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 시인선 239

송찬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2월 2일 | ISBN 9788932011455

사양 신46판 176x248mm · 94쪽 | 가격 8,000원

수상/추천: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

책소개

[개요]
시집 『붉은 눈, 동백』에서 시인은 아름다움의 힘과 실체를 선명한 이미지로 빚어낸다. 세상은 늘 빠르고 폭력적이고 불운한 것들로 가득 찬 듯하다. 그러나 세상 한켠에 아름다움은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조용함을 넘어 가히 혁명적이며 역동적이다. 동백꽃이 사자와 같은 용맹스런 맹수에 비유되듯이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아름다움은 동물적인 행동력과 성스러운 영향력으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경(經)이 세상을 다스리듯이 아름다움이 세상을 다스린다.

[시인의 말]
내 詩業은 아직 지붕이 없다. 기껏 한철을 살다 가는 매미의 노래로나 기억될 뿐, 그러나 시간은 자꾸 등을 떠밀고 또 책을 낼 때가 되어 기왕 발표한 것들을 헐어내고 잇대어 세번째 시집을 엮는다.

손을 놓고 이곳저곳을 뒤적여보지만, 역시, 누추할 뿐이다.
2000년 1월, 송찬호

[시인의 산문]
우리 동네는 충북과 보은의 동남쪽 끝머리에 있다. 이곳에서 동쪽을 붙잡고 자동차로 사오 분 가량 줄달음치면, 경북을 잇는 도계와 만나게 되고 거길 한발 넘어서면 상주 화서 땅의 시작이다. 상주에 갈 때면 나는 늘 가슴이 뛰곤 하는데, 쌀·누에고치·곶감으로 이름난 그 三白의 고장은, 단숨에 내 상상력을 휘어잡는, 뛰어난 시인과 소설가의 고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상주를 지나 문경 예천 영주 너머 영동 산악 어딘가를 헤매곤 하는데, 그것은 그런 오랜 방황과 모색 끝에 오래도록 책들이 썩지 않고 노래가 죽지 않는, 시의 천축국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에서인 것이다. 삶의 불연속과 유한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내 짧은 혀를 자책하면서, 본디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시인으로서의 천품을 조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인 것이다.

[해설]
검은머리 동백, 시인의 숙명적인 부조리 김춘식

송찬호의 세번째 시집에 해당하는 이번 『붉은 눈, 동백』 시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에 발간된 두 권의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와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성사, 1994)의 특징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고 있는 시집이다. 이런 생각은 『붉은 눈, 동백』 시편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언어적 자의식과 시의 본질에 관한 집요한 사유가 그의 시적 내력 안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가 현실과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한계 의식을 주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면, 『10년 동안의 빈 의자』는 실존과 언어의 괴리에 대한 도전을 시적 화두로 삼고 있다.

이 두 권의 시집은 이런 점에서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동일한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근대적 미학에 비추어 보면, 송찬호는 ‘존재의 집’과 ‘언어의 감옥’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시적 인식을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송찬호는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에서 물질적 현상계와 ‘삶’이라는 ‘세계’의 감옥 속에 갇힌 ‘존재’의 탈출구이자 ‘소통의 통로’로서 ‘언어와 시’를 바라보는 인식을 확연히 드러낸다. 그리고 두번째 시집인 『10년 동안의 빈 의자』에서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언어에 대한 한계 의식’을 통해서 표현해낸다. 결국, 첫번째 시집이 시적 구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삼아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중심을 이룬다면, 두번째 시집은 그런 언어의 한계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과 도전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말, 닿으면 부패하는/감옥이 되는/그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술, 매혹될 수밖에 없는」,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p. 52)이라는 시 구절처럼, 첫 시집에 실린 「불구의 집」 「머뭇거리다가 너는 그 구멍을」 「말의 폐는 푸르다」 「말은 나무들을 꿈꾸게 한다」 「공중 정원 1??」 연작 등의 작품들은, ‘사물과 언어’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시인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 양면성은 언어에 대한 매혹과 부패·왜곡을 모두 체험하고 있는 존재의 모순을 암시한다.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지만 그러한 직관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즉 의미에 ‘닿으면’ 부패해버리는 ‘언어의 감옥’ 안에 있다. 매혹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집’이지만 또한 언제나 ‘부패한 감옥’이기도 한, ‘말의 세계’에 대한 시적 자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송찬호의 첫 시집이다.

두번째 시집 역시 이러한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중심적인 ‘화두’로 삼고 있지만 그 시적 지향점에서 다소의 차이를 나타낸다. 우선, 언어(특히 의미)에 대한 신뢰보다는 불신을 앞에 내세워 그 한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기표’ 중심의 시학적 특성, 그리고 구체적인 사물의 상실, 추상적인 관념과 이미지의 빈번한 출현 등은, 좀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을 느끼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사물의 구체성보다는 그 본질을 지향함으로써 생겨난 관념성과 추상적 이미지가 언어의 불투명한 상징성에 의해 여과되면서 새로운 이미지나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미의 구체성이 소실되어 ‘기표의 미끄러짐’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두번째 시집은 언어 혹은 제도적으로 규정된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 두드러진 시집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구체성’과 의미의 중심이 ‘해체’된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집’으로부터 ‘존재의 감옥’ ‘언어의 감옥’으로 시적 인식과 화두를 이동시켜온 송찬호 시인의 시적 여정은 이렇게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존재의 집’에서 ‘언어의 감옥’으로 자신의 시관을 이동시켜온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번 시집 『붉은 눈, 동백』이다. 『붉은 눈, 동백』은 ‘존재의 탐구’라는 형이상학 시론과 ‘언어의 감옥’이라는 ‘형식주의 미학’ 사이의 심도 있는 조화를 시도하는 그의 ‘시적 향방’이 구체화된 것이다. 즉, 시의 본질이 “존재의 현현과 구원”이라는 생각에 송찬호는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구원과 존재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 즉 언어의 ‘불완전성’이다. 존재 구현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매혹될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부패’하는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그의 언어적 자의식을 자극하고 있고 그 결과 그는 ‘인공예술’을 지향하는 ‘장인 정신’으로 자신을 무장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형이상학적인 기원으로부터 언어적 자의식과 형식 미학, 즉 ‘인공 예술’로 발전해온 근대적인 ‘미학’과 ‘시론’의 행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근대적인 시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나무를 포로로 하고서
나무가 구조적 척추 동물임을 알았다
나무의 중심을 지워없앤다
오, 놀라워라 나무가 둥글어진다

말 속에 이런 둥글고 넓은 감옥이 숨겨 있었다니
말의 감옥은 얼마나 숨쉬기 부드러운가

말을 감옥 밖에 놓아두고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의 말은 세계를 둥글게 감싸 감춰버린다
중심에 이르는 모든 길을 지워없애고
감옥은 더 큰 감옥에 폭넓게 갇혀버린다

말에 포착된 것은 무엇이든 말은 감옥을 만든다
말은 상호간 대화를 한다

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말을 할 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
말을 하여
우선 감옥을 만들라
말로부터의 자유는
중심을 무너뜨리고
그 중심으로부터 해체되어 나오는 길뿐이다
─「공중 정원·3」 전문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말,’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위에 인용한 시에서 잘 나타난다. “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말을 할 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말을 하여/우선 감옥을 만들라”는 자신의 시 창작 행위에 대한 자의식을 담은 언술이다. 즉,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말을 하여 새로운 감옥을 만드는 ‘역설적 행위’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언어를 세우지 않는 시의 속성―와 ‘불리문자(不離文字)’―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 시의 속성―를 나타내는 이런 표현은, 그의 시적 자의식이 사물의 본질과 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낡은 언어의 중심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게 한다. 또한 언어의 ‘낡은 중심’은 사물의 본질을 은폐하는 상투화된 ‘의미’의 세계이다. 진실을 은폐하는 ‘낡은 중심’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말’을 만들고 그 ‘다른 말’을 앞세워 견고한 중심을 흔드는 ‘시적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말을 하여 새로운 말의 감옥을 만드는 것은,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 ‘상투화된 의미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중심을 해체하기 위한 ‘시적 글쓰기’의 숙명이다.

시인의 숙명에 대한 이런 자각은, 그를 시적 자의식과 언어에 대한 감각이 특별히 예민한 시인으로 만든 주요한 원인이다. 말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말 속에 둥글고 넓은 감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의 글쓰기 과정인 것이다. 근대적인 시인의 숙명은 이렇듯 말의 감옥으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는 ‘역설’ 속에서 탄생한다. 이 점에서 송찬호의 시적 인식은, 말의 감옥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감옥의 언어, 근대의 언어를 넘어서는 방법의 탐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시적 언어, 숭고한 언어의 탐색을 보여주는 그의 시적 여정의 도착점이 이번 시집 『붉은 눈, 동백』이다.

송찬호의 ‘존재론적 성향’과 ‘미학주의’는 그의 시 안에 특유의 긴장감을 부여하는 상호 모순된 충동들이다. 이 점은 그를 사물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신비에 매혹된 ‘미학적 인간’과 진리 인식의 ‘구도적 인간’ 사이에 불안정하게 머물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붉은 눈, 동백』에서 이런 위태로움은 오히려 승화된 긴장감을 독자에게 안겨주면서, 이상적인 미학으로 완성되고 있다. 특히, ‘동백꽃’ 시편과 ‘산경(山經)’ 시편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자체를 ‘미학’으로 만드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송찬호는 ‘구도적 자세’조차 ‘매혹’과 ‘욕망’이라는 인간적 본성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미학적 인간’의 특성을 온전히 지닌 시인이다.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 감성적인 것을 환기하는 이미지의 제시는, 그의 미학적 매혹이 새로운 이미지의 영토를 개척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 영토가 ‘동백’과 ‘산경’의 화려하고 처절한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들 이미지는 무척이나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존재론적인 특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멧부리를 닮은 잔등 우에 처자를 태우고
또랑물에 적신 꼬리로 훠이 훠이 마른 들길을 쓸고 가고 있는 저 牛公이

어깻죽지 우에 이름난 폭포 한 자락 걸치지도 못한
저 비루먹은 산천이 막무가내로 봄날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일자무식 쇠귀에 버들강아지 한 움큼 꽂고 웅얼웅얼 가고 있는 저 풍광이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못하고 春窮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가는 거 아닌가
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째 떠가고 있으니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
―「봄날을 가는 山經」

인용한 시의 첫 구절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에는 ‘산경’의 의미가 현실 속에서는 찾기 힘든 어떤 ‘이상향’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산경’ 시편에서 종종 ‘동백꽃’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이런 의미 연결과 무관하지 않다. 산경(山經)은 중국의 고전 『산해경(山海經)』에서 빌려온 말로써 이 책의 내용이 공상과 상상 속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을 초월하는 문학적인 상상이 만드는 ‘유토피아’ 같은 것을 상징한다. 다만, 산경(山經)이라는 말이, 바다가 아닌 산의 풍광 속에 깃들인 어떤 본질과 근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지향은 동양적인 ‘선계(仙界)’의 이미지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시 1연 2행에서 3행까지의 구절과 마지막 행의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와 같은 표현은, ‘산경’의 이미지가 선계로서의 낙원과 현실적 삶을 부정하는 ‘미학적 이상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나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와 같은 현실 부정은, 시의 세계와 이상주의적인 욕망의 세계가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런 이상주의는 ‘동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이
앞발을 번쩍 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
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山經 가는 길」

“동백은 결코 땅에/항복하지 않는 꽃”이라는 말은, 동백이 상징하는 것이 ‘산경’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송찬호는 이 점에서 이 시에서도 역시 그의 미학적인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동백’에 매혹된 시인의 ‘근원 회귀’를 암시하는 산경은 따라서 관념적인 이상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대상이다. 그 이미지의 구체적인 현현이 ‘동백’이고 동백의 ‘붉은 색깔’은 생각 또는 관념의 상징인 ‘검은 글자’와 대립한다. 이런 대립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이 첫번째와 두번째 시집의 화두를 어떻게 지속시키고 있고 또 어떤 점에서 극복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려준다. ‘동백’과 ‘산경’의 발견은 이 시집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으며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송찬호의 시적 욕망을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매개가 되고 있다.

『붉은 눈, 동백』은 시인의 숙명이나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직접적인 언술로서 표현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첫 시집에서 “말과 사물 사이에 인간이 있다/그곳을 세계라 부른다/드러내보이는 길들, 그 길을 이어받아/뒤틀린 길을 드러내보이는 길들”(「공중 정원·1」, p. 45)이라고 직접적으로 언술하던 것이 이번 시집에서는 “누가 검은머리 동백을 아시는지요/머리 우에 앉은뱅이 박새를 얹고 다니는 동백 말이지요/[……]/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빨갛게 멍들었는지/거울도 안 보고 살아가는 검은머리 동백”(「검은머리 동백」)이라고 표현된다. 이런 변화는 시인의 숙명적인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이번 시집이 좀더 상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고 또한 상당히 섬세한 미적 환기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검은머리 동백’이 상징하는 시인의 숙명적인 부조리와 ‘가슴이 빨갛게 멍드는’ 구체적 이미지, 생생한 미적 인식에 대한 ‘직감’의 충돌은 검은 문자의 세계와 붉은 꽃(생생한 사물의 이미지)의 대비를 말한 두번째 시집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시에서도 시인은,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라고 하여 현실, 혹은 문자의 세계 속에 갇힌 ‘시적 영혼’의 아픔과 불온성을 ‘붉음’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다. “앞발을 번쩍 들고,”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집을 찢고/아버지를 찢고/나뭇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은 말 그대로 시의 창조력과 부정 정신 혹은 불온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백’과 같은 사물의 구체적인 현현을 검은 문자로 옮겨야 하는 시인의 숙명은 이외에도 「동백이 활짝,」 「동백이 지고 있네」에서도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동백이 활짝,」에서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와 같은 표현에는 시간 속에서 고정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사물의 변화와 그 순간성을 시 속에 담아야만 하는 시인의 강박 관념이 노출되어 있다. 또, 「동백이 지고 있네」의 “벗이여, 이 볕 좋은 날/약술도 마다하고/저리 붉은 입술도 치워버리고/어디서 글을 읽고 있는가/이른 아침부터/한 동이씩 꽃을 퍼다 버리는/이 빗자루 경전을 좀 읽어보게”에는 관념의 경전이나 글 속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바로 눈앞의 사물과의 생생한 교감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런 사실은 송찬호의 시가 단순히 ‘미학주의’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물의 본질을 ‘죽은 문자’에 가두지 않고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고자 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일치를 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수영의 꽃과 송찬호의 꽃을 비교했던 필자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1) 김수영에게서 꽃과 열매의 관계가 ‘미(美)와 도(道)’ 혹은 ‘아름다움과 진실’의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송찬호에게 꽃과 열매는 ‘시적 영감 혹은 아름다움/인식(認識)·문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실제로 꽃이 원색인 데 반해서 (그 꽃의) 열매는 검다. 시적 영감이 포착한 세계의 근원적 생동성 혹은 원색은 늘 불완전한 흑백의 문자 세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란 그 검은 열매에서 떨어진 무명(無明)의 씨앗을 종이로 받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수천 번 제 육신을 두드려 빨아 빛깔을 얻는 간결함이 깃들인 씨앗’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원을 담은 문자, 태초의 신성한 문자가 아니겠는가. 송찬호의 근원에 대한 향수는 그의 글쓰기를 ‘그 현기증 나는 빛을 향하여 오랫동안 흘러온 것’이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결국 그의 글쓰기란 근원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꽃)과 진리(열매)에 대한 받아쓰기 혹은 다시 쓰기Rewriting이다. (「미학적 인간」, 『한국문학평론』, 1999년 봄, pp. 58∼59)

2)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근본적인 실천의 도를 추구하는 도덕주의자인 김수영의 비애와 현실 저편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검은 문자의 감옥 속에 스스로 갇힌 이상주의자의 ‘비애’에는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 ‘탈속주의(脫俗主義)’라는 시적 영토가 그것이다. 김수영의 실천이 종종 근원적인 도(道)로 상징되는 탈속주의로 나타나듯이 송찬호의 미학주의 역시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찾는 탈속주의를 보여준다.

송찬호의 미학주의는 이 점에서 시인 개인의 성향에 가장 일차적인 형성 요인이 주어진다. 김수영이 비판적 지성이 강한 시인이었다면 송찬호는 미적 감수성이 강하고 원초적인 아름다움의 풍경에 매혹된 시인이다. 그의 영혼이 보려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근원이고 이것은 진·선·미라는 절대적 가치 체계를 모두 감싸안는 원초적 장면과 같은 것이다.

세계의 본질을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미학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매혹당한 영혼들에게서 종종 이런 미학적 인간의 면모를 발견하곤 한다. 송찬호 시인은 이 점에서 매혹당한 인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매혹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가치 기준이 ‘아름다움’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미학적 인간」, p. 65)

인용한 1), 2)의 글은 송찬호의 미학주의가 진선미를 모두 감싸안는 원리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근거는 그의 시적 인식 안에 존재하는 ‘동백’의 붉음과 열매 혹은 ‘검은색’의 의미가 그의 ‘근원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붉음이 근원적인 사물의 세계라면 검은색은 근원적인 문자, 신성한 문자의 세계이다. 이 둘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지만, 시인의 글쓰기는 이러한 상이한 두 개의 근원을 하나로 연결하려고 하는 시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근원에 대한 향수와 탈속주의라는 두 가지 특성은 송찬호의 시에서 동백과 산경이 차지하는 위치를 그대로 암시한다. 산경이 탈속주의적인 경향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면 동백은 ‘근원에 대한 향수’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산경(山經) 가는 길’과 ‘동백 보러 가는 길’이 같은 길로 묘사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서 탈속주의적인 ‘구원’의 지향과 사물의 근원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도의 길과 매혹, 아름다움의 ‘궁극’으로 가는 길, 시의 길은 같은 것이다.

존재의 구원과 미적 심취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 그의 시 쓰기는 이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 구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 종종 어떤 심취의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과 미적 심취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영역이 시 안에 모두 담겨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송찬호의 시는 이 점에서 상징성을 전면에 내세워 근대적 미학의 폐쇄성에 도전한다.

「총알」이라는 시에서 “근대의 혼혈아인/납탄 덩어리가/격발의 이름으로/금속인 아버지를 찢고 나와/날아간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근대적 미학 또는 현대시의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현대시와 현대 예술은 어차피 근대적 원리에 의해 생성되었고 그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혼혈아’다. 그러나, 이런 저주받은 출생의 한계를 시는, 미학은 ‘금속인 아버지를 찢고’ 날아가듯이 돌파한다. 근대성을 초극하는 것이다. 송찬호의 시는 이런 측면에서 근대적 미학의 폐쇄성에 대한 도전을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격발의 이름으로” 금속인 아버지를 찢듯이 송찬호의 시는 근대적인 ‘인공 예술’과 ‘장인 정신’을 자신의 시적 자세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형식미학,’ 지나친 ‘언어중심주의’의 시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시적 도전 의식, 실험 의식은 그의 시편 안에 유난히 많은 자의식적인 시를 포함시키는 원인이다. 예를 들면, 「임방울」 「검은머리 동백」 「山經을 비추어 말하다」 「나비의 꿈」 등이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특히 「山經을 비추어 말하다」는 “세상에는 등에 거울을 지고/다니는 사람도 있단다//경 없이 가는 길,/그것이 문자의 운명인데도//너희, 거북이 아저씨 알지?/자신의 등을 구워/문자를 만드는 사람,/우리 동네 시인/같은 사람 말이다”라고 하여 ‘문자의 운명’과 시인의 운명에 대한 명확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즉, 문자의 길은 경[鏡, 經] 없이 가는 길인데도 시인들은 “자신의 등을 구워/문자를 만드는 사람”이고 또 그런 거울을 만드는 사람이다. 결국, 시인의 문자[시]는 다른 문자와 달리, 스스로의 등을 구워 만들었으므로 ‘산경’을 비출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비추는 ‘산경’의 모습은, 이 점에서 일상적인 검은 문자의 세계 안에서는 도저히 재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시인만이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산경’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시인은 문자를 배우지 않으며, 스스로의 내면 속에서 그런 문자를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산경’ 즉 사물 저편의 세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오직 시인 스스로 만들어낸 ‘날것’의 신선하고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임방울」이라는 시도 이런 시인의 숙명에 대한 비유를 담고 있는 시이다.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
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어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
우당탕 퉁탕 울대를 꺾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
임방울, 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은 늙은이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임방울」 전문

인용한 시는 명창 임방울을 빌려서 자신의 시적 지향점을 밝히고 있는 시이다. 송찬호의 시가 미적, 예술 지향적이면서도 삶과 사물, 존재의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가 1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되는데, 이런 반복은 그의 시적 지향점이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그 예술 안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임방울의 뛰어남에 대한 ‘동경’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구절은 아름다움의 근원이 언제나 ‘삶’을 휘몰아치는 사물의 저편에 대한 표현이나 인식 속에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은 늙은이”처럼 그는 아름다움의 예술적 근원에 몰입한다.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 년 잉어를 기다”리다가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어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하고 말하는 화자의 심정 속에는 자신이 바로 이 시대의 명창으로 남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임방울」은, 송찬호가 최고의 시 작품 또는 시인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기준에 대해 어떤 일정한 근거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목차

[시인의 말]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희생
촛불
머리 흰 물 강가에서
임방울
어느 회의주의자의 일생
우리들의 찐빵에 대하여
나, 동백꽃 보러 간다
동백
동백 열차
이야기 벌레들
접시라는 이름의 여자
동백이 활짝,
검은머리 동백
동백의 등을 타고 오신 그대
동백이 지고 있네
봄밤
사상누각
봄날
山經 가는 길
기타
山經에 가서 놀다
봄날을 가는 山經
병뚜껑
향일암 애기 동백
총알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山經을 비추어 말하다
아이스크림
동백 선생
이른 아침 창가 나뭇가지에 동백이 앉아 있었네
담쟁이넝쿨이 동물 해부학을 들여다 보다
나비經은 언제 오는가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목 부러진 동백
외투
동백國에 배를 띄워 보내다
동백 대왕 신종
뜨개질
뜨개질, 그 후
아이스크림을 휘젓다
외투가 얼어 죽었다
나비의 꿈
살구나무
金사슴
이지 라이더
주름살

[해설] 검은머리 동백, 시인의 숙명적인 부조리·김춘식

작가 소개

송찬호 지음

시인 송찬호는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 왔다. 시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 있다. 이상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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