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20세기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엮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9년 12월 20일 | ISBN 9788932011318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31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개요]
사르트르의 다양하고도 깊은 사상과 문학은 구조주의, 해체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같은 발상법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또한 앞으로의 사회적, 개인적 삶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물음, 억압에 대한 투쟁,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긴장, 대타 관계의 괴로움은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며, 그런 문제들은 인간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해에 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주체의 결단적 행동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이러한 성찰의 결과다.

[머리말]

1
1980년 3월이라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가 운명하기 한 달 전이다. 그때 프랑스의 한 유력한 주간지는 그가 그의 비서였던 베니 레비와 가졌던 긴 대담을 세 번에 걸쳐서 연재했다. 이미 완전히 실명한 사르트르로서는 그 원고를 스스로 보지 못했고, 글의 내용과 체제에 관한 일체의 결정을 레비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 대담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고, 그것은 사르트르의 최후의 사상을 논하기에 완전히 합당한 자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레비에 의한 가능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대담에서 사르트르가 한결같이 지켜온 사르트르다운 점을 재확인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좌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을 늘 가져왔다. [……] 그러나 희망은 행동의 본질 그 자체이다. [……] 진보를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나의 최후의 소박한 면의 하나일지도 모른다.”1) 대담의 제목이 「이제 희망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지속된 이러한 백절불굴의 신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절을 넘어서면서 더 좋은 미래를 구축해나가는 데 행동의 뜻이 있다는 사르트르의 생각은 결국 소박한 환상이 아니었던가? 도시 그가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인가? 그것은 혹시 그의 자기 기만이 아니었던가? 이런 것이 그의 사후 20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천년기에 접어들려는 이 시점에서, 내가 「이제 희망을……」을 다시 읽으면서 불가피하게 제기하게 된 질문이다. 그러자 내 눈에는 이 대담의 첫장을 꾸미고 있는 사르트르의 사진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졌다. 뒷짐을 진 작달막한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고 있다. 어디인지 모른다. 회색 바탕의 이 흑백 사진에서는 하늘과 땅의 구별도 분명하지 않고 그 땅이 사막인지 광야인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제 그림자를 앞세우고 노구를 끌고 가는 사르트르의 외로운 모습 이외에는 주위 사방에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득한 희망의 나라로인가, 혹은 매우 가까운 죽음을 향해서인가? 두 가지가 모두 정답이다. 그는 아득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으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진이 다 그렇듯이 이 사진의 의미 역시 그런 풀이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진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제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련시킨다. 혐오·동감·그리움, 그리고 무관심조차 그런 관련의 양식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희망을 안고 죽음의 길을 가는 사르트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 있었으며 어떻게 그를 대하려는 것이었던가? 그가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미 현실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공연한 수선을 떨면서 연명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서서 별다른 감동 없이 그가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전면에 위치하여, 그를 부축할 태세를 갖추고, 그가 영영 쓰러지고 나면 그의 엄청난 업적을 재확인하고 찬양하려는 사람들은 없었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1980년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해볼 만한 이야기이다. 사르트르는 과연 우리들에게 살아 있는 존재인가, 혹은 다시 발굴할 가치조차 없는 유해(遺骸)인가?

2
20세기의 사상가 중에서 사르트르만큼 말썽 많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그는 말썽의 주체이며 대상이었다. 『구토』에서는 독학자의 모습을 통해서 ‘휴머니즘’을 조롱하더니 전후(戰後)가 되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소책자로 세상을 들끓게 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면서도 그 실질적 조직인 공산당에게는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가 하면, 또 얼마 동안은 그 세력과의 긴밀한 협력을 내세웠다. 문학은 현실세계의 변혁을 위해서 참여해야 하는 동시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으로 세간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인간의 대타관계의 본질은 상극적이라고 단정하면서도 공생의 윤리학을 구상한다는 양면성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하고 스스로 모순을 노정하면서,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 대가로 그 역시 줄기차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고 논쟁 속으로 끌려들게 되었다.

이 자리는 그가 좌우익으로부터 받은 십자포화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아니다. 다만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반성을 촉구할 만한 한두 가지의 비판에 대해서 언급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알베르 카뮈의 비판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르트르의 반응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1952년에 벌어졌던 그 논쟁은 반공산주의자 카뮈와 공산주의적 혁명에 동조하는 사르트르 사이의 논쟁이었으며, 동구권이 패망한 오늘날에는 카뮈의 입장이 정당한 것으로 판가름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그 논쟁의 심층적 의미를 밝히는 데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역사 창조의 가능성과 수단에 관한 견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카뮈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훌륭한 목표일망정 그 수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살상과 고문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이 도덕적 순수주의는 결국은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묵인하는 것이 되며, 진실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는 희생과 대항 폭력이 불가피하며, 카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도덕적 순수주의는 결국 착취자와 억압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 논쟁의 시대적 의미를 넘어서서 이런 근본적 태도의 차이를 읽어낸다면, 그것은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할 만하다. 목적과 수단, 도덕과 정치적 효과, 폭력의 정당성과 한계, 이런 모든 문제에는 아직도 보편타당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고 오늘날 역시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적·종교적·지역적 분쟁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의 논쟁은 그 두 사람의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 같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당위성을 두고 전개된 이야기이며, 카뮈 역시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영국 노동당이 표방한 바와 같은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아 유럽이 한가족을 형성해나가기를 바랐는데, 다만 그런 미온적 유럽 중심주의가 사르트르의 눈에는 위장된 자본주의적 보수주의로 보였던 것이다. 한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 미온적이건 급진적이건간에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 거부되고, 사르트르는 인간의 가능성에 관한 허상을 그린 사람으로서 단죄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비단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문학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또는 휴머니즘에 관한 비전에 있어서 약점과 오류와 변덕을 드러낸 사람일 뿐만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새로 제기된 핵심적 문제에는 아무 적합성이 없는 고고학적 존재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프랑스의 지성계의 관심이 당위론으로부터 구조주의적인 새로운 존재론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지적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를 생매장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다름 아닌 푸코였다.

푸코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휴머니즘은, 그리고 특히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19세기의 사람이 20세기를 생각하려는 장려(壯麗)하고도 비통한 노력이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는 마지막 헤겔주의자이며 또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라고조차 말할 만하다.”2) 인간의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진전해나간다는 것이 이미 니체에 의해서, 그리고 프로이트,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레비 스트로스와 같은 상이한 경향의 학자들에 의해서 한결같이 부정되었는데도 새삼스럽게 변증법을 들먹이는 사르트르는 푸코의 눈에는 구시대의 망령으로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과 사물』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사르트르가 대표하는 이른바 휴머니즘의 환상에서 인간을 결정적으로 깨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푸코는 어떠한 대안을 제시했는가?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또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구체적인 출구를 구상하려는 데서 여러 가지 무리와 모순을 보여왔지만, 푸코는 그런 출구에 대한 비전을 아예 내걸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좋은 사회에 대한 신념 대신에 그가 기껏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앨 수 없는 갖은 형태의 권력에 대한 무한 투쟁이다. 더구나 이 무한 투쟁에 있어서 지식인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적이다. 사르트르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의 모델을 따라 민중의 의식 개혁을 선도할 보편적 지식인으로 자처한 반면, 푸코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각자의 특정된 영역에서(가령 의사, 과학자, 대학 교수로서) 권력의 담론을 비판해나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자유와 존재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사라지고 지식인의 보편적 역할이 거부된 이상, 현세의 메시아처럼 행세하던 철학자 겸 작가인 사르트르의 시대는 사라진 것이 된다.

사르트르에 대한 푸코의 비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패퇴는 진보사관의 종언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한없는 발전은 도리어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이나 행위를 통해서 진실한 진보와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인류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또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행동의 가능성이 좁아들고 전도가 어두울수록 윤리적 고뇌는 더욱 커져가는 법이다. 한데 우리는 푸코가 장년기에 전념한 권력에 대한 언어적 게릴라전이나 또 그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금욕적 개인 윤리를 미래 사회의 비전으로 삼을 수는 없다.3)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나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수동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철학자와 작가와 지식인은 객관적 진실에 대한 인식에만 시종(始終)하고 오직 그 철저화를 기해야 할 사람이며, 사회적·인류적 차원에서의 어떠한 명제도 제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의심은 사르트르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근본적인 결함은 인간의 존재와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 철저한 의심을 제기해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검토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 인간의 실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령 인간은 “대자(對自)로서 자유롭고 투명한 의식이라는 전제[가 세워지고], 또한 그가 실존주의적 심리 분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신 분석을 과소 평가하고, ‘근원적 투기(投企)’를 통해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주체를 상정한 설명의 도식이다. 그리하여 어떤 인간의 근원적 투기를 이해한 순간으로부터 그의 인생 전체만이 아니라 저작 전체도 그것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4)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안이한 이해 방식은 자연히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서도 불충분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주네, 플로베르와 같은 시인과 작가를 다루는 데 있어서, “문학의 텍스트는 결국 그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간이다. [……] 사르트르는 인생의, 인간의 투기의 증언, 징조로서밖에는 [그들의] 문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문학 자체에 대한, 문학의 특정성(特定性)spécificité 대한 관심은 거기에는 없는 것이다.”5)

인간을 오직 주체적 자유로만 보아왔다는 데리다의 비판은 앞서 언급한 푸코의 비판과 대동소이한 것인데, 사르트르의 여러 텍스트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주체에 관해서 그렇게 낙관적이며 일률적인 생각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존재와 무』에서부터 그는 대자로서의 투명한 의식을 지니는 것의 괴로움이 인간을 자기 기만으로 내몬다는 것을 다만 윤리적으로 고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현실로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을 그 두 사람은 충분히 평가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낙관적 인간관은 날이 갈수록 대자적 자유가 넘어서야 할 중대한 고비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 수정되었다는 사실도 간과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만을 간단히 지적해두자. 첫째로 사르트르는 라캉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의식’이라는 개념을 ‘체험vécu’이라는 개념으로 대치시킨다. 그것은 “의식-무의식의 등가물이다. [……] [그것은] 표면은 완전히 의식적이지만 나머지는 이 의식에 대해서 불투명하고, 무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려져 있는, 그러한 전체를 두고 한 말이다.”6) 그리고 사르트르는 이 개념을 사용하여 플로베르가 번뜩 자기 자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어둠 속에 빠지는 곡절을 추구한다. 이렇듯 주체적 생성을 가로막는 조건에 대한 사르트르의 인식의 또 하나의 예로서 들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실천적 타성태’의 개념이다. 이 책에 게재된 졸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것은 사회적 실천으로서 혁명의 성립을 가로막는 엄청난 역률(逆率)로서 작용해서, 새로운 혁명 이론을 제시하겠다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 자체를 비관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문학관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지적하다시피 사르트르의 관심을 끈 것은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문학적 언어의 특성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는 데리다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밑에 깔려 있는 모순, 즉 산문 문학을 참여와 결부시키기 위해서 소설의 문학성을 애써 최소화하려는 무리한 담론의 진상을 캐보고 있지 않다. 또한 말라르메와 주네가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문학적 언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사르트르는 그 나름대로 밝히고 있는데, 데리다는 그 점도 평가하고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데리다는 사르트르가 시만이 아니라 산문에도 역시 존재하는 ‘말의 물질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지만,7) 이 비판은 당치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르트르는 「작가는 지식인인가?」에서 과거에 설정했던 시와 산문의 구별을 스스로 해소시키고 언어의 물질성이야말로 문학적 언어의 특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8) 다만 데리다와 사르트르는, 어떤 다른 말로도 바꿀 수 없고 일상어에서 벗어난 이 역리적(逆理的)인 문학어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데리다에게는 그것은 즉자적 존재이며, 인간의 기도를 떠나서 무한히 많은 해석을 자아내는 ‘기호의 자유로운 놀이’의 장이다. 이와 반대로 사르트르로서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듯한 이런 문학적 언어는 일상어로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외부의 세계를 내면화하고 내면화된 것을 다시 외재화하는 부단한 왕복 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9) 이렇게 볼 때 문학 언어의 특성과 물질성은 그것을 텍스트 속에 가두면서 즐기려는 데리다의 자폐적인 헤도니즘을 필연화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 태도가 재미있고 또 새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학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일 따름이다. 그 대극(對極)에는 사르트르처럼 문학적 담론의 특성을, 인간이 형이상학적·사회적 조건을 걸머지면서 자기 실현을 해나가는 과정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문학적 기호를 세계를 향해서 열려고 하는 끈질긴 전통을 대변하는 사람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푸코와 데리다가 높이 평가하는 블랑쇼와 바타유는 오히려 그런 전통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사람들이다.

3
이렇게 생각하면 사르트르의 문학관은 구조주의 이후의 시대에는 이미 시효를 상실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같은 말은 사르트르의 사상 전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우리는 오늘날 역사의 종언이나 인간의 죽음이라는 말로써 특징지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활짝 트여 있는 것 같지 않고, 이 이상의 더 좋은 사회가 올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인간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지적했듯이 무의식과 언어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묶여 있는 부자유스런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테크놀로지의 세계에서 나날이 더욱 대상화되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제한된 조건하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의식체이다. 그리고 이 생성의 과정에서 여전히 문제와 갈등과 책임을 안고 행동하는 주체이다. 성패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대자적 기도가 바로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비전을 가장 강력하고 가장 조리 있고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준 20세기의 한 사람”10)이라고 말한다면 과찬이 되겠지만, 그가 지난 20세기의 인간상을 성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상가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인간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제기한 사상가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숱한 허황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한 물음, 억압에 대한 투쟁,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긴장, 대타관계의 괴로움은 적어도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런 문제들은 인간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해에 의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주체의 결단적 행동을 요구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분야에서 결정적인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도리어 현대의 중요한 모든 문제를 제기했고, 또 그것을 해결하려던 그의 노력이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 깊은 반성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의 그러한 성찰의 일단이다. 그것들은 사르트르 개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제시한 문제와 인식을 통해서 오늘날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생각들을 심층화하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평생의 관심이었으며 또한 인간이 존속하는 한 부단히 제기될 근본적 문제로서 세 가지를 생각하고 그 범주 내에 우리의 글들을 위치시켰다. 제1부에는 「폭력과 전쟁」이라는 제목하에 세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사르트르는 전쟁이 그의 인생의 분수령이라고 말할 정도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체험을 본질적 변신의 계기로 판단하고 있고,11) 또한 폭력에 관해서 말하자면 죽음의 직전까지도 그 상대성·정당성·불가피성에 대한 반성이 그의 문학적·사회적 사상과 그의 파란만장한 행동의 틀을 이루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줄기찬 반성과 문제 제기가 오늘날에도 변치 않는 큰 뜻을 갖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체첸에서,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폭력 사태의 뉴스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세 논문의 취지를 요약해보자. 첫째로 조영훈의 「전쟁의 이야기체와 몽타주 기법」은 『자유의 길』, 특히 그 제2권인 『유예』에 있어서 전쟁의 체험이 소설적 언어에 어떤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말로의 『희망』과 비교하면서 논구하고 있다. 그 혁신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몽타주의 기법인데, 두 소설은 각각 제 나름대로 그 기법을 활용하면서, 전쟁에 의해서 주체가 파열되고 가지가지의 체험과 현실이 착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는 양상을 현존화시켜놓은 것이다. 필자는 그 수법을 치밀하게 추적하면서, 몽타주의 끊임없는 확장과 증식(增殖)이 가져오는 다양성과 유연성이 독자를 소설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두번째로 실린 변광배의 논문은 지금까지 프랑스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룬 일이 없었던 사르트르의 시나리오 「톱니바퀴」(1946)가 갖는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필자는 이 시나리오가 3중의 의미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 나타난 후기 사상의 맹아를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고, 둘째로 그의 전기 비평의 핵심이 되어 있는 ‘전진적-역행적 방법’이 이 작품의 주인공 장에 대해서 실험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그리고 셋째로는 사르트르의 글쓰기와 역사의 산파 역으로서의 폭력과의 보완적이며 경쟁적인 관계가 「톱니바퀴」의 두 작중인물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한다. 한데 다름 아닌 폭력과 글쓰기의 관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살핀 것이 장근상의 「알제리 전쟁과 고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역사의 창조에 있어서 불가피한 대항 폭력의 행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규탄되어야 할 가해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르트르는 알제리 전쟁에서의 고문을 통해서 인종 차별주의에서 유래하는 폭력이 계급 투쟁에서의 폭력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주장하고, 그 현실을 프랑스 국민들 앞에 양심의 직격탄처럼 터뜨렸다. 그의 최고의 희곡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알토나의 유폐자들』은 이화 효과(異化果)distanciation를 통해서 그 의미를 보편화하고 억압자들의 깊은 반성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는데, 필자는 작품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 속에 담긴 상징적인 정치 사상을 추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르트르가 존재의 철학자이며 문학자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전전(戰前)에 쓴 『구토』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의 하나로 남을 것이며, 『존재와 무』는 겉보기와는 달리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 의해서 지양되었기는커녕,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을 가지면서 오늘날도 부단히 새로운 읽기의 대상이 되어 있고, 또한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밑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12) 그뿐만 아니라, 그가 아무리 전후의 변신을 스스로 중요시한다고 해도,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이란 존재자는 또한 무엇이냐는 문제에서 떠난 것은 결코 아니다. 전후의 그의 언어는 어떤 면에서는 이 존재론의 사회화의 표현이며 또 좁게는 사르트르가 그의 정체성을 한결같이 찾아나간 궤적을 나타낸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음의 네 편의 글을 가지고 「존재와 언어」라는 제2부를 꾸몄다.

강충권의 「『존재와 무』에서의 무에 관한 고찰」은 이 책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무’가 대자에 의한 무화 작용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는 일반적 견해를 넘어서서, 그것 자체로서의 자율성을 잠재태로서 지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필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무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바로 의식의 작용과 일치하는 것이며, 이 의식은, 사르트르 자신은 분명한 언어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대자 의식을 넘어서는 총괄적 상위 의식이다. 이렇듯 ‘무’는 단순히 대자 의식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에워싸는 포괄적인 의식이라는 필자의 주장은 『존재와 무』를 푸는 새로운 열쇠가 될 만한 것이다. 한편 정경위는 「『구토』의 이중 구조」에서 철학적인 테마가 어떻게 소설로 변모했는지 그 과정을 추구하고 있다. 첫째로 철학적인 면에서 사르트르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체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흄Hume과 로크Locke의 인식론을 다 같이 원용한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르트르는 로캉탱의 존재 체험을 경험주의적인 것처럼 만들어놓았으나, 그 형상화는 사실에 있어서는 철저한 합리주의적인 논리에 의거한 것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르트르는 여러 종류의 소설들과 문학적 수법을 원용하여 독특한 이미지들과 사건들을 구성하고 그의 철학적 주제를 소설로서 성공적으로 전개시켜나갔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견해는 앞으로 『구토』의 언어를 텍스트 상호 관련성intertextualité의 견지에서 분석하는 데 공헌할 것이다.

세번째로 실린 윤정임의 「『야릇한 전쟁 수첩』 연구」는, 사르트르가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의 존재를 그 구체적 양상하에서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후일 말라르메, 주네, 플로베르의 전체적 인간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적용한 방법들의 씨앗과 그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문헌이 바로 이 『수첩』이다. 그는 여기에서 전통적 전기의 단점을 지적하고, 인간이란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원초적 기도로서 초월하려는 총체적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해서 실천적 타성태를 극복해나가는 역사적 생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이른바 ‘전진적-역행적 방법’으로 파악한다는 사르트르의 작업의 밑그림이 이미 『수첩』에서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실린 이재룡의 「사르트르와 종교적 언어」 역시 그가 쓴 전기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그의 전기적 글쓰기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기독교에 대한 역설적 집념을 드러내보이려는 데 있다. 특히 『성 주네』에서 사르트르는 그가 성자를 혐오하는 이유로 신성함이 인분과 같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하면서, 정신 분석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무신론에 의해서 완전히 청산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및 정신 분석과 마찬가지로 양가적(兩價的)인 의미를 띤다는 것이 시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양가성을 그의 존재론을 위시하여 모든 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제3부에는 「개인과 사회」라는 주제로 세 가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이런 주제는 어떤 작가나 사상가에 대해서도 붙일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개인의 존재를 사회와의 관련하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로부터의 초탈이라는 차원에서 개인을 생각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사회와의 관련을 설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이 제목은 세 가지 의미에서 특히 합당하다. 첫째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계급적 존재être de classe’이다. 사회 계급은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 문제는 에콜로지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하다.13) 둘째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개인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객체시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당위론이 전개된다. 셋째로 사르트르는 이 미래를 향한 기도는 인간 자신이 시시각각 만들어나가는 산물들에 의해서 엄청난 지장을 받는다는 측면을 또한 강조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세 사람의 글은 각각 그 세가지 측면에 관해서 언급한 것이다. 박정자의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은 사르트르가 자기의 출신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를 푸코의 견해와 대조시켜가면서 살펴보고 있다. 푸코가 역사적 입장에 서서, 멀리 5세기의 게르만의 골 정복에서 그 기원을 보는 반면에, 철학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사르트르는 자연법에 근거를 둔 계몽주의 사상을 그 계급 형성의 기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분석적 이성의 보편성을 내세워서 자신의 존재와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사르트르의 견해는, 그 계급이 교묘한 앎-권력의 메커니즘으로 그 자체의 존재를 은폐하면서 지배해왔다는 푸코의 견해와 대조된다. 필자는 이런 비교적 고찰이 한국의 부르주아 계급 기원론의 바람직한 전개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구체적 상황에서 자신을 부르주아로 객체시하고 자신을 선택해나갈 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심정섭은 「사르트르의 ‘개별적 보편성’과 『말』」에서, 사르트르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그 과정을 추적한다. 사르트르는 『상상 작용』(1936)으로부터 『집안의 천치』(1970)에 이르기까지 그 근본에 있어서 달라진 것이 없고, 직접적 여건에 대치하는 실존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인간을 생각해왔다는 점에서 한결같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한다. 특히 그의 자서전 『말』과 앙드레 말로의 『반회고록』과의 대비를 통해서, 그가 아버지 없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로서의 상황을 살아나갔던 과정에 대한 철저한 자기 비판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자기 비판의 밑에는 강렬한 사회 의식과 역사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글쓰기는 개인적 선택인 동시에 보편적 의미를 띤다는 점이 밝혀져 있다. 마지막으로 실린 정명환의 「사르트르 또는 실천적 타성태의 감옥」은 어떤 의미에서는 심정섭의 글과는 대척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사르트르가 ‘실천적 타성태’라고 명명된 상황의 굴레의 불가피성을 구조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측면이다. 부단히 생산되면서 부단히 주체를 얽어매는 이 굴레의 존재를 부각시켰기 때문에,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결함을 실존주의로서 바로잡아 진실한 주체적 혁명의 이론을 세우겠다는 저자의 야심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 방대한 책은 역기능을 하는 실천적 타성태의 실체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드러낸 점에서 도리어 깊은 뜻을 지니며,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의 사회조차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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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필자들는 공통된 테마 속에서도 각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근원이 되고 그것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는 엄청나게 넓은 범위의 문제들을 다루었고, 그의 사상을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통일성 속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규명해나가는 작업은 앞으로도 뜻있게 계속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사르트르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48년경이며, 이때 그의 존재를 알리는 데 공헌한 분으로서 우리는 양병식(梁秉植) 선생을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사르트르 문학의 독해를 위한 산고』에 포함된 많은 글을 통해서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이 엄청난 산맥들이며, 그 전후의 문학, 철학, 정치적 사건에 비추어 심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 후 한국에서의 사르트르 연구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구조주의 및 탈구조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어져내려왔다. 수많은 소개서와 번역 외에도, 신오철 지음 『자유와 비극』(문학과지성사, 1979), 김치수·김현 엮음 『사르트르의 문학적 세계』(문학과지성사, 1989), 김화영 엮음 『사르트르』(고려대 출판부, 1990), 박정자 지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상명대 출판부, 1991)는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사르트르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도 10여 편에 이르고 그것들은 모두가 이 희대의 사상가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시도한 값진 노력의 결정이다.

우리가 1994년말 ‘한국사르트르연구회’를 결성한 것은 그의 사상이 가질 수 있는 의의가 그를 뒤이어온 사람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결코 지양된 것이 아니라는 공통적 인식에 의거하면서 그 연구를 이어나가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동일한 입장이나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루어온 것은 오직 각자의 견해를 서로 피력하고 보충하고 비판하는 절차탁마의 포럼이다. 다만 수년간에 걸친 이런 조촐하면서도 고무적인 대화를 통해서 재확인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이건 혹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이건간에, 사르트르를 빼놓고서는 20세기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어떤 기술적 조작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그가 제시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세기를 넘어서서 지속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시적 및 공시적 관점에서의 우리의 연구가 마땅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독자들의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사장과 동인 여러분의 각별한 호의의 덕분이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99년 12월, 한국사르트르연구회를 대표하여, 정명환

1) Le Nouvel Observateur, no. 800(1980. 3. 10), pp. 92∼93.
2) Michel Foucault, Dits et Ecrits, tome I, Gallimard, 1994, p. 542. 이 발언은 1966년 『말과 사물』이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가진 한 인터뷰에서 한 것이다.
3) 졸고 「주체의 변모─프랑스의 대표적 두 지식인의 경우를 중심으로」(『문학동네』, 1999년 봄호) 참조.
4) 「자전적인 ‘말’」(“pourquoi pas(why not) Sartre”─일본 『現代思想』의 사르트르 특집호에 실린 인터뷰, 1987년 7월호, p. 70).
5) 같은 책, p. 71.
6) Jean-Paul Sartre, Situations X, Gallimard, 1976, pp. 110∼11.
7) 『現代思想』, pp. 70∼71.
8) 특히 Situations VIII, pp. 434∼36 참조.
9)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문학을 찾아서』의 제1부 「사르트르의 문학 참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특히 제4장을 참조.
10) Aronson & Van des Hoven, Sartre Aliv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91, p. 31.
11) “내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은, 거의 완전히 분리된 두 시기를 이루어놓은 단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제2기에 있는 나로서는 제1기의 내가 나 자신 같지가 않다. 그 두 시기란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이다”(Jean-Paul Sartre, Situations X, p. 175).
12) 이 점에 대해서는 제3부에 실려 있는 졸고를 참조.
13) “An Interview with Jean-Paul Sartre”(P. A. Schilpp, The Philosophy of Jean-Paul Sartre, 1987, p. 29) 참조.

목차

머리말

제1부 폭력과 전쟁
전쟁의 이야기체와 몽타주 기법·조영훈: 『희망』과 『자유의 길』 연구
사르트르: 폭력 또는 글쓰기·변광배:「톱니바퀴」를 중심으로
알제리 전쟁과 고문·장근상

제2부 존재와 언어
『존재와 무』에서의 무에 관한 고찰·강충권
『구토』의 이중 구조: 존재 상황과 글쓰기·정경위
『야릇한 전쟁 수첩』 연구·윤정임: 전기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사르트르와 종교적 언어·이재룡:전기를 중심으로

제3부 개인과 사회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박정자: 사르트르와 푸코
사르트르의 ‘개별적 보편성’과 『말』·심정섭
사르트르 또는 실천적 타성태의 감옥·정명환

필자 소개

작가 소개

정명환

서울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 졸업. 저서 『한국 작가와 지성』 『졸라와 자연주의』 『문학을 찾아서』, 역서 알베레스 『20세기의 지적 모험』, 사르트르 『말』(공역),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외. 한국외국어대학교·서울대학교·가톨릭대학교 교수 역임.

윤정임

프랑스 파리10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 「『성자 주네』, 감동과 상상의 미학」 「사르트르와 바타이유: 주네론을 중심으로」 등이, 역서로는 『시대의 초상』 『사르트르의 상상계』 등이 있다.

조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파리 VIII대학(문학박사) 졸업. 논문 「사르트르와 『자유의 길』―전쟁의 글쓰기의 제 문제」 「사르트르의 주체성의 사실주의」 외, 역서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전남대학교 교수.

변광배

프랑스 몽펠리에3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다. 저서로 『존재와 무―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등이, 주요 논문으로 「기부문화의 이론적 토대」 「사르트르와 바르트의 ‘작가-독자론’ 비교연구」 등이, 역서로는 『사르트르 평전』 『사르트르와 카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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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상

서울대학교 불문과, 프랑스 푸아티에 대학(문학석사), 파리 X대학(문학박사) 졸업. 논문 「사르트르 연극의 역사적 수용」 외. 중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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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충원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문과(문학석사), 프랑스 몽펠리에 III대학(문학박사) 졸업. 논문 「『집안의 천치』에 나타난 문학 비평에서 자지 비평으로의 이행」 「사르트르의 상상력 이론」 외. 아주대학교 교수.

정경위

서울대학교 불문과, 파리 VII대학(문학박사) 졸업. 논문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과 채만식의 『탁류』」 「로브 그리예의 『질투』에 관하여」 「콩스탕의 『아돌프』에 대한 교류 분석」 외. 숭실대학교 교수.

이재룡

성균관대학교 불문과, 프랑스 브장송 대학(문학석사 및 박사) 졸업. 논문 「사르트르, 텍스트의 주석자―집안의 천치』에 관하여」 외, 역서 밀란 쿤델라 『정체성』. 숭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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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학원 불문과(문학박사) 졸업. 저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역서 앙리 르페브르 『현대 세계의 일상성』,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외. 상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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