리적 심층의 관계는 점점 더 단호하게 ‘편리한 환경’을 위해 그 추이가 움직인다. 다시 말해서, 진보적인 사용자 편리성은 컴퓨터를 눈에 보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도처에 편재하는 컴퓨팅’이라는 컨셉트이다. 즉 컴퓨터가 보이지 않게 된다-그리고 도처에 편재한다. 컴퓨터가 도처에 편재함으로써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미래의 커뮤니케이션적 상황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인터넷은 오늘날-그 테크닉을 도외시한다면-자발적인 질서의 핵심 메타포이다. 이미 가령 개방된 망은 계몽의 유토피아로부터 투영 평면으로 변했다. 즉 전자적 시청이나 가상적 의회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더 매력적인 것은 특히 청소년들이 인터넷의 개방된 구조들 속에서 소수 집단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네트워크-문화는 사회적 위계 서열과 정반대이다. 개방된 망들 속에서 자유롭게 연결된 개인들이 만나고 있다-그리고 그들이 항상 새롭게 자신을 ‘기록’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로 꾸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통일적인 문화가 아니라 특정한 이해 집단과 지식 집단으로 구성된 네트워크이다.

사회적 위계 질서라는 친숙한 형식들은 오늘날 점점 더 단호하게 ‘근원이 다른’ 네트워크-문화를 매개로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는 고대의 부족적 형제애(종족 공동체)와 근대의 보편적 형제애(모든 인류가 형제이다-서로 ‘타인’이고 이방인이면서도)의 단계를 지나서 이제 또다시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형식-즉 전자적 네트워크에 의해서 유도된 조직적 이웃애Neighborhood-을 마주하고 있다. 네트워크의 원래 의미는 정보-프로세싱의 차원에 있지 않고, 공동체들의 형성에 있다.

2000년 1월, 독일 에센에서, 노르베르트 볼츠

[서문]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는 언젠가 도서 문화의 퇴조라는 아쉬움을 자아내는 사회적 사태에 대해 아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오늘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라면, 더 이상 사회학적인 성찰로써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오늘날 근세를 선도해온 책이라는 미디어와 단절하고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컴퓨터와 전자 미디어들은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구텐베르크-은하계Gutenberg-Galaxis라고 부른 바 있는 한 세계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체계들의 기능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소프트웨어에 관한 지식들이 정치경제학의 고전들에 대한 독서보다 유용하다. 따라서 다음의 연구들에서 우리는 어떤 통합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기본 윤곽들을 스케치해볼 것이다.

정보 사회가 스스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시각을 돌릴 때, 우리는 원거리 통신 기능과 계산 기능이 새롭게 통합되는 일련의 진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즉 텔레커뮤니케이션과 컴퓨터의 테크놀러지들이 서로 융합되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가장 중요한 지적인 형상화 과제는 통합된 데이터 처리의 디자인이다. 사회는, 비록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들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기계임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언어는 더 이상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옮긴이) 우리 존재의 집이 아니다-왜냐하면 우리 존재는 수학적 알고리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의 코드들과 인터페이스Interface들을 인간 상호간의 의미 전달을 위한 보조 도구 정도로만 해석하는 견해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오해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지 꿈속을 헤매는 철학자들만이, 이러한 원격적 관계맺음Telere-lation의 확산 경향에 반해서, 사랑이나 특별한 가치 그리고 문자 등의 낡은 권위들에 마력을 불어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현재의 수사학을 그것을 담고 있는 테크놀러지들로부터 판독해야지, 결코 그 테크놀러지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담론들로부터 읽어내서는 안 된다. 유럽은, 비록 과거에는 이 후자의 태도와 관계했지만, 현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광대역 커뮤니케이션 권역으로서 테크놀러지적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매스미디어들은 세계 사회의 급속한 커뮤니케이션적 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모든 것에 침투하고 있는 팝 음악의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그리고 유명 브랜드에 대한 컬트(숭배)적 소비 행위에 대해서도 세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지위를 확고히해주고 있는 전자 장치들의 상호 융합은,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언어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다음의 연구는 현재 가장 진보된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 사회(철)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체계 이론Systemtheorie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루만의 이론에는 물론 첨단 기술적 미디어들에 대한 적절한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루만의 연구 성과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통들에 대한 역사적 심화뿐만 아니라, 이론적 모방과 절충도 망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제1장에서는 먼저, 개념사적인 테두리 내에서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으로부터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사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관한 이론의 전사를 다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과의 관련 속에서 하나의 통합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기본 개념들이 전개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의 논쟁이 제2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는 가장 냉혹하고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미디어인 화폐에 대한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현대 세계는 미디어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미디어 사용자User들의 모든 스페이스에서, 즉 파노라마로부터 전자 화면을 거쳐 사이버스페이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소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다. 제3장은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진화 과정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각을 특징짓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 지각에 관한 이론으로부터 출발했던 아이스테시스aisthesis는, 그것을 아름다운 가상das schöne Schein의 이론으로 이해했던 소위 미학자 Ästhetiker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다. 그러나 말레비치 (20세기초 러시아 구성주의[쉬프레마티슴]의 대가: 옮긴이) 이래로 예술은 언제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적 테크놀러지들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자기 스스로가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 항상 되물어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제4장에서 초현실주의의 해방된 화면 공간으로부터 시네마 미학적인 컴퓨터 회화로 이르는 하나의 장정을 스케치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근세를 주도해온 책이라는 미디어로부터 훨씬 멀리 탈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대신에 나타나는가? 제5장은 하이퍼미디어Hypermedien 이론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지식 디자인이 구텐베르크적 은하계로부터의 결정적인 이별을 위한 획을 그을 것이다.

도서 문화의 종말에 관한 이 책 역시 물론 한 권의 책이다. 그 책도 한 명의 저자Autor를 지니고 있으며, 그 저자는 스스로의 저자적 본질Autorschaft이 디지털 회로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주의 깊은 독자-이 개념 자체가 곧 사라져버릴 종이기는 하지만-라면 이와 같은 종류의 모순들을 여러 번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들은 결코 회피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조작적 형태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론적 반성은 스스로를 책이라는 미디어에 더 이상 맡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아직 새로운 미디어는 시야에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이러한 사유에 대한 서술은 모순을 풀어가는 과정으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유일한 대안은 이론을 폐기하고 순전히 사실들로만 어떤 것을 구성하는 것-즉 사유 과정 없이 일종의 구체적 사실들만 나열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길목에 놓여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우리의 사회 이론은 단지 그 현상을 관찰할 수 있기만 할 뿐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제1장 이론적 기초
1. 문제의 전사에 대하여
2. 인간학적 관점과 체계 이론적 관점
3. 니클라스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

제2장 탈마법화
1. 커뮤니케이션적 행위의 신화
2. 부정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3. 미디어로서의 화폐

제3장 인터페이스
1. 파노라마적 통각
2. 사용자 환경으로서의 세계
3. 미디어 그물망 속에서

제4장 미디어 미학
1. 대상 없는 세계의 예술
2. 미디어 환경 디자인
3. 계산된 영상들
4. 뉴미디어 세계의 두 노인

제5장 지식 디자인
1. 문자라는 구텐베르크적 세계로부터의 이별
2. 하이퍼미디어 세계로의 진입

참고 문헌
옮기고 나서

작가 소개

노르베르트 볼츠

저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는 1953년 출생으로, 베를린 자유 대학 철학과 교수를 거쳐 1992년부터 에센 대학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소장 철학자이자 미디어 이론가이다. 그는 “트렌드 분석의 왕”(『포쿠스Focus』지)이라는 호평과 “언어의 거품”(『슈피겔Spiegel』지)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으면서, 독일 전통 사상과 현대 미학의 줄기 속에서 뉴 미디어와 최신 트렌드를 조망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
다독과 다작으로 유명한 그의 저서는 독일 철학과 미학, 현대 프랑스 철학, 뉴 미디어와 컴퓨터, 디자인, 사진 영상, 그리고 사회·문화적 최신 트렌드 분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지난 10년 동안 Stop Making Sence(1989), Theorie der neuen Medien(1990), Auszug aus der entzauberten Welt(1991, 교수 자격 논문), Walter Benjamin(1991; 『발터 벤야민: 예술, 종교, 역사철학』, 서광사,2000), Eine Kurze Geschichte des Scheins(1992), Die Welt als Chaos und Simmulation(1992), Philosophie nach ihrem Ende(1992), Kult-Marketing(1995), Ruinen des Denkens(1995), Risikante Bilder(1996), Das Pathos der Deutschen(1996), Die Sinngesellschaft(1997), Die Konformisten des Andersseins(1999), Die Wirtschaft des Unsichtbaren(1999) 등의 저서와 Computer als Medium 등 몇 권의 편저서를 출간했다.

윤종석

옮긴이 윤종석은 서울대학교와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독문학과 미학 그리고 미디어학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에서 우리나라와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홍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와 대중 문화 비판」 「‘타이타닉스 호의 침몰’과 포스트모던적 역사 의식」 「미디어 시대의 해외 홍보」 등이 있으며, 부어M. Buhr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모던-니체-포스트모던』, G.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공역), 플러서V. Flusser의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등을 번역했다.
현재 N.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Das Kontrollierte Chaos』를 번역중이며 논문 「디지털 미학의 고고학」(가제)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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